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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짓으로 삶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언니들

단편 마임 컬렉션 <만화경>

윤단우

218호

2022.05.12

‘이게 언니들 마임이다’. <만화경>의 공연 포스터에는 이 같은 카피가 인쇄되어 있다. 언니들의 마임은 대체 어떻다는 것일까. 마임하는 ‘언니들’은 양미숙, 임선영, 박이정화로, 단편 마임 아홉 편으로 구성된 공연에서 이들은 대표 레퍼토리 세 편을 옴니버스식으로 선보였다. 첫 번째로 무대에 나온 임선영은 <성냥팔이 소녀>, <소개팅>, <오늘의 요리>를, 두 번째 무대를 책임진 박이정화는 <물을 긷다>, <마임 라푼첼>, <사랑, 쓰다>를, 마지막 무대의 양미숙은 <깨몽>, <어머니>, <도시>를 차례로 공연하며 각자의 개성을 뚜렷이 내보였다.

웃음을 주는 언니 임선영

임선영의 무대는 ‘웃음’에 포커스를 두고 있었는데, 그 웃음은 그가 무대를 진행시켜 나갈수록 강도를 더해가며 반전 있는 전개로 객석에 박장대소를 안겼다. <성냥팔이 소녀>는 추운 겨울날 거리에 나와 성냥을 파는 소녀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외면당한다는 동화의 기본 설정은 그대로 가져오되,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동화 속에서 어떤 온정도 받지 못한 채 홀로 죽어가는 가련하고 애처로운 소녀가 아닌, 자신을 외면하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반격을 꿈꾸며 분노할 줄 아는 소녀다. 그러나 관객들의 웃음을 겨냥한 임선영의 무대에서 소녀의 반격은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고 상상으로만 그친다.
손에 든 성냥에 언제든 불을 피울 수 있지만 상상만 할 뿐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고 분노를 꾹 눌러 참는 소녀의 모습은 무리한 지시를 내리는 상사나 무례한 태도로 주문하는 고객, 불쾌감을 주는 낯선 타인 앞에서 본연의 감정을 숨기고 가면을 쓰는 현대인의 모습과 닮아 있다. 관객들은 소녀의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도, 소녀가 생존을 위해 가장하는 태연함도 모두 이해한다. 소녀의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반격은 소녀와 관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종의 공감과 함께 가능성으로만 남는다. 소녀의 마음을 너무도 잘 이해하는 관객들은 그가 반격을 상상하는 순간마다 커다란 웃음으로 화답한다. 소녀는 추위와 절망 속에서 얼어 죽지 않고 내일도 이 거리에 나와 성냥을 팔 것이다. 반격의 상상은 실행에 옮기기 전 그 가능성만으로도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에너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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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영 <성냥팔이 소녀>

네 번째 작품인 <소개팅>이나 일곱 번째 작품 <오늘의 요리>에서도 임선영은 반전을 통한 웃음을 일관되게 밀고 나간다. <소개팅>은 소개팅하러 나가는 길에 오늘의 만남에 대한 장밋빛 상상으로 한없이 들뜬 여자와 소개팅을 망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개한테 물리고 날아가는 새가 머리에 똥을 싸는 등 속된 표현으로 ‘재수 옴 붙은’ 여자의 모습을 대비시키고, <오늘의 요리>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종갓집에 내려오는 유서 깊은 조리법이라도 전해줄 듯 단아한 자태로 요리 스튜디오에 등장한 여자가 조리 과정에서 실수를 연발하다 담배를 피워 물고, 닭을 잡느라 스튜디오를 뒤집어놓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여준다.
관객들은 작품에 반전이 있으리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실감나는 임선영의 연기에 그만 포복절도를 하고 만다. 관객들이 웃음을 터트리는 것은 임선영의 연기가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놀라움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보여주는 반전이 너무나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반격을 상상하는 소녀처럼, 기대를 배반한 소개팅이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음식 조리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일로 기분이 가라앉거나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거나 불운에 불운이 겹치는 것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음 직한 상황이다. 임선영의 무대가 관객들의 웃음을 빚어내는 지점은 반전이 아니라 반전에서 드러나는 인간미다.

