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무엇을, 어떻게, 왜] 박용우X성수연

언제든 유연하게 바꿀 수 있다면

성수연

218호

2022.05.12

[무엇을, 어떻게, 왜]는 배우이자 창작자인 성수연이 진행하는 대화입니다.
동시대 창작자들이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작업하며, 그 일을 왜 하는지 들어봅니다.

‘전형적’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검색해보니 ‘어떤 부류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이라는 뜻을 가진 관형사라고 나옵니다. 어떤 부류의 특징이란, 그야말로 어떤 부류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세계는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더디게, 하지만 분명히 변하고 움직이고 있으며 우리의 몸의 역사도 우리가 가진 편견도 세계의 일부로서 계속 흐르며 변하고 있을 것입니다. 전형적인 연기라는 말은 가끔 흥미롭지 않은 연기라는 의미로 읽혀, 배우들에게 전형성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강박을 만들기도 합니다. 배우들은 인물을 연기할 때 그런 생각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요?
배우 박용우 님과 함께 대화를 나눈 기록입니다.

성수연
안녕하세요(웃음).
박용우
안녕하세요(웃음).
성수연
웹진 연극in이 한동안 ‘이후의 이후’, 그러니까 ‘미투 이후의 이후’라는 키워드를 갖고 있었고, 저도 계속 여성 창작자들과 대화를 나눴어요. 미투 이후 현장에서 남성 창작자로서 느낀 감각들이 작업들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최근 여러 흥미로운 연극들에 참여하시며 어떻게 작업하셨는지, 코로나 시대에 어떤 생각들을 갖고 작업하고 계시는지, 또 창작자로서의 박용우 배우님은 어떤 분인지 궁금하여 배우님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웃음).
박용우
네(웃음).
성수연
조금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2018년 연극계 미투 당시에 어떤 생각들을 하셨는지 들려주실 수 있나요? 2018년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에도 참여하셨죠.
박용우
그 당시에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 조심스러웠고, 죄책감을 많이 느꼈어요. 어쨌든 대한민국 사회에서 남성이고,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고향이 부산이라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누리며 불편을 겪지 않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같이 작업하는 동료들, 특히 여성 동료들한테 뭔가 늘 죄인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알게 모르게 내가 상처 주는 말을 했을 수도 있고. 그런 생각들에 괴로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다 2018년 가을에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이하 <람람람>)이라는 작품을 재공연했는데, 그때 내부에서 고민이 많았어요. 창작진들이 좋아했던 작품이고 저 개인적으로도 사랑하는 작품이었지만, 그런 마음만으로 재공연을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문제라고 느끼는 부분들을 해결해야 이 시기에 이 작품을 다시 올리는 것에 의미가 있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야 관객들도 납득할 거라고 생각했고요. 초연 때는 여성 인물들이 정말 많이 평면적이었고, 문제가 있었고, 그런 것들을 많이 개선하려고는 했지만 여전히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한계도 느꼈고요. 남성 중심적인 부분이 있는 작품이고, 그전에는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의 행동에 대해 ‘찌질한 지식인 남성들, 에휴’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조금은 코미디적 요소로 넘어갔던 부분들의 문제점들도 보였습니다.
성수연
다 알 수는 없지만 창작진들 사이에서 고민이 많으셨다는 이야기에 공감이 됩니다. 여성 인물들을 좀 더 입체적으로 그려내기 위한 고민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박용우
네. 창작진들이 여성 인물들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수동적으로 그려내지 않기 위해 대사 수정도 꽤 있었고요. 특히 장샘이 배우님이 맡으셨던 역할 같은 경우, 조금 더 기성세대들 사이에서 자신의 것을 찾아가는 인물로서의 흐름이 드러나도록 고민하기도 했던 것 같고요.
성수연
저도 공연을 봤어요. 원작인 「바냐 아저씨」도 같이 생각해봤을 때 어쩌면 그 역할은 주인공 남성을 서포트하는 정도로 머물 수 있는 지점이 있지 않나, 배우님께서 고민이 많으셨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풀어나간 방식도 그렇고 여러모로 장샘이 배우님 굉장히 멋지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나요.
