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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산책자 미래연극: [극장전] 다시쓰기

웹진 연극in 창간 10주년

김연재

제220호

2022.06.16

2012년 4월 창간준비호에서부터 총 네 번의 준비 과정을 거친 연극in은, 2012년 6월 제1호 웹진을 발행했습니다. 그사이 많고 많은 연극과 사람들이, 무대와 객석의 이야기들이, 새로운 소식과 담론들이 연극in이라는 세계를 만들어왔습니다. 2022년 창간 10주년을 맞아 편집부에서는, 그 세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기획을 준비했습니다. 연극in의 첫 번째 기획 시리즈 [극장전]은 대학로 공연장과 그 주변의 숨어있는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한 코너로, 2012년 4월 19일부터 11월 1일까지 연재된 바 있습니다. 당시 필진이었던 정진세 작가와 현재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연재 작가가 또 다른 [극장전]을 쓰기 위해 2022년의 대학로를 산책했습니다. - 편집자 주

첫 번째 편지 (새 창 열기)

두 번째 산책

내가 정진세를 만난 곳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안에 있는 까페였다. 정진세는 산책하면서 아무 얘기나 하면 되는 거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했다. 걸을 때마다 텀블러 안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과 차들이 한 방향으로 지나다녔다.
큰길을 지나 주택가로 접어들자 높은 오르막이 나타났다. 낙산 성곽길로 향하는 나무 계단을 올랐다. 그는 자신이 대학로 산책 파트너로 적격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대학로에서 공연을 올린 적이 거의 없는 데다 자주 한국연극을 비판하는 입장에 섰으므로 한국연극으로 대표되는 대학로에 마음을 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연극을 공부하는 학생 때는 분명히 저기에 서고 싶다, 혹은 저기에 서는 인간들 왜 저래, 이런 게 있었지만 지금은 그 단계도 지나서 뭔가를 선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거든요. 지금이라도 대학로의 극장을 대관해서 공연할 수는 있겠지만 아예 이곳을 통해서 어떤 욕망이나 마음이 자극되지 않는… 이민자 3세의 느낌? 바람은 신선했고 나는 나의 낡은 운동화를 보며 신발을 새로 하나 사야겠네 생각하고 정진세의 발걸음을 따라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야기를 들었다. 유모차를 끈 여자 둘이 우리 옆을 지나갔다.

정진세는 나의 첫 번째 편지에 부응하고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지난 20세기의 소개팅 이야기를 써서 보냈다. 그러나 그는 팝업씨어터 검열 사태 때 대학로 예술극장 앞에서 시위하던 기억이 먼저 떠올랐고 이어서 관객들의 미투 집회 때 마로니에 공원에 서 있던 기억, N번방 시위 때 우연찮게 대학로를 지나던 기억이 생각났다고 했다. 작고 소박한 역사를 말하겠다고 하지만 정작 기억나는 건 크고 정치적인 사건들뿐이구나 그는 생각했다. 나와 정진세는 2018년 관객 미투 집회 때 마로니에 공원 한켠에서 서로를 만났을 것이다. 맞은편에 서서 눈인사를 나누었을 것이다.
또 대학로에는 소극장뿐 아니라 노들야학이 있었고 장애인문화예술센터 이음센터가 개관했으며 최근에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가 있었다.

