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통 가장자리에 선 작가
신촌문화발전소 2021 오드아이프로젝트 <이홍도 자서전 (나의 극작 인생)>
영이
제202호
2021.06.10
신촌문화발전소의 무대에서 상연된 <이홍도 자서전 (나의 극작 인생)>은 이홍도가 쓰고 송이원이 연출한 작품이다. 공연은 일전에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낭독극의 형태로 상연된 바 있으며 이번 공연은 당시의 결과를 바탕으로 발전시킨 본 공연이라 할 수 있다. <이홍도 자서전>은 선배 작가들을 차례차례 죽이고 그 자신도 신인 작가에게 죽음을 맞는 한 작가의 가상/현실이 담긴 ‘자서전’이다.
공연이 올라가기 전 객석에서 보이는 풍경 중 눈에 가장 먼저 띄는 건 광막하게 아가리를 벌린 쓰레기통이다. 사람 한 명이 사지 멀쩡하게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쓰레기통은 관객과 가장 가까이 있는 소품으로, 본래 푸른빛의 주둥이를 가지고 있지만 조명으로 인해 그 뒤의 다른 소품들과 같이 하얀 빛을 낸다. 그 웅장한 크기로 모자라 돌출된 위치로 인해 가장 먼저 혹은 가장 빈번히 쓰일 것 같은 이 소품은 의외로 무대의 다른 요소들보다 늦게, 그리고 드물게 사용된다. 이 간헐적 사용 패턴이야말로 공연에서 쓰레기통이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쓰레기통은 소품의 영역을 넘어 하나의 텅 빈 공간으로서 주인공이 작가가 되기 위해 경유하는, 그리고 그 자신이 고대하는 ‘작가의 죽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쓰레기통이 처음 사용되는 장면은 작품 초반 주인공 작가의 배우가 자신의 원고를 구겨 쓰레기통을 향해 던지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구겨져 쓰레기가 된 원고는 쓰레기통에 닿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이를 배우 역할의 배우가 주워 집어넣는다. 이 장면은 작품 내에서 ‘아직 공연이 시작되지 않은’ 시점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주인공 작가의 운명을 미리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죽음을 바라지만 그것은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타인의 손으로, 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쓰레기통이 처음 사용되는 장면은 작품 초반 주인공 작가의 배우가 자신의 원고를 구겨 쓰레기통을 향해 던지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구겨져 쓰레기가 된 원고는 쓰레기통에 닿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이를 배우 역할의 배우가 주워 집어넣는다. 이 장면은 작품 내에서 ‘아직 공연이 시작되지 않은’ 시점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주인공 작가의 운명을 미리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죽음을 바라지만 그것은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타인의 손으로, 그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비판의 대상의 비판의 대상
<이홍도 자서전>의 주인공인 작가는 ‘퀴어 작가’로서 선배 작가들을 죽인다. 이는 주인공이 극작 기술을 배우기 위해 가장 먼저 불러낸 선배 작가 에드워드 올비의 가르침으로 시작되는데, 올비는 자신의 가르침으로 후배에게 당수를 맞아 죽기 전에, 극작을 하려면 ‘살불살조 살부살모’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긴다. 무대에서 발화되는 대사들을 극본의 형태로 띄워주던 후면의 슬라이드는 올비의 죽음에 ‘극작 기술 +1’이란 텍스트를 띄운다. 이렇게 극작 기술을 얻은 주인공은 잇따라 테네시 윌리엄스, 토니 쿠시너, 장 주네, 장 콕토 등 선배이자 퀴어 작가들을 불러내어 죽이려 한다. 하지만 그들을 불러내며 주인공은 극작 기술을 얻어내겠다는 자신의 목적 앞에 또 다른 명분, ‘정치적 올바름’을 세워 놓는다.
