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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魔人)

다른 손(hands/guests)

박신강

제220호

2022.06.16

2022 [희곡]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다른 손(hands/guests)’은 인류세 이후의 연극, 인간중심적 예술의 바깥을 상상합니다. 그동안의 한국 연극이 누락한, 이야기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존재들의 지위와 존엄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지 질문합니다. 다른 손으로 보편성을 다시 씁니다.
등장인물
유성표
하반신 마비 장애인. 前 무당파 7대 제자.
진인곤
절정고수. 前 무당파 7대 제자. 現 무림맹 비선당주(秘線當主).

무대
무대 중앙에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 치(약 2센티미터) 높이의 턱을 넘어야 한다.


개막
무대 오른편에서 진인곤이 등장한다. 그는 멀끔하고 비싸 보이는 무복(武服)을 입고 있다. 왼손에 검을 쥐고 있으며 머리에는 죽립을 쓰고 있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 그는 품속에서 봉인된 편지 한 장을 꺼낸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잠시 내비치며 다시 편지를 품에 넣는다. 그는 다리를 건너려 한다.
그 순간 무대 왼쪽에서 휠체어를 탄 유성표가 등장한다. 그는 허름한 거지의 복장을 걸쳤고 낡은 삿갓을 쓰고 있다. 유성표는 양손으로 힘겹게 휠체어의 바퀴를 굴린다. 그의 하반신 위에는 지팡이 한 자루가 놓여 있다.
진인곤
(두 손을 확성기 삼아 크게) 먼저 건너시오!
유성표
감사합니다, 나으리…….
휠체어를 탄 유성표에게 반 치에 불과한 턱은 너무나 높고 가파르다. 그는 간신히 다리에 오른다. 곧바로 끙끙거리며 애를 쓰지만 휠체어는 매우 느린 속도로 전진할 뿐이다.
진인곤은 잠자코 기다린다. 하지만 점점 짜증 섞인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유성표를 아니꼽게 바라본다.
유성표가 외나무다리의 오른쪽 끝에 도달한다. 역시나 애를 쓰지만 다리를 내려가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유성표
송구합니다, 나으리…….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진인곤
(화를 참으며) 보호자를 데리고 다니든가. 좁은 다리에서 이렇게 시간을 끌면 어떡하잔 말이오? 갈 길이 급한 몸이거늘.
유성표, 진인곤의 목소리를 들은 직후 멈칫한다. 그리고 다리 끝에 멈추고는 움직이지 않는다. 유성표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진인곤
어허, 노인장. 급하다 하지 않소. 서둘러 내려오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게요?
유성표
(사늘하게) 나으리, 외람되오나, 나으리께서는 혹시 무림지사(武林之事)에 몸을 의탁하고 계시진 않으신지요?
진인곤, 유성표를 수상쩍게 쳐다보고는 대답한다.
진인곤
그렇소만. 노인장은 뉘신지?
유성표
(무시하며) 혹 이십 년 전 무당산(武當山)에서 태극검법을 수련하지 않으셨는지요.
진인곤
……?
유성표
‘태허진인’을 사부로 모시진 않으셨는지요.
진인곤
누구냐, 네놈은. 정체를 밝혀―
유성표
당시 사제(師弟) 한 명과 비무를 겨룬 적은 없으신지요. 익힌 검법을 실전에 옮겨본다는 명목으로 대련 상대인 사제의 혈맥을 가차 없이 끊어버린 일은 기억에 남아 계시는지요?
진인곤
…… 성표냐?
유성표, 삿갓을 벗어 바닥에 던진 다음 포권지례를 취한다.
진인곤의 눈동자가 커진다.
유성표
진 사형, 이십 년 만에 뵙는군요. 사제 유성표가 인사드립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사이.
진인곤
…… 무탈하다. 너는 어떻게 지냈느냐?
유성표
무탈하셨다니 부럽습니다. 소제(小弟)는 참으로 다사다난한 세월을 보냈거든요. 객잔에서 음식을 구걸하고 유곽을 돌아다니며 동냥도 하고. 무당파에서 검을 휘두르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 해본 경험이었지요.