10년 전 서울연극센터에서 창간한 웹진 연극in의 첫 기획은 [극장전]이었다. 대학로에 위치한 극장들의 역사와 특징, 내부 시설, 주변 명소를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코너로, 당시 웹진 편집부는 총 열다섯 호의 기획 지면을 극장을 소개하는 데 할애했다. 도합 열네 개의 극장이 소개되었고 그중 여섯 개의 극장이 모습을 바꾸거나 사라졌다. 정진세는 웹진 2호에서 학전블루 소극장, 3호에서 선돌극장, 4호에서 설치극장 정미소, 5호에서 게릴라극장, 6호에서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 대해 썼다. 2012년 11월 1일에 발행된 웹진 11호에서 그는 ‘관객의 자기 권리 찾기’라는 나름의 소주제를 가지고 일련의 글을 연재했다고 말한다.
[극장전] 이후의 기획은 [대학로 연대기]다. 대학로 연극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연극 문화의 변천사를 조망하는 코너로, 대학로라는 도시공간의 기원을 설명하는 이진아 평론가의 글로 시작된다. 나는 갓 창간된 연극 웹진이 연극에 앞서 연극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관한 담론을 적극적으로 형성하고 있다는 데 놀랐다. 왜냐하면 지금의 대학로는 마치 용산 전자상가나 세운상가, 성수동 수제화 거리처럼 한때 특정 산업이 집약되어 있었으나 콘텐츠 플랫폼의 발달과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그 상징만 존속되는 공간을 향해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다수의 관객에게 극장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극장을 방문하는 모든 관객을 환대하는 방법을 찾는 중이다. 당시 편집부는 2010년대가 한국연극을 대학로라는 말로 칭할 수 있던 마지막 시기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그들이 상상했던 10년 뒤 대학로, 10년 뒤 연극은 현재와 어떻게 같고 다를까? 그리고 10년 뒤의 예술가들은 현재를 어떻게 보게 될까?
우리는 극장을 나와 극장들이 집약된, 혹은 집약되었던 공간을 경관으로 바라보며 극장의 외벽을 따라 천천히 걷기로 했다.

산비둘기들이 접이식 부채처럼 날개를 펼치고 길가 풀숲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계속 지나다녀도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진세는 산비둘기가 일광욕을 하는 건지 물었고 나는 왠지 그런 것 같다고 답하며 사진을 찍었다.

  • - 작가님도 산책 중에 보신 것들을 찍어서 보내주셔야 해요.
  • - 저는 지나가는 연극인을 만나면 그분을 찍겠습니다.
  • - 만날 수 있을까요?
  • - 엄청 운동이 되네요.
  • - 지금 힘드세요?
  • - 네. 근래에…
  • - 가장 많이 움직이셨군요.

  • 우리는 성곽 앞 벤치에 앉아 얼음 든 음료를 마셨다. 노인들이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키가 크다고 칭찬했다. 몇이야 지금 키가? 칠십오? 중학생인데 꽤 크네. 아이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걸어갔다. 고양이 한 마리가 맞은편에 배를 깔고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정진세는 요새 허망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했다. 과거의 것을 반복하는 것도 새로운 것을 하는 것도 흥이 안 나는데 코로나가 종식되는 분위기에 들뜬 사람들을 보면 더 흥이 안 난다고 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광해 왔을까? 뭐 때문에 대학로가? 그는 대학로를 미워하는 쪽이었고. 미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좋아한다는 거겠죠 그가 말했다. 그는 언젠가 대학로를 소극장이 이백 개나 밀집된 대단한 공간이라고 자랑한 글을 읽었던 게 기억난다고 했다.
    사실 수만 많았을 뿐, 올라가는 월세, 누군가는 접근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 화장실을 비롯한 기본적인 시설도 교정하지 못해 허덕이고 있었는데 명소인 것처럼 위장하며 열심히 했던 시절들이 좀… 이십 대에 주로 시간을 보냈었던 홍대 앞 예술공간들이 완전히 사그라들고 소멸한 것을 봐도 그렇고. 그냥 뭐 모든 흘러간 역사 앞에서 기억나는 건 소개팅? 그리고 몇 번의 데이트 그런 거구나 또 마르쉐가 마로니에 공원에 섰던 거…

    극장을 이백 번이나 셀 수 있다니. 극장 이백 채에서 이백 개의 연극이 올라가고 한 프로덕션 멤버를 열 명으로 잡는다면 적어도 이천 명의 연극 인력이 움직인다. 그들은 혜화역을 오가고 혜화역에는 서울올림픽을 위한 도시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1985년 즈음 만들어진 타일 벽화가 지금보다는 괜찮은 상태로 붙어있고 거기에는 학이 그려져 있다.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샘터 파랑새 극장에 어린이 연극을 보러 갔다는데 그때가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니까 대학로에 극장들이 밀집해 있을 때였겠지. 어린이 연극을 본 뒤에는 코메디언 이원숭 씨가 오픈한 디마떼오에서 옥수수 박힌 화덕 피자를 먹었다고, 전해 들었다.

