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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곰팡이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강동훈

제212호

2021.12.23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WHEREISMYKAIROS
정의의이름으로널
장소
서울 24시 세탁소, 지하창고에 딸린 쪽방.
스트리머가 라이브 방송을 진행 중이다. 시청자 수는 현재 두 명이다.
WHEREISMYKAIROS
어머니, 오늘은 그냥 저예요.
다른 건 없고요. 오늘은 요란한 걸 해볼 엄두가 나질 않네요.
요즘 세상에 누가 저 같은 걸 보고 싶겠나 싶으시죠?
제 생각도 그래요. 저도 꽤나 유행에 민감하거든요.
저 같은 게 관심을 끌어보려면 무지 자극적이거나 아주 웃겨야 해요.
엄청 먹어 치우거나 듬뿍 눈물을 짜내는 것도 좋죠.
그래서 저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요. 울다 웃고 눈물 콧물 쏙 빼 봤죠.
사연 팔이, 먹방, 멜로, 액션 다요.
그런데 그러면 뭐해요 어머니. 도통 조회수가 오르지를 않는걸요.
여기도 저 밖과 다름없이 냉혹한 곳이더라고요.
가장 중요한 건 경제성이에요. 이도 저도 아니라면 싸야 하죠.
짧아야 한다고요. 5초 안에 감칠맛이 돌아야 하죠. 생각만으로도 침이 고이게.
중독이요. 그런데 누가 이론을 몰라서 못 하나요?
다 실천이 어려운 거죠. 오늘은 어쩔 수가 없어요 어머니.
세희가 아프거든요. 골병이 들었는지 일어나지도 못하겠대요
잠깐 얼굴이라도 비춰줄 수 없겠냐고 물었는데, 싫다네요.
노크도 하지 말래요. 부당해고를 당해서 기분이 안 좋다나요.
지상에서 여러 대의 세탁기가 동시에 가동된다.
WHEREISMYKAIROS
아, 방이 그새를 못 참고 또 진동을 하네요.
우웅-우웅-. 방이 매일 저를 대신해서 울어주니 외로울 틈이 없다니까요.
같은 신세끼리 참고 살아야죠. 저 친구도 얼마나 햇빛이 그리우면 저리 울겠어요?
여기 바로 위요. 일 층에 세탁실이 있거든요?
세희가 야간직을 맡는 대신 지하창고로 쓰이던 쪽방에 세를 든 건데…
이번에 24시간 영업 매장으로 리모델링을 하면서 CCTV가 4대나 들어왔죠.
그놈들이 한 자리씩 차지한 덕에, 저희는 또 월말에 옮겨 갈 곳을 알아봐야 해요.
그네들 입장에서 따지고 보면 효율적이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아쉽게 됐다, 이 말이에요.
지하 셋방 신세긴 해도, 서울에 사는 실감이 나서 좋았거든요.
거대한 군함의 쪽칸 하나에 몰래 올라탄 기분이랄까.
애초에 덤 같은 거였으니 어쩔 수는 없지만요.
“콩크리트” 님이 입장한다. 입장과 동시에 퇴장한다.
WHEREISMYKAIROS
어머니?
아, 네. 안녕히 가세요.
“지구멸망” 님이 입장한다. 시청자 수는 현재 세 명이다.
WHEREISMYKAIROS
안녕하세요? 갑자기?
배꼽을 까보라고요?
스스럼없이 배꼽을 까는 남성 스트리머. “지구멸망”님은 곧바로 퇴장한다.
WHEREISMYKAIROS
네, 안녕히 가세요. 아무튼 저는 시도 때도 없이 멀미에 시달린다니까요.
바로 위에서 세탁기 50대가 밤잠도 없이 굴러 가거든요.
그 덕에 세희랑 저는 오밤중에도 잠이 깨서 눈이 마주치곤 해요.
자꾸 어디론가 내몰리는 기분이 들어서요. 창문이 없으니 헷갈릴 만도 하죠?
그냥 전 제 방에 누워 있는 건데, 달리 갈 곳도 없는데요.
그 덕에 세희는 요새 길고양이처럼 잔뜩 날이 서 있어요.
저번 주부터 방에 박혀서 만화만 보고 있다니까요. 세일러문 아시죠?
정의의 사도요. 요즘 거기에 아주 미쳐 있거든요. 다 봐야 할 때를 놓쳐서 그런가 봐요.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금방 또 제자리로 돌아오겠죠.
세희도 어머니를 무척 보고 싶어 하니까요. 정말이에요.