주인공은 우선 자신의 자서전을 쓰기 위해 자신의 선배/퀴어 작가인 에드워드 올비의 자서전을 정리하고자 한다. 그는 희곡집에 서술된 올비의 생애를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수정한다. 주인공의 시각에서 올비는 <누가 버지니아의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이성애 커플로 가장한 동성애 커플의 이야기를 서술했다. 올비는 그러한 해석을 부정하지만, 주인공은 그가 ‘당사자성’을 수면 위에 드러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올비를 비판할 뿐이다. 결국 주인공은 올비를 죽이고 ‘퀴어 서사’를 창작한 작가로 그의 생애를 고쳐 쓴다.
다음으로 불려 나온 테네시 윌리엄스는 등장 내내 손에 술병을 든 채 취해 있는데, 주인공은 그가 술을 먹다 죽었으며, 퀴어들을 재현하며 (그와 같이) 부정적인 일면만을 그려왔다고 비판한다. 윌리엄스는 자신이 죽은 것은 술을 먹다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술병의 코르크가 목에 걸려 죽은 것일 뿐이며, 퀴어들이 부정적으로 재현된 것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삶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변호한다. 주인공은 이 또한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무기로 후려쳐 죽인다.
토니 쿠시너의 경우, ‘동시대성’을 비판하려는 주인공의 부름에 응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해당 작가의 정치적 올바름을 뚫지 못해, 그리고 작가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죽이지 못한다. 그러나 장 주네는 부르주아 진보 진영에 그 자신의 당사자성을 이용당하는 것을 방관했다는 것을 비판당하고, 장 콕토는 그저 선배 작가라는 이유로 살해당한다. 그렇게 모든 선배 극작가들을 살해한 주인공은 ‘극작 기술 +∞’를 달성해 자신 위에 아무도 없는, 선배 작가가 된다.
주인공은 우선 자신의 자서전을 쓰기 위해 자신의 선배/퀴어 작가인 에드워드 올비의 자서전을 정리하고자 한다. 그는 희곡집에 서술된 올비의 생애를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수정한다. 주인공의 시각에서 올비는 <누가 버지니아의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이성애 커플로 가장한 동성애 커플의 이야기를 서술했다. 올비는 그러한 해석을 부정하지만, 주인공은 그가 ‘당사자성’을 수면 위에 드러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올비를 비판할 뿐이다. 결국 주인공은 올비를 죽이고 ‘퀴어 서사’를 창작한 작가로 그의 생애를 고쳐 쓴다.
다음으로 불려 나온 테네시 윌리엄스는 등장 내내 손에 술병을 든 채 취해 있는데, 주인공은 그가 술을 먹다 죽었으며, 퀴어들을 재현하며 (그와 같이) 부정적인 일면만을 그려왔다고 비판한다. 윌리엄스는 자신이 죽은 것은 술을 먹다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술병의 코르크가 목에 걸려 죽은 것일 뿐이며, 퀴어들이 부정적으로 재현된 것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삶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변호한다. 주인공은 이 또한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무기로 후려쳐 죽인다.
토니 쿠시너의 경우, ‘동시대성’을 비판하려는 주인공의 부름에 응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해당 작가의 정치적 올바름을 뚫지 못해, 그리고 작가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죽이지 못한다. 그러나 장 주네는 부르주아 진보 진영에 그 자신의 당사자성을 이용당하는 것을 방관했다는 것을 비판당하고, 장 콕토는 그저 선배 작가라는 이유로 살해당한다. 그렇게 모든 선배 극작가들을 살해한 주인공은 ‘극작 기술 +∞’를 달성해 자신 위에 아무도 없는, 선배 작가가 된다.
선배 작가가 된 주인공은 자신이 갈망하던 모든 극작 기술을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에 대한 질투와 후배 작가에 대한 불안으로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그의 질투와 불안 모두 현실이 되어 그에게 다가온다. 주인공이 ‘가짜 게이’라고 비판하는 배우 ‘안필’은 주인공이 의심하는 바로 그 당사자성을 이용해 온갖 연극상을 휩쓴다. 자신의 질투가 현실이 되자 주인공은 자신이 생각하는 ‘안필’의 진실을 희곡으로 집필하는데, 이로 인해 주인공은 타인의 이야기를 허락 없이 사용했다는 명분으로 후배 작가에 의해 정치적 올바름의 처단을 받는다. 후배 작가, 혹은 변호사이기도 한 배우는 도덕의 벽이 무너져 도덕의 문지기가 깔려 죽은 틈을 타 자신이 새로운 도덕의 문지기가 되었음을 밝힌다.
