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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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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환의 이즘, 열일곱 번째
젊어서 좋지 아니한가




졸업 시즌인데 대학교 안팎이 조용합니다.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학사모를 공중에 던지며 활짝 웃는 졸업생들 사진도 신문에서 사라졌습니다. 주변에서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는 사람도 확 줄었습니다. 졸업 선물로 만년필을 주고받던 풍속은 낡은 앨범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작년 이맘때 TV에서 본 장면이 아직도 가슴 한편에 걸려 있습니다. 교수들이 졸업생들에게 축가(?)를 불러주는 시간이었습니다. 노래 제목은 <걱정 말아요 그대>. 총장님까지 감동 연출에 앞장섰지만 정작 졸업생들은 ‘희망 고문’인 양 무덤덤했습니다. 그걸 지켜보면서 왠지 모를 미안함이 들었습니다. “당신들은 걱정 없지. 직장 있고 연금도 받을 테니.” 졸업이 곧 실업이라는 현실 앞에서 젊은이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대학 동창 10명이 겨울밤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35명이 입학했으니 출석률 30%입니다. 사실 오랜만의 만남도 아닙니다. 자녀 결혼식과 부모님 장례식에 소리 없이 나타나는 정다운 친구들입니다. 미세먼지에 바람까지 불던 그날 저녁은 지난번 자녀 결혼식에 와준 친구들에게 혼주가 감사를 표하는 자리였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단톡방(단칸방보다 훨씬 넓은)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이입니다. 깨알 같은 건강 정보, 조심해야 할 노인 대상 사기 경계 정보는 그 방 안에 차고 넘칩니다. 누가 퇴장이라도 하면 금세 다시 초대합니다. 소환된 친구는 멋쩍은 듯 슬그머니 제 자리로 가서 앉습니다. 근래에 나온 책 제목처럼 ‘표현해야 사랑이다’라고 굳게 믿는 친구들입니다.
올해는 우리가 대학을 졸업한 지 40년 되는 해입니다. 어마어마한 세월이 순식간에 흘러갔습니다. 포털 어학사전에 ‘순식간’이란 말을 입력하니 ‘눈 한 번 깜짝하거나 숨 한 번 쉴 사이’라는 뜻으로 나옵니다. 동창 다수가 이 표현에 공감했습니다. 소주 한 잔 들이켜며 누군가 말합니다. “일찍 태어난 게 다행이야. 우리 졸업할 땐 취직이 수월했잖아.”
취직은 쉬웠을지 몰라도 직장생활이 순탄하진 않았습니다. 내우외환을 겪으며 몸과 마음이 상한 친구도 더러 있습니다. 아직도 직장에 출근하는 저는 그래서 말을 아낍니다. 혹시라도 조기 퇴직한 친구 마음에 서운함을 남긴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섭니다.
동창생을 만나면 자동으로 그 시절 노래가 순차적으로 떠오릅니다. “우리 오늘 만난 것이 얼마나 기쁘냐.” 누구 하나가 거기까지 선창하면 그다음부턴 들불처럼 화음이 번집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다음다음 문제다.” 응원할 때 불렀던 <친선의 노래> 마지막 부분입니다. 라이벌 응원단도 이 노래는 함께 불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기고 지는 것은 다음다음 문제일까요?




발행인의 말 관련 이미지




‘그때 나는 왜 그렇게 이기려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듭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정말 상대방을 이긴 걸까’ 하는 의문도 간혹 듭니다. 친구들에게 이 말을 했더니 “그 당시에 우린 이겨야 산다고 배웠잖아”라고 대꾸합니다. 그런데 우린 잘 배운 걸까요? 배운 대로 이겨서 잘산 걸까요? 이겨서 얼마나 행복해졌을까요? 그리고 그 행복은 얼마나 오래갔을까요?
청산이니 보복이니 하는 말들이 뉴스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스산한 계절입니다. 살벌한 말들이 판치는 와중에 테니스 스타 정현과 조코비치의 인터뷰가 가슴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조코비치는 테니스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선수인데 9살 아래인 정현에게 패한 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정현은 마치 벽(Wall) 같았다. 랭킹 톱 1에 들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패기의 정현 역시 유쾌한 답장을 날렸습니다. “3세트를 내줘도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코비치보다 젊어서 2시간 더 경기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젊음은 대단한 거지만 훌륭한 건 아닙니다. 단지 2시간 더 경기할 수 있는 겁니다. 그 한마디로 충분합니다. 능력이 어떻고 출신이 어떻고 하는 것보다 그냥 ‘젊어서’라는 자신감. 듣기에 좋지 않은가요? 그렇다면 2시간을 이미 써버린 저희 같은 사람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재기발랄한 젊은이에게 교훈의 말을 구질구질 늘어놓기보다 그의 잠재력을 즐겁게 예언해주는 것. “나도 옛날엔 너보다 더 힘이 셌어.” 청춘을 질투하는 이런 말로 독거를 재촉하지 말고 “젊으니 뭔들 못해”라고 한마디 던진 후 뒤로 빠져주는 지혜로운 노인이 되고 싶습니다.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    주 철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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