한번은 잘 먹지도 못하는 술에 취해 들어와서는 저한테 훈수를 늘어놓는 거 있죠? 답답하다고요. 제가 그렇게 답답하대요. 그렇게 해서 대체 누가 방송을 보겠냐고요.
언제 어머니를 찾겠냐고요. 그래서 자기도 단독 방송을 기획 중이래요.
자기도 어머니께 할 말이 있다나요. 라이브 방송인데 벌써 대본도 써놨대요!
걔는요 어머니. 정말 타고났어요.
남성 스트리머가 시청자 수를 확인한다.
“김씨 아저씨” 님과 “분홍코두더지” 님. 두 명이 시청 중이다.
말을 이어가려는데 “분홍코두더지” 님 퇴장한다.
WHEREISMYKAIROS
오늘도 김씨 아저씨 혼자서만 보고 계시네요.
벌써 6분이 지났는데 채팅창이 내려갈 생각을 안 해요.
바이럴 마케팅이 대세라는데 큰일이죠.
남성 스트리머는 잠시 방송 화면 속 자신을 남처럼 응시한다.
방송 화면 앵글을 의미 없이 조정해 본다.
WHEREISMYKAIROS
안녕하세요, 김씨 아저씨?
있다 오시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일자리 소개해주시기로 한 거요.
저번 달에 챙겨드린 비타민은 잘 드셨어요?
1호선 지하철 안. 청량리 역. 지하철 정차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문이 열린다.
한 손에 셀카봉을 들고 라이브 방송 중인 여성 스트리머가 내린다.
다른 한 손에는 치킨 박스가 들려 있다.
정의의이름으로널
처단하겠다는 거지. 필요하다 싶으면.
그럴 필요도 없을걸. 겁만 주고 돌아올 거라니까.
그래, 진짜 이 안에 치킨 말고 장미칼 들었다고.
아니 그건 또 무슨 시비세요.
그럼 퇴근 시간 1호선인데 양손에 고이 모셔 들고 타겠냐?
어그로 끄는 거 아니라니까. 못 믿겠음 조금 있다 확인해.
주소? 주소를 찍긴 뭘 또 찍어. 왜 니들이 난린데?
정의구현? 네가 뭔데 정의를 운운해?
네가 세일러문이야? 정의는 개뿔.
니들이 하면 그건 그냥 뻘짓이야.
내가 하려는 건 복수라고.
여성 스트리머는 계단 앞에 잠시 멈춰 캡처해뒀던 지도를 확인한다.
그 와중에도 시청자 수가 빠르게 증가한다.
정의의이름으로널
좀 기다려봐 인간아. 다 와간다니까.
4번 출구로 나가면 돼. 여긴 에스컬레이터가 없다니까.
그래. 올라서 돌면 또 계단이야.
지하철은 내가 다 꿰고 있다니까?
그나저나 콩크리트 님아. 너 님은 앵무새세요?
너는 왜 아까부터 계속 주작 주작 거리는데?
못 믿겠음 입 닥치고 지켜보라고. 그래, 좀 믿고도 살아라.
지 손으로 주소 찍어서 보냈다니까.
엄마 찾아주겠다고 나보고 직접 찾아오라고 했다고.
그런데 이 새끼 봐라. 성북동 반지하 살던 놈이 빌라도 아니고 15층짜리 오피스텔로 이사를 갔네?
그것도 보란 듯이 꼭대기 층으로? 그 새끼 저번 달에 이사한다 했을 때부터 이상하다 했다니까. 보증금 천이 갑자기 어디서 나?
로또라도 맞았냐? 하늘에서 떨어졌어?
백 퍼센트. 오빠가 맡긴 돈으로 삥땅 친 거라니까.
채팅 창에 여러 주장들이 쏟아진다. 의견이 분분하다.
“정의구현가즈아” 님 과 “속은순간끝” 님을 중심으로 양측이 치열하게 공방 중이다.
정의의이름으로널
속았으면 포기하라고?
그게 어떤 돈인데 포기를 해. 오빠가 뼈 갈아서 번 돈이야.
중졸 도장 찍고 올라와서 여태 모아둔 돈이라고.
그런데 엄마를 찾아주겠다는 놈이 그 돈을 왜 자기 이사하는데 꼴아 박아? 지가 무슨 대부업자야? 흥신소 탐정이야?
속은 오빠는 죄 없다. 그냥 등신인 거지.
못 말린 내가 죄인이야. 그래도 오빠는 시인이라고.
