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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박수치지 않는다

[큐투큐] ㅋㅌㅋ

이혜령

제220호

2022.06.16

큐투큐(Cue-to-cue)는 극장에서 이뤄지는 리허설의 일종으로, 큐와 큐를 중심으로 연극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맞춰보는 작업입니다. 객석 오픈 시점, 조명 변화, 음향 타이밍, 무대 전환 포인트 등 모든 지점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큐로 존재하며, 공연 한 편은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큐로 구성됩니다. 큐투큐는 연극 제작 과정에서 꼭 거쳐야 하는 작업으로, 여기에는 프로덕션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합니다. 누군가는 큐를 지시하고, 누군가는 고 버튼을 누르며, 누군가는 타이밍에 맞춰 등장하고 흩어집니다. 웹진 연극in에서는 극장 리허설을 넘어, 연극 작업 전 과정에 존재하는 수많은 큐와 큐 속에 흐르는 각자의 관점과 생각을 들어보려 합니다. 하나의 큐가 주제로 던져지고,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필자들이 그 큐에 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예정입니다.

박수는 덩달아 쳤다

옆에서도 치고, 앞에서도 치기에, 빈 무대에 조명이 켜지고 사람들이 뛰어나오기에, 자세를 고쳐 앉아 손뼉을 쳤다. 자리는 광주문예회관 1층 앞쪽이었고,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오월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각종 현수막이 내걸리는 완연한 봄. 아침이면 알맞았던 긴 팔 셔츠의 춘추복이 한낮이 되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던 그 날, 나는 단체 관람으로 연극을 봤다.

커튼콜 무대 위에는 왼쪽 눈썹 위에 난 큰 점을 분장으로 감춘 수학 선생님이 배우로 서 있었다. 공연을 보는 내내 그가 거기 있는 줄 몰랐던 터라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굉장한 것을 본 것 같았는데 극장 밖으로 나오면서 조금 잊혔다. 손뼉을 치느라, 수학 선생님을 보느라, 집에 가는 버스가 서는 정류장이 이쪽에 있는지 길 건너편에 있는지 이야기하느라. 한참 기다렸는데 버스에 탈 수 없었다. 차에는 사람이 가득했고 정류장에는 극장에서 나온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두 대를 내리 보냈다. 나와 친구는 한 정거장을 거슬러 걷기로 했다. 한 정거장 앞서 타면 집에 갈 수 있겠지? 그렇게 걷는데 곳곳에 오월이란 단어가 들어간 포스터나 현수막이 보였다. 우리는 연극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서둘러서 박수를 쳤다. 모두가 아는 유명 공연은 이미 섭렵했고, 이쪽 사람들이나 알 법한 극단의 공연을 챙겨보고, 국내에 소개되는 해외 프로덕션의 공연 표를 살뜰히 구하게 되자, 이제 커튼콜의 의미를 제법 안다는 듯이, 다른 관객들 보란 듯이, 그렇게 했다. 공연제작사에서 일하거나 공연 관련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박수를 치고 소리 내어 환호를 보냈다. 이젠 다 내가 아는 사람들. 응원의 인사를 힘껏 보내고 나면, 그 순간 무대와 연결되는 것 같은 느낌 같은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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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rtain Call (2016) © Matt Humphrey

아니, 있었는데, 사라졌다. 공연과 하나 되는 것 같은 그 느낌 같은 게 있었는데, 없어졌다. 그 연결감이 박수와 환호로 완성되는 것인지 망쳐지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공연을 본 후에 떠오르는 뭔가를 더듬거리느라 손뼉 치는 것을 잊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도 손뼉은 쳐야 하는 것이기에 힘차게 박수를 보내던 어느 공연의 커튼콜에서, 반사적으로 손뼉을 치고 있는 중학생 시절의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광주의 오월을 다룬 공연이라서 그랬을까, 친구와 거슬러 걷던 길을 떠올렸다. 다만 그때처럼 덩달아 박수를 치면서도, 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건 공연이 별로였고 저 무대가 박수 받을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무척 좋았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느린 관객이다. 그건 사실 당연하다. 평소에도 어려운 유머에 뒤늦게 웃거나 웃지 못하고, 배운 것을 몇 달 후에야 문득 이해하는 느린 인간으로서 공연을 실시간으로 흡수하고 온전히 손뼉을 치는 일이 마땅할 리 없다. 급하게 서둘러서 쫓아가다가도, 그게 안 되는 날도 있는 것이다. 장면과 장면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데, 마침 끝나 버린 공연. 쏟아지는 환한 조명과 박수, 음악은 내게 새로운 정보로 빠르게 입력되어버린다. 앞서 봤던 장면들에서 멈추지 못해 내가 놓쳐버린 것들은 얼마나 많을까. 다 놓쳐놓고선 커튼콜이 즐거우면 그저 조금 신이 나서 극장을 떠나버린 걸까? 그동안 나는 커튼콜만 봐온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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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예술전문가양성과정 공공공간 예술창작 워크숍 (Trans)figure la city 현장 사진(2015) ©김유리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낼 것인가

2015년 겨울의 프랑스 마르세유. 나는 프랑스 거리예술 전문가 양성기관 페아(FAI-AR, Formation Avancée et Itinéante des Arts de la Rue)와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가 진행하는 창작워크숍에 참여하고 있었다. 느릿한 관객으로서 만들 수 있는 것을 욕심내며 왕초보 창작자로서 거기에 쫓아갔다. 나름대로 극장 바깥의 공연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믿었지만, 그건 다 나 혼자만의 믿음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매일 깨달으며,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세 명의 예술가가 이끄는 워크숍에 참여했다.

