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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이 만난 사람] 이경미 X 김성희

옵신(ob/scene)페스티벌과 가상정거장, 경계를 넘어 함께 만드는 예술의 새로운 별자리들

이경미

제211호

2021.12.09

2008년 시작된 페스티벌 봄(Bo:m)을 통해서였으니 내가 김성희 예술감독을 알게 된 것이 얼추 잡아도 10년은 된 것 같다. 그가 당시 국내 공연예술계에 소개했던 작품들은 기존의 장르 관습으로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그야말로 낯설고 불편한 것들 그 자체였다. 공연장을 나와 함께 간 동료들과 나누었던 그 혼란스러운 설렘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는 현대공연예술에 대한 지형을 대충이나마 그려가기 시작했다고 할까. 그가 2015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 페스티벌 ‘아시아윈도우’에서 예술감독의 포지션으로 공연들을 소개했을 때, 다시 동료 혹은 학생들과 주말, 주중 가리지 않고 시간이 나면 서울에서 광주까지 KTX를 타고 달려갔던 것도, 그에 대한 믿음과 또 다른 기대감 때문이었다. 2018년 국립 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다원예술 아시아포커스’로 현대예술에 대한 질문을 이어갔다. 그리고 또다시 올해로 2회째를 맞은 옵/신 페스티벌과 가상정거장이라는 기획전시로 동시대 예술에 대한 질문을 진행 중에 있다. 여러 이유로 그동안 그의 행보에 중간중간의 끊김이 발생했던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다시 ‘귀환’할 때마다 동시대 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은 몇 배로 커져 있음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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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열린 장(場)

이경미
옵/신 페스티벌과 가상정거장, 뭔가 같으면서도 다른 지점이 있는 것 같다. 옵/신이 제목 그대로 기존 예술의 장(場)에서 벗어나 예술의 지형을 새롭게 구성하는 실험적 모색의 집합소로서 뭔가 포괄적 범주로 다가온다면, 가상정거장은 그중에서도 예술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적극적 성찰의 장소로 다가온다.
김성희
제목 그대로 옵/신 페스티벌은 컨템포러리 예술축제다. 예술의 동시대성과 관련해 뭔가 중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예술페스티벌을 생각하고 있다. 내년에도 잘 진행된다면 일단 최소한의 대표예술축제 지원 자격은 갖추는 것이니 열심히 해볼 생각이다. 가상정거장은 원래 옵/신 페스티벌의 여러 꼭지 중 하나인데, 올해는 문화역서울 284의 지원을 받아 협력 전시 형태로 진행할 수 있었다. 향후 이 두 기획을 어떤 식으로 연계 발전시킬 수 있을지는 아직 백 퍼센트 확답할 수는 없지만, ‘가상정거장’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예술과 기술의 문제만큼은 계속해서 다뤄볼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경미
페스터벌 봄에서 옵/신 페스티벌, 가상정거장까지 이름을 참 잘 짓는 것 같다. 실험과 모색, 동시대성 등, 이 기획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특히 예술계에 어떤 질문을 제시하고자 하는지가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에 대해선 조금 있다 더 이야기하겠지만, 장소와 관련해 특히 가상정거장은 이번 전시가 진행되었던 문화역서울이라는 공간과 너무 잘 어울렸다.
김성희
약 4년 전이었을 거다. 문화역서울 284 측에서 나에게 전시 컨텐츠와 관련해 의사를 타진해 온 적이 있었다. 알다시피 그곳에서는 주로 한국의 근대사와 관련된 전시들이 많이 열리지 않는가. 하지만 당시 내가 제안했던 것은 ‘아트 앤 테크놀로지’라는 콘셉트였다. 서울에서 인천, 대전, 부산 등 다른 물리적 장소로 떠나는 정거장이 아니라, 가상, 멀티버스, 미래로 떠나는 정거장이라는 게 제안의 핵심이었다. 긍정적인 응답을 받긴 했지만 이후 조직 내의 문제로 무산되었는데, 올해 공모에 다시 신청해 마침내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경미
전시 중간중간 광장 주변에 나가 서 있곤 했다. 정말 많은 사람이 모여 있고, 왔다가 흩어지고 있더라. 코로나 검진을 받으러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 길바닥에 모여 앉은 노숙자들, 마이크를 들고 설교하는 각종 종교단체들, 비둘기 떼들까지. 서울역 광장 근처처럼 2021년 지금 한국사회의 단면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곳이 또 있을까. 거기에다 가상, 증강현실이 포개지니 리얼리티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확 다가오더라. 이만큼 완벽한 장소성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축제는 장소도 중요하지 않은가. 앞으로도 ‘가상정거장’은 꼭 이곳에서 하는 게 좋겠다.
김성희
실제로 그런 의견을 많이 들었다. 또 한 가지, 이번 전시를 기획하면서 문화역서울의 공간 자체의 역사성, 장소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어떤 구조물이나 설치를 일절 하지 않았다. 텅 빈 방, 그 방의 벽지와 가구, 그 위로 쏟아지는 햇빛, 긴 복도 등등, 건물의 물성 그 자체를 그대로 살리면서 그 위에 가상현실을 포개 얹어 시간과 공간, 현실과 가상을 교차시키고자 했다.