공연은 이처럼 정치적 올바름을 무기로 사용해 온 작가 그 자신이 정치적 올바름에 의해 죽음을 받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당사자성’, ‘부정성’, ‘동시대성’ 등을 비판의 기준으로 삼는 정치적 올바름과 그것의 배제성에 매몰된 예술계를 비판하는 듯이 보인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스스로를 위해 박수치는 관객’과 같이 정치적 올바름의 자아도취성에 칼을 겨누는 텍스트에서도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어떻게 보면 <이홍도 자서전>은 ‘혐오 받는 퀴어’가 아니라 ‘혐오하는 퀴어’의 연극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결국 그 정치적 올바름을 이용한 작가의 선배 죽이기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작가들은 무엇을 그토록 갈구했길래 2055년 가상의 미래에서조차 살불살조 살부살모의 관행은 반복되는 것인가?
공연은 이처럼 정치적 올바름을 무기로 사용해 온 작가 그 자신이 정치적 올바름에 의해 죽음을 받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당사자성’, ‘부정성’, ‘동시대성’ 등을 비판의 기준으로 삼는 정치적 올바름과 그것의 배제성에 매몰된 예술계를 비판하는 듯이 보인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스스로를 위해 박수치는 관객’과 같이 정치적 올바름의 자아도취성에 칼을 겨누는 텍스트에서도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어떻게 보면 <이홍도 자서전>은 ‘혐오 받는 퀴어’가 아니라 ‘혐오하는 퀴어’의 연극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결국 그 정치적 올바름을 이용한 작가의 선배 죽이기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작가들은 무엇을 그토록 갈구했길래 2055년 가상의 미래에서조차 살불살조 살부살모의 관행은 반복되는 것인가?
마침내 쓰레기통 속으로
<이홍도 자서전>에서 작가의 죽음이란 물리적 죽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연에서 작가의 죽음이란 작품에서 작가가 지워지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에드워드 올비는 주인공이 그의 생애를 제멋대로 해석하자 ‘그걸 내가 말하는 건 몰라도 다른 사람이 말하면 안 되지’라며 항변한다. 테네시 윌리엄스 또한 자신이 술병의 코르크가 목에 걸려 죽은 것이 술을 먹다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을 집요하게 입증하고자 한다. 그러나 장 주네가 ‘원래 이용당하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라며 체념한 것과 같이, 작품이 세상에 나와 관객, 독자들에게 ‘이용당하는’ 순간 작가들의 죽음은 이미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본 공연에서 무대 장치가 사용되는 방식 또한 작가와 작품의 운명과 맞물린다. 무대 중앙의 흰 책상 두 개는 세워지면 그 윗면이 열리는 구조로 제조되어 장면에 맞춰 옷장으로도, 문으로도, 철로로도 이용된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공책은 가로로 놓여 펼쳐지면 노트북으로 이용된다. 즉, 이 소품들의 본래 기호, 책상과 공책이라는 기호는 소품이 상황에 따라 변조되며 소실되는 것이다. 이는 작품에 작가가 부여한 그 어떤 것도 독자의 손에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운명과 닮았다. 하지만 공연 중간에 사고로 떨어진 달력과 같이 불가피한 작가의 죽음을 <이홍도 자서전>의 주인공은 누구보다도 바라고 있다.