세 명의 멤버 중 하나인 연출가 알릭스(Alix Denambride)는 거리극을 구성하는 요소를 설명하며,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낼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당시의 나는 이게 관객과 행인에게 지금 벌어지는 일이 공연임을 각인시키고, 동시에 확실히 끝났다는 걸 알려야 한다는 것으로 서둘러 이해했다. 그래야 거리에 혼란이 없을 테니까. 내가 만든 첫 공연은 아스팔트 위에 만들어진 네모난 칸 안에 들어가면서 시작해 참여한 관객들이 손을 맞잡고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끝났다. 누가 봐도 시작이고 끝이도록. 두리번거리며 네모 안에서 벌어지는 것을 지켜보려 멈췄던 행인들은 그들의 인사를 보며 손뼉을 쳤다. 그러면 진짜 끝이었다.

알릭스의 말을 오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건 한참 후였다. 느린 학습자답게. 나를 극장 바깥으로 이끈 작품들의 마지막 장면은 하나같이 혼란했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기 때문이다. 땅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나무 아래를 한참 서성이게 했던 공연, 내가 지칠 때까지 머물다가 떠나도록 여러 개의 회차가 뒤섞여 있던 기획, 이게 진짜인지 공연인지 고민하게 만들던 오브제,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나를 내내 외롭게 만들던 자리 같은 것. 내가 좋아했던 작품은 그런 식으로 끝이 났다. 손뼉 칠 틈도 없이 찜찜하게.

커튼콜이 있었다면 조금 덜 찜찜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더는 극 중 인물이 아니라 훌륭한 배우로 인사하는 이를 바라보며, 이제 현실로 돌아왔음을 확인하는 환호와 박수를 보내면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일 텐데. 그러면 내가 본 것이 무엇이든, 무지하게 슬펐든 아름다웠든 혹은 지루했든 이제 그 감정은 간단한 대화의 소재가 되고 나는 안전한 고양감을 느끼며 저녁 메뉴를 고를 수 있을 텐데. 어떤 공연들은 나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렇게 가면 되는 건가? 찜찜한 마음으로 돌아서서 길을 걸을 때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차츰 공연의 장면들이 잊혀도, 돌아서서 걷는 길의 기분만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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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켓라인: 은희에게 은희는>(2020) ©김동재

아무도 박수치지 않는다

눅진한 그늘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사람이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멀찍이 앉아 있던 다른 사람은 아리송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눈치 빠른 사람은 쓰고 있던 헤드폰을 벗은 후 가방을 챙겨 들었다. 다른 날에 어떤 사람은 홀로 낡고 좁은 여관방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어쩐지 허전한 마음으로 여관을 벗어난다. 공연 장비인 헤드폰을 쓰고 지하철역을 향하다 되돌아오는 사람, 헤드폰을 벗고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모두 내가 만들었거나 기획한 공연이 끝난 후의 관객들이다. 이렇게 끝난 건가? 그들의 뒷모습에서 그런 말이 들릴 것 같다.

커튼콜이 없다. 커튼콜 비슷한 것을 시도해본 적이 있지만 대개 실패했다. 거리라는 장소성에 기반해 의도했다거나 주제를 일상적 순간과 연결하려는 연출이라거나 혹은 극장 규범을 타파하고자 커튼콜을 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해볼까. 그러나 극장에서 하던 것을 안 하거나 극장의 규범을 피해 간다고 해서 그게 곧장 무엇의 타파일 리 없고 그런 식으로 거리의 언어가 획득되지도 않는다. 실은 내가 아주 느린 관객이라서 그렇다. 느린 창작자이기도 해서 그렇다.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낼지 여태 고민하느라 그렇다.

좋은 작품들은 그저 무대가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서, 영원히 커튼콜을 반복한다. 그런 점을 흉내를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공연을 끝내고 싶지 않다. 당연시되어 온 개념이나 인물을 불러들여 함께 들여다보기 위한 이야기로서 공연을 마칠 때, 그게 우리 각자의 길과 방과 기분 모두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끈질기게 붙들고 싶기 때문이다. 근사한 연출로 구현하면 가장 좋겠지만 그걸 해낼 수 없어서, 우선은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관객의 뒷모습을 숨어서 바라본다. 치고 싶지 않은 박수를 덩달아 치느라 하나의 공연을 끝내버리는 대신, 관객이자 퍼포머로서 보낸 시간이 언젠가 문득 각자의 방식으로 되살아나길 기도하면서, 여태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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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령

이혜령
제너럴쿤스트에서 글을 쓰고 공연을 만든다.
@generalku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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