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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고백이 산화하던 날

다른 손(hands/guests)

이승혜

제221호

2022.06.30

2022 [희곡]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다른 손(hands/guests)’은 인류세 이후의 연극, 인간중심적 예술의 바깥을 상상합니다. 그동안의 한국 연극이 누락한, 이야기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존재들의 지위와 존엄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지 질문합니다. 다른 손으로 보편성을 다시 씁니다.
등장다른손
고()문서에 남겨진 어떤 사어(死語)

등장인물
131071
언어학자


그러나
우리
계절을 돌아
언젠가는
다시
만나길

0.

사막. 황량하다.
밤 공기가 차갑다.
모래밭에 남겨져 있는 여.
나를 따라 쓰던⋯ 사람이⋯ 있었다⋯⋯.
내내⋯ 나를 따라 썼다⋯⋯ 필사라고도⋯ 했고⋯⋯ 연구라고도⋯ 했다.
책을 읽다가⋯ 화분에 물을⋯ 주다가, 컴퓨터로 뭔가⋯ 막⋯하다가— 그러다가도, 꼭⋯ 연필을⋯ 들고 앉아서, 나를 붙들고⋯ 필사를⋯ 연구를⋯⋯ 했다⋯⋯. 어느 순간, 그 연필은⋯ 더 이상⋯ 그의 손에 잡히지도 않을⋯만큼, 짧아졌다. 나는⋯ 연필이 부러웠다⋯⋯ 그 손, 안에⋯ 빈틈 없이⋯ 안겨⋯⋯ 있는, 그 모양이 좋아⋯보였다⋯⋯.
나는 나를 삽시간에⋯ 휘감았던⋯⋯ 복사기의 열기보다도, 필사를⋯ 하느라고, 아주 가끔씩⋯ 나한테⋯⋯ 닿는 그 손⋯⋯이, 더 아늑하고⋯ 편안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체온⋯⋯.
사이.
그리고 눈이⋯ 그는 눈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눈이 있었다. 나한테 그의 손이⋯ 닿는 건. 그가⋯ 나를 더 잘⋯⋯ 보려고, 할 때. 속눈썹이⋯ 그의 방에⋯ 걸려 있던 벽화⋯ 거기 그려진, 용⋯⋯이랑, 닮았고⋯ 눈동자의 온도는⋯⋯ 자주⋯ 바뀌었다⋯⋯ 아무때나⋯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아아⋯ 저게 눈시울⋯⋯이구나⋯⋯ 그랬다. 나를 다른 종이로⋯ 옮기던⋯ 복사기의 열기보다⋯ 훨씬 뜨겁고⋯⋯ 무거웠다⋯⋯. 이상하게, 그 눈시울은⋯⋯ 불이 아니라⋯ 물이었는데도. 나는⋯⋯ 이렇게⋯ 아직도 기억한다⋯⋯ 그 눈⋯⋯.
뭔가를 발견한다.
거기, 누구⋯ 아아— 사람⋯ 아니네⋯⋯. 뭐⋯ 하러. 여기에⋯ 아⋯⋯ 이야기를 들으러⋯ 이야기⋯ 나한테서⋯⋯? 내가 누구⋯⋯? (사이) 몰라⋯ 기억 나는 건⋯ 그 체온⋯⋯ 그 눈이 찾던⋯그 글자들⋯그 의미⋯ 몰라⋯⋯ 나는⋯ 뭐였더라⋯⋯ 뭐였을⋯까. 나도 모르는 나⋯를, 너무너무 따뜻⋯하게 봐 주던⋯ 그 눈⋯⋯ 모르겠어⋯ 나는. 무슨 말⋯인지⋯⋯ 내가⋯⋯ 나는⋯⋯ 무슨 뜻⋯으로⋯⋯. (사이) 그래도⋯ 이야기⋯해도⋯⋯ 되는⋯ 걸까⋯⋯.
다시 한 번 바람. 고운 모래가 흩날린다.
조금, 춥다.

1.

