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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 안의 나를 사랑한다

글과 무대 <이것은 실존과 생존과 이기에 대한 이야기>

김상옥

218호

2022.05.12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말처럼 “모든 비극은 죽음으로” 끝나고, “모든 희극은 결혼으로” 끝이 날까?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우리 삶에서 ‘희극’과 ‘비극’은 어떻게 얽혀있을까. 물질적인 조건만을 보고 결혼하는 것이 그릇되지만, 사랑만을 보고 결혼하는 것 역시 어리석게 치부되는 시대다. <이것은 실존과 생존과 이기에 대한 이야기>는 실존과 생존 그리고 이기가 오늘날 결혼을 둘러싼 사회적 배경과 어떻게 맞닿아있는지를 그려낸 현실주의 드라마다.
마주 보이는 객석 사이에 비딱하게 놓인 무대는 단차가 낮은 1단 층계로 이루어져 있다. 층계에서 바닥까지 이어지는 장판지 무늬, 노란빛 조명, 무대 왼편 바닥의 수납장, 오른편 벽면의 옷걸이는 이곳이 생활 공간임을 가리킨다. 계단 챌판의 붉고 긴 띠는 결혼식장 주단을 연상케 한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은 자연스럽게 밟아야 할 인생의 필수 단계처럼 여겨지곤 한다. 극 중 인물들은 무대 계단에 올라섰다 내려오기를 반복하면서, 만남과 이별을 되풀이한다. 극적 공간은 대부분 집 내부이며, 각각의 관계는 무대처럼 어딘가 틀어져 있다. 단조로운 무대는 인물들의 복잡미묘한 감정선을 부각한다. 배우 네 명이 각각 2·3인 역을 맡아, 다섯 커플의 갈등을 펼쳐냈다.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결혼이라는 화두에 관해 다른 견해를 가진 커플들처럼, 양측 관객들은 하나의 무대를 각기 다른 시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1

남일과 이혼한 지 9년이 지난 희수는 재훈과 연애 중이다. 희수는 더 이상 결혼하고 싶지 않다. 재훈은 연애 상대로서 희수가 끌리지만, 같은 직업을 비롯해 자신과 사회적 조건이 비슷한 지나와 양다리를 걸치고 결혼 계획을 세운다. 여유로운 노후생활을 함께 즐기는 부모님은 지나에게 있어 닮고 싶은 롤모델이다. 중산층이라는 가정환경과 공유된 아비투스가 결혼에 대한 재훈과 지나의 인식을 일치시킨다. 하지만 어떻게 혼수를 마련하고, 어떻게 결혼 생활을 꾸려갈 것인지 합의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다. 이때 ‘전통적인’ 결혼을 하고 싶은 재훈과 ‘합리적인’ 결혼을 추구하는 지나의 가치관이 충돌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과 시간, 노동력 배분에 관한 갈등은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결혼 과정에서도 피할 수 없는 문제로 나타난다.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지나의 태도와 이에 감정이 상해버린 재훈의 대화는 희극적으로 연출되지만, 결혼을 앞두거나 비혼을 결심한 젊은 관객들에겐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현실적인 장면으로 다가온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무대를 걸어가는 두 사람이 같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요원해 보인다.