    고양이는 한참 앉아 있다가 유유히 사라졌다. 우리는 잠시 우리가 연극을 흉볼 때 말하는 것들을 반복해 말했다. 그중 어떤 항목은 나에게 해당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흉을 보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나는 연극이 동시대 예술의 촌스러운 일면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촌스러움은 연극이 상실한 미감을 비아냥대는 말이 아니라 연극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의 한 특성을 지칭하는 말에 가깝다고. 촌스러운 것은 투박한 것이고 욕망의 경쟁력을 잃은 것이며 가장하지 못하는 것이고 위엄이나 허영을 부릴 줄 모르는 것이며 자신을 의식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 것이고 원래 그러한 것을 원래 그러한 대로 내보이는, 통제할 수 없고 동시에 신실한 것이다. 나는 아름다움이 성립하는 중요한 한 조건을 생각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자만이 아름답다.
    촌스러운 것만이 진정으로 아름다울 기회를 얻는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들은 ‘촌스럽다’. 소설가 손보미는 그의 소설 「해변의 피크닉」에서 이렇게 썼다. “예쁘다는 것은 매 순간마다 자신의 어떤 요소를 초월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나의 한 친구는 이 소설을 언급하면서, 아름다움은 자신의 실존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본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긴다고 했다. 나는 자신의 어떤 요소를 초월하는 것은 그것이 아름답든 그렇지 않든 상처를 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연극을 생각했다. 관객과 관계할 때 연극은 자기의 체급을 초과한다. 자신의 어떤 요소를 초월하면서 관객에게 작동한다는 점에서 연극은 상처덩어리다. 촌스럽고 신실하며 둔중한 상처를 내는 연극. 우리는 아름다움의 바늘구멍 앞에 모여 선 거적때기 영혼들이다…

    정진세는 이른바 ‘페봄 키즈’로, 2007년부터 2016년까지 서울에서 열렸던 국제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에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연극인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연극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무용, 미술, 음악, 영화, 퍼포먼스 등 타 장르와 활발하게 교류하며 실험적인 연극을 만들고자 했다. 그럼에도 그는 당시에 축제로부터 영향받은 동료들이 시도했던 포스트드라마나 다큐멘터리 연극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장르의 작품을 볼 때도 힙한 것을 따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작품보다 개념이 큰 것은 재미가 없었으며 그러다 보니 희한하게 드라마 연극만을 해왔다고 이 점을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더 이상 키즈가 아닌 ‘페봄 키즈’들이 꼭 ‘슈퍼주니어’나 ‘소녀시대’ 같다고 했고 1980-90년대 대학로의 연극 문화를 계승하지 않으려고, 차라리 극복하려고, 한국연극을 미워하고 비판하고 도망 다니면서도 집과 연습실에서 열심히 드라마를 구상하는 정진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 - 정보소극장은 어땠나요? 저는 한 번도 안 가봤어요.
  • - 정보소극장은 되게 작아요.