예술의 동시대성??!!

이경미
페스티벌 봄을 처음 기획한 것이 2008년이다. 예술기획자로서 동시대 예술에 대한 김성희의 질문은 올해로 최소한 14년째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그 14년은 우리 주변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정말 엄청난 변화들이 발생한 시기가 아닌가. 예술의 동시대성이라는 화두에도 좀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가. 2021년 지금 김성희가 생각하는 예술의 동시대성은.
김성희
처음 유학을 가서 다양한 공연들을 접하면서 너무 놀랐었다. 그러면서 당시 한국공연예술계가 뭔가 자기 틀 안에 딱 고립되어 멈춰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 1-2년 동안은 동시대 국제 예술계와 한국 예술계의 간극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일단 젊은 세대에게 국제적인 동시대 예술을 소개해 보자고. 관객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고, 특히 관객들의 수준에 당시 내한공연을 했던 해외 아티스트들도 놀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 갔었을 때 즈음에는,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걸맞은 제작환경과 해외진출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컨템포러리를 보는 나의 관점 역시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했다. 그때 아시아문화전당에서 만든 공연들과 소개한 작가들은 현재까지 유럽에서 큰 반응을 얻고 있다. 현재 유럽은 그 어느 때보다 아시아 컨템포러리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다. 내년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되는 ‘테아터 데어 벨트(Theater der Welt)’의 예술감독이 일본인이고, 카셀의 ‘도큐멘타(documenta)’의 큐레이터 그룹은 인도네시아인이다. 이 사례들만 보아도 컨템포러리와 관련한 예술의 관점은 일단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한 것이 분명하다.
이경미
예술의 지형의 동시대성과 관련한 질문에는 팬데믹도 큰 화두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팬데믹을 통해 시장자본주의의 문제는 물론이고 민족주의, 인종주의, 젠더, 환경문제 등 우리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사안들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었고, 늘 그랬듯 예술은 이 문제를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아시아의 컨템포러리라고 할 때는 바로 이러한 글로벌적 사안에 대한 아시아적 접근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아시아 예술 하면 여전히 서구적 시각으로 신기하게 소비되는 대상이 아니다. 오늘날 유럽이 보는 아시아 예술은 20세기 초 아르토나 브레히트 등이 생각한 그 아시아 예술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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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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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김성희
동의한다. 그런데 아시아 예술이 거기에 답하기엔 아직 준비는 덜 되었다고 생각한다. 유럽이 아시아 예술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정작 아시아는 스스로 국제적인 기준을 세우고 비전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직도 유럽 또는 서구에서 벤치마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저런 생각이 많다. 아시아 스스로 동시대의 화두를 자기 주체적으로 풀어내고 대응할 역량이 절실히 필요하다. 옵/신 페스티벌이 국내 작가들뿐 아니라 해외 작가들에게 그 장(場)이 되었으면 좋겠다.

