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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 대한 몇 가지 질문

연극in 필자들에게 묻다#2 “비평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리_연극in 편집부

195호

2021.02.18

지난 12월, 연극in은 새로운 비평 플랫폼을 구성하기에 앞서, 웹진의 다양한 필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총 스물다섯 분의 필자들이 설문에 응해주셨습니다. [기획]코너를 통해, 연극in의 질문에 대해 필자들이 전달한 내용을 2회에 걸쳐 공유합니다. 이번에는 창작 작업을 수행하는 필자들이 보낸 열한 개의 응답입니다. (기명과 익명이 섞여있습니다)
질문 1.
비평(critic)은 무엇을/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나요? 비평은 항상 창작자 편이어야 할까요?
질문 2.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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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보기]
비평은 비평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비평이 항상 창작자 편이 되면 편협한 글이 된다. 수용자는 편을 잃는다.
리뷰와 비평을 구분해서 물었듯, 창작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도움이 되는 글을 공개적으로 쓰는 것과 워크숍/중간발표 때 피드백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없어도 되나. 비평이 창작자를 위해 쓰는 것이고, 창작자만 읽는 것이라면, 창작자 편이어야 한다. 글의 목적과 지면의 성향에 따라 글을 쓰듯이, 비평가는 드라마터그가 되어야 한다.

+ 비평은 독립된 장르다. 창작자도 비평을 참고해서 자신의 연극적 지형도를 넓혀갈 수 있고, 수용자도 비평을 참고해서 ‘작품’을 새롭게/깊게 보거나 ‘연극’의 다른 면들을 하나둘씩 알아갈 수 있는 지침서로 삼을 수 있다.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연극만을 작품만을 마주할 때 창작자와 수용자를 포괄하는 글이 될 것이다. 비평이 창작자와 비평가들만을 위한, 우리만의 언어가 되지 않길 바란다. (입시생, 논문 쓸 때 말고 언제 비평을 읽는지도 궁금하다)
비평이 볼 만한 장르가 되었으면 한다. 작품이 어땠는지 궁금할 때 찾아보는 기록용 글(리뷰)에서 나아가, 비평만 모아봐도 연극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고 자극하는 분야가 되길 바란다. 연극이론서를 작품에 응용해서 본다는 느낌?

+ 비평문화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해본 적은 없어서 단상만 풀어보자면 ‘주제비평’이 한번 시도되었으면 한다. 공연 기간이 짧아서 어렵겠지만, 연극을 이렇게 저렇게 요모조모 볼 수 있는 방안으로 시도해보면 어떨까.

+ 질문) 비평과 리뷰와 이론과 줄거리 소개와 비난은 왜 구분이 어려울까.
- 자신의 감상/기분만 늘어놓는 글에는 근거가 필요하다.
- 자신을 존중하는 만큼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장르)을 존중하되 자기(장르)를 존중했으면 한다.
김연재(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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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기본적으로 관객과 작품을 잇는 작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작품을 보고 싶은 관객을 위해서, 혹은
2) 관객이 필요한 작품을 위해서 존재해야 할 것이다.
1), 2)는 결국 다르게 쓴 동의어에 해당한다. 동의에 해당하지만 ‘관객’과 ‘작품’에 중심을 두고 접근하는 방법은 명확하게 다르고 유기적이어야 한다. 비평은 관객과 작품을 대표하는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중간자이기 때문에 ‘항상’ 어느 쪽 편에도 놓일 수 없다.

비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관객에게 충분하게 전달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가 하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창작자가 의도한 것과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에 차이가 있다면 왜 그런지 물어야 하고, 충분한 대답이 되기 위해서는 온전히 관객 입장에서 고려해야 할 점들이 훨씬 많다고 보인다. 창작자에게서 벗어난 시각에서 봐야 더 뚜렷하게 보이는 것들을 냉철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관객을 위한 비평의 언어는 쉽고 명확해야 한다. 작품을 만들다 보면 내부 시선에만 머물러 균형을 잃을 때가 있는데 비평은 이때 제3의 시선 역할을 ‘따듯한’ 시선으로 해내야 한다. 단순히 칭찬하고 결점을 짚어주는 것이 아니라 작업의 과정까지 읽어내서 ‘가치’를 읽어낸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비판이 힘이 있으려면 애정이 필요하다.