2

남일과 여은은 성생활과 주거 문제로 다투다 헤어진다. 그런데 어느 날 남일은 여은을 다시 찾아와 결혼할 것을 제안한다. 그의 성욕이 여은에게만 반응하며, 그 순간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남일은 그런 상태를 ‘실존’과 연결 지으면서, 여은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과 충만한 남성성을 충족하려 한다. 그는 여은보다는 여은과 섹스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듯하다. 성애적인 관계에서 타인은 본연의 의미를 가진 존재이기보다, 자신의 무의미를 채워주는 도구로 간주된다. 사랑에서 성애로 비속화되는 우리 시대의 로맨스는 상대방을 사물화한다. 반면 비정규직인 여은에게는 주거나 생계 문제가 큰 고민거리다. 그는 자신보다 더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선웅과 사귀고 있다. 둘의 연애 장면이 시작되기 전, 여은은 악몽에서 깨어난 듯 소리를 지른다. 그는 매력적인 선웅과 경제적 안정을 제공해줄 수 있는 남일 사이에서 마음이 어지럽다. 여은에게 결혼은 단꿈을 꾸게 하는 환상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결혼은 ‘실존’과 ‘생존’의 문제, 즉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이기’와 결부된다. 우리가 결혼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실존과 생존과 이기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을 위한 누군가가 필요하기에 결혼제도 안에 들어가려는 나르시시즘적인 인간관계의 풍경을 비춘다.
인물들이 겪는 연애, 결혼, 이혼, 다시 연애, 그리고 이별의 과정은 결혼이 더 이상 인생의 필수적인 통과의례나 연애 관계의 완성이 아님을 보여준다. 다만 재훈을 떠나보낸 희수는 왜 계속 이처럼 아픈 이별을 경험해야 하는지, 사람들은 왜 자신과 있으면 행복하지 않은지를 물으며 울음을 터트린다. 희수의 아버지 갑구는 사별한 아내를 두고, 자기애와 자기혐오를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다고 회상한다. 갑구는 희수가 그러한 아내를 닮았다며, “너답게” 살라는 말을 던진다. 희수가 직면한 “난 누구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침묵은 사랑이 불가능한 이유에 관해 대답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파묻혀있지만,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한다. 나를 알려면 타자에게 열려있어야 한다. 우리는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 타자, 즉 나와 분리된 거울 이미지를 통해서만 자신을 볼 수 있다. 타자에게 닫혀있는 우리는 자신도 타인도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가 날 위한 ‘누구’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연애와 결혼, 어쩌면 이별도 나와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형성해가는 과정일 것이다. 이때 나와의 동질성으로만 누군가와 연결되려 한다면, 우리는 결코 타인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알랭 드 보통). 자신과 너무나 다른 윤숙과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관계를 이어가는 갑구는 딸 희수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비슷한” “고만고만한” “똑같은 것들”끼리 만날 바에야 혼자 살아!

3

남일이 여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가져간 것은 먼 거리에서 사 온 생딸기 주스다. 여은은 앉은 자리에서 한 박스를 먹어 치울 정도로 생딸기를 좋아하지만, 향만 첨가된 딸기우유는 싫다고 말한다. 딸기향만 들어있는 우유는 여은에게 ‘그럴듯한’ 가짜이다. 남일이 건넨 분양 브로슈어 또한 여은에게는 ‘그럴듯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여은은 브로슈어를 가리키며, 여기에 행복이 있냐고 묻는다. 남일의 대답대로 그곳에는 그저 콘크리트 건물의 이미지만이 있다. 그러나 선웅이 가져왔을 모텔용 콘돔에서도 가짜 딸기향이 난다. 어느 것에서도 완연한 기쁨을 찾을 수 없는 여은은 신용불량자가 되어 곤궁에 빠져있다. 콘돔과 브로슈어 중 어떤 것을 집는다 해도, 여은에게는 연애와 결혼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행복이라는 숙제가 남아있다.
희수는 영화의 효과음을 만들어내는 폴리 아티스트로, 이미지에 ‘그럴듯한’ 소리를 입히는 사람이다. 실체 없는 영화 속 괴물, 상상 속 이미지를 무찌르기 위해 희수가 허공에 펀치를 날리며 분투한다. 남일은 여은에게 브로슈어를 건넸던 것처럼, 전처인 희수에게도 봉투 하나를 주고 간다. 희수는 ‘겉’만 보고 그것이 돈일 것이라 판단해 처음엔 화를 낸다. 그런데 봉투 안에는 희수에게 보내는 전 시아버지의 편지가 담겨 있다. 좋은 남자를 데려오면 혼수를 해주겠다는 편지 내용에는 희수를 도구적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 어른의 사랑이 묻어있다. 그 마음에 희수는 다시 눈물을 흘린다. 희수는 남일, 어머니, 재훈에 이어, 이번에는 전 시아버지와의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희극과 비극이 뒤엉킨 우리 삶에 때로는 ‘그럴듯한’ 껍데기로, 때로는 사랑으로 다가올 새로운 만남을 기다리면서.

4

[사진 제공: 글과무대/ 촬영: 예준미]

글과 무대 <이것은 실존과 생존과 이기에 대한 이야기>
일자
2022.4.28 ~ 5.15

장소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

작가
최보영, 진주, 황정은
연출
이인수
출연
김수아, 변효준, 양나영, 임준식
조연출·무대감독
송은혜
음악감독
이승호
움직임지도
권영호
무대디자인
송지인
조명디자인
신동선
음향디자인
박재식
의상디자인
이윤진
홍보물 디자인
티끌
스튜디오사진
정근호
기획
신승빈
제작PD
박용휘
주최·제작
글과무대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03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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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김상옥
연극학을 전공하고,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활동했다. 경계를 넘는 동시대 예술, 연극이 만들어낼 수 있는 미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만남에 관심을 두고 있다. gracegate@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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