기술에 대한 능동적 대응과 새로 쓰는 예술들

이경미
이 지점에서 테크놀로지의 문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술의 동시대성과 관련해 기술은 더 이상 예술 밖의 낯선 범주가 아니게 되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지난 예술의 역사는 그 시대의 기술이 가져온 문화적, 매체적 환경 변화에 직간접적으로 대응하면서 진행되었던 것도 사실이고. 적어도 기술산업에서만큼은 한국이나 대만, 중국 등 대단하지 않은가.
김성희
그동안 유럽 예술계는 기술을 예술과 전혀 상관없는 별도의 영역으로 치부해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유럽의 예술계에서도 기술에 대한 관심이 아주 높아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이 급격하게 기술중심으로 바뀌고 있는 데다, 유럽의 청년예술세대는 그들의 이전 세대보다 기술을 예술로 체감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다. 독일이 더 그렇다. 문화정책 자체가 기술 및 융합이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지원금의 규모도 크다. 그러니 아트 앤 테크놀로지라는 화두로 아시아 예술의 동시대성을 부각시킬 환경이 충분히 조성되어 있다고 본다.
이와 연결해 오늘날 동시대성과 관련한 화두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현재의 인류세 등등과 관련해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거쳐 인식 전환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것, 다른 하나는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적 환경 변화 속에서 예술이 어떻게 대응하는가의 문제이다. 이러한 21세기의 큰 변화와 위기 속에서 예술가는 새로운 좌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경미
동시대 예술과 관련해 나는 둘이 별개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수천 년 동안 모든 예술은 그 시대의 주요 화두에 대응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21세기 예술이 품어야 하는 화두가 인류세 문제를 비롯해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각종 정치·사회·경제적 사안들과 관계된 것이라면, 기술은 이제 예술이 그러한 이야기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언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김성희
극과 극인 것 같다. 오늘날 예술에서 기술의 비물질성, 가상성과 관련된 화두들이 급부상하면서, 한 편에서는 그 반대급부로 몸, 정동, 체험, 감각, 물성과 같은 것들이 중심화두가 되었다. 실제로 올해 가상정거장은 비물질, 가상에 대한 이슈를 다루었다면, 옵/신 페스티벌의 잉그리 픽스탈, 마틴 스팽베르크 등등은 누구보다 후자의 화두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다.
이경미
옵/신 페스티벌이나 가상정거장의 예술가와 작품들이 랑시에르, 장 뤽-낭시, 알랭 바디우 등이 말하는 의미에서 매우 ‘정치적(the political)인’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기술장치를 동원하건 안 하건 그들은 한결같이 세상 혹은 대상에 대해 우리가 통상적으로 감각하는 방식 자체를 냉정하게 되짚어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고 할까. 한쪽은 말 그대로 공간과 몸 이외의 모든 예술적 수사들을 최대한 걷어낸 상태에서 관객인 나로 하여금 오롯이 나의 몸, 감각 하나하나에 집중해 눈앞의 대상을 스스로 구성하게 만든다. 다른 한쪽은 최첨단 기술을 통해 나를 증강 혹은 가상현실 안으로 초대하되, 그들 역시 이 안에서 나에게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재와 환영의 경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한 예로 마틴 스팽베르크가 일상의 장소 한가운데서 진행했던 ‘춤추는 공동체’는 서로 다른 몸들이 각자의 리듬을 만들되 동시에 다른 몸의 리듬들과 접점을 찾아 함께 춤을 만들 것을 제안하고 있더라. 그는 안무가로서의 포지션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그가 우리에게 제안한 것은 안무가의 지시에 따라 만든 완결된 춤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모두의 몸이 함께 공존하는 진정한 공동체를 구현하는 몸짓이었다. 그런가 하면 문화역서울에서 VR을 쓰고 만난 차이밍량의 <폐허>는, 그 가상의 현실 속으로의 몰입감을 최대로 끌어올리되 동시에 내 시선이 어디에 가서 닿는가에 따라 그 안의 인물들 말고도 빗소리, 바닥으로 파고드는 햇빛 소리, 달그락대는 그릇 소리, 심지어 남자가 느끼는 어깨 통증까지도 모두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시각 말고 청각, 심지어 촉각까지 건드린다. 물론 그에 따라 장면은 순간순간 나를 중심으로 다르게 배치, 구성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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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차이밍량 <폐허>는 어떤 한 남자와 귀신에 대한 이야기다. 질병, 삶과 죽음의 경계 너머의 어떤 초현실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경미
그런가? 전혀 몰랐다. 난 그냥 제목만 보고 VR을 쓴 채 작품 안으로 들어갔다. 50여 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영상 안에는 대사 한 마디도 없었기에 그 남자가 누구인지, 특히 그 여자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좀 전에 말했듯, 난 그저 남자와 여자의 움직임 하나하나, 호흡 하나하나, 그 공간 속의 물건들과 소리, 심지어 벽에 간 금과 바닥의 묵은 때들 하나하나에 집중해 보고 듣고 느끼면서 장면과 이야기를 스스로 구성해갔다. 그에 따라 ‘폐허’라는 단어의 의미도 내 안에서 다르게 다가오더라. 유령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그 작품을 잘못 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김성희
