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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의 계보

극단 아이컨텍 <마지막 배우> ; 제10회 서울미래연극제

권혜린

191호

2020.11.19

Intro. 마지막 고백
2099년 연극이 멸망하기 직전, 마지막 배우의 마지막 공연을 보러 행화탕에 온 관객들은 기이한 초대장을 받는다. 의자마다 하나씩 놓인 카드에는 각각 다른 대사가 적혀 있다. 혼자만의 대사와 지시문이 적혀 있거나, 자신과 상대방의 대사와 지시문이 적혀 있거나, 코러스가 적혀 있기도 하다. 빠르게 깜빡이는 불들은 소멸 직전 연극의 위태로움을 보여주는 듯하다. 서울미래연극제 마지막 작품의 마지막 공연이라 중첩되는 ‘마지막들’에 숙연함마저 느꼈다.
간단한 악기들과 마이크가 있는 무대에 등장한 마지막 배우는 노래 <연극이 끝난 후>를 감미롭게 부른다. 그 뒤에 자신이 이제까지 <햄릿>에서 클로디어스를 맡았고 그 외에도 군인, 거지, 아빠, 아들 등 이름 없는 역할을 20년 동안 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힘든 연극을 왜 계속 붙잡고 있느냐는 친구의 말에 무대 위에서는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으며, 연극이 좋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폭발적으로 속삭여야 하는’ 난해한 연출, 소품이 사라진 무대에서 종이 칼과 손가락 총으로 실수를 만회해야 하는 돌발 상황, 현실적인 어려움 등도 등장한다. 군데군데 언어유희를 섞어 웃음을 주지만 연극의 마지막 생존자로서의 소회를 애틋하게 전개하며 비애감을 준다. 4차 산업혁명, AI 시대에서 한없이 아날로그한 배우는 밀려난다. 이렇듯 멸종 위기의 연극을 추도하는 것 같지만, 분위기는 곧 역동적인 것으로 반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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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1. 막간, 연습
공연이 시작한 뒤 15분이 지나고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서 지각한 관객이 등장한다. 그리고 즉흥적으로 인터뷰를 당한다. 그 뒤에 지각한 관객이 선창으로 ‘이런 게’를 외치면 다른 관객들이 후창으로 ‘연극이지’를 외치면서 극이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제10회 서울미래연극제가 기치로 내세운 “연극의 재발명 : 이것이 연극이다”를 그대로 보여 주는 구호이다. 여기에서 극이 시작한다는 것은 관객도 함께 연기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적극적인 관객 참여형 연극으로서 관객은 배우와 함께 카드에 적힌 번호 순서대로 연기해야 한다. 즉석 섭외된 관객의 탬버린 음향을 배경으로 예행 연습을 잠깐 한 뒤 1부에서 3부까지의 몰아치는 연기가 시작된다. 1부에서는 <고곤의 선물>, <갈매기> 등에 나오는 대사들을 중심으로 연기하고, 2부에서는 극중극을, 3부에서는 피날레로서 동시에 대사를 외치는 것으로 공연은 마무리 된다. 그러나 1부에서 3부까지는 파도에 휩쓸리듯이 지나가기 때문에 사실상 연속된 느낌을 준다.
Track 2. 폭풍들
관객은 배우와 대사를 주고받거나, 독백함으로써 ‘아무 느낌도 없이 팔짱 끼고 앉아 있는’ 것에서 벗어나 극의 일부가 된다. 자신의 차례를 놓치지 않아야 하므로 잠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견디면서 책임과 중압감을 갖고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연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던져진 말들을 멋지게 소화하며 열연한 관객들이 많았다. 배우는 이것이 새로운 연극이라고 하면서 폭죽과 꽃가루와 눈 스프레이를 뿌리기도 하고, 왕관을 씌워 주기도 하고, 연기 지도를 하기도 한다. 눈앞에서 나타나는 각종 효과에 관객들의 반응도 즉각적이었다. 각각의 카드에 적혀 있던 폭풍 같은 대사들은 무대에 쏟아지면서 ‘불꽃, 정열, 분노, 칼날, 횃불 같은 말들’을 남기며 순식간에 지나간다.
Track 3. Q&A
연극은 몰아치듯 ‘끝났고’, 과거형이 된 마지막 연극 이후 관객과 합동 연기를 한 배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다. 관객에게 무작위로 소감을 물어보자 ‘재미있다’, ‘손발이 떨리고 긴장되었다’, ‘배우와 함께해 영광이었다’ 등의 말들이 나온다. 소품을 일상용품으로 선택한 이유를 제작비로 들기도 하고, 배우를 그만둔 뒤의 직업을 묻자 ‘육아’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공연 장소를 목욕탕으로 한 이유에 대해서는 사우나 후의 해방감이 새로운 출발,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연극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공연 시간이 남았는데 진짜 끝난 건지 묻자 12분이 단축되었으며 이런 현장성이 바로 연극이라고 답한다. 연극의 수명을 묻는 말에는 마지막 연극이 끝났기에 머릿속에 연극이 없다고 답한다. ‘마지막 배우’로서의 역할에 지극히 충실한 것이다. 이렇게 보통은 선택의 영역이었던 질의응답 시간이 극 안으로 들어오면서 관객들은 배우에서 관객으로 재빠르게 전환된다. 더불어 무대 안팎과 공연장 안팎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사우나를 한 듯 후련함과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Track 4. 끝의 시작
