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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세 갈래길 앞에서

음이온 <비둘기처럼 걷기>

조주영

제220호

2022.06.16

인간도 비둘기도 아닌 비둘기-인간입니다

세로로 긴 창문들과 잘 나열된 예배 의자는 교회의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교회는 아닌 이곳(공연장의 이름은 TINC(This is not a church)였다)에서 만난 이야기는 공간만큼이나 기묘했다. 비둘기-인간이 된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찾던 범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진실과 마주하고 난 뒤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찔렀다면, 여기서 남자의 눈을 찌른, 아니 쪼아 먹은 건 자신도 다른 사람도 아닌 한 비둘기이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남자는 아마도 과한 음주로 인해 자신의 얼굴 위로 범벅이 된 토사물을 비둘기가 먹다 그만 자신의 눈까지 먹게 된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결과로 남자는 한쪽 눈으로는 원래 보던 것을, 다른 한쪽 눈으로는 비둘기가 보는 것을 보게 되면서 그렇게 비둘기-인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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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버드아이뷰, 비둘기의 시점을 넘어

“인간과 비인간 사이를 진동하며 사유의 새로운 경로”를 살피고자 하는 이 연극은 남자의 변신을 통해 우리의 시야가 인간 너머의 세계로 확장되는 현재의 과도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변해가야 하는가에 관해 고민한다. 연극은 가장 먼저 우리가 지닌 시각의 불완전성을 인지시키며 그 과정에서 가족, 두 의사,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보험사, 비둘기 퇴치사, 주민, 행인, 노인)이 남자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보이는 각기 다른 반응을 보여준다. 예컨대 남자가 찾아간 두 의사는 한쪽 눈은 새가 보는 것을 본다는 남자의 말을 진지하게 듣기는 하지만 쉽사리 믿기 어려운 상황 앞에서 그의 말에 진심 어린 공감을 해주지는 못한다. 안과 의사는 그에게 의안을 권하고 정신과 의사는 그가 보는 것은 환각이라고 하지만 남자는 의안을 내켜 하지 않을뿐더러 이것은 환각이 아닌 정말 자신의 몸과 비둘기의 세포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외에도 남자는 자신에게 새의 영혼이 있으며 ‘영혼은 뭐든 될 수 있거든요’라고 말해오는 한 (수)행인으로부터 자신이 찾는 답을 얻을지도 몰라 기대를 갖고 관심을 보이지만, 그 새가 비둘기가 아닌 독수리라는 말을 듣고는 등을 돌려 다시 길을 나선다.
연극은 묻는다. 위와 같이 의학도 종교도 그의 상태를 설명하지 못할 때, 또 다른 청자인 관객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쩌면 좀처럼 믿기 힘든 이 기묘한 이야기를 어떻게 소화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이 이후의 시대를 살아내는 마음가짐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질문에 최대한 잘 답하기 위해 연극은 관객이 남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생각하게 하기보다 대신 비둘기-인간의 시점을 보여준다. 남자의 말이 어쩌면 터무니없는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듯. 관객 앞에 위치한 빔프로젝터 스크린에는 남자가 새로이 얻게 된 비둘기의 시점이 재생된다. 여기에는 새가 날면서 도심을 내려다보는 버드아이뷰와 마치 비둘기가 공연장의 바닥에서 서 있듯 연극의 실시간 상황을 바라보는 시점이 번갈아 가며 나온다. 이로써 관객들은 그의 말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것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비둘기-인간의 시각을 공유하게 된다.
이때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바로 관객 또한 현재 공연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과 카메라(남자 혹은 비둘기-인간의 시각)가 비추는 극장의 풍경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관객 또한 비둘기-인간의 시점으로 이 상황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남자가 자신에게 익숙하던 시각에서 점차 벗어나는 것처럼, 관객들 또한 현재 앉아 있는 좌석의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인 배우들의 동선, 그들이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등을 보다 총체적으로 조망하게 된다. 이처럼 다각도의 시점을 한 데 교차시킴으로써 연극은 사람들이 “자기를 기준으로 공간과 세계를 ‘최적화’”하는 방식을 꼬집고 지금 이 시공간은 “혼자 만든 것도 아닌 ‘같이’ 만든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게 관객 또한 비둘기-인간이 되어 한없이 작아 보이는 건물들, 네 배우의 위치와 움직임, 그리고 극장 속의 자신을 보게 됨으로써 남자와 같이 자신과 주변을 보다 낯설게 감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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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너는 누구인가