삼월. 봄비가 내리는 흐린 낮.
131071, 창밖을 보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131071
여보세요? 미안, 부재중, 방금 봤어.
아까는 미안.
131071
무슨 일이야?
느릿느릿— 졸린 오르골처럼 말해서.
131071
아아, 그냥, 잘 지내지 뭐. 응. 먹었어. 넌?
버릇이야. 다소 후천적인.
131071
이젠 거의 취미생활이야.
혼잣말할 땐 늘 이래.
131071
요새는 돈 주고 필사노트 사는 사람도 있잖아.
그 사람 때문이야.
131071
하하.
나를 받아쓰면서 계속 입을 오물오물. 뭘 자꾸 중얼대는지.
131071
에이. 이것만 붙잡고 있는 건 아냐.
계속 보다 보니까 닮아버렸나 봐.
131071
계속 쓰다 보면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읽는 법도 뜻도 모르면서, 대체 뭐라고 중얼댔는지는 모르겠지만.
131071
되게 비과학적이라는 거 알긴 아는데.
어쩌면 날 해석할 수 있을 거라고 믿다 보니까,
131071
그래. 다른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안에서 뭔가 제멋대로 말이 만들어져 버린 건가?
131071
그 느낌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단 말이야.
아닌가.
131071
그러니까 더 애써야지.
그냥 배고프다, 졸리다, 그런 거였나.
131071
그 글자들, 정말 세상에 혼자 남은 거니까.
아무튼, 바보.
131071
내가 좀 그렇잖아. 이상한 데서 아가페가 충만해지는 그런⋯⋯.
사어가 괜히 사어겠냐고.
131071
그럼 이따 저녁. 같이 먹을래?
아무도 안 쓰고 쓸 줄도 모르니까.
131071
내가 갈게.
죽은 말이라서 사어지.
131071
그리고, 있잖아—
어?
131071
⋯⋯아냐. 이따 연락할게.
131071, 전화를 끊고 책상 앞에 앉는다.
근데 난 살아있는데.
131071은 연필을 집어들고 필사를 다시 시작한다.
이렇게⋯⋯ 응?
얼핏 보면 그저 똑같아 보이는 흐릿한 문자들을 받아쓰는 131071.
지금 나는⋯⋯ 사본. 이 사람이⋯⋯ 커피를⋯ 쏟아도, 실수로⋯ 조금 찢어도 괜찮⋯은. 혹여나 잃어버려도⋯ 그다지 크게는⋯ 상관없는⋯⋯. 대체⋯가능한⋯⋯ 하지만 저⋯ 전화 너머⋯그리고 이 사람⋯⋯은. 오직⋯ 하나뿐⋯⋯ 그렇지만⋯ 여기 지문이⋯ 남은⋯ 나도 하나⋯⋯. 원본에⋯ 원래 거기에⋯ 지금 내가⋯ 있지 않은 이유⋯ 나는⋯ 나를 봐⋯⋯ 주는⋯ 누군가 있는⋯ 곳에. 있⋯⋯는, 다.
131071, 필사를 멈춘다. 연필을 내려놓는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고개를 푹 숙인다.
몰라⋯⋯ 나는⋯ 내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그냥⋯ 그 체온⋯⋯ 그리고 눈⋯⋯ 그뿐⋯⋯.
131071이 한숨을 쉰다.
미안⋯해⋯⋯.
131071이 필사 노트를 덮는다. 고문서의 사본을 필사 노트와 함께 한쪽에 밀어놓는다.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한다.
⋯내가 무슨 뜻인지 알면, 정말로 그만 두려나. ⋯⋯알 수 없다.
131071, 몇 개의 파일을 열고 다른 연구에 집중한다.
앞으로 몇 번의 저녁을 같이 먹게 될까⋯⋯알 수 없겠지, 나는.
131071, 여전히 문서를 읽어내려가는 중이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를 거라면, 있잖아⋯⋯ 나는 차라리, 네가 따라쓴 그 글자들이 되고 싶어.
침묵 속에서, 읽는 소리와 읽으려는 소리.
여, 졸리다. 꿈을 꾸기 시작하려나— 알 수 없다.

1.5.