진인곤
…….
유성표
그건 그렇고. 사형께서 얼마 전 무림맹 비선당주에 임명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우리 사형, 출세하셨습니다그려. 언젠가 무림맹주의 지위에도 오르시겠소이다?
진인곤
쓸데없는 말은 그만두자. 비키거라, 나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유성표
형제간의 안부가 충분히 나눠지질 않았거늘 어딜 그리 바삐 가시려 합니까. 긴 세월을 지나 오랜만에 만난 사제가 반갑지도 않으신 겁니까?
진인곤
세월이 우리 사이를 떨어뜨려 놓았나 보다. 별다른 감정이 일지 않는구나. 비켜라.
유성표
그럴리가요. 이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제는 단 하루도 사형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습니다. 아직 못 비켜드립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진인곤
성표야, 그땐 미안했다. 내 잘못이 크다. 허나 지금 맡은 일이 시급하구나. 맹주님의 명을 받아 황실로 향하는 중이다. 비켜다오.
유성표
황실로 향하는 중이라. 뭔진 몰라도 책임이 막중한 임무를 맡으신 게로군요.
진인곤
그래, 무림지사와 관련된 중대한 안건이다. 그리고 이렇게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중원의 질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느니라.
유성표
사형, 황실과 무림맹이 본래 상호 불간섭하는 사이인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지금 사형께서 맹주의 명을 받아 황실로 향한다는 것은…… 혹 천마신교(天魔神敎)의 부활이라도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까?
진인곤
(정곡을 찔린 듯) …… 그건 말할 수 없다.
유성표
이런! 그것 참 큰일입니다. 마교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새끼들이 다시 세를 불리고 있다니, 맹이 건재하고 있거늘 어쩌다 이 지경까지…….
진인곤
대충 상황을 파악했으면 이제 비켜다오. 과거의 원한은 잠시 미뤄두자. 일이 끝난 뒤에 내가 널 다시 찾으리라.
유성표
(혼잣말) 황실로 간다라…….
진인곤
성표야! 이 사형의 말이 안 들리는 게냐!
유성표
아! 송구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느라 그만. ……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진인곤
…… 다리에서 당장 내려와라. 검을 뽑아들기 전에.
유성표
검을 뽑는다니. 사형, 설마 지금 동문수학한 소제를 겁박하시는 겁니까?
진인곤
이놈!
진인곤, 검집에서 검을 뽑아든다. 칼끝을 유성표에게 향해 보인다.
사이.
유성표, 하반신 위에 놓여 있던 지팡이를 집어든다.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왼손으로 자루를 뽑으니 얇은 검신(劍身)이 드러난다.
진인곤
(당황하며) 뭐하는 거냐?
유성표
사형께서 검을 뽑아드시길래 소제도 그리 해봤습니다. 문제가 있겠습니까?
진인곤
네놈이 감히 무림맹주의 사자(使者)를 가로막느냐. 한 번만 더 말하마. 한때의 인연을 말미암은 마지막 경고다. 비켜라!
유성표
못 비킵니다.
진인곤
천하의 안위가 달린 일이다. 알아듣게 설명해주지 않았느냐. 대체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냐?
유성표
사형을 방해할 작정이니까요.
진인곤
뭣이?
유성표
(독하게) 사형이 이 다리를 못 건너도록 막아서겠다 이겁니다.
진인곤의 미간이 천천히 찌푸려진다.
진인곤
그게 무슨 말이냐.
유성표
(의미심장하게) 사형, 이십 년 전 사형이 내 목덜미 경맥(頸脈)을 베어낸 이후로 나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무당파 내공심법의 요결에 따라 운기를 해봤지만 차도가 전혀 없더군요. 하단전에 진기를 끌어모으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기경팔맥의 핵심혈로가 끊어진 이상 공력의 순환이 이뤄지질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무인으로서의 삶이 끝장난 것이지요.