하지만 보고 감각하는 것이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어지러울 일이 많아지는 것임을 연극은 또한 보여준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고 어쩌면 이해받고 싶어 떠난 여정에서 남자는 정신과 의사로부터 새를 찾아볼 것을 권유받는다. 그렇게 그는 어느 아파트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비둘기인 동시에 또 다른 자신을 찾아 나선다. 자신이 키운다는 비둘기를 만지지도 못하는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주민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견디며 그는 마침내 비둘기/그와의 대면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 달리 비둘기는 그의 손을 쪼고 하늘로 날아간다. 남자는 꿈에서 비둘기를 다시 만나 대화를 시도해보지만 되돌아오는 건 비둘기의 울음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이 새의 목에 자신의 두 손을 가져간다. 이때, 남자가 만나는 마지막 인물이자 연극이 보여주는 마지막 시점인 점괘를 치는 한 노인이 등장한다.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대화는 연극의 또 다른 키워드인 운명에 관한 것이다. 노인은 잘못된 점괘를 뽑을까 걱정하는 남자에게 새의 운명은 새가 점칠 수 없기에 잘못 뽑는 건 없다고 말한다. 고민 후 남자는 노인으로부터 하나의 점괘를 뽑는다. 그리고 연극 내내 시차를 두고 불규칙적으로 조금씩 내려오던 창문의 블라인드는 마침내 모두 닫히고 극장은 어둠에 잠긴다.
남자가 뽑은 점괘가 무엇인지 관객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운명을 점치고자 했던 새는 바로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선왕 라이오스를 죽이고 테베에 전염병을 일으킨 장본인이 누구냐는 오이디푸스의 물음에 오이디푸스가 자신도 모르게 걸어온 길을 가리킨다.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처럼 오이디푸스는 이후 자신의 정체를 알고 난 뒤 자신의 눈을 찌르고 스스로를 테베로부터 추방시킨다. 하지만 그 순간은 동시에 오이디푸스가 마침내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질문에 답하던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극장이 어둠에 잠겼을 때는 남자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 순간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남자가 보는 비둘기가 곧 자신이란 점을 비추어봤을 때, 스크린과 카메라의 끝없는 반사를 통해 만들어진 (돌아가며 남자를 연기한) 세 배우의 뒤에 생긴 수 겹의 상은 자타의 구분을 흐리고 내 안 있는 수많은 당신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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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비인간, 삶과 죽음, 운명과 자유의지 사이를 오가며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이제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이 이야기를 이해해보고자 한 나의 노력이야말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하나의 시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직감하는 건 남자의 여정은 내가 나인 동시에 당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의 연속이었다는 점이다. 그때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변신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그렇기에 설령 새를 죽이라는 점괘가 나왔어도 그것은 죽음 또는 비극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새의 영혼을 가질 수 있냐’는 남자의 물음에 답한 행인의 말처럼 우리는 고정된 게 아니며 영혼은 뭐든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당신이란 이의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본 것처럼 몇 개의 운명이 사라지면 몇 개의 운명이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인정하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읊조린 행인의 말을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세 갈래길 앞에서의 연극

이 여정 끝에서 나는 이 연극이 드라마와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연극은 무언가를 계속해서 모방하여 끊임없이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예술일 뿐만 아니라 드라마(drama)의 어원이 ‘하다, 행동하다’(dran)인 것처럼 이 연극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을 넘어 우리의 움직임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제 다른 방식으로 걸어야 한다고. 연극을 보며 자꾸만 나는 그때의 오이디푸스가 한없이 걸어와 우리에게 당도한 것 같다는 허황된 생각을 했다. 그는 그때와 같이 세 갈래 길 앞에 서 있었다. 이미 머나먼 길을 걸어온 그였지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의 길, 하나의 운명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비둘기처럼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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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음이온, 사진: 하준호]

음이온 <비둘기처럼 걷기>
일자
2022.6.2 ~ 6.5

장소
TINC (This is not a church)

작·연출
김상훈
배우
김경현, 김나윤, 전혜인
시노그라피
박이분
조명기술감독
김현
음향디자이너
이현석
영상디자니어
전태환
기획
전강채, 조윤경
제작
음이온
포스터디자인
박서영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05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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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영

조주영
좋은 인간-동물이 되고 싶은데 매일같이 딜레마에 빠집니다. 여섯 번째 대멸종을 앞두고 연극으로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jin021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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