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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를 중심으로

창작집단 양산박 연기론 정립 프로젝트

장진웅

제220호

2022.06.16

창작집단 양산박이라는 단체를 만든 이후, 오래도록 고민했던 내용은 ‘우리의 연극을 설명할 근거’가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구성원 대부분이 기성 극단에서의 연극 경험이 없었던 또래 집단이었기에, 누군가가 “너희가 극단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있을 수 있으려면, 극단이기에 공유하고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저 역시 이러한 지적에 십분 공감하며, 우리가 프로젝트 그룹 내지 이합집산으로 존재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연극에 접근함에 있어 어떤 식의 ‘경로’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극단이라는 시스템에서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자신의 정체성을 배우라고 밝히는 게 일반적입니다. 극단 시스템은 배우 중심의 창작공동체라는 것이지요. 배우들이 계속해서 극단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소속된 극단에서 충분한 예술 경험과 성장을 하고 있다는 신뢰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도제식 시스템을 거부하고, 사사를 수여할 만한 선생이나 선배가 없는 상황에서 창작집단 양산박이 선택한 방법은 일종의 연기 스터디였습니다.

창작집단 양산박은 코로나 이전까지 만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배우를 위한 희곡읽기’라는 주간 모임을 운영해왔습니다. 이 모임은 비단 단원들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원하는 누구든 수용하는 커뮤니티를 지향하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배우들이 다양한 연극의 세계를 경험하고, 그 연극 속에서 배우의 존재 ‘근거’ 내지 ‘방법’을 함께 고민하고 개발하기를 바랐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모임’을 힘들게 했던 코로나의 영향을 받으며 우리는 다른 형태의 모임을 모색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시작된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창작집단 양산박 연기론 정립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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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까지의 연극 경험에 근거해, 연기의 기본 메커니즘을 설명할 때 우리는 ‘호흡’이라는 개념을 주로 사용해 왔습니다. 어떤 식의 인식이나 감각(감정)이 생길 때, 배우(인간)의 호흡을 바꾸고, 그 바뀐 호흡은 몸, 음성, 말(화술)을 바꾼다는 식의 믿음 말이죠. 이러한 믿음을 따르기 위해서는 일단 이러한 ‘호흡’을 가능하게 할 배우의 ‘그릇으로서의 몸’을 만드는 것을 장기적인 목표로 삼아야 했으며, 그것은 단기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작업 과정에서는 다소 기능적으로 ‘호흡’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런 식의 ‘호흡’에 대한 이야기는 배우가 실제로 경험하고 체화하지 못하면, 배우를 경직시키는 측면이 있었기에 모두가 공유할 만한 메소드라고 정리하기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위에서 정립한 메커니즘에서는 배우(인간)의 호흡은 어떤 식의 인식이나 감각(감정)을 수용하면 자연스럽게 호흡을 변화시킨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다시 기능으로 치우치게 하는 ‘호흡’이라는 주제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 인식하고 감각할 수 있는가에 주목해보자는 것으로 화두가 옮겨졌습니다. 배우의 절대 목표가 인간 삶의 체현에 있다면, 결국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감각할 수 있는 것들, 하지만 연기라는 작위적 상황 속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제약당하는 것들을, 우리가 선명하게 붙잡고 갈 수 있는 메소드로 다시 인식하게 해서 경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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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발견한 개념은 러시아 연기론의 ‘작용’이라는 개념입니다. 실상 인간은 환경 속에 던져져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인식이나 감각(감정)은 그 속에서 피동적으로 발생된다는 것이죠. 이 개념은 감정에 관련한 영어 표현들과 연결해서 접근해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흔히 연기를 이야기할 때 쓰는 표현 중 하나가 ‘동사를 중심으로 구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 적용하는 말이 아니지만, 작용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에도 감정과 관련된 ‘동사’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한 측면이 많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흔히 감정을 상태라고 생각하지만, 감정이란 것은 어떤 상태가 만들어지기 전에 촉발(provoke)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 감정과 관련된 동사들은 대부분 감정을 촉발한다는 개념으로 구축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amaze (vt. 놀라게 하다), bore (vt. 지루하게 하다), excite (vt. 흥분시키다), surprise (vt. 놀라게 하다), interest(vt. 흥미롭게 하다) 등

그래서, 감정과 관련한 문장들을 대개 이런 식입니다.

(example.)
The game interests me, The game is interesting.
So,
I am interested by the game.