진인곤
…….
유성표
내공은커녕 두 발로 걷지도 못하는 병신이 된 나를 무당파가 어찌 대우했는지 아십니까? 제대로 된 보상 따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살아갈 길은 마련해줘야지요. 문파의 장원에서 무공을 단련하던 중 사고를 당한 건데, 최소한 먹고 살 방안은 문파가 마련해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게요?
진인곤
장궤(長櫃)가 내어준 금전이 충분치 못했더냐.
유성표
금전이라뇨, 하하! 사형, 금전(金錢)이라니! 나는 은전(銀錢) 한 푼 받지 못하고 하산을 명받았습니다! 무당파가 해를 입은 제자를 그리 처우할 줄 단 한 번이라도 상상해본 적 있으십니까?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수좌를 다투며 정파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 일컬어지는 협의지심(俠義之心)의 종가 무당파가 이럴 줄은 난 정말로 몰랐습니다. 사형, 내가 지금 틀린 말을 하고 있는 것이외까? 대답해보시오. 내가 문파에 너무 많은 걸 바랐던 것이겠소?
진인곤
…… 몰랐구나. 그런 일이 있었는 줄은.
유성표
알 턱이 없지요. 사제의 인생을 망쳤음에도 사과 한마디 없던 사형이 아니었습니까?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갑자기 들이닥친 삶의 고통이 이 나를 얼마나 괴롭게 만들었는지 하산 이후 한 번도 얼굴을 비춘 적이 없던 사형이 무슨 수로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진인곤
성표야. 너는 모르겠다만…… 나도 내 나름대로 괴로웠다. 어찌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를 찾아가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네 얼굴을 볼 낯이 없었느니라.
유성표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소?
진인곤
밤잠을 설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네가 너 자신이 입을 사고를 예측하지 못했듯 나 또한 대련 도중 사제의 무공을 폐하게 될 줄 알지 못했으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성표 너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그 무렵 나는 이미 네가 어디에서 지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을 뿐더러―
유성표
(정색하며) 비선당주!
음산한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유성표를 비추는 조명이 서서히 보라색으로 바뀐다.
유성표
혀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기가 막히는군. 감히 내 앞에서 죄책감을 느꼈다는 말을 지껄일 수가 있느냐?
진인곤, 유성표가 분출하는 마기(魔氣)를 느끼고는 흠칫 놀란다.
그가 검세를 취하며 일갈한다.
진인곤
…… 유성표! 너 혹시 마공(魔功)에 손을 댄 것이냐?
유성표
이제 와 새삼 놀라운가? 내가 마공을 운용하는 것이? 나를 바라보는 네 표정이 볼 만하구나.
진인곤
네 이놈! 비록 파문당했다고는 하나 한때 백도무림(白道武林)에 몸담았을진대. 저잣거리에서 비럭질을 하면 했지 어찌 마교에 투신할 수 있단 말이냐! 네놈의 마음속에는 신의(信義)라는 게 없는 것인가!
유성표
아무것도 모르면서 입만 살았구나. 비선당주, 귀하는 그 비럭질이란 것을 경험은 해보고서 그런 말을 내뱉는가? 불구의 몸으로 온갖 핀잔을 들어가며 주루에서 술을 날라보았는가? 이 빌어먹을 바퀴의자를 탄 채로 다리를 건너본 적이 있는가? 밖에 나돌기만 해도 쏟아지는 멸시와 수치를 한 번이라도 겪어보면 그런 개소리를 입에 담을 수 없을 것이거늘!
진인곤
닥쳐라! 입만 살아 움직이는 건 다름 아닌 네놈이 아닌가? 명색이 무당파 7대 제자였다는 자가 정파무림을 배신하다니 치가 떨리는구나. 사부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경을 치실 게다, 경을!