새로운 시청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식별하기 어려운 속도로 채팅 창이 내려간다.
여성 스트리머는 채팅 창을 읽어 보려다 포기하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정의의이름으로널
아무튼 나는 오늘 끝장을 볼 거니까 알아서들 해.
신고하려면 해보라고. 내가 누군지는 알아?
지하의 쪽방. 시원하게 배수 소리가 들려온다. 남성 스트리머의 방송 시청자 수는 다시 3명으로 늘었다. 모서리를 차지한 곰팡이가 방송 화면 전면에 드러난다.
WHEREISMYKAIROS
저 초록곰팡이들, 보이세요 어머니?
딱 제 꼴이 저렇다는 거예요.
무슨 신화 속에나 존재하는 시인처럼 굴지 말라는 거죠.
다시 자기 얼굴이 보이게 앵글을 고쳐 잡는다.
WHEREISMYKAIROS
그래서 저는 ‘최고의 칭찬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를 했죠.
세희가 아주 속이 터져 하더라고요.
제 멱살을 막 움켜쥐고 따발총처럼 쏘아대기를-
“이 세상에 대체 진짜 시인이 어디 있는데?
오빠가 흉내 내는 그 사람들은 예수가 오기도 전에 죽은 사람들이야. 맥도날드 한번 못 먹어본 사람들. 히틀러 취임연설도 놓친 사람들이라고. 그런데 걔네들이 치킨 한 마리에 2만 원이 넘는 세상을. 대통령이 탄핵되는 세상을 상상이나 했겠어? 그런데 왜 오빠는 죽은 시인의 말투나 흉내 내고 있는데!”
말이 빨라질수록 방송과 현실의 아주 짧은 레이턴시가 발생한다.
먼저 말을 마친 남성 스트리머는 방송 속 자신의 메아리가 멈추길 잠시 기다린다.
WHEREISMYKAIROS
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듣고 있었어요.
그러다 조그맣게 변명처럼 부끄러운 말을 늘어놨죠.
‘그래도 나는 본질은 같다고 생각한다’고요.
세희는 그제야 멱살을 놔주면서 고개를 떨구더라고요.
세상이 더 나빠졌다고 유세 떠는 게 아니라고요.
지금이나 그때나 다를 게 있겠냐고요.
다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그렇게 한들.
지금 이 세상에 누가 제 말을 들어주겠냐는 거죠.
저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어요.
“영웅재림” 님이 입장한다. 시청자 수가 4명으로 늘었다.
채팅 창에서 “김씨 아저씨” 님을 제외한 3명의 시청자들이 대화를 시작한다.
방송 내용과는 무방하게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다.
WHEREISMYKAIROS
시를 위한 아크로폴리스가 제가 사는 서울엔 없으니까요.
오디세이아 속 풍랑 같은 시련들도 없죠.
제 인생의 시련은 월세 30에 보증금 500을 모으는 일이니까요. 생판 모르는 고인의 장례식에 조화를 늦지 않게 배달하고, 힙합을 틀어 놓고 박스 하나당 비타민 20개를 오차 없이 채워 넣는 거요. 남의 집 변기가 막히면 뚫어뻥을 들고 달려가 물이 절대 넘치지 않게 하는 거요. 시시했어요. 비참했죠.
“영웅재림” 님 다시 퇴장한다.
WHEREISMYKAIROS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요, 어머니.
인생에 장르며 형식이 다 무슨 상관인가요?
이 모든 게 다 그저 어머니를 만나려고 시작한 일인걸요.
“김씨 아저씨” 님을 제외한 다른 시청자들도 모두 퇴장한다.
WHEREISMYKAIROS
그래서 방송을 해보기로 한 거예요.
하루라도 빨리 소문이 퍼지게요.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더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에요.
시청자 수. 조회 수.
눈에 뚜렷이 보이는 수치가 있으니까요.
인생의 목표가 드디어 명확해진 거죠.
대로변 횡단보도 앞. 경차의 경적 소리와 함께 여성 스트리머가 멈춰 선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린다.
정의의이름으로널
마일스 데이비스는 초록이지. 블루스라고 뭐 다 같은 블루스냐.
분명히 초록색이라니까. 푸른 곰팡이를 착각하는 게 아니라고.
처음에 나는 그게 민트맛 솜사탕인 줄 알았다니까?