이것을 위의 ‘작용’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키자면, ‘The game’은 대상(내지 주체)이 되는 것이고, interest는 작용이 되는 것이지요. 즉, 그 순간에 나에게 작용을 주는 대상을 정확히 인지하고, 작용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 캐릭터에 구애될 것도 없이, 매 순간 그렇게 진실하고, 정확한 작용을 받는다면 그것이 인물이 될 따름이라는 것이 이 개념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표현을 하느냐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배우의 주관성이자, 고유성일 뿐이지요. 굳이 배역일 필요도 없고, 나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 사이에서 그냥 경험하는 누군가가 있을 뿐입니다.

배우를 굳게 만드는, 때로는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호흡’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배우를 자유롭게 만들어 보자고 끌어온 것이 ‘작용’이라는 개념이지만, 이 역시 배우의 작업을 지나치게 도식화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도식화가 되는 순간 배우의 창조적 작업은 멈추고, 배우를 가둘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지점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쉽게 말해 ‘The Game’이라는 대상이 우리를 매번 interest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 역시 우리가 다시 언어의 함정에 갇혀, interest함을 표현하게 만드는 지점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발견한 셈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언어와 도식화의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 The Game이라는 대상을 자신의 감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떤 개념으로 치환하기로 했습니다. 예문에서의 The Game 역시 그저 텍스트에서 제시된 정보 내지 조건일 뿐이지, 배우 본체에게 그 순간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는, 배우가 그렇게 ‘믿어야 하는’ 한 가지 과정을 아직 걷어내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러한 개념에 무엇을 가져다 놓는지는 배우마다 다릅니다. 어떤 배우는 그것을, 자신을 무척 interest하게 만들었던 무언가(본인의 정서 경험)에서 가져오기도 하고, 어떤 배우는 자신에게 선명한 감각을 주는 ‘대체’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배우는 ‘대상을 치환하는’ 작업 대신 작용의 언어를 감각화하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interest와 같은 말은 감정을 촉발하는 동사(작용)이기 때문에, 또 그것을 표현하게 만드는 오류가 생기기도 하기에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배우들은 자신의 감각을 자극할 수 있는 다른 동사나, 형용사를 그 자리에 배치해 매 순간 그것을 새롭게 느끼는 방법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 ‘단위’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습니다. “너는 단위를 어떻게 받고 있냐, 단위를 어디서 받고 있냐”라는 식의 말이 된 셈이지요. 물론, 단위라는 개념이 기존의 연기 언어에서 쓰이던 개념과는 다소 다른 적용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단위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결국 “너는 지금 진짜 경험하고, 감각하고 있냐”라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굉장히 주관적인 작업이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집요하고 일관된 사고의 프로세스를 검증하고 맞춰갈 수 있는 메소드를 개발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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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우리가 ‘단위’를 중심으로 연기 언어를 구축해 가면서, 창작집단 양산박 연기론 정립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는 배우들은 그동안 있었던 많은 연기 메소드들, 그리고 동시대에 활용, 연구되고 있는 다양한 메소드에 통섭적으로 접근하며 이러한 ‘단위’ 메소드를 보다 체계화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 꽤나 흥미롭고, 생산적이어서 매번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살아있음을 매 순간 느끼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이 순간에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일종의 말장난 같은 소리일 수도 있지만요.

이제는 ‘단위’라는 주장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할 만한 어느 정도 개념이 구축됐다 생각해, ‘위드 코로나’ 시기에 발맞춰 이 ‘연기 스터디’를 다시 이러한 지점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연구, 체현해보고자 하는 연극인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코로나 이전의 열린 모임이었던 ‘배우를 위한 희곡읽기’를, 코로나 이후의 ‘배우를 위한 연기읽기’로 부활시키는 셈입니다. 조만간 다양한 채널을 통해 함께 할 분들을 다시 모시고자 하니, 관심 있으신 많은 분들의 연락 부탁드립니다. 어떤 새로운 ‘살아있음’이 계속해서 이어질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사진 제공: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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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웅

장진웅
‘이상주의 예술공동체’를 지향하는 ‘창작집단 양산박’과 함께 2017년부터 연극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연극은 만남에서 시작하는 무언가’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창작집단 양산박에서는, 그 만남의 출발점이 되는 ‘배우’(내지 수행자)라는 존재를 연극 예술의 핵심으로 전제하고, 텍스트와 공연, 연기 사이의 간극을 채우는 선명한 커뮤니케이션의 언어를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2021년, 제21회 밀양공연예술축제에서 작품상(미래상)을 수상한 이후, 한층 더 마음을 다잡고 이제는 그동안의 탐구에서 길어올린 발견들을 메소드화해 구체적인 미학으로 발전시키고자 분투하고 있습니다.
jw_whitep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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