  • 벤치에서 일어나 낙산을 내려왔다. 벤치에 도착했을 때 보았던 한 무리의 노인들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그러니까, 정보소극장은 대학로에서 만날 수 있는 소극장보다 한 1/4정도 더 작은 것 같아요. 사방이 닫혀 있어서 운동성이 적은 언어극이나, 오히려 작은 공간에서의 운동성, 존재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그런 작품들이 기억에 남는데요. 예전에 윤영선 작가님 <여행>인가? 거기에 막 열 몇 명이 나오는데 너무 좁아 터져 보이는 거예요. 그게 묘하게 좋았었고. 그리고 <임차인>. 그리고 아돌프 푸가드의 <출구와 입구>인가? 이인극이었는데 정말 상수가 입구고 하수가 출구여서 좀 웃겼어요. 아프리카 연극에 관한 연극이었는데 좀 감동적이었고. 여러모로 정보소극장은 혜화동1번지나 연우소극장과는 다른 맥락이 있었는데요. 그게 좋았어요. 그래서 정보소극장에서만큼은 공연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작아서? 제가 하는 연극도 품어내기 되게 좋겠다는 생각. 거기에서 작업하셨던 연극인들 중에는 돌아가신 분들도 계시고. 지금은 극장이 어떻게 됐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느 순간부터 소식 업데이트가 끝나서 아마 문을 닫긴 한 것 같아요. 정미소도 사라졌는데. 거기에서도 공연을 본 적 있으세요? 그렇죠. 연극을 공부하던 2005년에서 2010년 사이에 대학로의 연극들을 봤으니까. 작가님은 정미소에 특별한 기억이 있으신가 봐요? 저는 2017년쯤 가봤는데 로비가 좋았어요. 객석과 무대 사이의 담화공간이 있는 느낌. 그리고 가는 길이 한적해서요. 그 길이 좀 외졌죠. 이음 책방도 많이 갔었는데 사라져서 좀 아쉽고. 희곡 컬렉션을 파는 서점이 많지 않으니까 대학로 올 때마다 이음에서 희곡 한 권씩 사왔었는데요. 지금 제 집에 있는 희곡 절반은 이음에서 산 거. 저는 온라인 서점에 일찌감치 익숙해져서… 그런데 우리가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나요? 여기로 내려가면 정미소 그 라인이 나올 것 같은데요. 아닐 수도 있고. 원래 우리의 산책 종착지는 한성대입구 쪽 명문 막국수였는데요. 다른 길로 내려왔네요. 그런데 배 안 고프시잖아요. 어! 왜요? 아 여기는 거기네요. 정미소 쪽이 아니라 예술청 쪽인데요. 여기가 제가 지도에 그렸던 공터다.

    - 정보소극장에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이제 정보소극장이 나와요.

    우리는 시멘트를 바른 계단을 내려갔다.

  • - 여기가 정보소극장. 혜화나무 여기가. 작가님이 말한 바오로 딸이 바로 옆에 있어서 신기했어요.
  • - 여기? 지하요?
  • - 이 박스가 티켓부스였어요. 정보, 라고 쓰여 있을지도. 그런데 이름이 바뀌었네요.
  • - ‘지하 소극장 내려가는 길’ 이렇게 써 붙였다.

  • 정보소극장이었던 곳은 닫혀 있었고 또 캄캄했다. 우리는 정보소극장 터를 지나 내가 편지에 썼던 정체 모를 빌라를 향해 걸었다. 그곳의 정식 명칭은 광명가든레지던스였다. 오래된 관리실을 지나 입구 안에 들어서니 꽃나무에 둘러싸인 이 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 몇 채가 주차 구역과 화단과 연못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었다. 베란다 유리창으로는 가지런히 정돈된 선풍기며 이불이며 상자들이 보였고 몇몇 집은 창가에 주렴이나 발을 늘어뜨렸다. 멀리, 나무가 우거진 정원 혹은 숲 같은 곳이 있었는데 나무 교량이 너무나 정답게 정원과 빌라 단지를 잇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교량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 조금 감동적이었고 그 완전한 모양을 보며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영원의 건축』을 생각했다. 그러다 일순간 내가 이곳에 침입한 이방인이 된 것처럼 느껴졌고 그럼에도 흰색 돌로 만든, 때가 탄, 이름 모를 동상들이 소박하고 아름다워 탄식했다. 정진세는 그곳이 특별한 사람들이 사는 공관 같다고 했다.