+ 비평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거움 혹은 어려움에 대한 장벽을 낮추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작은 단위에 비평이라고 할 수 있는 공연 후에 피드백을 받는 여러 플랫폼들 (구글, 네이버 설문조사 등)은 이미 많이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보다 더 크게 비평문화를 위해서는 연극을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다양한 연령대의 필자를 발굴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세대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고, 유의미한 논의지점이 보일 것이다. 공연예술 아카이브와 비평 아카이브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형태로 그간의 출판물, 온라인 글 등 다양한 비평 글들을 모아두는 플랫폼이 있으면 한다.
박상미
▶메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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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어...? 드립이 아니고 이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왜 물어보지,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내가 모르는 비평론적인 어떤 의미나 이론 같은 게 있는 건가? 어리둥절하지만 비평은 진짜로 모두를 위한 것인데요...? 비평이 무조건 창작자 편이어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서 혹시 그렇게 주장하는 비평이론의 어떤 갈래 같은 것이 존재하는 거라면 저는 그거 너무 엘리트주의적이고 오만해서 좀 별로네요, 하하.
비평은 그 비평의 대상(콘텐츠)을 향유하고 수용하는 관객/독자/고객/사용자/etc의 경험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존재할 수도 있고, 창작자들의 좋은 창작을 위해 통찰을 제시할 수도 있고, 같은 비평의 영역에서 담론들을 풍성하고 성숙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존재할 수도 있고, 시대나 사회에 화두를 제시하거나 반대로 그것들에 반응하기 위해 특정 콘텐츠를 매개로 말하기를 할 수도 있고요. 개개의 비평이 타겟팅하는 층이 누구고 무엇이냐에 따라 취할 수 있는 관점을 선택할 뿐이겠지요.
아! 혹시 ‘“한국연극평론가사람’은 무엇을/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나요? ‘한국연극평론가사람’은 항상 창작자 편이어야 할까요?”가 질문이었다면 왜 이런 질문이 나오는지 좀 납득이 갑니다. 특정되는 작품이나 콘텐츠에 있어서는 지인 축사 정도의 비평밖에는 본 기억이 없긴 하네요. 그렇다고 창작자들이 당근만 먹는 건 아니니까 너무 그렇게 비꼬지는 않을게요. SNS 댓글들로 이미 채찍 세례는 배부르게 받고들 계시니. (부러워서 그래요, 채찍이라도 좋으니 저한테도 좀 관심을…)
그런 연극계 비평문화를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생각하면 아무래도 인식개선엔 용감한 누군가 먼저 총대 메고 선례를 남기는 게… 이것은 손을 들어주실 누군가가 있을 거라 기대하고요. 관객 비평 활성화의 경우엔 예매처의 푸시 알림 혹은 DM과 마일리지로 참여 유도를 높이는 방법이 있겠어요. 저부터도 뭐가 되었든 후기 같은 걸 잘 안 남기는 편인데, 얼마 전에 여행을 다녀오면서 여행 어플을 통해 예약한 숙소와 티켓/패스 후기로 쿠폰들을 깨알같이 쌓아놓게 되면서 스마트폰 시대 푸시 알림의 지배력과 효과를 새삼 느꼈답니다. 형식적인 후기들을 줄여 비평의 신뢰도를 좀 더 높이고자 한다면 베스트 후기에 베네핏을 주는 것과 같은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강한나
▶메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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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정치판에서도 그렇고, 연극판에서도 그렇고, 누가 누구 편인지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제가 어느 편인지,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데, 비평이 누구 편인지, 누구 편이어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겠어요. 비평이 제 편일 때도 있고, 제 편이 아닐 때도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럴 수 있는 거죠. 친구가 잘하면 칭찬해줄 수도 있고, 엇나가면 조언을 해줄 수도 있는 것처럼.
그런데, 문득, 우리가 친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비평을 할 때는 창작자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고 하던데, 애정이 도저히 안 생길 수도 있잖아요. 하긴 요샌 다들 착한 것, 다정한 것 같아서(연극in 웹진 보면 다 꽃점은 4.5개 아니면 5개더라고요), 피도 눈물도 없는 비평가가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그런데, 또, 이해와 연민이 없는 신랄한 비평조차 창작자를 위한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평가의 또 다른 우정이라고 볼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쓰세요. 창작자를 발굴하겠다, 관객을 위한 비평을 하겠다, 이런 생각하지 마시고요. 당신이 무엇을 특별히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건 왜 그런지를, 그러니까 당신이 누군지 부터 보여주세요. 우리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서 씁시다. 자기 자신의 편부터 되자고요.

