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를 생각하는 객석, 극장
세상의 모든 극장, 세상의 모든 관객
여름
제256호
2024.06.27
연극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요? 관객은 극장에서 무엇을 기대할까요? 웹진 연극in에서는 지금 우리의 관극 문화와 극장 규범을 질문합니다. 무대와 객석이 어떻게 서로를 환대하고 함께 충만할 수 있을지, 열린 객석과 편안한 공연이 모두에게 어떤 마음의 준비, 혹은 몸의 태도를 요구하는지, 조금은 다른 질문들을 쌓아보고자 합니다.
안 좋은 컨디션으로 극장에 들어간 적 있었다. 극장에 들어가면서도 여차하면 중간 퇴장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연 시작 직전 안내 방송을 들으며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리 거창하지 않은, 극장에 가면 보통 들을 수 있는 안내 사항이었다. 그러나 “관람 중 불편 사항이 있으면 손을 들어주십시오. 안내원이 가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오고 여기저기에 상주한 안내원들이 빨간 봉을 들고 “여기 있습니다”라고 돌아가며 외칠 때 이상하리만치 불안감이 사라졌다. 아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손만 들면 바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안전함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평소에는 ‘그렇구나’라고 무심히 넘겼던 ‘공연 중 가장 큰 소리와 작은 소리, 가장 밝은 조명과 어두운 조명에 대한 안내’도 그때만큼은 관객에게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기 위한 배려로 다가왔다. 만일 그러한 안내가 따로 없었다면 더 예민하고 불안한 상태로 관람했을지도 모른다.
극장 자체 공연 전 안내 방송도 불안감을 사그라들게 했지만, 접근성 서비스 안내 부스에 있었던 인형 중 하나를 안고 객석에 앉은 관객을 보는 순간에도 마음이 편해졌다. 그분이 어떤 이유로 인형을 안고 관람하셨는지 모르지만, 극장에서 준비한 인형을 이용한 사례를 바로 눈앞에서 보면서 ‘관객이 편안한 마음으로 관람하도록 극장에서 애쓰고 있구나’라고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날 필자는 마음을 편히 가지고 무사히 공연을 끝까지 봤다. 반면 다른 극장에서는 공연 시작 전 ‘공연 중 중간 퇴장은 불가하오니 이 점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라는 안내 사항을 듣다가 순간 불안해졌다. ‘그럴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만약에 급하게 나가야 하면 그땐 어쩌지?’ 겁났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설령 중간 퇴장이 가능해도 좁은 객석 통로를 비집고 나가야 하니까 다른 관객의 시야를 방해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상황에서 오직 안전만 생각하며 나갈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컨디션이 안 좋아 중간 퇴장까지 고려했던 적이 있었기에 이전보다 유난히 신경 쓰이는 부분이 많았다.
객석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 객석은 ‘극장 따위에서 손님이 앉는 자리’이다. 그렇다면 그 객석이 있는 극장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전에서 극장은 ‘연극이나 음악, 무용 따위를 공연하거나 영화를 상영하기 위하여 무대와 객석 등을 설치한 건물이나 시설’이라고 한다. 사람이 앉는 자리와 그 사람이 앉는 자리를 설치한 공간이란 점에서 객석과 극장은 결국 사람, 즉 관객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객석과 극장은 과연 관객을 향하고 있는가. 개인적으로는 이 질문에 다소 회의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대다수 객석과 극장은 ‘정자세로 앉아서 조용히 장시간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관객을 주요 관객으로 상정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좌석이 불편한 나머지 허리, 엉덩이 등이 아프단 이유로, 혹은 장시간 앉아 있기 힘들단 이유로 공연 관람을 결국 포기하는 일까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필자의 몇몇 지인은 공연 자체는 흥미롭게 보이지만 좌석이 유난히 불편하다고 소문난 극장에서 상연하는 바람에 망설이다가 예매하길 포기했다. 필자 또한 체력이 갑자기 좋지 않을 때는 상연 시간이 유독 긴 공연은 관람하길 포기한다.
공연 하나만 바라보며 참고 인내하기에는 관객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본인의 컨디션을 고려하여 선택할 수 있는 여지라도 있다면 다행이다. 만성 허리 통증을 앓거나 범불안장애가 있는 경우에는 그보다 훨씬 선택의 여지가 줄어든다.
수많은 극장은 이렇게 외친다. 우리는 어느 관객에게나 열려있는 극장이라고.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관객은 알고 보면 극악의 객석 환경마저 견딜 수 있는 ‘일부’ 관객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극장은 실은 모든, 아니 많은 관객을 아우르지 못한다. 모두를 수용하지 못하는 극장을 과연 열린 공간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런 극장이 관객에게 생각할 여지를 심어주는 광장과 같이 기능할 수 있나. 지금으로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극장은 더 많은 관객을 안고 갈 수 있을까. 나아가 열린 공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한 질문에 개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답하고자 한다.
