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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연극 상상하기 - 이전과 이후, 여기저기를 들락날락

웹진 연극in 창간 10주년

이연주

제221호

2022.06.30

2012년 4월 창간준비호에서부터 총 네 번의 준비 과정을 거친 연극in은, 2012년 6월 제1호 웹진을 발행했습니다. 그사이 많고 많은 연극과 사람들이, 무대와 객석의 이야기들이, 새로운 소식과 담론들이 연극in이라는 세계를 만들어왔습니다. 2022년 창간 10주년을 맞아 편집부에서는, 그 세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기획을 준비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편집위원 이연주 연출가가 미래의 연극에 대한 상상을 펼쳐 봅니다. - 편집자 주

미래연극이라니. 아무리 상상해도 잘 상상되지 않네요. 미래라고 하면, 어느 정도의 이후라고 하면, 미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 2020년이 오면 세상이 이렇게 바뀔 거라는 과학책을 보면서 신기해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의 미래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무한으로 뻗어가는 인류의 빛나는 성과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요. 자료로 보여주는 그림 속의 인물들이 한 바퀴를 돌면, 옷 색깔이 바뀌면서 빙글빙글 도는 것만으로 하나의 공연 같았습니다. 그땐 2020년을 막연하게 진보하는 인류의 미래로만 상상했는데요. 정작 2020년에 전염병으로 인류의 미래를, 지구의 미래를 고민하게 될 줄은 정말로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10년, 20년 이후는 지금과 얼마나 같고 다를까요? 히라타 오리자의 희곡 「도쿄노트」에서는 시간적 배경을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로 설정하면서 유럽에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음을 가정합니다. 유럽의 전쟁을 피해서 일본으로 소장처를 옮긴 작품이 전시되는 미술관이 그 배경이 됩니다. 그런데 희곡을 읽으면서 저는 희곡의 현실이 마치 지금의 현실 같기도 하고, 언젠가의 미래를 엿보는 것 같기도 하면서 과거의 한때를 옮겨온 것 같다는 묘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너무 가까운 미래는 적극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이번에는 막연하지만 100년 이후를 떠올려봅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연극이 있을까요? 과거 100년 전에도 연극은 있었으니 연극은 있겠지, 하는 생각과 정말로 연극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런데 그랬잖아요. 연극은 늘 위기라고. 어쩌면 영화의 등장 이후에 늘 연극은 도태되고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던 것 아닐까요? 아니면 그전에도? 사실 연극은 늘 사라지는 것이라고, 그것이야말로 무대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면서도, 연극에 대해 꾸준히 다양한 정의를 내리며 연극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건 연극인들만의 막연한 불안일까요? 그런데 전쟁터에서도 연극을 했다고 하잖아요. 물론 그것의 구체적인 과정은 어떠했을지 잘 모르지만요. 상상해볼 뿐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참 놀라운 일입니다. 오랜 식민의 역사에서도, 피난길에서도. 전쟁이 일상이라면 가능한 걸까요? 전쟁이 현실이기에 가능한 걸까요? 어쩌면 전쟁 같은 일상에 무감해지면서 연극에 몰두하는 시간을 우리는 늘 만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유랑극장에 대한 영화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를 보면서 이동하는 극장과 무대가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고 또 사라지던 삶을 상상해보는 것처럼. 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남습니다. 전쟁 중에도 우리는 연극을 할 수 있을까요? 상상이 되지 않아요.

그럼에도 연극은 살아있을 것 같은 거예요. 그건 연극이 엄청 대단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은 꿈을 꾸고 싶을 것 같아서요. 잠시라도 현실을 잊기 위해서 또는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다양한 연극이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네요. 누군가는 그래서 연극을 만들고, 누군가는 그래서 연극을 볼 테니까요. 전쟁 중 큰 극장은 폐허가 되어 흔적만 있을 수도 있겠지만, 소극장, 여기저기 골목 안 소극장, 극장인지 건물의 지하인지 알 수 없는, 옥탑방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곳의 극장들은 사라져야 하는 정확한 목적과 대상에서 빗겨 난 채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사실 코로나로 일정 규모 이상의 극장이 닫힐 때 소극장은 마치, 그래도 끝나지 않는 연극의 은신처, 아지트 같았거든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조용한 말과 은밀한 눈빛으로 티켓을 주고받으며, 조심스럽게 손을 닦고 마스크를 쓴 채로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 극장 안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모여 앉아 조용히 공연을 보고, 또 다시 조용히 각자 집으로 가는 뒷모습. 굳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지 않으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금은 사라진 시간을 간직하며 각자의 길로 떠나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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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희곡릴레이 페스티벌 ‘까톡희곡릴레이’