+ 더 나은 비평문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더 나은 제도나 아이디어의 도입이 아니라, 지금의 문화가 이상한 것을 알고 무엇을 그만할까 고민하는 것입니다. 각종 지원제도가 생기고, 공공극장이 들어서고, 연극상들이 부활하면서, 연극이 점점 그럴싸해지는 것 같습니다. 많은 창작자들과 비평가들이 고군분투한 덕이겠지요. 그렇습니다. 비평의 힘은 더 세지고 있습니다. 지원제도와 공공극장의 라인업, 연극상의 수상자 명단을 모두 주류 비평가들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미학과 정치성이, 무엇이 좋은 작품인지 판단하고 공인합니다. 뉴스테이지 혹은 창작 아카데미 같은 신인 지원 사업에서 평론가의 눈에 띈 창작자는 다른 지원사업을 수혜합니다. 그리고 서울연극제에서 혹은 동아연극상에서, 백상예술대상에서 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연도 국립극단, 남산예술센터 라인업에 오릅니다. 그리고 곧 어느 대학에 출강한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이것은 명백한 신호입니다. 주류 평론가들이 눈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면밀히 살핀다면, 그래서 입맛에 맞는 작품을 내놓는다면 당신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연극의 비평문화는 이 끔찍한 카르텔의 끈끈한 연결고리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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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의 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비평이 창작자의 언어를 잘 번역해서 관객들이 창작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매개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지만, 또 한편으로는 공연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들을 담론화해주길 바라지만. 비평 또한 독자적인 장르이고 비평가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므로 또한 비평가는 창작자와 관객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입장이자 자신의 창작물로서의 비평을 창조해낸다는 본인의 소명이 있으므로 누군가의 편을 든다는 것이 가능한가? 또한 작품에 따라 비평가의 입장에 따라 편을 들 수 없고, 작품적으로나 다른 여러 관점(정치적 올바름, 페미니즘 등등)에서 비판해야 하는 공연도 있을 것이므로 항상 창작자의 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창작자의 연극 언어를 읽어낸다는 점에서는 편이 되어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 같은 창작자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서로의 편이 되어줄 수는 없다. 각자의 관점에 따라 도저히 편을 들 수 없는 창작물이나 창작자도 있다. 공연은 사진이나 영상, 희곡집 등으로 아카이빙 되기도 하지만 일단 공연 자체는 하면 사라지고 말기 때문에 비평은 당시에 상연되는 공연을 가장 즉각적으로 공연을 보지 못한 관객들과 창작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리뷰가 그래서 영화 등 다른 매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창작자들이 공연을 올려놓고 트위터나 여러 매체에서 관객 리뷰나 평론가 리뷰를 찾아보는 것이다. 가장 슬픈 경우는 비평의 대상이 되지도 않을 때이다. 아무 평론가도 보러 오지 않거나 보러 왔지만 아무런 비평도 하지 않는 경우. 그 공연은 아주 빨리 사라져버리고 만다. 공연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이야기도 담론화 되지 못하고 만다. 그것은 공연 자체, 혹은 창작자의 책임일 수도 있으나 비평가들, 혹은 비평 자체의 결정에 따른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어떤 공연에서 이야기하는 어떤 내용을 담론화할 것인지는 당시의 비평이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비평가들도 인간이고 공연이 몰리는 시기와 비수기가 있기에 모든 공연을 다 비평하고 모든 공연의 내용을 담론화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 시대 현 커뮤니티의 뜨거운 이슈에 조응하는 공연을 했을 때는 좀 읽어내 주고 같은 맥락의 공연들을 묶어서 평가해주고, 특정한 이슈에 집중한 형식이나 내용을 선택했을 때는 그 이슈에 입각한 비평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때로는 어떤 공연에 다른 창작자들이 자극을 받고 그에 응답하는 공연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흐름이나 연극계를 관통하는 경향이나 사유들을 좀 더 중점적으로 다루어주었으면 하기도 한다.