박용우
그 배역의 성별을 바꿔야 하나 하는 논의도 잠깐 있었던 것 같고 많은 고민이 있었는데, 어쨌든 장샘이 배우님께서 많은 고민들을 반영해서 하셨고, 저는 그게 참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또 인상적이었던 것은 객석의 분위기였어요. 초연 때와 달리 어떤 남성 인물들이 등장해서 소위 찌질한 무엇인가를 할 때, 관객들이 그것을 정말로 진지하게 싫어하는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비웃음, 놀림을 담은 싫어함이 아니라 제가 느끼기엔 정말로 싫어하는.
성수연
워낙 일상성이 잘 살아있고, 핍진한 순간들이 잘 구현된 것이 미덕인 작품이다 보니, 그런 순간들 또한 정말 리얼하게 가 닿은 게 아닐까도 싶네요. 그냥 ‘찌질하다’ 혹은 ‘찌질해서 웃프고 귀엽다’ 정도로 웃어넘기기엔 일상에서 마주하는 그런 순간들이 의미하던 성별권력이 무엇이었는지 모두가 함께 인식하던 때였으니까요.
1
박용우
맞아요. 그랬을 것 같아요. 저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은 현실이 아니라고 거리를 두고 볼 수도 있었던 것들이, 지금 당장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는 것을 관객들이 느낄 텐데, 그저 비웃어버리고 넘길 수 없는 순간이 있었을 것 같아요. 공연의 어떤 순간에 대한 반응은 현실의 그런 것들에 대한 일종의 의사표현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고요.
성수연
결함이 없는 인물은 없고, 소위 ‘찌질함’은 성별 불문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예전에는 서사에서 남성 인물들의 비중이 컸던 만큼, 남성의 결함을 목도하고 이해하는 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여성 인물들의 결함과 남성 인물들의 결함이 동등한 위상으로 놓이는 게 아니라, 결함은 남성들이 담당하고 있고, 여성 인물들은 사실은 좀 결함이 덜 보이고, 남성들의 결함을 이해하거나 견디거나 보조하거나 그런 식의 기능들로 존재한 적이 더 많았고, 현실에서도 사실 그런 부분이 있었으니, 더 ‘왜 저 남성들의 찌질함을 여성들이 항상 견뎌’ 이런 식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겠네요.
박용우
그랬다고 생각해요. 지금 다시 <람람람>을 한다면 또 좀 다른 느낌이 들 것 같아요. 여러 고민들을 디딘 상태에서 달라진 것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창작진들도, 관객들도. 그런 인물들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창작진들의 관점이 올바르게 드러난다면, 결함이 있는 캐릭터가 무대 위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사실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여성 서사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굉장히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직은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지만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보여서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돼요. 제가 너무 <람람람> 이야기만 했나요(웃음)?
성수연
아니요(웃음). 그때의 고민 나눠주신 것 정말 좋고, 감사합니다. 그 후 또 어떤 작품들을 하셨나요?
박용우
미투 이후의 고민과 연관성 있는 작품은 아무래도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이하 <자이툰>)랑 <엔젤스 인 아메리카>(이하 <엔젤스>) 입니다.
성수연
국립극단 시즌단원으로 활동하시며 했던 <자이툰>과 <엔젤스>, 특히 최근에 하신 <엔젤스>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그런데 그전에, 시즌단원이 되시고 그 해…
박용우
네네네(웃음).
성수연
공연들이 취소…
박용우
네네네(웃음).
성수연
그 이야기도 좀 나눠보고 싶었어요. 연이은 공연 취소를 경험하며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박용우
트리플 크라운 달성을(웃음)…
성수연
(웃음) 아이고… 어떤 작품들이었나요?
박용우
<채식주의자> 첫 모임 날 취소 통보를 받았어요. 코로나 초창기라 유럽의 상황이 심각하여 연출이 입국할 수 없어 취소됐죠.
그다음 <스웨트: 땀, 힘겨운 노동>(이하 <스웨트>) 연습을 시작했는데, 8월 15일 사랑제일교회 집회 이후 확진자가 급증하며 취소됐어요. 공연 영상을 찍고 분장실에서 참여자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는데, 뭐 할 말이 없어서 계속 울었어요(웃음).
그리고 <햄릿>을 준비했어요. 코로나 상황이 잠잠해지기 시작해서 공연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불이 나더라고요, 극장에. 극장에, 불이 나서, 공연이 3주 연기됐어요. 그런데 그 3주 사이에 또 기하급수적으로 확진자가 급증하여 결국 개막 하루 전날 취소됐어요.
성수연
결국 온라인극장으로 관객들을 만나셨죠.