질의응답 시간이 평화롭게 마무리되려고 할 때, 갑자기 한 관객의 날 선 질문이 끼어든다. 왜 본인 마음대로 좋은 대사들을 모욕하는지, 책임 회피가 아닌지 공격적으로 질문하는 것이다. 배우는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최대한 차분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연극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절절하게 이야기했음에도 관객은 계속해서 공격적으로 나오고, 급기야 배우는 정색하면서 이제 자신은 배우가 아니라며 퇴장해 버린다.
급격히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스태프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배우는 창문 밖에서 드릴을 찾는다. 이것이 실제 상황인지, 극의 일부인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마지막 질문을 한 관객은 다른 관객들에게 이 연극이 정말로 재미있었는지 묻고 다닌다. 관객들이 재미있었다고 하자 왜 재미있었는지를 추궁한다. 이처럼 다소 무례해 보이는 그 관객은 무의미한 형식 실험은 공허하므로 내용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한다. 제대로 된 연극이 사라진 상황을 거부하고 새로운 연극이 다시 시작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탈바꿈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것은 오로지 연극의 한 시대가 멸망한 자리 즉, 끝에서만 가능한 시작이어야 한다. 배우는 이미 연극이 끝났다고 했는데, 이 멸망의 순간 연극 자체를 돌파하는 질문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계보가 시작된다. 기존의 판을 엎은 자리에 새 판을 까는 것이다.
Hidden Track. 관객-배우의 출현
느닷없이 새로운 관객이 무대에 전면적으로 등장함으로써 히든 트랙이 시작된다. 도덕적 성품을 향상시키고, 시대상을 반영하며, 내면을 탐구하는 진정한 연극을 설파하는 것은 고전적인 연극으로 돌아가자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마지막 배우의 마지막 연극이 실험극이라는 점에서는 이에 반하는 계보를 새롭게 이어 나가자는 태도에 가까워 보인다. 마지막 배우도 연극은 곧 삶이며, 서툴러도 된다고 하면서 그 관객에게 배우를 직접 하라고 한다. 자신이 차고 있던 벨트를 그 관객에게 채워 주며 상징적으로 계승자를 지정하는 방식을 통해 멸망 직전에 있던 연극은 새로운 계보를 찾게 된다. 멸망의 계보는 이렇게 관객이 배우가 되는 형식으로 다시 이어진다. 신나는 음악과 함께 새로운 연극, 새로운 관객-배우가 탄생한다.
Outro. 예고편
새로운 배우의 탄생을 목도한 배우들은 공연장 밖으로 나간 뒤 새로운 포스터를 마주한다. 포스터는 마지막 배우의 얼굴에서 마지막 관객-배우의 얼굴로 바뀌어 있고, 제목도 <마지막 배우>에서 <새로운 배우>로 바뀌어 있다. 마지막 배우 한 사람만이 주인공인 모노드라마인 줄 알았지만 관객들도 모두 주인공이었고 히든카드로서 지각한 관객과 스태프, 관객인 척 열연했던 배우들, 무례한 질문을 했던 관객-새로운 배우도 모두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돌고 돌아 미래에도 연극은 다시 시작 되었고, 새로운 포스터처럼 새 문이 열리게 되었다. ‘다음 시간에’처럼 ‘다음 공연에’를 예고하는 이 포스터는 실패한 자리에서 시작함으로써 ‘FAIL BETTER’라는 서울미래연극제의 주제와도 어울렸다. 이처럼 멸망 상태에서 이어진 계보는 잔잔하지만 오래가는 울림을 주었다. 이런 게, 이런 것도 연극이라는 말을 남기면서.

[사진 제공: 서울연극협회]

제10회 서울미래연극제 마지막 배우
일자
2020.11.01. ~ 2020.11.02
장소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
작/연출
박용희
출연
강원재
조연출
김수진
예술감독
강승환
조명디자인
조경수
무대디자인
백규진
음향
최지혜
의상
정다빈
포스터
하예든
작곡
신준영
소품
김주효
분장
안영현
진행
송희, 최다은
관련정보
http://www.st-future.co.kr/showinfo_02_d.asp?idx=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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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린

권혜린
문학 연구자, 강사,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더 자유롭게 읽고 쓰기를 꿈꿉니다.
lingi3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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