+ 오래 생각해오기도 했고 창작자들끼리 만나서 이야기할 때 많이 나오는 이야기이도 한데 비평을 비평하는 메타비평이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 메타 비평의 주체가 창작자가 되는 것은 어색하다. 창작자는 창작이 주업이니까. 그러니 메타 ‘비평’의 주체도 결국 비평가가 될 수밖에 없다. 듣기로는 비평가 집단도 위계나 생존을 위해 내부 비판이 쉽지 않은 구조라도 들었다. 그러니 ‘시선’ 같은 집단에서 익명을 사용하는 것이라 본다. 한국의 연극 비평 (혹은 그 외 어떤 장르에서건)에서 메타 비평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많은 경우 비평가들은 예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신진 작품 발굴 혹은 연말의 공연계 정산에서 심사를 맡는다. 비평과 작품 사이에 뚜렷한 위계가 존재한다고 창작자들은 느낀다. 그 위계를 넘어서는 비평과 창작의 동료로서의 더 생산적 공존이 가능한가? 그 판단과 실천의 몫은 비평계에 넘기고 싶다. 달에 한 번 정도라도 메타비평적 글을 읽어보고 싶다. 『연극평론』이나 『한국연극』 같은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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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창작자이자 다른 작품의 관객으로, 관심이 있었던 작품을 미처 보지 못했거나 작품을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을 곱씹게 될 때 비평을 읽습니다. 사실 먼저 챙겨서 읽기보다는 SNS나 메일 소식지에 노출이 되었을 때 '아, 이 작품!'하고 클릭해보는 편이고요. 아직은 제가 공연한 작품의 비평을 읽은 경험이 많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저에게는 비평이 관객을 위한 글입니다. 객석에서는 강렬했던 감정들, 마음속에 떠오른 질문이 극장을 나오면서 흐려지는 것 같을 때, 비평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주의 깊고 풍부하게 쓰인 비평은 자칫 납작해지기 쉬운 나의 느낌의 부피와 감촉을 느끼게 해주고, 스쳐지나가 버린 질문을 떠올려 오랫동안 다듬어진 사상에 다리를 놓게 도와주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나의 창작물이 어디에 있는 누구의 경험과 공명하고 있는지 알고 싶고, 더 멀리 다리를 놓고 싶은 창작자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새로움을 찾는 것도 좋지만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순간을 자꾸 바라는 사람이다 보니, 더 많은 비평이 다양한 기획을 통해 연결되고 흩어졌다가, 또 다른 점에서 연결되며 모이는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오랫동안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잠기는 생각들, 또는 갑자기 일상을 크게 휩쓸어버리는 사건들, 넋을 놓고 빠져들었던 아름다운 순간들이 자석으로 쇠를 끌어내듯 여러 창작물에 대한 비평을 모으는 구심점이 되는 일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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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수업 시간이었다. 연기 전공을 하던 나는 연출이 부전공이었는데 오지랖을 떨어 비평의 세계도 호기심에 가득 차 문을 두드렸다. (학부 수업도 아닌 대학원 수업에서, 비평 실기 수업을 청강도 아닌 ‘수강’을 했다) 비평가들은 도대체 어떠한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볼까 궁금해 하면서 전전긍긍 수업에 임하여 글 쓰는 훈련을 하느라 한 학기 혼쭐이 난 기억이 있다. 그때, 비평가를 야구 경기의 심판에 비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연극 혹은 공연 예술이 야구 경기라면 비평가는 심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요지는, 비평가는 누구의 편도 아닌 독립된 역할을 수행하며 연극 그 자체의 재미를 가중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심판이 없는 야구 경기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물론 이제는 비디오 판독이 더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듯하나) 비평가는 공연이 기획되고 실행되어 기록되는 과정에 있어 하나의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그들의 역할은 공연 예술의 재미와 매력을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비평은 창작자를 위한 것도, 관객을 위한 것도 아니었음 한다. 비평이라는 작업은 하나의 독립된 세계이며 그러한 독자적 세계는 공연 창작의 세계 중 한 부분에 속하여 공연예술 전반을 완성하는 데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비평은 공연 예술에 있어 공연 자체가 만들어내는 언어와는 또 다른 언어를 생산하는 과정이다. 비평이 만들어낸 언어로 인해 작품은 서로 다르게 자리매김 된다는 지점에서 창작의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녹화나 촬영으로 온전히 남길 수 없는 연극과 퍼포먼스에 있어 비평은 하나의 공연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보존하고 기록할 수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비평은 공연 예술 창작에 있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세계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 나는 전문 비평가가 아니다.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하지만, 굳이 주절거려본다면,