채팅 창은 잠시 제 기능을 잃고 지식의 창구로 변모한다. 백과사전, 위키백과, 지식인 등 온갖 출처의 정보들을 퍼 나르며 시청자들이 “초록곰팡이”의 존재 가능성을 반박하고 있다.
정의의이름으로널
푸른색 흰색 검은색 말고 다른 곰팡이는 존재하지를 않는다고?
네가 봤냐? 직접 봤어?
초록. 그 자식들이 입주하는 첫날부터 방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니까. 내가 방을 더럽게 써서 그런 게 아니라고.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니까.
해가 안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도무지 줄어들 생각을 안 해.
빠르게 내려가는 채팅 창을 확인하던 여성 스트리머.
정의의이름으로널
그래, 네 말 대로 따지고 보면 걔네들이 그 방에 원주민,
우리가 손님이지. 그래서 내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딱 선을 그은 거 아니야. 여기만 넘어오지 말고 거기서 조용히 살라고.
우리가 침략자긴 해도 피차 같은 처지.
공생까진 아니더라도 같이 살긴 살아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요새 그 녀석들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니까.
조용히 좀 지낸다 싶더니 장마철이 가까워지니까 막 영역을 확장하려고 들잖아.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거지.
걔네들한테 뭘 기대하냐? 애초에 걔네들은 본체도 없어 본체가.
그냥 증식을 위해 태어난 애들 아니야?
신호가 초록불로 바뀐다. 여성 스트리머는 횡단보도를 빠른 걸음으로 건너기 시작한다.
정의의이름으로널
그래 바로 저 색이라고.
신호 바뀐 거 안 보이냐? 딱 저런 초록색이라고!
WHEREISMYKAIROS
그래서 월세가 말도 안 되게 저렴하잖아요.
자기도 양심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제값을 받기엔-
방이 너무 습하다는 거죠. 좋은 점이 더 많아요 어머니.
월세 받는 날 말고는 사람들이 아무도 내려와 볼 생각을 안 하거든요. 최고죠. 영화처럼 지상이랑 단절돼 있다거나 그런 것도 절대 아니고요. 보세요.
여기는 서울이잖아요. 항상 연결돼 있죠.
남성 스트리머는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핸드폰을 들고서 비좁은 방을 누비고 다닌다.
WHEREISMYKAIROS
세탁실 덕분에 와이파이가 끊길 일이 없다니까요.
덕분에 라이브 방송도 24시 잘 터져요.
그 에서도 가장 제 마음에 드는 건요.
왼쪽 벽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원주민들의 구역이에요.
세탁기 50대에 연결된 배수관들이 전부 저 벽을 타고 하수구로 뻗어 있거든요. 덕분에 지상에서 배출된 오수는 전부 제 방을 타고 내려가요. 24시간 끊김이 없죠.
그래서 집 한가운데 요상한 맨홀이 있는 거라니까요.
남성 스트리머는 소리를 들어보라는 듯 조심스럽게 벽에 핸드폰을 가까이 댄다.
WHEREISMYKAIROS
들리세요 어머니? 꼭 원시림에 있는 것 같죠?
방해 없이 하강하는 저 물줄기가 마음에 들어요.
어디서 왔는지는 모두 알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위층에서 세탁기 여러 대가 한 번에 굴러가기 시작한다.
배수관을 타고 오수가 시원하게 흘러내려 간다.
정의의이름으로널
저기 보인다. 이제부터 직진이야. 나를 왜 자기 집으로 불렀겠어.
속내야 뻔하지. 어떻게 한 번 해보려는 거라고.
그러니까 너네, 쓸데없이 참견 좀 하지 마.
감 놔라 대추 놔라 하지 말라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떻게 할 거냐고?
우선은 순진하게 머리를 반쯤 귀에 넘기고 들어가야지.
안녕하세요, 아저씨?
출출하실까 봐 치킨도 한 마리 포장해 왔어요.
그러면 그 새끼는 또 좋다고 내 어깨를 쓰다듬으려 할 거 아니야.
그때 오늘은 살짝 넘어가 주는 척.
아저씨, 전에 말씀하신 일자리는요?
찾아주기로 하신 저희 엄마는요?
그렇게 넘어가는 척을 하다가 그냥 딱!
치킨 박스를 열고 칼을 꺼내는 거야.
자기 거시기 앞에서 식칼이 달랑대는데 지가 안 쫄고 배겨?
그래 임마. 원금에 이자까지 쳐서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낼 거라고. 너희들 한 명 한 명이 증인이라니까. 빼도 박도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부지런히 좌표 찍어 나르라고.