전적으로 동의한다. 보도록 제시된 것을 보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가. 왜 사람들은 예술과 기술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예술과 기계를 적대적 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 기술은 잘못이 없다. 사람이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좋은 기계와 나쁜 기계로 나뉜다. 현재 예술과 기술 관련해 문예기금 등등이 엄청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가상정거장을 기획하면서 기계가 단순한 체험의 도구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현실이 엄청나게 팽창된 지금,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예술이 소위 말하는 체험경제에 일조하는 또 하나의 수단이 되는 것은 반대한다. 소위 기술을 통해 리얼리티는 무한하게 복제되고 확장되고 해상도는 높아지고 있지만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을까? 이제 예술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새로운 시각체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 체험과 경험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그 조건을 둘러싸고 어떤 정치·경제·문화적 맥락이 작동하는지, 이때 예술가는 어떤 위치에서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해야 한다.
이경미
같은 생각이다. 보여주고 본다는 것은 모든 예술의 공통된 기반이다. 그렇다면 이제 예술 안으로 들어온 기술은 지금 보여주는 것이 진짜 제대로 보여주는 것인지, 그리고 본다고 하지만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와 관련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때다. 여전히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그 ‘무엇’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정말 필요하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예술의 동시대성은 그때그때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예술과 기술의 문제를 온라인 스트리밍을 위한 영상제작 문제로 가져가서도 안 되고, 무대 스펙타클을 더 그럴듯하게 구현하는 기술적 도구로 가져가서도 안 될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언어와 몸 이상의 어떤 예술적 매체로 생성될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장(場)이 통섭적 차원에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본다. 정부의 지원도 이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김성희
더 이상 우리는 보도록 지시되고 제공된 것을 보고 즐기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새로운 감각들이 열리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 세상과 대상에 대해 주체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질문을 예술가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을까. 자본과 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결합되고 있는 지금, 적어도 예술에서만큼은 관객이 단순한 소비자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예술, 예술가의 좌표를 다시 설정해야 할 시점이다.
이경미
결국 오늘날 예술의 동시대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생성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기술과 관련해서 기술은 오늘날 예술의 새로운 동력이다. 이에 대해 예술가로서 어떤 생산적 포지션을 취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정말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은 매체가 가져온 환경변화에 무감한 채 자기만의 영역에 갇힐 수 있으며, 대중 혹은 시장의 욕망에 부응하는 또 하나의 그럴듯한 볼거리, 또 하나의 대중문화 컨텐츠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떤 예술가도 그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성희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모할 정도로 옵/신 페스티벌, 특히 가상정거장을 기획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예술이 새로운 기술매체에 대해 어떤 포지션을 취할 수 있는지, 거기에서 정치도 시장도 할 수 없는 어떤 미학적 생성이 가능한지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를 질문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예술밖에 없다. 이게 가능하려면 오늘날 예술가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현실에 대한 분석과 비평적 사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나라 문화예술정책의 방향성도 반드시 함께 재고되어야 한다.