박용우
네. 사실 코로나 이후 영상으로 관객을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겪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생각이 많았어요.
도대체 이게 연극이라 할 수 있을까? 눈앞에 관객이 없는데? 이런 생각도 들었고, 촬영 날 모두들 조금 기운도 빠졌던 것 같고, 연습 때만큼 에너지가 나오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어요. 찍다가 여러 문제가 생겨서 다음날 다시 찍어야 하기도 했고. 그래서 모두들 힘들었던 것 같아요. 많이 속상했습니다.
성수연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셨나요?
박용우
계속 달렸습니다(웃음). 시간이 비면 계속 달렸고, 대부분 집에만 있었어요. 그때 한창 클럽하우스가 유행할 때라서 집에서 클럽하우스를 많이 했어요(웃음).
2
박용우
성수연
와, 그랬군요(웃음). 실제로 말도 많이 하시고요?
박용우
(웃음) 네. 클럽하우스 해보셨어요?
성수연
네. 해봤지만 저는 부끄러워서 직접 제가 말을 한 적은 없었어요(웃음).
박용우
(웃음) 저도 처음엔 듣기만 했는데, 우연히 들어간 어떤 방이 굉장히 편안한 분위기였고, 서로 처음 본 사람들끼리였는데도 코드가 잘 맞았어요, 희한하게도. 그래서 저도 그 방에서 처음으로 말을 해봤어요. 다음날 그 방에서 또 부르고(웃음). 그때 마침 그 방에 있던 친구들이 모두 일을 쉬고 있을 때라, 다같이 모여서 길게는 11시간까지도 이야기해본 것 같아요.
성수연
와, 저 클럽하우스 실제로 많이 한 분 처음 만났어요! (웃음) 좋은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그 시간들이 많이 위안이 되셨나요?
박용우
그 친구들이 많이 위안이 됐어요. 그중 한 명은 작년에 제가 했던 공연들을 다 보러 왔어요. 그렇게 현실 친구가 된 친구도 있고, 외국에 살고 있어서 아직은 실제로 만난 적 없는 친구들도 있고요. 그렇게 지내다가 <스웨트>를 공연하게 됐어요.
성수연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 같아요.
박용우
제가 불운의 아이콘(웃음)…
성수연
(웃음) 그런 농담을 스스로 하시지만, 그 전에 정말 힘든 순간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그럴 때 ‘연극이란 뭘까?’, ‘연극은 대체 왜 있어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신 적도 있으세요?
박용우
있죠. 있죠. 말씀드렸듯 영상으로 관객을 만나는 것을 연극이라고 말할 수 있나 싶기도 했고.
그런데 그 와중에도 ‘연극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계속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수연
오, 그러셨군요. 왜인지 더 설명해주세요.
박용우
연극뿐만 아니라 공연예술이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바로 앞에 관객이 앉아 있고 바로 앞에 예술가가 있고, 서로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만나는 것은 공연예술뿐이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연극의 위상이 그렇게 높거나 인기가 있는 예술 장르인 것도 아니고(웃음), 앞으로 좀 더 떨어질 수 있겠지만(웃음), 진짜로 사람들끼리 만나는 일인 연극이 아예 없어지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가장 오래된 예술 장르이기도 하고요.
다만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연극을 해야 할지 고민은 많았어요. 저는 연출가나 극작가가 아니라 배우이고, 계속 어딘가에 의해 선택되는 입장이고, 이 상황에 맞게 연극의 형식이라거나 뭔가를 바꾸는 일을 하려면 포지션을 바꿔야 할 것 같은데, 저는 그냥 연기를 하는 것이 좋거든요. 막연하게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작년에 오랜만에 관객들을 무대에서 만나면서 ‘연극은 역시 관객을 실제로 만나야 하는구나’, ‘새로운 형식도 있겠지만 결국 이게 가장 보편적인 연극의 형태이고 이건 없어지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성수연
가장 보편적인 연극의 형태라는 것은 ‘관객과 배우가 만난다’라는 사실 자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박용우
네. ‘만난다’. <엔젤스> 공연을 할 때 거의 2년 만에 명동예술극장 객석이 꽉 찬 것을 봤어요. 거리두기 객석이 없어지며 나중에는 객석 3층까지 오픈을 했었거든요. 그날 3층까지 관객들이 꽉 들어차게 앉아있는 모습을 공연 시작 전에 봤어요. 공연하면서 정말 신났죠. 그리고 커튼콜 하러 나갔을 때, 그 많은 관객분들이 거의 모두 기립해서 박수를 치고 계신 모습을 봤어요. 배우들 다 울먹울먹 울고, 커튼콜 끝나고 무대 뒤에서 시즌 단원들 모여서…
성수연
그 공연 취소들을 함께 겪으셨던?