범죄 행위를 저지르고 그것을 찬미한 장 주네를 비판하던 도중 주인공은 잠시 멈칫하고는, ‘지금 나왔으면 바로 절판되었겠다’고 읊조린다. 주네는 이에 ‘부러워 죽겠지?’라는 대사를 남기는데, 이는 주인공의 행위 목적에 대한 가장 적확한 평가임에 틀림없다. 주인공은 부처를 죽이고 조상을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여, 자신이 그들이 되기를, 그래서 그들과 같이 죽임당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죽인 작가들의 극작 능력뿐만 아니라 그들의 운명마저도 얻고 싶어 했다. 테네시 윌리엄스를 만났을 때 그가 술을 권하자 자신은 불면증이 있어 술을 마시지 않는다며 거절했던 주인공은 선배 작가가 되었을 때 윌리엄스와 마찬가지로 술병을 들고 취한 채 등장한다. 이것이 그가 원한 운명이 아니기엔, 주인공에게 생은 ‘등에 칼을 꽂는’, ‘인사도 없이 지나가는’ 것이다. 자신의 글을 ‘똥’이라고 부르는 주인공은 스스로의 대본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쓰레기통 입구에 둥그렇게 올려놓는데, 그것이 떨어지지 않게 살며시 올려놓는 그 손의 떨림은 차마 연인에게 닿지 못하는 설렘과도 같아 보인다. 공연 말미에 주인공은 기차가 다가오는 철로에 머리를 기대듯이 죽음을 맞는다. 이전까지 질투와 혐오, 경멸, 불안으로 떨리던 배우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마치 그 울림을 만끽하듯이, 이것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범죄 행위를 저지르고 그것을 찬미한 장 주네를 비판하던 도중 주인공은 잠시 멈칫하고는, ‘지금 나왔으면 바로 절판되었겠다’고 읊조린다. 주네는 이에 ‘부러워 죽겠지?’라는 대사를 남기는데, 이는 주인공의 행위 목적에 대한 가장 적확한 평가임에 틀림없다. 주인공은 부처를 죽이고 조상을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여, 자신이 그들이 되기를, 그래서 그들과 같이 죽임당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죽인 작가들의 극작 능력뿐만 아니라 그들의 운명마저도 얻고 싶어 했다. 테네시 윌리엄스를 만났을 때 그가 술을 권하자 자신은 불면증이 있어 술을 마시지 않는다며 거절했던 주인공은 선배 작가가 되었을 때 윌리엄스와 마찬가지로 술병을 들고 취한 채 등장한다. 이것이 그가 원한 운명이 아니기엔, 주인공에게 생은 ‘등에 칼을 꽂는’, ‘인사도 없이 지나가는’ 것이다. 자신의 글을 ‘똥’이라고 부르는 주인공은 스스로의 대본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쓰레기통 입구에 둥그렇게 올려놓는데, 그것이 떨어지지 않게 살며시 올려놓는 그 손의 떨림은 차마 연인에게 닿지 못하는 설렘과도 같아 보인다. 공연 말미에 주인공은 기차가 다가오는 철로에 머리를 기대듯이 죽음을 맞는다. 이전까지 질투와 혐오, 경멸, 불안으로 떨리던 배우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마치 그 울림을 만끽하듯이, 이것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이홍도 자서전>의 주인공은 퀴어 작가로서 퀴어 당사자의 이야기를 쓰지만, 본인은 ‘항상 혼자’라고 느끼며 고독에 잠긴다. 다시 말해 주인공 작가의 당사자성은 사회적 연대로 이어지는 장치가 아니다. 작가의 당사자성은 그것이 퀴어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만 남을 뿐이다. 결국 ‘작가의 삶에는 알리바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운동으로서 퀴어에게는 생존이 목적이라도 작가로서 퀴어에게는 죽음이 목적일지도 모른다. <이홍도 자서전>이 그려내듯 작가의 운명은 고독과 외로움, 연대 불가능성뿐이니 말이다.
신촌문화발전소 2021 오드아이프로젝트 <이홍도 자서전(나의 극작 인생)>
- 일자
- 2021.06.04.(금) ~ 2021.06.12.(토)
- 장소
- 신촌문화발전소 공연장
- 작가
- 이홍도
- 연출
- 송이원
- 출연
- 권형준 김정화 박종현
- 무대
- 김재란
- 조명
- 서가영
- 음향
- 목소
- 영상
- 손영규
- 조연출
- 오휘민
- 기획
- 이선민
- 그래픽
- 홍진학
- 주최
- 이홍도X丙소사이어티, 신촌문화발전소
-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 영이
-
폭력과 고통, 그리고 분열의 상관 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 제작. 제2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
https://twitter.com/monthly_pa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