편집위원회에서는 미래연극을 상상해보는 하나의 방법으로 ‘스마트연극’을 제안했습니다. 스마트폰의 ‘자동완성’ 기능을 이용해서 글을 완성해보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카톡으로 희곡을 이어 써보는 시도가 있었네요. <10분희곡릴레이 페스티벌>의 ‘까톡희곡릴레이’에서는 즉석에서 희곡을 이어나가는, 여러 사람이 함께 써나가는 시도를 했는데요. 한 사람의 세계가 온전히 담긴다고 믿는 희곡에 흥미로운 균열이 일어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것, 모든 글쓰기는 누군가의 기억과 기록을 빌려 쓰는 것에서 각자의 역사를 길어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스마트폰의 ‘자동완성’ 기능을 사용해보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자동완성’ 기능이 어느 정도의 기록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이었고, 그것에 주목해 봤습니다. 최근 저의 기록을 보는 일이기도 하더군요. 이전 호에서 김태희 님은 기록매체로서 웹진에 대해 또 다른 기록을 남겨주셨습니다. 웹진을 포함한 연극 매체들, 더 넓게 보면 연극사에 기록되는 이야기들, 사람들, 말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다시금 ‘이후’를 상상해보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분들의 기록을 빌려오기로 했습니다. 필진으로 참여하셨던 분들에게 문자를 보내는 방식으로요.

안녕하세요? 웹진 연극in 편집위원회입니다.
웹진 창간 10주년을 맞아 지난 10년을 돌아보고, 미래의 연극을 상상해보고 있습니다.

1. 상품 검색 기록을 제외한 최근 검색어를 공유해주세요.
2. 검색 기록을 꺼놓으셨다면, 스마트폰의 ‘자동완성’ 기능을 켜주세요.
3. 입력창에 '연극'이라는 단어를 썼을 때 자동완성으로 이어지는 단어를 알려주세요.
4. 자동완성이 추천해주는 첫 번째 단어를 계속 선택했을 때 만들어지는 문장을 공유해주셔도 좋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사람만의 온전한 창작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삶과 기록을 빌어오는 일인 것 같습니다. 거창하게 시작한 것 같은데요. 여러분의 기록을 빌어서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고 미래를 상상해보려고 합니다. 오픈채팅 방에 접속해서 자유롭게 참여해주세요.

오픈채팅방에 남겨주시는 단어나 문장들은 웹진 창간 10주년 [기획] ‘미래연극 상상하기’ 원고에 반영됩니다. 여러분의 기록 자체를 글에 담을 수도 있고, 기록에서 연결된 화두가 글에 담길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검색어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각자의 기록에서부터 시작해보는 상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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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채팅방에 올라온 ‘자동완성’을 이용한 문장들

최근 검색어와 연극에 대한 자동완성 기능으로 이루어진 문장들은 막상 읽으면 전혀 해독되지 않는 말들이기도 합니다. 물론 직관적으로 연결되는 단어와 단어도 있습니다. 참고로 전 ‘연극’을 쓰자마자 저의 최근작 제목이 보이는 것을 보고, 이제는 리뷰 검색을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문장 안에 드러나지 않은, ‘사이’의 맥락을 상상해봅니다. ‘연극’ 다음에 이어지는 단어, 그 단어는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그 사람만의 연결일 수도 있는, 또는 나의 기록과 여러 사람의 기록이 이어져서 만들어진 연결의 맥락은 하나의 맥락으로는 정확하게 판단되지 않으며,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불가능성의 연결 같기도 합니다. 하나의 ‘단어’에서 떠오른 각자의 생각이 어떠한 착상과 전개로 이어질지 궁금해집니다. 말을 이어본다는 것 말입니다.