1. 접근이 용이한,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공간과 플랫폼이 많아져야 한다.
2. 매뉴얼도 수업시간에 읽었던 것 같다. 미국 비평가 협회의 매뉴얼.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술 마시고 공연 보지 않는다, 였다. 우리도 그런 매뉴얼이 있나. 없으면 만들면 좋을 것 같다.
3. 역시 돈이 문제다. 비평가들이 계속해서 비평할 수 있는 지속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비평이 실릴 수 있는 잡지나 신문, 인터넷 공간이 많아야 하는데 불행히도 연극은 그렇지가 않다. 지속성을 위한 예산 집행, 예술 행정이 필요할 듯하다.
4. 아이디어 : ‘당대 제일 잘 나가는 작품 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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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연극을 좋아하며 우리의 지속을 이루려는 비평가 자신과 창작자, 여러 독자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비평은 누군가의 편이 되는 게 아니고, 함께 문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것이다.

+ 작품을 매개로 시작되는 비평은, 창작자에게 가닿을 때 보다 의미를 가지며, 평가가 아닌 발견으로써 기록될 때 동료라는 인식에서 함께 발전할 수 있다. 전문가의 언어로 가치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틀 지워지고 있는 것을 경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비평은 모든 것에 공평한가? 모든 작품 및 작품을 이루는 많은 것들을 대상으로 놓고 있는가? 1작품-1비평 의무화는 어렵더라도 모든 작품 안팎의 것들이 비평받을 권리를 얻고, 누구나 비평할 권리를 성취하길 기대한다. 공연을 만드는 현장 관계자 모두(순서와 무관하게 기획부터 오퍼, 이동지원인 외)가 각자의 위치에서 사고하고, 점검해나감으로써 비평계가 폭넓게 활성화될 수 있지 않을까.