박용우
네. 시즌단원들은 정말 다 울었어요(웃음). 지금도 생각하니까(웃음), 눈물이 나는데. (웃음) (눈물) (웃음).
성수연
(웃음) 사진작가님. 박용우 배우님 울고 계세요. 찍어주세요.
(사진작가, 웃으며 셔터를 누른다)


34
박용우
공연은 너무 좋은데 관객이 한 명인 경우랑 공연이 엉망진창인데 만석인 것, 굳이 선택하라면 저는 만석이에요. 밸런스 게임 같은 것을 할 때, 그런 선택을 한 적 있어요. 공연이 아무리 잘 나와도 관객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대면이라는 것. 이것은 연극에서만 가능하잖아요. 영화도 재밌고 드라마도 재밌지만, 절대 연극한테서 못 뺏어가는 게 대면이잖아요.
성수연
멋진 표현이네요. 절대 연극한테서 못 뺏어가는 게 대면이다.
박용우
비대면 시대에(웃음).
성수연
처음 연극을 시작할 때도 그런 생각들을 하셨나요? 대면의 가치랄지. 연극을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박용우
아버지가 배우로 활동하시니까 어릴 때부터 연극을 많이 봤어요.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뭔가 창의적인 일은 늘 하고 싶었어요. 영화감독, 건축가, 가구 디자이너 아니면 요리사. 그러다 고3이 되기 직전에 내가 사실 연기하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어릴 때를 떠올려보면, 재밌는 공연 볼 때 ‘아, 재밌다’ 하고 생각하기보다는 ‘아, 내가 하고 싶다. 저 무대 위에 있고 싶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무대 위에 있는 어른들이 질투가 날 정도로. 그것을 깨닫고 배우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아버지가 워낙 훌륭한 배우시니까 난 아버지처럼 하지 못할까 봐 좀 두려웠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차피 배우의 일은 무슨 기록 스포츠도 아니고, 연기력을 1, 2위 이렇게 순위 매길 수 있는 일도 아니다’라는 생각에 이르게 됐어요. 결심하고 나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한숨을 쉬시면서 “에효, 그럴 줄 알았다” 하셨어요(웃음). 최근에 알게 됐는데, 아버지는 사실 늘 가슴 졸이면서 사셨대요. 언젠가 제가 배우를 하겠다고 하지 않을까 항상 긴장을 하고 사셨는데 결국 올 것이 왔다 싶으셨대요(웃음). 지금은 좋아하세요. 그리고 아버지랑 저는 배우로서도 많이 다르긴 한 것 같아요.
성수연
<엔젤스>에서 아버지랑 같이 연기하는 것은 어떠셨어요?
박용우
정말 좋았죠. 설렜고요. 특히 <엔젤스> 2부에서는 극 중에서 많이 만나거든요. 거의 파트너처럼. 둘이 서로 막 욕을 하고, 아버지한테 제가 손가락욕도 날리고. 보는 분들이 즐거워하셨어요(웃음). 연습실 밖에서도 공연 이야기 많이 하고, 조언을 해주시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팀 안에서 제일 선배이기도 해서 여러 부담도 있으시고 조심스러우셨겠지만, 저는 그냥 즐거울 때가 더 많았어요.
성수연
말 나온 김에 <엔젤스>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팀 안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며 작업했을지도 궁금하고, 배우님 개인적으로 어떤 생각들을 하며 연기하셨는지도 궁금하고요.
박용우
일단 저는 이 공연의 러닝 타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꼭 하고 싶었습니다. 10시간짜리, 이런 공연을 정말 해보고 싶었거든요. 무대 위에 오래 있는 게 너무 좋아요. 기왕 출연하면 퇴장 한 번도 안 하는 게 좋고(웃음).