웃음과 공감 사이의 언니들, 박이정화와 양미숙

웃음이라는 코드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임선영과 달리 웃음에서 출발한 박이정화의 무대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깊은 공감으로 마무리된다. 두 번째 작품인 <물을 긷다>에서는 우물에서 물을 긷는 여자가 자신의 신체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데, 처음에 물동이에 손을 담가 자신의 손을 인지하게 된 여자는 그다음에는 세수를 하고, 이어서 상체와 하체에 차례로 물을 끼얹으며 자신의 신체를 단계적으로 인지해간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실존과 관계되는 이러한 발견 혹은 인지의 순간들은 박이정화의 코믹한 연기 덕분에 심각해지거나 무거워지지 않고 웃음으로 수렴된다. 박이정화는 마지막으로 물동이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것으로 연기를 마무리짓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은 내장기관일까 아니면 여태 들여다보지 못했던 내면일까.
다섯 번째 작품 <마임 라푼첼>은 성에 갇힌 라푼첼 공주와 그와 연인 사이인 왕자의 만남과 이별, 그후의 이야기까지 그려낸 동화의 재해석이다. 임선영의 <성냥팔이 소녀>가 동화에 드러나지 않은 소녀의 내면을 번뜩이는 기지로 잡아냈다면 박이정화의 <마임 라푼첼>은 역시 라푼첼의 성 안 모습이나 왕자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과정 등 동화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을 유머러스한 상상력으로 전달한다. 라푼첼은 방을 한가득 채우며 잔뜩 엉켜버린 긴 머리카락을 힘겹게 빗어 내리고, 왕자가 긴 머리카락을 타고 올라가는 동안 왕자의 무게를 견디느라 두피에 가해지는 통증으로 괴로워한다.
그리고 동화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하던 박이정화의 연기는 둘의 만남이 성사되기 직전, 라푼첼이 마침내 성벽을 거의 다 올라온 왕자의 손을 잡아주다 힘이 모자라 놓치고 마는 비극으로 치닫는데, 이 비극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관객들은 박이정화의 세밀하고 실감 나는 연기에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그리고 박이정화의 라푼첼이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운동을 하며 근력을 키우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이 웃음은 가장 크게 증폭된다.
여덟 번째 작품인 <사랑, 쓰다>는 앞서 보여준 두 작품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작품인데, 진지한 표정으로 허공에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박이정화의 몸짓을 따라가는 동안 관객들 역시 사랑의 의미에 대해 다시 사유하게 된다. 박이정화가 선보이는 세 편의 작품 가운데 가장 힘을 뺀 연기를 보여주면서도 객석에 남기는 여운은 가장 짙고 강렬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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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정화 <사랑, 쓰다>

마지막 출연자인 양미숙은 앞서 임선영과 박이정화가 웃음에 포커스를 둔 연기를 펼친 것과 다소 결이 다른 무대를 보여준다. 세 번째 작품인 <깨몽>은 이솝 동화 속 우유를 팔러 가는 소녀 이야기를 현대에 맞게 각색한 듯 보이는데, 값비싼 보석과 의상으로 치장하고 자동차를 몰고 교외로 나가 골프를 치는 등 경제적으로 부유한 여자의 과시적인 소비생활을 보여주던 양미숙의 연기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고 말한다. 허탈한 표정을 짓는 무대 위의 양미숙을 바라보며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리지만 그 웃음은 꿈에서 깨어난 여자를 향한 조롱이 아니라 공감이다.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며 부자가 되고 쌓은 부를 자랑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기도 한데, 양미숙은 이어지는 무대에서도 계속해서 관객들에게 말을 걸어온다. 여섯 번째 작품인 <어머니>는 제목 그대로 어머니로서의 여자의 삶을 보여주는 짧고도 긴 일대기로, 양미숙은 아기를 품은 임산부로 등장해 할머니가 되어 퇴장한다. 그는 처음 가진 아이를 소중히 낳아 키우고, 걸음마를 하는 모습을 흐뭇해하며 안아주고, 어느덧 장성한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아들이 짝을 데려오자 결혼을 시키고, 다시 자신의 아이를 낳는 걸 지켜본다. 간결한 움직임으로 여자의 전 일생을 보여주는 양미숙의 섬세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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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미숙 <어머니> / 양미숙 <도시>

임선영의 동화로 시작한 무대는 양미숙의 마지막 <도시>에 이르며 관객들을 여자들의 현재로 데려온다. 쳇바퀴 도는 것처럼 단조롭고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여자가 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만원 대중교통으로 출근을 하고, 하루가 끝나면 다시 아침의 그 대중교통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를 집과 회사로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대중교통은 그러나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니라 성범죄의 온상이기도 하다. 여자는 몸을 더듬는 낯모르는 이의 손을 뿌리치며 소심하게 반항해보지만 그의 손길은 멈추지 않는다. 여자가 매일 당하는 성추행은 같은 사람의 소행일 수도 있고 매일매일 다른 사람에게서 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여자에게는 매일 닥치는 일상이며 현실이라는 점이다. 임선영이나 박이정화가 보여준 반전과 달리 양미숙은 그러한 현실을 그저 묵묵히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다. 동화로 시작한 무대는 우리 현실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삶을 모사한다는 점에서 연극과 비슷하지만 대사가 없고(세 사람이 보여준 아홉 편의 무대에서 배우의 육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박이정화가 <마임 라푼첼>에서 라푼첼과 왕자라는 두 인물을 번갈아 연기하며 낸 지시어와 의성어뿐이었다) 몸짓을 언어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무용과도 비슷하지만 무용처럼 잘 훈련된 테크닉의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기에 마임의 연기는 매우 어렵다. 배우들은 대사 없이 몸짓과 표정으로만 상황과 감정을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만화경>의 세 배우는 관록 있는 연기로 객석에 웃음은 물론 깊은 울림을 전달하며 관객들을 자신들이 포착한 삶의 단면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과연 ‘언니들’의 마임이 무엇인지 확인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대였다.

단편마임컬렉션 <만화경>
일자
2022.4.20

장소
대학로 코델 아트홀

출연
양미숙, 임선영, 박이정화
기획
우석훈
조명
류성국
조명OP/음향
강한구
스탭
최정산, 임태상
관련정보
https://www.playticket.co.kr/nav/detail.html?idx=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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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단우

윤단우 작가. 무용칼럼니스트
공연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쓴다. 무용웹진 <댄스포스트코리아>에서 취재와 비평을 하고 있으며, 쓴 책으로는 『기울어진 무대 위 여성들』, 『여성, 신체, 공간, 폭력』, 『꽃이 아니다, 우리는 목소리다』, 『결혼파업, 30대 여자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 등이 있다. https://blog.naver.com/her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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