비평을 통해 작품 제작의 전 과정과 결과를 함께 돌아볼 수 있길 바란다. 몇몇 작품들이 어떤 폭력 위에 세워졌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 가졌던 분노까지도 비평이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비평 권력이 형성돼 왔음을 인지하고, 연출 중심의 가부장제 권력 구조를 이루는 데 비평가도 한몫했음을 반성해야 한다. 주류란 무엇이고, 작품 완성도 따위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위계 폭력, 성폭력, 고용불안, 산재, 불평등, 접근성, 수고스러운 행정 등)이 짓밟혀 왔으며, 그것을 어떻게 개선할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작년에 수작으로 주목받은 작품들이 모두 코로나19로 인해 공연취소 되지 않은 운 좋은 작품에 한정된 것이 아쉽다. 의도한/의도하지 않은 온라인 공연에 대한 담론도 충분히 이뤄졌다면 어땠을까. 온/오프라인을 구분해야 했을까. 비평은 코로나로부터 안전했는지 안부도 묻고 싶다. 위드 코로나에서 비평의 역할은 무엇인가.

- 비평을 받고자 하는 작품이 사전 신청하면 연결해주는 플랫폼
- 비평가와 함께하는 합평회 혹은 창작팀 내부 합평회 기록 공유
- 각 포지션 별로 묶은 비평그룹 생성: 배우, 하우스매니저, 기획, 오퍼, 관객 등이 작품 안팎에 대해 다양한 관점 나눔
- 더 이상 작품이 아닌 사람 중심의 안전한 창작환경을 위한 ‘산재 이야기’ 코너
- 누구나 쉽게 접근 가능하고, 잘 읽히는 비평 방식을 고민(ex.온라인 활용, 만평)
- 평등한 비평을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 제공
박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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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다닐 때 비평이라 함은 예술작품을 들추어 보며 가치를 정의/판단 할 수 있는 기능으로 배웠다. 단, 여기에 “공식적”이라는 역할을 함께 붙인다. 다시 정리하면 비평은 공식적으로 예술작품의 가치를 매기는 일이다. 잘 생각해보면 꽤나 큰 영향력을 가진 글이라고 부연 설명할 수 있겠다. 비평에 관해 늘 따라오는 소음은 비평을 하는 주체의 시각이다.

‘객관적이느냐 주관적이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나는 생각한다 _ 사람은 완벽하게 객관적이기 어렵다고.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완벽하게 객관적이긴 어렵다.
여기서 다시 생각한다 _ 객관적이기 어려운 무엇이 꽤나 큰 영향력을 가졌을 때를.

그리고 눈알을 위로 굴려 내가 받은 질문을 생각해본다.
“비평은 무엇을/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나요? 비평은 항상 창작자 편이어야 할까요?”
그리고 나의 답글을 인용한다.
“b(아니다)라고 생각하지만, 주변에 a(그렇다)가 된 모습을 보고 부러움을 느끼는 내 모습을 보니 c(잘 모르겠다)라고 얼버무려야겠다.”

비평은 창작자 편이면 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공연을 올릴 때면 주변에서 글을 써주시는 분이 계시느냐, 평론가가 와서 글을 써주면 좋을 텐데, 그게 네가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말을 한다. 내가 있는 연극씬에서는 대단히 통용되는 말이라고 본다. 잘나가는 평론가가 글을 잘 써주면 독자들은 그 글을 보고 작품을 판단하기도 한다. 연극계 인사들도 엄청 관심을 가져준다. 왜냐면 비평은 객관적이기 어려운 무엇이 꽤나 큰 영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나랑 관계가 사뭇 괜찮은 분이 내가 만든 공연을 들추어 보며 가치를 발견해 널리널리 알려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니 나는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려 말한다.

여기서 일어나는 비극적 갈등은 신념과 맞서는 욕망과의 사투이지 않을까?
더 나은 환경에서, 다양한 관객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말이다.
이와 평행선에 선 비평가도 더 나은 환경에서, 다양한 독자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겠지?
(그것 외에 명예, 권력, 돈이 끼어든다면 그건 다음 기회에 생각을 풀어보기로 하겠다.)