또 이 공연 안에서 제가 실제로 드랙을 하는 장면은 없지만, 제가 맡은 인물인 ‘벨리즈’는 전직 드랙퀸인데, 저는 어릴 때부터 드랙퀸을 동경했었어요. 만약 제가 노래를 잘하고 기회가 있었으면 ‘헤드윅’ 같은 역할을 꼭 해보고 싶었을 거예요. 극 중 ‘프라이어’ 역할을 맡았던 정경호 배우님이 드랙 분장 테스트하던 날 분장팀에서 저한테도 분장을 해주셨는데, 그날 저는 정말 제가 세상에서 제일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개인적으로 작업 과정에서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을 더 말하자면, 그런데 사실 이게 맞는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하겠습니다. 제가 이 역할을 준비하며 킬힐을 신고 출근하기도 하고, 매니큐어는 계속 바르고 다녔거든요. 그리고 전 원래도 평소에 가끔 치마를 입고 다니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렇게 다닐 때마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어요. 킬힐을 신고 걷느라 발이 너무 아픈데도, 그 눈총을 받으니 오히려 아파하면서 걸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더 당당하게 허리 펴고 눈총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쳐다보면서 걷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했던 생각은 ‘누군가에게는 내가 입고 싶은 것을 입고, 나를 표현하면서 나답게 사는 것이 매일의 투쟁이겠구나’ 하는 것이었어요. 퀴어 씬에서 많이 쓰는 ‘캠피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뭔가 좀 굉장히 밝고, 활기차고, 재미있고, 발랄한 그런 태도를 말해요. 나나영롱킴 같은 사람을 보면 항상 밝고 당당한 태도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할수록 실제로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제가 이 역할을 하며 계속 ‘캠피하게’ 뭔가를 하는데, 그것이 나에 대한 프라이드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고, 행복해지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투쟁의 방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사실 이게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벨리즈’는 흑인, 드랙퀸, 게이인 인물이고, 처음에는 고민이 많고 어려웠어요.
성수연
좀 조심스럽기도 하셨을 것 같아요.
박용우
맞아요. 조심스러웠어요.
성수연
어쨌든 어떤 약자성과 소수자성을 갖고 있는 인물을 연기할 땐 접근과 표현에 있어서 여러 고민들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스스로의 생각을 계속 점검해야 하기도 하고.
박용우
맞아요. 책임감도 들고, 조심스러운 마음이 있었어요. 너무 전형적인 것을 하게 될까 봐 고민한 때도 있었고요. 그런데 사실 전형성이라는 것은 바꿔 말해 보편성이기도 하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편견, 혹은 전형성 안에는 몸의 역사를 전제로 한 어떤 보편성이 흐르고 있다고도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만약 내가 흑인 게이의 스테레오 타입, 혹은 편견을 재생산할지도 모르는 연기를 하는 것이 불편해서, 혹은 이건 너무 전형적인 표현이고, 모든 흑인 게이가 이렇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너무 그저 나로서 출발하잖아요? 저는 그것은 무책임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저는 전형성에서부터 출발하는 편입니다. 왜 그런 전형성이 생겼는지 고민하고, 인물의 몸의 역사에 대해 고민을 하고, 그 고민이 깊어지면 그 후에 내 것이 찾아진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조심하고 책임감을 갖는 동시에 ‘아니야, 너무 조심하지 말고 내 마음대로도 해보자’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여러 생각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듯 준비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수박 겉핥기 식으로 외형을 표현하려고 해본 적도 있었고, 그게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내려놓았는데도 인물에 대한 이해와 공부가 깊어질수록 어떤 제스추어나 몸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기도 했고요.
성수연
한 가지 질문이 있어요. 수박 겉핥기 식으로 외형을 표현하려고 했던 순간이 있었고, 그것을 내려놓았는데도 인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자연스럽게 몸이 따라온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외형만을 표현하려는 몸의 연습을 했던 단계를 거친 사실이 없었어도 이해에 따라 자연히 몸이 따라왔을까요?
5
박용우
음… 저는 조금 어려웠을 것 같기는 해요.
우리의 일상에서 편견은 대체로 안 좋게 작용하는데, 제 생각에 배우의 창조는 편견에서 시작하는 것도 같아요. 중요한 것은, 그 편견이 바뀔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요. 작품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편견이 깨지고 확장될 수 있다면, 언제든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유연함만 잘 갖고 있다면 어쩌면 편견이라는 것을 잘 이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미투 이후 자꾸만 더 어떤 전형성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런 시도들을 하거나 보면서 또 다시 생각이 변한 부분도 있어요.