하나. 다양한 관객을 고려하는 극장
지난 4월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 <스카팽>을 보고 나서 ‘열린 객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열린 객석은 경직된 여건에서 관람이 어려운 장애인, 노약자, 어린이 등을 위해 극장 환경을 조절하는 ‘릴랙스드 퍼포먼스(Relaxed Performance)’의 일환이다. 신체적·정신적으로 다른 조건에 놓인 관객도 편안함을 느끼도록 객석 조명을 밝게 하고, 음향 등도 자극이 강하지 않게 조정한다.1) <스카팽>의 경우 그간 공연과 달리 객석 조명이 비교적 밝았으며 작은 소리로 대화하여도 안내원이 따로 제지하지 않았다. 필자가 공연을 봤을 당시에는 자유롭게 입·퇴장하는 관객을 보진 못했으나 여태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된 다른 공연과 비교하자면 편안한 객석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열린 객석의 의미가 가장 와닿았던 곳은 뜻밖에도 극장 밖이었다. 공연 관람을 마치고 역으로 가는 길에 극장 측 이동 지원 스태프가 휠체어 이용자를 역까지 바래다주는 걸 발견했다. 그때, 공연을 보고자 하는 관객이라면 그 사람이 누구건 자유로이 극장을 오갈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로서 열린 객석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스카팽> 외에도 지난 4월 말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 상연된 연극 <공동창작 실패 다큐멘터리: 생존자프로젝트는 생존할 수 있을까> 또한 열린 객석을 운영했다. 이 연극은 직접 관람하지 못했지만, 열린 객석 안내 문구 중 불안 장애에 도움 될 수 있는 ‘도움 가방’이 눈에 띄었다. 아직 국내에서 열린 객석 사례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다양한 상황에 놓인 관객을 관객으로 염두에 두는 열린 객석 운영 사례가 점차 늘어날 것이라 기대한다.
또 하나. 관객이 ‘수동적 감상자’가 아니라 ‘능동적 참여자’로 녹아들 수 있는 극장
극장을 찾아올 관객의 특성을 세세히 파악하고 그들이 편안하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관객을 단순한 ‘수용자’로서가 아니라 ‘참여자’로서도 끌어오며 창작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도록 유도하는 것 또한 창작자 당사자, 나아가 극장이 해내야 하는 역할이라고 본다. 관객 스스로 또 다른 창작자로서 참여할 여지가 있는 무대가 존재하고, 그런 무대를 극장이 수용한다면 그 극장은 기존의 극장보다 더 열려있는 극장이 될 것이다.
지난 3월 신촌극장에서 관객이 ‘능동적 참여자’로도 녹아들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 극을 봤다. <장기*기억>이란 제목의 공연이었다. 관람 당시 관객은 비닐봉지 뭉치를 쿠션처럼 안으며 보거나 극장 벽에 기대며 보는 등 편안한 자세로 공연을 관람하였다. 이들은 연출의 제안에 따라 비닐봉지로 장기(臟器)를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가지고 자유로이 극장을 누비며 다른 관객, 연출과 반갑게 인사하기도 했다. 공연 마지막 장면은 관객들이 비닐봉지로 만든 장기(臟器)를 극장 밖 발코니에 함께 걸어두는 것으로 끝났다.
필자는 그동안 관객이 수용자로서 어떠한 이야기 혹은 메시지를 ‘그저 받아들이는’ 존재로만 있게 하는 공연을 주로 봐왔다. 그 공연이 상연된 극장은 대부분 프로시니엄 극장으로 관객을 더욱 수용자로서만 존재하게 했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객석과 극장의 이미지를 깨뜨린 공연을 발견하게 되어 관객으로서 즐거움과 더불어 해방감을 느꼈다. 시도가 잘 보이지 않을 뿐이지 관객을 또 다른 동료 창작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공연은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여지를 생각하는’ 극장을 꿈꾸며
연극은 제한된 공간에서 ‘상상함으로써’ 오히려 제한을 뛰어넘는 예술이다. 그렇기에 객석에 앉은 관객 또한 어느 순간 ‘같이 상상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무대에서 제약을 뛰어넘는 연극이 그 점에서 객석에서도 제약을 뛰어넘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수많은 극장에서 연극이 올라가고 있지만, 대다수는 객석, 관객에 대해 경직된 사고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제라도 ‘여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전형적인 객석, 극장을 견딜 수 있는 ‘소수의’ 관객만 연극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객석과 극장이 경직되는 악순환에 빠질 것이다.
연극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의 다양한 여지에 대해 생각하는 극장이 지금보다 더 많이 늘어나길 바란다. 객석, 관객의 기존 개념이 깨질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니며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객석, 관객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해야 한다. 더 많은 여지를 상상하고 고민하는 순간 객석과 극장은 과거보다 더욱 열린 개념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본다.
- 남지은, 「움직이지마! 조용히 해!… 객석에서 이런 말이 사라진다」, 『한겨레신문』, 2024.5.2.,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390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