    빌라 단지를 나와 대학로를 걸었다. 쇳대박물관을 지나 커다란 교회와 방송통신대학교 주차장 사이 길을 그늘을 따라 걷다가 한때 설치극장 정미소였던 건물을 보았다. 흰색 초록색 타일로 외벽을 바른 텅 빈 건물이었다. 초등학교인지 중학교인지 모를 학교의 담벼락을 지나 높다란 주차장과 공사 펜스를 따라 걸으니 처음 출발했던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맞은편에 다다랐다. 우리는 다시 혜화역을 향해 걸었다.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다가 약 이십 년 전 정진세가 소개팅 상대를 만났던 곳에 가볼까 하여 그곳을 밟아보았다. 그때 나는 배우들이 극장을 답사하는 일을 두고 극장을 ‘밟아본다’고 하는 이유를 알았다. 밟아본다는 말은 어떤 곳에 찾아가, 다른 시간에서 일어난/일어날 어떤 일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적극적인 행위인 것이다.

    - 이렇게 오래 걸었는데 연극인을 한 명도 못 만나다니.

    정진세는 아쉬운 대로 사라진 이음 책방의 출입구를 촬영했다. 우리는 다시 혜화역으로 돌아가 JS 빌딩을 구경하기로 했다.
    JS빌딩은 혜화역 1번 출구 앞 ABC마트가 자리한 건물로, 건축가 김봉렬은 1998년 대한건축학회지에서 이렇게 썼다. “대학로가 소비지역으로 바뀌면서, 서울 시내를 떠돌던 소극장 팀들이 모여들었다. 물론 그들의 연극이란 문예극장에 올려질 수 없는 영세하고 대중적인 공연이었다. […] 80년대 대학로는 대중적 연극과 라이브 컨서트의 메카가 되었다. […] 이러한 문화적 변화의 초기에 조건영은 JS빌딩을 설계했다. […] 붉은 벽돌집들이 기성문화를 상징하고 순수문화를 고집하는 것이라면, JS빌딩은 신세대의 소비행위를 수용하고 상업문화를 옹호하는 건축이다.1)” 이 글을 쓴 김봉렬은 약 25년 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되어 상업적으로 대중적으로 우수한 성과를 거둔 졸업생과 영세한 재학생들을 열과 성을 다해 격려하게 된다.

    우리는 JS빌딩 꼭대기의 삼각뿔 같은 계단탑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정진세에게 산책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정진세는 운동할 시간은 거의 없지만 산책의 힘을 믿는다고 말했다. 나는 산책이 장소의 비밀들, 엄밀히 말하자면 누설할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강제로 비밀에 부쳐진 쓸모없고 하찮은 정보들을 수집하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걸음으로써 공적 기록이 누락시킨 사물들과 조우한다. 극도로 미시적인 것들이 가져다주는 덕후적 쾌감. 멘홀 뚜껑에 쓰인 글씨, 지하철 승강장에 그려진 타일 벽화, 용도를 알 수 없는 고리와 배관과 이음새, 간판과 쓰레기와 하수구. 어긋난 타일과 아름다운 교량. 새들과 아이들과 고양이와 꽃나무.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 저해상도 이미지들, 소음들, 잡담들 말이다. 이렇게 수집된 비밀들은 예술가들의 몫이 된다.
    극장의 어원은 ‘본다’는 뜻이다. 관객들은 극장에서 예술가를 보고, 예술가는 행위한다. 산책은 보는 동시에 행위하는 일이다. 산책자는 관객인 동시에 예술가다. 걷는 행위는 객석과 무대를 얽어버리려는 움직임이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산책을 마친 당신의 미래 극장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때 우리의 앞으로 한 연극인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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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촬영 김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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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촬영 김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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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촬영 김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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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촬영 김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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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촬영 정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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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촬영 정진세

    세 번째 편지 (새 창 열기)

    1. 김봉렬, 「건축비평 - 동숭동 대학로의 도시와 건축 : 대학로의 건축사-미술회관 , JS빌딩 , 문화공간(Moonye Galley , JS Building , and Culture-Space Building)」, 『건축』 제42권 제10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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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재

    김연재 본지 편집위원
    작가, 단추학자, 이미지 수집가
    <매립지>,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폴라 목> 등을 쓰고 전시 <불완전 운동>에서 <달과 종>을 연출했다. 1960년대 서울의 건축물과 오컬티즘에 관심이 있다.
    인스타그램 @publish_seri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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