성수연
보는 사람의 편견과 배우의 편견, 혹은 새로운 편견 사이의 어떤 줄타기가 필요한 순간도 있을 테고요. 흥미로운 얘기네요. 전형성을 인정하고 그걸 전제로 가는 것과 아예 아무것도 없다고 치고 출발하는 것은 다른 접근일 테고요. 사실은 전형성이라는 것은 분명히 있을 때가 많고, 그것을 전제해야 거기서 조금씩 비껴 나가는 순간을 볼 때의 기쁨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예 거기서 출발하지 않고 완전히 배우 자신으로서 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면, 연기를 준비하는 단계가 더 촘촘히 만들어져서 완전히 새로운 무엇이 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박용우
맞아요. 전형성을 탈피하려면 아주 새로운 걸 보여주거나, 전형적으로 연기하려면 정말 탁월한 연기여야 하거나 그런 것 같습니다(웃음).
성수연
어렵지만 힘냅시다.
박용우
어쨌든 <엔젤스> 같은 경우엔 원작을 해체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한다기보단 최대한 충실하게 원작을 이행하려 했기에, 그 안에서 ‘벨리즈’라는 역할이 해야 하는 기능들이 있었어요.
공연에 활기를 주기도 해야 하고, 관객들이 조금 즐겁게 보며 숨을 쉴 수 있게 하기도 해야 하고. 역할의 ‘기능’이라는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기능이 저도 완전히 만족스럽진 않았어요. 유대인이고 퀴어이긴 하지만 결국 미국의 백인 주류 작가가 쓴 작품이라는 한계도 있고, 실제로 작가도 그 부분에 대해 인정을 했거든요. 그런 작품에서 ‘흑인’ ‘간호사’인 인물이 조력자로서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아쉬웠어요. 그렇지만 그런 기능이 아쉬워서, 내가 내 인물 자체만 보면서 그런 기능을 하지 않는 다른 선택을 한다면, 인물로서는 좋은 시도일 수 있겠지만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마이너스겠죠. 비록 전형적일지라도 작품 안에서 내가 혹은 ‘벨리즈’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공연을 미국의 프로덕션에서 할 때 ‘벨리즈’를 맡았던 배우가 ‘왜 흑인들은 다 백인 시중을 드냐’고 했대요. ‘벨리즈’는 간호사이고, 환자들은 다 백인들만 나오고. 그래서 작가가 만약 이 작품을 다시 쓴다면 절대로 ‘벨리즈’를 간호사로 쓰지 않을 거라는 얘기를 했다고 해요. 심지어 이제는 작품이 처음 나온 때로부터 시간도 많이 흘러서 분명히 이 작품엔 한계가 있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좋은 것 같아요.
성수연
아무 문제의식 없이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를 분명히 인지하고, 고민이 반영이 된 채로 관객들을 만나는 거니까. 여러 가지를 또 함께 고민할 수 있다면 더 좋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박용우
사실 ‘벨리즈’를 하며 정말 정말 많이 행복했어요. 인물 덕분에 저도 좀 부드러워진 것 같고,
세상을 보는 시각도 좀 따뜻해진 것 같아요.
성수연
영향을 받아서?
박용우
네. 많이 영향을 받았어요. 평소에 화가 날 때도 ‘난 벨리즈야’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웃음).
성수연
(웃음). 역할이랑 자기 사이에 어떤 주고받음이 진짜 강하게 생길 때 있잖아요. 저도 <로테르담>이라는 작품에서 ‘앨리스’ 역할을 할 때에는, 저의 겁 많고, 걱정 많고, 거절 못 하는 면이 평소에도 극대화되는 것 같다고 느끼기도 했고, 어떤 다른 역할을 할 땐 또 그 역할의 영향을 받아서 세상이 다 갑갑해지는 감각을 순간 순간 느낄 때도 있고 그랬어요.
박용우
이번 ‘벨리즈’는 다행히 좀 좋은 기능을 한 것 같아요(웃음).