김연재 님은 ‘[극장전] 다시 쓰기’를 통해 정진세 님과 함께 대학로의 역사, 극장의 역사를 둘러보는 산책길을 밟아주셨습니다. 사라진 극장의 터를 이야기할 때에는 그곳에서 봤던 공연과 무대의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때의 무대를 떠올리는 일이 갑자기 너무나 명확한 순간으로 기억되어 오히려 낯설기도 합니다. 제가 그저 지나간 공연을 떠올릴 때 우선적으로 떠오르지 않는 극장과 공연이기도 했는데 말이죠. 어제 본 공연은 극장과 무대를, ‘사라지는 것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제는 멸종될, 된, 되는 극장의 직업군인 프롬프터의 속삭임은 무대와 객석 곳곳에 퍼지며, 잊혀졌던 극장의 소리들, 기억들을 모두 소환해내는 것 같았습니다. 오랜 시간 극단의 시간과 극장의 시간이 함께 쌓여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의 극장과는 다름에서 오는 낯설음, 부러움이 함께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극장에는 또 어떤 시간이, 역사가 쌓이고 있는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우리에게 극장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새롭고 깨끗한 공간. 새로운 기술이 구현될 수 있는 공간. 좀 더 많은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문화와 예술이 포괄되는 공간으로서의 극장은 무엇을 사라지게 하고, 무엇을 새로이 생겨나게 할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앞서 본 공연의 제목은 <소프루>입니다. 폐허가 된 극장에 대한 상상. 그리고 사라지는(진) 것들. 하지만 극장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 한국에서 ‘프롬프터’라는 역할은 익숙하지는 않지만, 연습실에서는 연출부가 그 역할을 주로 담당하게 됩니다. 대본을 읽고, 함께 작품을 분석하는 과정 외에 또는 이후에 배우의 몸을 통해 움직여보는 과정에서 대사를 읽어주거나 동선을 알려주죠. 극장에 들어간 이후에는 (프로덕션의 규모에 따라 무대감독이 있을 경우에는) 무대감독이 그 역할을 이어서 진행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무대감독은 공연 중에는 대사를 읽어주거나 동선을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하는 역할로 무대 안쪽의 소대에서 연극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무대 안쪽을 들여다보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연 중에 의상 변화 및 분장 변화를 대비해서 담당 스태프가 상주하기도 하고요. 대도구 및 소도구의 이동을 위한 무대 크루가 상주하기도 하며, 무대 상하부의 기술적인 구동을 위한 극장의 기술감독도 있습니다. 극장의 기술을 담당하는 스태프 외에 공연의 기술적 운영을 위한 스태프들은 보통은 객석에는 드러나지 않는 조정실에서 그 역할을 수행합니다. 여러분이 프로그램북에서 보시는 조명, 음향, 영상 등의 오퍼레이터로 역할이 표기된 사람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관객들에게는 공연의 시작과 끝에 만나는, 객석을 담당하는 하우스 스태프들과 티켓 담당 스태프가 객석의 안과 밖에서 공연을 함께 합니다. 하우스 스태프들은 공연 중에는 그 역할이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꾸준히 객석의 상황을 주시하며 변동에 대응합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멸종되는(된) 역할로 극장의 막을 직접 수동으로 올리고 내리는 기술 스태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는 많은 극장에서 막을 열고 닫는 일은 기술로 구동하지만, 이전에는 모두 사람이 했던 거죠. 그리고 그 속도와 운용의 차이가 그 사람의 전문성을 보여주는 것이었겠죠. 최근에 본 영상에서는 온몸으로 성당의 종을 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종에 달린 끈을 양팔로 끌어내리면서 종을 치고 있었고, 종이 움직이는 반경이 커질수록 온몸으로 종에 매달리며 종을 운용하는 모습을 통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무대 위 프롬프터의 모습에서 저는 수어통역사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존재했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극장에 새로 생겨났지만, 사실은 ‘새로’라는 말이 어색한 그 역할 말입니다. 프롬프터가 배우를 위해 존재한다면, 수어통역사는 같은 무대에 존재하지만 관객을 위해, 또 그리고 배우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무언가는 늘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래서 새롭게 생겨난 것들이 있을 겁니다. 그것이 꼭 기술의 진보, 발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죠.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야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극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떠올리는 일은 앞으로 거기에 있을 사람들을 떠올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연극in 웹진의 독자일 때,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코너는 이전도 그렇고, 지금도 [대화] 코너입니다. 궁금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은 그 사람과 그 사람의 무대를 떠올려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처음 웹진을 읽을 때만 해도 대부분의 인터뷰이는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인터뷰를 읽으면서 늘 앞으로 만나게 될 ‘누군가’로 생각했다면, 최근에는 이미 만나본 사람이 되어버린 거죠. 그런 면에서 [대화]는 미래이며 과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군가는 미래를 상상하고 누군가는 과거를 떠올리는 시간일 수도 있을까요? 지난 호에 실린 이진아 님과 임성현 님의 대화에서는 웹진의 궤적과 이후를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구성되는 과거와 현재, 그 안에서 주체들의 선택, 코너의 성격, 시간, 역사는 각자의 의도와 동일하게, 또는 다르게 재편될 수 있음에 대해, 그것은 여전히 움직이고, 늘 각자의 시선으로 해석될 수 있는 공연의 물성과도 닮아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해석하는 자의 몫, 보는 자의 몫에 대해서도요. 전달하는 매체의 성격만이 아닌, 매체와 독자 간의 보이지 않는 긴장과 관계를 앞으로는 또 어떻게 만나볼 수 있을까요?