각각 그리고 더불어 함께 하는 장(場)

이경미
사실 우리 예술계에서 다원예술 하면 김성희 예술감독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다원이라는 말을 절대로 정의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왔다. 다원을 정의하는 순간 가뜩이나 장르 중심적 사고가 강한 예술계에서 그 역시 또 하나의 장르주의로 빠져 결국 자기들만의 관습적인 프레임에 갇힐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이야기를 되짚어보면, 결국 다원과 컨템포러리는 상호연동되는 것이 아닐까.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돌려보자.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탈장르, 탈경계의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연극이나 무용, 시각 예술 자체의 기반은 어쨌거나 다르지 않은가. 특히 연극은 배우와 관객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어야 하는 것뿐 아니라, 배우와 대사 혹은 말이 중심이 된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연극은 다른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겁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연극과 다원 혹은 컨템포러리,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김성희
독일 연극학자 한스-티스 레만이 이런 말을 했다. 연극은 동시대적인 사회정치문제와 가장 직접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말이다. 그는 연극 자체를 ‘실재의 모임’이라고 정의했다. 이로써 연극의 위상을 정확히 정의하지 않았나 싶다. 68 이후, 가장 슬픈 일은 공동체의 와해가 아닐까. 오늘날은 더 심각하기도 하고. 오늘날 유일하게 공동체 얘기가 가능한 곳이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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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지난 몇 년 이후 한국연극은 정말로 진지해졌다. 노동문제와 젠더, 장애와 동물권, 기후위기까지, 우리 사회가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안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진정성에 하나 더 추가되어야 할 것은 ‘어떻게’의 문제다. ‘어떻게’는 단순한 수사의 차원이 아니다. ‘무엇’과 ‘어떻게’는 서로 밀접하게 연동되어야 한다. ‘어떻게’가 도리어 ‘무엇’의 가치를 그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지난 예술사, 특히 지난 140여 년의 현대예술의 중요한 전환은 바로 이 ‘어떻게’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나는 지금의 연극이 또 한 번의 중요한 전환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이것은 개인 창작자들의 능력 혹은 노력으로도 가능하겠지만, 동시에 외부로부터 동력이나 자극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최근 만나본 연극 창작자들 중에는 다른 예술 장르와 적극적으로 협업하면서, 기술의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둘씩, 고민하는 사람들이 진짜 많더라. 그렇다면 좀 더 비전이 있는 연극 창작자들을 찾아 이들에게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나 싶다. 옵/신 페스티벌이나 가상정거장이 그 역할을 해줄 수는 없을까. 결국 지원기관의 인식 전환 및 예산의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김성희
그런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겠다. 옵/신 페스티벌에서도 노력하겠지만, 연극인들도 옵/신 페스티벌을 찾아 다양한 동시대 관점을 공유했으면 좋겠다. 나는 늘 별자리를 만든다는 얘기를 한다. 동시대에 가장 유효하고 흥미로운 예술가들의 관점들을 계속해서 배치하다 보면, 결국 거기에서 동시대 예술의 지형이 그려진다. 나는 바로 그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한 동시대의 다양한 목소리를 함께 듣고 그 차이와 접점을 함께 찾아갔으면 좋겠다. 나는 나대로 연극하는 분들의 작업 안으로 관심을 갖고 들어가 우리가 얘기한 예술의 동시대적 지형을 함께 그릴 수 있게 노력하겠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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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X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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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한편의 연극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이 극장, 저 극장을 기웃댄다.
'잘 만든' 연극 보다는 꿈틀대는 파동이 느껴지는 연극을 좋아한다.
http://blog.naver.com/purun8

김성희
김성희는 기획자로서 다양한 예술 형식과 관점을 소개, 제작해왔다. 2020년부터 옵/신 페스티벌을 창설하여 예술감독을 맡고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감독(2017-8),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초대 예술감독(2013-2016), 다원 예술 축제 ‘페스티벌 봄’ 창설 및 초대예술감독(2007-2013), 백남준아트센터 개막 축제 스테이션 2 예술감독(2008), 국제현대무용제(Modafe, 2002-2005) 감독을 역임했다. 동시대 예술의 국제적인 플랫폼을 구축하고 아시아 동시대 예술에 대한 담론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원 예술 잡지 <옵.신>을 공동 출간하고 있으며, 계원예술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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