성수연
‘벨리즈’의 좋은 영향을 받은 최근(웃음), 배우로서 갖고 계시는 화두, 혹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박용우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땐 악역을 정말 하고 싶었었거든요. 그런데 거의 안 했었고, 굉장히 평범한 인물을 주로 했어요. 그게 콤플렉스일 때도 있었어요. 배우로서 너무 모범생, 바른 청년 이미지인 것 같았고, 평범한 것은 매력이 없는 것이라고 어릴 땐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냥 그것이 나의 좋은 매력일 수도 있고, 평범한 것을 하는 배우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다행히 점점, 조금 평범하지 않은 여러 유형의 인물들을 해보게 됐고, 악역도 해봤고요. 그러다 이번에 <엔젤스>를 하며, 악역 혹은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인간들의 매력과 존재감만이 관객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물론 그런 역할들이 강한 인상을 주긴 할 테지만, 아주 선한 인물의 선함 또한 엄청난 매력이고,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느꼈어요. 이전엔 어떤 개성이나 강렬함이 있어야 관객들의 시선을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관객들은 사실 다 아는 것 같아요.
6
성수연
이거 굉장히 멋진 생각이네요.
박용우
네. 사실 강렬한 것을 해보고 싶은 배우로서의 욕심도 있고, 인물의 결함을 찾고 드러내는 것이 재미있어서 악역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정의로운 주인공은 재미없다고 생각했어요. 항상 뭔가 엇나가고 단점이 많지만, 그 단점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자신의 모습이 발견될 때 관객들에게 끌어낼 수 있는 공감들이 있잖아요. 연극사 수업 때 들은 것을 생각해 보면, 고대 그리스비극에서부터 셰익스피어, 사실주의로 넘어오면서 주인공들이 점점 우리와 가까운 인물이 되잖아요. 고전 속 인물들은 다 컸는데, 현대로 넘어오며 점점 작아지고 가까워지는. 그런 맥락에서 저는 작은 인물을 좋아했어요. 배우가 자기 인물에 너무 빠져서 인물을 이상화하게 되는 것도 싫었고요. 그래서 자꾸만 제가 맡은 인물을 작게 만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구나, 내가 맡은 인물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성수연
재미있네요. 내 배역에 대한 이상화에 빠져 잘못된 방식으로 위상을 높이는 것은 좋지 않지만, 현재의 내 능력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면이 타인에게, 혹은 내가 맡은 인물에게 있기도 하니까.
박용우
네. ‘벨리즈’ 같은 경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인물이라는 것을 느끼며 요즘 배우로서 하게 된 생각들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 매번 하는 작품들이 안전하고 행복하면 좋겠다고 바라요.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되기 이전에 일단 제가 행복하고 싶어요(웃음).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며 민주적이지 않은 프로덕션에 있다거나, 우리가 관객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 벌어지는 프로덕션을 만나면 그 괴리감이 더 괴로운 것 같아요. 같이 하는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끝나면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쉽고, 그런 것들이 점점 중요해져요. 작품의 성패보다 더. 그래야 이 일을 더 오래 할 수 있지 않을까.
성수연
같이 하는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배우님이 생각하시는 ‘행복’이군요.
박용우
성과가 행복을 만들어주지는 않는 것 같아요. 저는 그냥 먹고 살 수만 있는 선이면, 할 때 재미있고, 사랑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스스로가 행복하게.
성수연
공감하고 동의해요. 오늘 여러 깊은 이야기들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질문 주고받기를 하며 이 대화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박용우
네. 감사합니다.
(박용우와 성수연, 서로를 바라본다)
성수연
편견에서 출발해 인물을 만들어나감으로써 우리의 편견이 무엇이었는지를 되짚는 걸 목적으로 하는 연기는 가능할까?
.
.
박용우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진짜 불가능할까(웃음)?
.
.
.
성수연
인류가 사라질 때까지 대면 예술은 존재하겠지?
.
.
박용우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을까 이제? 우리나라에 아직 희망은 있겠지?
(박용우와 성수연, 소리 죽여 길게 웃는다)
.
.
성수연
희망 없는 사회에서 연극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
박용우
절망 속에서 빛을 찾는 게 인생의 묘미 아닐까?
.
.
성수연
너는 최근에 어떤 순간이 제일 행복했어?
.
.
박용우
너는 최근에 어느 순간에 제일 행복했어?
.
.
성수연
너는 역할과 너 사이에 많은 것들을 서로 주고받는데, 만약 행복하지 못하고 마음이 많이 아픈 역할을 맡게 된다면 어떤 방식으로 너 자신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을까?
.
.
(박용우, 달리는 동작)
.
.
박용우
펜싱… 배워볼 생각 있어?
7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성수연

성수연 본지 편집위원
배우, 창작자. 다양한 형태의 연극작업을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sooyeonsung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