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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달하지 않는 목소리를 위해 예술가가 할 일

최서윤

191호

2020.11.19

벌써 2020년의 끝이 보인다. 2021년을 생각해도 이르지 않은 때다.

2021년은 <월간잉여> 창간 10주년이 되는 해다. <월간잉여>는 2012년,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다 더는 못해먹겠다 싶어 내가 창간한 잡지다. 당시 나는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스스로를 ‘잉여’라고 자조하는 이들을 보며 공감과 동질감을 느꼈다. 쓰고 난 나머지, 혹은 쓰일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남겨져 있는 숱한 청년들. 나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를 잉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자신을 표현하고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사회적 담론을 제시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됐다.

그렇게 <월간잉여>를 세상에 던졌더니 기대 이상의 반응이 돌아왔다. “나도 잉여”라는 투고와 ‘나 혼자만이 아니었구나’ 느끼며 위로받았다는 피드백이었다. 자기가 독자위원장이 되어 독자위원회를 조직하겠다는 내용의 메일도 왔다. 그 뒤, 한동안 독자위원장 한 명으로 운영되던 독자위원회는 점점 7~8명 정도가 모여 주기적인 오프라인 회담(이라고 쓰고 ‘수다’라고 읽는다)을 가지게 됐다.

이제는 거의 10년 지기 친구가 된 독자위원장은, 애는 착한데, 가끔 “시어머니인가?”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월간잉여> 10주년 기념으로 뭐라도 기획해보라고 내게 닦달할 때도 그랬다. 나, 잡지 발행한 지 너무 오래되어 감 다 떨어졌는데…. 하지만 그 덕분에 휴간의 이유를 돌아볼 수 있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개인의 목소리가 직접 세상에 닿을 수 있는 플랫폼이 보편화되며, 청년을 포함한 개인들이 시민적 영향력을 널리 뻗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봤다. 이 때문에 ‘이런 세상에서 굳이 힘들게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모으는 잡지를 자비출판 할 필요가 있을까?’ 자문하며 2016년 <월간잉여>를 휴간했다.
2014년 1월에 발행된 (격)월간잉여 15호(2주년 기념호) 표지
2014년 1월에 발행된 (격)월간잉여 15호(2주년 기념호) 표지
최근 생긴 문제의식은,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세상임에도 여전히 사회적 의제가 되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셜 미디어가 선호하는 이야기는 장사가 잘되는 것. 당파성이 짙고 갈등을 심화시킨다. 사람들을 흥분시키며 일종의 ‘재미’를 제공하고, 동시에 소속감을 선사하는 이야기들에 사람들은 중독됐고,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해 홀로 생각하며 성찰하기보다 ‘팀 대항전’ 치르듯 입장을 정하고 행동하게 됐다.

가볍고 유쾌한 콘텐츠를 선호하는 분위기 또한 담론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짐)’를 지양하며, 안전하게 포장 가능한(예를 들어 시작은 어둡더라도 감동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이야기를 사람들은 원했다. 이는 ‘포장할 수 없는 불행’을 수면 아래 머물게 한다. 나는 우리 사회에 감당할 수 없어 덮어놓는 진실들이 수없이 존재한다고 감각한다.

각종 지표가 파국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제출한 우울증 관련 진료 현황은 상반기 우울증 진료 인원이 전년 동기 대비 증가했음을 드러내는데,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인 연령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28.3% 증가한 20대였으며, 30대도 전년 상반기 대비 14.7% 늘었다고 한다. 청년 우울증 증가율이 너무나 가파른 것이다. 자살 신고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상반기 112 신고센터에 접수된 자살 신고 접수 건수는 전년 동기 대비 1,170건 늘었다고 한다.

<월간잉여> 창간 전후 느낀 사회 분위기를 떠올린다. 2010년 초, ‘일베’의 태동에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불러온 경제위기가 있었다. 현재 코로나19로 더욱 심화된 취업난과 높아진 실업률이 불러온 사회 분위기와 닮은 것이었다. 현재 청년들이 ‘잉여’라는 언어로 스스로를 표상하는 일은 그때만큼 빈번하지 않지만, 당시 잉여라고 스스로를 칭하던 이들의 현실 인식 및 정서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은 많다. 앞으로 빈부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며, 내 삶도, 세상도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절망은 오히려 지금 더 넓게 퍼진 듯 보이지만.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하려는 노력 보다 훈계를 앞세우며 고통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상대적 기득권이 있다는 것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상황 파악 못 하는 인간들이 문제다. 대중매체의 몇몇 사례만 보고 교과서와 EBS로 열심히 공부하면 ‘명문대’ 나와 인생 성공하는 줄 쉽게 말하는 인간들. 그런 인간이 부모인 경우, 자식을 제대로 돌보기는커녕 정서적으로 학대하며, 성공해 자신들 노후까지 책임지라고 한다. 적절한 ‘케어’를 받지 못하고 자본을 세습 받지 못한 이들은 그런 부모를 포함한 기성세대를 증오하게 되는데, 어르신들은 이들의 목소리를 도덕적으로 재단하며 억압한다. 낡아빠졌다.

정책 역시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생계 부양 및 교육· 의료 ·돌봄 부문을 가족에게 떠넘기는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이는 복지 수급 기본 단위가 가구로 지정된 것과도 관계돼있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지난 재난지원금 지급 시에도 논의된 바 있다. 이렇게 만연한 가족 이데올로기는 부모의 정서적 학대로부터 벗어나고 싶고, 대를 이은 가난을 끊고자 하는 청년을 절망에 빠뜨린다.

절망의 출구를 찾지 못한 청년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거나, 극우적 행태를 띄게 된다. 후자의 경우 약자 혐오와 각자도생으로 표출될 때가 많다. ‘자기 팀’이 아닌 사람에 대해 철저히 공감을 차단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지 못한 이들의 유희는 다른 이들이 자신만큼 추락하는 것. 추락하는 이들에 대한 냉소와 조롱, 가학적 즐거움의 추구로 가득한 아수라장을 볼 때면 아득하고 암담하다.

세상의 질서를 만드는 사람들이 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귀담아들으면 좋겠다. 전반적인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에 더해,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제 비혼·비출산 현상은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상황을 받아들인 상태에 정책을 세우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외치지 못하고, 경청과 존중을 돌려받는 경험을 하지 못한 채 홀로 조용히 생을 마치는 청년들을 생각한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든다. 그게 꼭 월간잉여 10주년 호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문제 인식에 공감하는 다른 창작자들도 함께 고민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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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윤

최서윤
말하고 싶은 것을 적시에, 효과적으로 전하는 법에 관심 많다. 그러다 보니 가지가지 하게 됐다. 2012년 창간한 잡지 <월간잉여>는 5년째 휴간 중이며, 대신 저서 『불만의 품격』, 공동 저서 『미운청년새끼』를 서점에서 만나볼 수 있다. 단편영화 <망치>는 공동체 상영을 통해 볼 수 있다. 가지가지 하는 창작자는 대충 작가라고 하는 게 룰인 것 같아 자기소개 때마다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영 어색하다. 좀 더 적절한 직함을 제안하고 싶다면 facebook.com/monthlying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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