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안전과 안심을 위한 규칙

접근성, 공연의 창작/제작 과정 다시 쓰기

글 쓴 사람_박경인 · 함께 쓴 사람_고주영

217호

2022.04.28


웹진 연극in에서는 현재 공연예술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배리어프리의 개념을 공연의 창작/제작 과정 전반에서의 접근성 문제로 확장해보고자 합니다. 전체 기획은 장애예술인들의 에세이를 연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며, 필자들께는 공연의 창작/제작과 관련한 몇 가지 키워드를 제안드렸습니다. 이를 통해 연극in은 기존의 공연예술 창작/제작 관행이 비장애를 규범으로 삼고 있지는 않았는지, 모두에게 안전한 작업 환경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나아가 접근성이 어떠한 창조적 상상력과 만나고 있는지를 함께 이야기해나가고자 합니다. - 편집자 주

* 이 글은 발달장애 활동가인 박경인 배우와 고주영 공연예술 독립프로듀서의 대화를 통해 구성되었습니다. 박경인 배우의 이야기를 검은색으로 표시했고, 필요한 부분에 고주영 프로듀서가 초록색으로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저는 박경인이라고 합니다. 평소에는 발달장애인의 권리옹호 활동을 하는 단체인 피플퍼스트서울센터에서 동료지원가-같은 발달장애를 가진 동료들의 자립생활을 돕는 일입니다-로 일하고 있습니다. 2021년 9월부터 연극 만들기 워크숍(플랜Qx극단 북새통 주관)에 참여했고, 11월 18일부터 20일까지 신촌문화발전소에서 공연된 <내 얘기 좀 들어봐>의 배우로 무대에 섰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저의 이야기를 했는데, 저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그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는 독백을 했습니다. 그 독백 안에 제가 시설에서 살았던 이야기, 탈시설한 경험, 지금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내 얘기를 들어봐>는 발달장애를 가진 비전문 배우 5인과 장애가 없는 예술인 5인이 함께 워크숍을 통해 만든 공연입니다. 연극놀이와 즉흥대사, 그리고 독백 읽기를 통해 발달장애인의 생각과 일상, 사회생활, 나아가 발달장애인이 느끼는 우리 사회의 ‘배리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무대였습니다.

1

9월에 워크숍을 처음으로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우리가 함께 지킬 규칙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5명의 발달장애인 배우와 5명의 비장애인 연극인들 중 서로 잘 모르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모두 편하게 안심하고 즐겁게 연극을 하기 위해 규칙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5명의 발달장애인 배우 중 박경인 배우를 제외한 4인은 2019년부터 진행한 연극놀이 워크숍 1-2기, 연극탐험대(발달장애인 관극 모임)에 각각 참여한 바가 있으며, 같이 작업한 비장애 예술인 5인은 모든 모임을 함께 주관·운영했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방식의 관계성이 이미 존재하는 멤버들이 공연팀을 구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규칙은, ‘경인’, ‘주영’하는 식으로 “성을 떼고 이름만 부르기”였습니다. 제일 어린 발달장애인 배우는 스물한 살이었고, 제일 나이가 많은 배우는 50대 남성이었습니다. 비장애인 연극인들 중에도 나이가 동갑이거나 비슷한 사람도 있었고,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 “피디님”, “배우님” 등등의 호칭을 붙이면 더 혼란스러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나이를 굳이 외우거나 하지 않고, 서로를 서로의 이름만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평등하게 지내기 위한 규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복지관이나 발달장애인평생교육센터 등을 다닌 경험이 있는 장애인들 중에는 비장애인을 나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무조건 “선생님”으로 호칭하는 데 익숙해진 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위계가 작동하지 않도록 이 규칙을 가장 먼저 정했습니다.

두 번째 규칙은 “다른 사람 얘기 잘 듣기”였습니다. 이 규칙을 정한 이유는 서로 생각하는 속도도 다르고 말하는 속도도 다르고, 말하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규칙이 없었다면 말이 빠르고 말을 잘하는 몇몇의 배우만 자기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극 워크숍을 통해 처음 만났지만, 한 무대에 서야 하는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기 위한 규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

세 번째는 “다른 사람 몸에 손 안 대기”라는 규칙이었습니다. 이것은 자기 의사를 말로 빠르게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말보다 빠른 행동으로 의사표현을 하면서 상대방이 원치 않는 신체 부위를 만지거나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로는 “마스크는 꼭! 물은 밖에서!”라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코로나니까요.

