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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몰랐고 이제는 안다.

변재원

제214호

2022.02.24

사회로 나오기 전까지 패배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패배를 인정해 본 적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패배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내 삶에도 분명 어떤 종류의 패배가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잘 떠오르질 않는다. 악에 받친 채 누군가와 싸워서 져 본 경험이 없었다. 그 나름 영리한 싸움꾼이었다. 잃은 것이 얻은 것보다 크지 않았다.

패배를 의식하게 된 것은 활동을 시작한 후부터였다. 장애인권운동은 내게 무수한 패배를 안겼다. 제도적 불평등에 대항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아니 더 정확히는 운동에 합류한 시점부터 내 삶의 패배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패배의 요인이 장애인권을 주장했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장애인이었고, 나를 향한 차별은 언제나 장애인 차별이었다. 다만 개인적으로 겪은 차별에 대항하는 과정에서는 패배를 맛본 적 없었을 뿐이었다. 켄타우루스같이 휘어진 몸뚱어리, 드워프같이 작은 키를 지닌 채로 목발 없이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장애인으로서 살아가며, 나를 둘러싼 크고 작은 차별을 경험할 때마다 싸우기를 피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차별에 저항하는 명분이 언제나 있었으며, 명분이 있는 싸움을 끝까지 이끌어가기에 충분히 영악했고 처세술에 능한 장애인이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집착과 깡, 욕망이 내 마음 어딘가에 새겨졌다. 그 덕분에 피해자가 오직 나로 한정되는 사적 갈등 앞에서는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승리는 언제나 같은 포맷을 따랐다. 자잘한 갈등이 있을 때면, 난리 난리 대난리를 치고 바꾸는 방식이었다. 가령, 장애학생지원센터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가 너무 자주 바뀌어 장애학생의 편의제공에 문제가 생기면, 총장 앞 대자보를 써서 학교에 덕지덕지 도배한 뒤 기획처장과 만나서 문제해결을 약속받았다. 장애인이 축제에 가거나 클럽에 가는 게 어려울 때면, 출입 가능한 곳을 끝까지 찾아 가고야 말았다. 장애인의 대학 내 체육시설 출입을 금지하면, 계속 이렇게 나오면 단과대학 학장과 교수님들께 알리고 공론화해서 이 학습권 침해의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겠다 엄포했다. 크고 작은 치킨게임을 거쳐야만, 체육관 출입을 허락받았다. 비장애인에게는 미처 싸움 거리나 되는가 싶은 것들이었지만, 나는 싸워야만 했다.

매일 치고받다 보니, 해를 거듭할수록 싸움의 기술이 풍성해졌다. 당장의 힘싸움에서 밀리거나 기죽지 않으려고 과감해졌고, 집착에 가까운 집요함이 생겼다. 나는 그 능력을 계속 단련이라도 하듯, 사회가 장애인을 만만하게 여기고 차별하는 문제를 대하는 데 맞받아쳤다. 싸움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 상황이 달라졌다. 감정과 행위에 대한 저항이 아닌, 제도에 대한 저항을 시작한 순간부터 패배를 맛보기 시작했다. 늘 이길 수밖에 없는 ‘사적’ 전선에 한정되었던 과거와 달리, 장애인권운동을 시작하며 전선이 한없이 넓어졌다. 넓어진 만큼 무모해졌다. 사인 간의 갈등이 아니라, 제도와의 갈등, 국가와의 갈등, 근본적 이념과의 갈등으로 문제가 확장되었다. 승리의 과실만을 요령껏 따먹을 수 없는 싸움이 주어졌다. 근본적인 제도를 이겨야 했고, 국가를 이겨야 했고, 이념을 이겨야 했기 때문이다. 싸움의 상대가 더 이상 일탈적 개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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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재정부 장애인권리예산 반영 촉구에 대한 입장발표 기자회견
사진 출처: 전국장애인차별폐지연대 페이스북

가장 대표적으로 탈시설과 자립생활의 권리에 관한 싸움은 언제나 패배가 익숙한 전선이었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다는 논리만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넘어야 할 산이 많았고, 설득해야 할 사람이 많았다. 중증장애인을 대책 없이 시설 밖으로 꺼내서 무얼 하자는 것이냐는 왜곡된 시선, 시설중심의 토착화된 정책, 소극적인 탈시설 정책 예산 편성 등은 지형의 불리함을 나타내는 지표들이었다. 승리를 전망하기는커녕, 내일 당장 닥쳐올 패배가 분명함에도 오늘도 싸워야만 하는 전선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규율에 맞춰 장애인이 살아가고, 수용자와 직원으로 계급이 나누어지고,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되는 시설 사회의 구조를 지적하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일탈적인 ‘개인’으로, 일탈적인 ‘기관’으로, ‘제도’를 가리키는 장애인들의 손가락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목소리의 일환으로 중증장애인을 위한 24시간 활동지원 서비스 마련, 공공임대 형식의 지원주택 마련, 국가 공공성 강화 등을 외치면 선동 취급을 받았다. 탈시설과 자립생활 운동은 장애인 정책에 관한 헤게모니 싸움이었고, 이길 수 없는 전선, 꼼짝도 안 하는 전선에 가까웠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앎에도, 시설 중심의 통제 사회에서 자립과 연립을 꿈꿀 수 있는 자기결정 존중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계란으로 바위 치듯 계속 싸우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전선을 펼치고 있다. 만원인 아침 지하철에 장애인이 탑승하고 있다. 대중교통을 함께 타자는 지극히 평범한 외침에서 비롯되었다. 끌려나가도, 욕을 먹어도, 함께 타고 또 타고 있다.

비현실적이라는 말들을 감내하며, 십수 년째 졌고, 앞으로도 질 싸움을 끝없이 이끄는 중이다. 승리를 염두에 두고 싸우는 게 아니라, 패배를 직감하고 싸우는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한다.

승리에 연대하기 위해 우리의 비난과 손가락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패배를 직감하면서도, 꿋꿋이 불평등에 저항하는 이들을 애써 누르는 데 쓰여야 하는가, 이들이 궁지에 몰리도록 만든 채 나 몰라라 하는 진짜 사회를 가리키는 데 쓰여야 하는가. 낮은 자가 차별받는 현실, 가려진 차별의 의도를 찾아내는 데 예술이 함께 있기를 새해 첫 소망으로 갖는다.

그때는 몰랐고 이제는 안다. 개인의 삶에서 승승장구하는 예술학도로서 그때는 몰랐었다. 더 큰 싸움이 존재하는지. 혼자서만 제어할 수 없는 무대가 있는지.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던지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나 혼자의 의지만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란 게 존재하는지.

이제서야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의 존재와 그 가치를 알게 되었다. 10년 만에 깨달은 내 부끄러움을 나누고 표현한다. 그때는 몰랐고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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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원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활동하는 초보 활동가. 투쟁의 현장에서는 활동가들에게 먹물 같다고, 인터뷰 현장에서는 시민들에게 말이 험하다고 놀림당하기 일쑤. 뒤틀린 몸과 말을 끝까지 지키는 활동가가 되기를 소박한 목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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