저에게 쌓인 연극의 이전과 이후, 극장 여기저기를 떠올리다 보니 미래는 단순히 시간의 의미는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래연극을 상상한다는 것은 ‘무엇’을 상상하는 일일까요? 이후를 상상한다는 것은 지나온 시간에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지에 대한 노력이며, 사라진, 보이지 않았던 것을 다시 들여다보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상상하고 창조하고 싶으세요? 다소 진부하고 촌스럽지만, 연극에 대해 다루는 매체인 만큼 희곡의 일부를 빌어 마무리해보려고 합니다. 이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 무언가를 ‘상상’해보는 일일 겁니다… 여전히 과거에 갇힌 자의 부끄러운 마무리입니다.

베르쉬닌
그럼 차가 안 나온다면 철학이라도 논해 봅시다.
뚜젠바흐
그러시죠. 무슨 얘길 할까요?
베르쉬닌
무슨 얘기? 상상을 한번 해 봅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죽고 나서 이삼백 년 뒤의 삶이 어떨지.
뚜젠바흐
좋지요. 미래에 사람들은 기구를 타고 날아다니겠죠. 재킷 모양도 달라질거고. 어쩌면 여섯 번째 감각을 발견해서 그 감각을 발견시킬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삶은 똑같을 겁니다. 인생은 여전히 힘들고 비밀로 가득 차 있고, 행복하기도 하겠지요. 천년이 지난 뒤에도 인간은 마찬가지로 “아, 사는 게 힘들어” 하며 한숨 짓겠죠. 그리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기 싫어할 겁니다.
베르쉬닌
(잠시 생각하더니)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요? 저는 세상의 모든 것이 점차 변해야 하고, 이미 우리 눈앞에서 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백 년, 삼백 년, 그리고 천 년이 지나면, 그 기간이야 중요하지 않습니다만, 행복한 새로운 삶이 찾아올 겁니다. 물론 우리는 그 삶에 동참할 수는 없겠지만 그 삶을 위해 지금 우리가 살고, 노동을 하고, 고통 받는 겁니다, 우리가 그 삶을 창조하고 있는 거죠. 여기에 우리 존재의 목적이 있고, 또 행복이 있는 겁니다.
마샤가 조용히 웃는다.

안톤 체홉 「세자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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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주

이연주 본지 편집위원
연극 쓰고 연출합니다. thukushi9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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