유성표
말 한번 잘했군. 비선당주, 내가 마공을 배우도록 부추긴 게 바로 그자요. 한때 내 사부였던 태허진인, 무공이 끊긴 제자를 피도 눈물도 없이 내쫓은 무당파의 장문인, 사파무림(邪派武林) 타도를 부르짖지만 정작 내부의 균열은 보지 못하는 무림맹의 눈먼 맹주!
진인곤
씹어먹을 놈! 사부님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진인곤, 유성표를 향해 신문십삼검(神門十三劍)의 제1초식을 발한다.
유성표, 무리가 없이 진인곤의 검법을 맞받아친다.
튕겨 나온 진인곤이 일순간 당황한 기색을 비치며 유성표를 쳐다본다.
진인곤
…… 마교의 세가 날로 강해지고 있다더니. 무공이 닫혔던 네가 이 정도의 공력을 운용하는 것이 놀랍구나. 절정에 오른 것이냐?
유성표
(고개를 끄덕이며) 나 또한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지. 허나 마교에는 나와 같은 사연을 가진 불구들이 많다. 천하만민의 천대와 차별에 지친 왕년의 무인들이.
진인곤
그래, 알겠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지체할 수가 없겠구나. 성표야, 나는 이 다리를 건너야겠다. 황군의 협력을 얻어 마교를 토벌해야겠다. 너를 베고서라도 지나가야겠으니 이번에는 미리 사과하마.
유성표
할 수 있으면 해봐라. 천마신교의 사장로(四長老) 혈염산하(血染山河) 유성표는 무림맹 비선당주 진인곤의 도하(渡河)를 죽음으로써 저지할 것이다. 내가 다리를 막아서는 동안 우리 천마신교의 동지들은 더 강해지고 날카로워질 것이다.
진인곤
답답하기 그지없군! 정녕 이래야겠느냐? 나와 사부님께 불만이 있다면 다른 방식으로 토로하면 될 것이 아니더냐?
유성표
내가 지금껏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하는지? 불구된 몸으로 험준한 무당산을 몇 번이나 올랐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구나.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내가 가진 불만과 분노를 들어주었더라면 내가 천마신교에 투신했겠느냐? 네놈이 언급했던 것처럼 이런 내게도 신의는 있었다. 협의지심이라는 것이 내 마음속에 있었다. 허나 이제는 그런 것 따위 잊어버린 지 오래다. 와라. 네놈의 육신을 고깃덩어리로 정형해주지.
진인곤
늦지 않았다. 성표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마공을 내려놓고 정도(正道)로 돌아와라. 그리하겠다 말하면 내 너의 책임을 묻지 않으마. 말해라.
유성표,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검세를 취한다.
유성표
…… 뜬구름 잡는 소리는 이제 그만해라. 정도를 걸었을 적 나는 모두에게 얕잡혀 보이는 약자에 불과했으나, 마도(魔道)를 택한 오늘날 세상에서 잊혀졌던 불구 한 명은 무림맹의 견제를 받는 어엿한 마인(魔人)이 되었다. 내가 악명을 두려워할 것 같으냐? 험담을 꺼려할 것 같으냐? 웃기지 마라. 나는 내게 쏟아지는 천하의 온갖 규탄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느니라. 잊지 말거라!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너희 무림맹이라는 사실을.
진인곤
그러냐……. 할 말은 끝났는가?
유성표
그렇다.
진인곤
안타깝구나. 한때 아꼈던 사제를 내 손으로 베어야 하는 현실이.
유성표
(조소를 내뿜으며) 마치 처음 베는 것인 양 말씀하시는군.
진인곤
(공세를 취하며) 간다.
유성표
(수세를 취하며) 와라.
진인곤이 유성표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 암전.
금속이 부딪히는 파공음이 무대를 크게 울린다.
사이.
조명이 다시 켜진다.
진인곤은 사라지고 없다.
무대에 남아 있는 건 뒤집힌 휠체어, 그리고 그 옆에 쓰러져 있는 유성표뿐이다.
유성표는 죽은 듯 미동도 없다.
조명이 휠체어를 비추다가 서서히 암전된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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