사투 끝에 내린 결론, ‘비평은 망했다’는 서브텍스트를 담아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려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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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이 창작자의 편, 비평의 대상이 되는 측의 편이이어야 하냐는 질문은 사뭇 당황스럽고, 재미나다. 특히나 주체와 대상이 명확한 글쓰기 앞에서, 언제나 대상의 위치에 놓였던 사람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창작자로서, 비평의 대상이 되는 순간은 때론 유쾌하고 (나만 알던 것을 누군가 발견했을 때, 역시나.) 때론 두렵다. (감추고 싶었던 것을 들켰을 때, 특히) 내게 비평은 결국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주체가 사라지고, 읽는 이로 하여금 대상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끔 만들고는 했다. (주체의 시선이나 글에 공감하면서도 왜 대상만 남았을까?)
나는 비평이 창작자/ 관객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했으나, 최근에는 그 생각이 약간 수정되었다. 비평은 창작자/ 관객/ 비평가를 위해서 존재한다. 근래에 들어, 비평의 대상 뒤에서 사라지는 비평가의 존재가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종종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평은 이를 읽는 관객과, 대상인 창작자와, 쓰는 비평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비평이 창작자 편일 필요는 사라진다. 비평은 읽는 이에게 대상을 소개하고자 존재하기도 하고, 쓰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자로 인해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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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평은 (작품과 세계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1-1. 비평은 창작자의 의도를 넘어서거나 혹은 모자라게 해석하는 작업이다. 거칠게 말해서 비평은 제 3자의 시선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고,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창작자의 ‘원래’ 의도와는 다른 위치에 놓여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1-2. 창작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맞추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비평은 ‘원래’ 작품으로부터 일말의 자유로움을 갖는다. 창작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비평은 새로운 감각과 의미를 포착하고 확장해나가며 작품에 대한 해석의 폭을 자유롭게 넓혀나간다. 이러한 운동성 속에서 다양한 사유와 고민의 가능성이 생기고, 시대와 사회에 대한 다채로운 담론들이 공유되며, 창작자 개인의 산물이었던 작품은 향유자(들) 공동의 공유재가 된다.

1-3. 어느 정도 자유로우면서도 작품 내적으로 일관된 해석을 이어나가는 과정은 지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유희를 안겨다 준다. 이러한 즐거움은 좋아하는 것을 계속 찾는 힘을 만든다. 예술에 대한 향유를 지속시키는 힘이자 예술적 미감(취향)을 기르는 근력을 만드는 원동력이다.

1-4. 비평은 창작자의 훌륭함에 대해서 존경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창작자의 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창작자와 작품은 별개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2. 비평문화를 위해 필요한 장치 : 애정, 존중, 익명의 접견장소

2-1. 애정 : ‘나’는 왜 그토록 이 작품에 매료되었는지, 이 이야기가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 가치 있게 다가왔는지, 이 관심사가 ‘나’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바깥으로 확정되어 어떻게 ‘우리’와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는 것.

2-2. 존중 : 창작자 또는 작품이 이 이야기를 왜 지금 여기 이 시점에서 (다시) 하는지에 대해서 심사숙고 해보는 태도. 작품을 볼 때 별로인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좋은 것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태도. 설령 작품에 대한 기대와 달랐다고 하더라도, 작품의 맥락을 잃지 않으며 왜 이렇게 이야기가 풀려갔는지 되짚어보는 신중함.

2-3. 익명의 접견장소 : 여타의 온라인 영화/드라마 리뷰 플랫폼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과 사유와 해석이 자유롭게 떠도는 플랫폼의 형태여야 함. 개인에게는 취향의 기록 수첩이 되고, 타인에겐 서로 다른 시각의 공유장이 되는 플랫폼. ‘왓챠’의 연극 버전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도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 풍성하게 떠돌 수 있다면, 그렇게 관객의 시선이 무한증식하게 된다면, 비평은 우리 모두의 문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단, 자유롭고 편하게 입을 여는 분위기를 위하여 익명으로 운영되어야 함. (필수) 가볍고 편하게 만날 수 있는 플랫폼이어야 함.
익명의 리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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