사막.
여는 모래에 반쯤 파묻혀 있고, 밤이 깊어지는 중이다. —아니, 어쩌면 얕아지는 중이다.
반만 덮어주면 어떡해.
가느다란 바람에 모래 알갱이들이 우수수- 다같이 이동한다.
그렇지, 그렇지. 좀만 더 이쪽으로- 아니. 아, 안 돼! 어휴. ⋯⋯어? 그렇지, 조금만— (사이) 아아. 정말⋯⋯. 됐어. 됐어. 포기야, 포기. 이러다 나도 날아가게 생겼네. 근데 말이야, 거기 너- 비웃지 마. 멍청한 비행기가 추락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너무 가볍지만 않았어도 여기까지 날아오지는 않았어.
바람이 분다.
너네도 옛날에는 엄청나게 커다랗고 멋있는 바위였겠지. 문화재였을 수도 있고. 신전이나 조각상 같은 거. 아, 아니다. 그, 얘들아. 여기 혹시, 예전에 아파트였던 애 있니?
아니면 뭐, 빌딩 같은 거라든지. 너네 몸집도 목소리도 진짜진짜 컸던 때 말이야- 그런 적, 없어? 없--니-?
침묵.
너희들, 멋지게 풍화됐나 보네. 그치? 점점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지고—
그래도 언젠가 다시 뭔가를 만나서 쌓이고, 그래서 또 커지고, 커지고, 커지고—
그러겠지? 부럽다. 난 산화가 될 거야. 곧 해가 떠서 빛이 비치면, 이 지독하게 건조한 사막 한복판에서 종이가 점점 누렇게 변하고 글자들도 다 흩어져서 날아가기 시작할거야. 그리고 여기 지문들도, 커피 자국들도 다— 날아갈 거야. 그러면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어디로 가? 어디로-? 응? 나처럼 잊혀진 말들은 어디로 가는지--
알—아아--?
알아? 알아-? 알-- 아---?
메아리. 울리고 있는 걸까. 그래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아아⋯ 지금 이게 원본이면 좋았을 텐데. 어차피 그 사람 말고는 아무도 날 읽어보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원본이라도 언젠간 폐기물이 될 텐데. 쓰레기가 되는 것보단 햇빛에 흩어지는 게 예쁘잖아⋯ 꽃잎처럼⋯⋯ 눈송이라든가⋯⋯. 아, 눈송이— 언젠가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어느 소금 사막으로. 12월은 우기라, 비가 내리면 하늘이랑 땅이 만난다고. 그래서 눈이 내려서 다 얼었으면 좋겠다고, 우리 말한 적이 있었는데⋯⋯.
바람이 한 차례 더 불어온다.
그럼, 아직은⋯ 아직은 다 가져가지 마⋯⋯.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언젠가.
아쉬우니까⋯⋯ 너희들도 날 좀만 더 붙잡아줘⋯⋯ 아니, 그래도, 자꾸 반만 덮어주면 어떡해⋯⋯.
모래들이 부드럽고 거칠게 여를 스친다.
엷은 바람 사이로, 종이와 모래가 서로 부벼지며 바스락거리는 소리.

2.

칠월. 어둑한 저녁.
장마. 빗줄기가 온갖 소리를 내며 소란하게 울린다.
131071은 책을 뒤적이고 있다.
언젠가부터 전화는 울리지 않아.
131071
분명 비슷한 게 있을 거야.
이 사람도 전화를 걸지 않아.
131071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너무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어.
131071
금방 읽어낼 수 있을 거야.
그저 흔히 있는 그런 일, 이었겠지.
131071
한 번만 더—
뭐였을까.
131071, 책을 뒤적이던 손을 멈춘다.

-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거울 ; 우유니 소금 사막

긴 사이.
131071, 휴대전화를 집어 든다. 잘게 떨면서, 천천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131071
오랜만이야.
사이.
131071
갑작스럽겠지만— 여행을 갈까 해⋯⋯ 괜찮다면⋯⋯ 너도, 올래. 나는 먼저 가서⋯
기다릴게.
전화를 끊는다. 131071은 필사한 종이를 멈춘 페이지 사이에 끼워넣고 책을 덮는다.
고문서의 사본과
노트를 펼치고, 다시 필사하기 시작한다. 연필의 소리는 모래를 닮았다.

277232917-1.

십이월. 몹시 흔들리는 공간. 현실일까. 알 수 없다.
131071
⋯⋯이거 말이야. 너한테 쓰는 편지가 되어가고 있었다는 거— 몰랐어, 나.
아니, (사이) 내내, 알고 있었어.
슬픈 것일까. 그것 역시 알 수 없다. 무언가 더 말하는 듯 — 그러나, 암전.

3.

사막. 서늘한 새벽.
그 사람의 마지막 말. 떠나간 누군가에게 남기던 말. 그마저도 산산이 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 새어나갈 리 없었지만, 그래서 그 누군가에게 절대로 들리지 않았을 거,
당연히 다 알지만- 나는 기억해. 그 목소리. 무너져 내리는 공기의 무게를 어떻게든 짊어지려고 애쓰던 그 진폭. 떨리던 모든 감각들. 그런데 그 마지막이. 마지막 말의 마지막이— 미안하다고 했었나. 고마웠다고 했었나? 미안해. 아아, 이건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말. 알잖아. 잠깐, 알아? 아무튼. 나,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그 마지막 말의 마지막이 들렸을 때 말이야⋯⋯. 그때는 정말 몰랐는데. 지금은— 내가, 편지를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소금 사막에는⋯⋯ 지금쯤 눈이 내릴까. 궁금해서⋯⋯.
빛이 선선히 터 온다.
빛무리에 눈이 내리는 듯 환상—
아니.
정말로 눈꽃이다.
아— 따뜻하다.
세상은 서서히 밝아지고 아무도 모를 속도로 흐려지는 여—

그 남겨진 글자들,

산화.

Music_
_ be my love
_ wintersong
_ in the stillness of this night
___by dakota suite & quentin sirja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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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혜

이승혜
연극과 연극 아니어 보이는 것들을 공부합니다. 관계에 대한 고민과 의문으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인간관계는 어쩔 수 없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하지만, 글과 음악과 역사와 과학과 철학 등등-을 좋아하고 이것들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은 더욱 좋아합니다.
blog.naver.com/bluefis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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