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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감에서부터 시작된 작업의 여정

접근성, 공연의 창작/제작 과정 다시 쓰기

강보람

제216호

2022.04.14

웹진 연극in에서는 현재 공연예술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배리어프리의 개념을 공연의 창작/제작 과정 전반에서의 접근성 문제로 확장해보고자 합니다. 전체 기획은 장애예술인들의 에세이를 연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며, 필자들께는 공연의 창작/제작과 관련한 몇 가지 키워드를 제안드렸습니다. 이를 통해 연극in은 기존의 공연예술 창작/제작 관행이 비장애를 규범으로 삼고 있지는 않았는지, 모두에게 안전한 작업 환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나아가 접근성이 어떠한 창조적 상상력과 만나고 있는지를 함께 이야기해나가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지금까지 터닝 포인트가 두 번 있었다. 글을 쓰고 그것을 나누면서 소통의 즐거움을 알게 된 대학시절과 내 몸과 말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준 극단 애인과의 만남이었다. 그랬다. 적어도 대학생활을 하기 전까지의 나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자존감이 상당히 낮았다. 그 이유를 되짚어 보니 단순하고 명확했다. 뇌병변장애가 있는 내 언어를, 신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비장애인 틀에 가두고 살았던 것이다.

특히 연기와 움직임 작업을 하면서 감각하게 된 가장 큰 변화는 몸과 말의 해방감이다. 이 변화의 출발점을 따라가다 보니, 더 정확하게는 ‘속도’에 대한 해방감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명히 나만의 속도가 있는데, 그것과 어긋난 호흡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무대 위에서 내 신체와 호흡에 맞는 속도를 잘 알아차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단원들과의 대화와 연습, 그리고 공연을 올리기까지 전반적인 과정에 그 모든 방향성과 약속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7년 봄에 극단 애인을 만나면서 연극을 시작하게 되었고, 몇 번의 외부 작업 경험이 있었다. 작업 환경이 다른 만큼, 단원들과의 작업과 외부 작업에서의 과정과 고민들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작업을 하면서 들어왔던 고민들을 되짚어 보면서 개인적인 경험을 적어보려고 한다.

먼저, 애인에서 작업하면서 가장 크게 들어왔던 말은 “충분한 시간”을 갖는 것이었다. 장애 배우 각자의 몸짓과 호흡이 다른 만큼 각자의 속도가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단원들과 작업할 때는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묻는다. 연습을 시작할, 연기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준비가 더 필요한 사람이 몇 분 후에 시작하자는 제안을 하고, 그 시간 동안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모든 사람이 준비가 되었을 때 연습을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모두가 편안한 호흡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 시간은 작업을 진행하는 모든 과정에 존재했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하지만 이 충분한 시간의 기준이 작업 환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비언어장애인이 더 많은 프로덕션에서 그 호흡을 따라가기 힘든 상황을 만났을 때, 어떤 선택이 최선일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극단 작업에서는 전환 조명이나 음향의 길이를 배우의 호흡을 기준으로 맞추었다면, 외부에서는 정해진 시간 안에 행동과 대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당시 음향의 지속 시간을 늘리는 방식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공연 전날이라서 수정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앞서 언급한 내 속도의 해방감은 장애 배우로서의 시작인 셈이었다. 속도에도 제한속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외부 작업을 하면서 인지하게 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비언어장애 배우와 대사를 주고받을 때는, 빠른 호흡까지 받게 되면서 상대 배우의 속도에 따라가는 일이 발생했다. 물론 호흡을 주고받다 보면 속도가 바뀌는 것이 당연하지만, 적어도 내 호흡을 놓치지 않고 잘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극단 내부에서의 연습 과정을 떠올려 보면, 다양한 속도와 방식으로 대본 리딩을 하면서 가장 편안한 호흡을 찾는 데에 긴 시간을 쓰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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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투쟁; 예술가 편>(2019) 무대와 만나는 시간

한번은 대본을 든 상태로 무대에서 발화하고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있었는데, 신체장애가 있는 나에게는 이 세팅 자체가 어려운 과제였다. 손의 강직과 떨림으로 인해 대본을 들고 넘기면서 발화해야 하는 과정 자체가 부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본을 외울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당일 셋업으로 진행되는 공연이라 어떠한 선택과 고민을 나눌 틈도 없이 무대와 관객을 급하게 만나야 했었다. 이 상황 안에서 내 호흡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작업은 나에게 몸풀기와 무대 밟기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경험이기도 했었다.

연기를 시작하면서 내 생각이 깨어졌다면, 움직임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몸의 감각이 열리게 되었다. 움직임 작업을 통해서 내 몸을 이완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몸을 다양하게 쓰는 동안 호흡이 훨씬 편해진 것을 체감하면서 연기와 움직임은 떼어 놓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를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라도 내 신체의 한계를 잘 알아차리고,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의 가동 범위 안에서 몸을 잘 쓰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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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애인의 “1인 무대” <놓다>(2020) 본 공연

움직임 공연에서도 극단에서의 작업과 외부 작업의 접근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협업하는 외부 작업 과정에서도 장애인이 중심에 있는 것은 동일했지만, 고민하게 되는 이슈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물론 퍼포머로서 외부 작업과 극단에서의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이 단편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일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극단 내부 작업에서의 경험을 공유하려고 한다.

2019년과 2020년 극단 내부에서 했던 “1인 무대” 공연에서 나는 움직임 작업을 진행했었다. 그 과정 안에서 가장 크게 고민했던 건 무대 바닥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많은 경우 움직임 무대에서는 댄스 플로어를 사용하는데, 마찰로 인한 부상을 경험하면서 최대한 내 몸이 움직이기 편한 소재를 찾는 일에 시간을 더 쓰게 된 것이다. 마찰로 인한 부상만큼이나 미끄러지는 것도 방지해야 했기에 소재를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함께한 창작진들과의 고민 끝에 포맥스라는 바닥 소재를 찾게 되었고, 신중한 선택을 하기 위해 문구점에서 포맥스를 구입해 움직여 본 후에 결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물론 나 혼자 하는 ‘1인 무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었다.

이 글을 정리하다 보니, 외부 작업을 하면서 어려움을 마주하게 되는 이유가 조금은 명확해졌다. 아직까지는 내 속도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몸과 말에 확신을 갖게 되기까지는 분명 많은 경험과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내 속도에 대한 확신을 찾아가면서 꾸준히 만나고 겪게 될 시행착오의 시간들이 오히려 반갑고 그다음의 변화가 궁금해진다.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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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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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와 잘 만나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kbr03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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