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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사랑하는 폭력

유선

제211호

2021.12.09

AI 알고리즘 기반의 포털 사이트 추천 뉴스를 보고 있다. 개인 맞춤형으로 추천을 해준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내가 선호하는 뉴스가 메이저 언론에 기사화되는 일은 드물어서, 그냥 만인이 다 보는 종이신문 1면 주요 뉴스 정도가 나온다. (소수자 관련 이야기는 비마이너나 일다 등 작은 언론을 따로 보는 것이 훨씬 풍성한 기사를 볼 수 있다) 몇 개의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왕왕 울리는 에코 챔버에 있는 것처럼, 듣고 싶은 이야기만 골라 듣게 되면 확증 편향이 강화된다고 하는데… 요즘은 발행되는 뉴스 전체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은 일들이 끝도 없이 나온다. 뉴스의 문제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이 생태계 전체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지난 일주일만 해도 ‘편향된 페미니스트’를 국민의 힘에서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했다는 이유로 퇴진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것을 포함한 이런저런 이유로 당 대표가 잠행을 했다가 다시 대통령 후보와 불고기를 먹으며 화해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 혼외자를 낳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공동선대위원장이었던 여성이 사퇴를 했다… 여러모로 혼란스럽고 어디에서부터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를 일련의 뉴스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떠오르는 단어는 ‘국민 정서’다. 대통령 선거를 90여 일 앞두고 철저히 지지율만을 기준으로 하는 여러 판단과 21세기에 하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발언들,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뉴스들 앞에서 ‘히틀러도 민주주의 선거로 당선된 인물이라고’ 외쳐본들 누가 신경이나 쓸까 싶다. 2021년 12월의 국민 정서란 무엇일까. 2021년 12월의 대중이란 무엇일까, 민중이란 무엇일까.

지난 두어 달 동안 코로나19, 대통령 선거에 이어 주요 뉴스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은, 유례없는 인기를 보여주었다는 K-콘텐츠 드라마 두 편, <오징어 게임>과 <지옥>일 것이다. 작품의 완성도와 이야기의 짜임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작품이 사회에 놓였을 때 그것이 어떤 현상으로서 영향을 갖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지금 이 순간 전 세계 대중에게 가장 인기 있다는 두 작품이 놓인 사회적인 맥락과 파급에 대해서. 조금 거친 질문을 해보자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환호하는 이야기라면 아무래도 괜찮은가? (당연히 괜찮지 않다) 모두가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이 폭력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이 발표 이후 오히려 그것을 추진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면. 지옥 같은 현실과 폭력을 SF와 서브컬쳐의 과장된 상상력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오히려 현실의 폭력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면. 물론 그것이 작품 자체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해석하고 흡수하는 사회와 대중의 몫이겠지. 더 폭력적이거나 더 잔인한 상상력의 작품들은 예전에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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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 메인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나는 2018년 칸 영화제에서 <어느 가족>이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일본의 치부를 드러낸 작품이라는 이유로 크게 떠들지 않고 쉬쉬하던 일본의 분위기와, 2019년 <기생충>이 같은 상을 받았을 때 기생충 관광 코스를 만들어 홍보하던 한국의 분위기를 떠올려 본다. 국가 간의 차이라기보다, 세계가 그로부터 조금 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 쪽으로 흘러온 것 같다. 그 물이 흙탕물이든 오염수든 돈이 된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쪽으로.

‘국민 정서’라는 것이 때로 소수자를 옥죄는 무법의 단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차별금지법을 만들기에는 아직 국민 정서가…”, “먼저 국민의 충분한 동의를 얻어야…”라는 말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다. 다수결로 하자면 벌써 죽어 없어져야 했을지도 모를 사람들이(다시 인류가 겪은 히틀러의 경험을 상기해보자),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해달라는 그 동의를 얻어야 하는 ‘국민’ 혹은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가 <오징어 게임>과 <지옥>이라면. 자신의 어린 아이들에게 456억 상금을 놓고 서로를 살인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트레이닝복을 입혀 재미로 딱지치기를 시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말에 절대로 공감할 수가 없다.

무려 32년 전에 출간된 『세 가지 생태학』에서 가타리는 베네치아 해에 갑자기 출현한 기괴한 해초의 예를 들며, 사회생태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어떤 해초로서 도널드 트럼프를 언급한다. 당시에 그는 “뉴욕·애틀랜타 시 등의 전 구역을 점령하고, 그 구역을 ‘개축한다’는 구실로 집세를 올리고 동시에 수만의 빈곤 가족을 압박하여 그 태반을 ‘집 없는(homeless)‘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갑자기 출현한 기괴한 해초로부터 시작된 이상한 생태계 교란은 몇십 년 만에 백악관으로 갔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니까, 라는 회의에 가득 찬 말이 아니라 뭔가 다른 기대를 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1989년에 같은 책에서 가타리는 이렇게 말한다.

“해방 투쟁의 목적을 재조성하고 재조립하는 것은 가능한 한 빨리 내가 여기서 제기한 세 가지 유형의 생태-논리적 실천의 전개와 상관적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자. 그리고 자본과 인간 활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여성’이란 맥락에서 생태적·페미니즘적·반인종 차별적인 자각이 주체성 생산—즉 이제는 새로운 생산적 배치의 근원에 존재하는 비신체적 가치 체계와 관련한 인식, 문화, 감수성, 그리고 사교성의 생산—양식을 신속히 주요한 목표로 삼기를 기대하자.”

폭력을 폭력이라 인지하지도 못하는 수준에서 다수가 소수에게 가하는 엄청난 사건, 사고, 폭언들의 뉴스를 매일 듣고 있노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 같은 시간을 대체 얼마나 더 살아야 하는지 절망스러워진다. 세계가 별로 좋지 않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누군가 먼저 상상했던 “자본과 인간 활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여성’이라는 맥락”이 무엇일지를 생각해보았을 때 눈앞이 영 캄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반짝반짝 떠오르는 많은 얼굴들, 지금의 국민 정서에는 반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는 여러 아름다운 얼굴들이 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밑바닥에서 그런 얼굴들을 상상하며, 선택지 바깥의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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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

유선
노들장애인야학 낮수업 교사이지만 한 번도 교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치기도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비장애인 교사의 권위에 대해 생각한다. 인포숍카페별꼴의 매니저 7인 중 1명이며, 3명으로 구성된 다이애나랩에서 33.3%의 일을 맡고 있다. 아기를 낳고 커밍아웃이 어려워진 팬섹슈얼, 비건, 고양이 추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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