다섯 번째는 “시간 약속 지키기”였습니다. 다들 학교에도 다니고 직장에도 다녀서 대부분 저녁 시간에 워크숍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약속에 늦으면 끝나는 시간이 더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공연 직전에는 만나는 시간이 달라지기도 해서, 다른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규칙이었습니다.
매번 같은 요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워크숍과 연습, 공연이 진행되면 가장 좋겠지만, 여러 상황상 그렇지 못할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희 공연팀의 경우 발달장애인 배우와 비장애인 예술인이 각각 한 명씩 짝을 맺어서 워크숍, 공연 때의 조력은 물론 일종의 매니저 역할도 맡았습니다. 글을 읽지 못하거나 길을 찾기 어려워하는 참여자들도 있어 각자에게 맞는 조력의 방식을 찾거나 개개인의 조력자(활동지원인, 자립생활센터 조력자, 부모님 등)와 협력하는 방식으로 일정 환기, 장소로의 이동 방법 협의 등을 진행했습니다. 특히, 공연이 있는 주에는 극장 측과 협의하여 극장에서 연습을 진행, 이동 동선이나 공간과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섯 번째로는 “핸드폰은 가방에 쏙!”이라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서로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집중을 하고 싶은데, 갑자기 카톡이 울리거나 전화가 오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나중에 새롭게 추가된 규칙이었습니다.

일곱 번째로는 “시계 보지 않기”라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시간이나 숫자에 예민하여 계속 참여자들에게 시간을 물어보거나 구석에 둔 다른 사람의 핸드폰 시계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작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 끝나는 시간을 ‘엄수’하기를 원하는 참여자가 있었고, 이 참여자가 다른 참여자들에게 계속 시간을 물어보거나 다른 사람의 손목시계, 핸드폰에 손을 대는 일이 발생하여 추가된 규칙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멀리서도 볼 수 있는 큰 벽걸이 시계를 공간 안에 비치함으로써 이 규칙이 굳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시간을 알기 위해 진행 흐름이나 다른 사람을 방해하는 일은 사라졌습니다.

이 규칙을 적어서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연습실 벽에 붙이고, 매일 연습을 시작하기 전에 함께 이 규칙을 읽었습니다. 공연장에도 가져가서 무대 벽에 붙이고 공연을 했습니다. 매일 반복해서 읽어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서로가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모임이든 규칙이 있어야 잘 진행이 됩니다. 하지만 규칙이 항상 완벽하게 지켜진 것은 아닙니다. 워크숍 중에 한 번은 라벨지에 각자의 역할을 써서 가슴에 붙이고 역할극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제 가슴에 붙인 이름표의 글씨 색깔을 좋아하는 다른 남성 참여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색깔 이름표를 갖고 싶다는 말보다 앞서, 제 가슴에 붙인 이름표에 손을 대려고 다가와서 제가 매우 놀라고 당황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짧은 역할놀이를 위해 꼭 이름표를 쓰는 것이 맞는지, 그 이름표를 서로가 예민한 ‘가슴’에 붙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스스로 질문하게 되었고, 이후에 유사한 일이 발생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워크숍에서는 공연에서 했던 이야기보다 훨씬 개인적인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눴습니다. 하지만, 공연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내가 그중에서 어떤 이야기를 가장 하고 싶은지를 결정하였습니다.

3

마지막에 부른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라는 노래의 경우, 제가 평소에 그 노래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던 조력자가 제안하여, 공연 마지막에 그 노래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1절은 제가 혼자 부르고 2절은 모두 함께 부르기로 정했지만, 결정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실제 공연에서는 처음부터 모두 함께 부르는 합창이 되었지만,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발달장애인들이 연극을 만들 때는 다른 사람이 이야기할 때 딴짓하지 않고 집중해서 들어주는 규칙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발달장애의 특성상 집중력이 조금 부족한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고 함께 작업하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워크숍을 통해 자유롭게 내 얘기를 하는 것도 좋았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 들으면서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고 어떤 걸 좋아하는지 듣는 것이 아주 좋았습니다. 금붕어와 식물을 키운다는 한 참여자의 얘기를 듣다가 진짜 사진을 보니까 너무 좋았고, 해외여행을 많이 다녔다는 참가자 얘기를 듣고 여행사진을 보게 되었을 때도 깜짝 놀랐습니다. 연습 때는 자기표현을 많이 하지 않던 참여자가 무대에서는 자기표현도 잘하고 마이크를 놓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에도 놀랐습니다.

만약 <내 얘기 좀 들어봐 2>나 다른 연극을 하게 된다면 이런 바람이 있습니다. 연습실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만 듣겠다고 고집하지 않기, 이야기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쳐주거나 듣고 있다는 표시 해주기, 말이나 행동을 더 기다려주기, 같은 규칙이 있었으면 좋겠고, 같이 더 오래 연습하고, 2박 3일로 워크숍을 가서 서로를 더 알 수 있는 시간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제공: 촬영_최지훈 ⓒ극단 북새통x플랜Q]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박경인X고주영

박경인X고주영
박경인
장애인 탈시설 당사자로 바리스타를 거쳐 피플퍼스트서울센터에서 동료지원가로 일하고 있다. 2021년 연극 <내 얘기 좀 들어봐>에 출연했다. 공연과 전시 보기, 여행, 그리고 키티를 좋아한다.


고주영
공연예술 독립프로듀서. <내 얘기 좀 들어봐>를 포함한 플랜Q 프로젝트, 연극연습 프로젝트 등을 기획·제작하고 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