가만히 기다리면 기회가 알아서 찾아오냐?
이번에 최고 조회 수 좀 찍어보자.
나도 까짓 거 뉴스에 한번 나보자고.
WHEREISMYKAIROS
그래서 한번은 세희랑 뚜껑을 열어 봤어요. 궁금하잖아요.
방 한가운데 뚫린 맨홀 아래 뭐가 있을지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고요.
너무 어두워서 깊이도 가늠이 되질 않았죠.
그런데 저 아래에서도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물줄기가 하강하는 소리요. 끝도 없이 내려갔어요.
그때 머릿속에 이런 의문이 들더라고요.
지하도 저렇게 넓은데.
왜 다들 위로 올라가려고만 할까, 그런 의문이요.
오피스텔 공동 현관 앞. 여성 스트리머는 주소상의 건물 앞에 도착한다.
시청자들은 오피스텔 이름과 위치를 추론하느라 분주하다.
정의의이름으로널
건물 때깔 봐라. 뭐? 앵글 올리라고?
미쳤냐. 나 여기 있다 광고할 일 있어?
어디긴 어디야 공동 현관 앞이지. 어떻게 할 거냐고?
배달 음식이랑 같이 들어가야지.
오토바이가 정차한다. 인터폰 전화벨 소리.
1104호 주민과 치킨 배달원, 서로를 확인한다.
여성 스트리머는 빠르게 자신의 얼굴만 보이도록 앵글을 조정한다.
정의의이름으로널
됐다.
공동 현관문이 열린다.
WHEREISMYKAIROS
생각해보면 서울이 63빌딩과 남산타워로만 유명한 건 아니잖아요? 하수 시설과 지하철. 전부 세계 1위죠.
어머니, 그래서 저는 새로운 가설을 하나 떠올려봤어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15층 버튼을 누른다. 치킨 박스 든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정의의이름으로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내가 좆 되겠다 싶으면, 오빠한테 바로 알려.
앉아서 또 답답하게 나만 기다릴 거 아니야.
지금 오빠 채널 주소 찍었다.
대신 지금 들어가서 스포하면, 너네 진짜 다 죽는 거야.
지하 쪽방의 맨홀 뚜껑은 어느새 열려 있다.
WHEREISMYKAIROS
어머니도 어쩌면 저 아래에 계신 건 아닐까 하고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오랫동안 엇갈릴 수 있나 싶은 거죠. 서울로 오라고.
그 말만 듣고 저희 정말 부단히 노력했거든요.
정의의이름으로널
들키면 이빨로라도 물어뜯어 버릴 거야.
누가 그러더라. 개가 사람을 문다고 사건이냐고.
사람이 개를 물어야 그게 사건이라고.
그 말을 듣는데 머리가 순간 핑 돌더라니까?
WHEREISMYKAIROS
배수관을 따라가다 보면 하류가 나올 테니까요.
폐수들이 전부 모이는 곳이요.
어머니, 거기서 기다리고 계신 거죠?
그래서 여태 저희가 만나지 못한 거죠?
정의의이름으로널
사람이 개를 물어도 사건인데
개보다 못한 처지에, 나도 올해에 토픽에 좀 올라보자
WHEREISMYKAIROS
혹시나 해서 손을 뻗어 테스트를 해봤는데-
와이파이도 빵빵해요!
거기까진 요금을 받으러 올 사람도 없을 거 아니에요.
방송도 계속 할 수 있을 거예요 어머니.
15층 도착 안내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여성 스트리머는 주소상 표기된 호수 앞에 멈춰 선다.
정의의이름으로널
그 아이디어가 떠오른 후부터,
어디서 들어본 만화 주제가가 자꾸 떠오르는 거야.
여성 스트리머는 노크를 한다. 대답이 없다.
문손잡이를 살짝 돌려보자 그대로 돌아간다.
WHEREISMYKAIROS
저희가 내려가도 누가 짐작이나 하겠어요?
월세를 받으러 온 집주인도, 김씨 아저씨도
저희가 그만 소멸해버렸다고 생각할걸요.
정의의이름으로널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WHEREISMYKAIROS
그런데 어머니, 김씨 아저씨가 아직도 보고 계시네요?
정의의이름으로널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WHEREISMYKAIROS
제가 드린 비타민이 별로 효과가 없었나 봐요?
그래도 비밀은 지켜 주셔야 해요 아저씨.
아저씨도 저한테 거짓말을 치셨잖아요.
저도 보답으로 작은 장난을 쳐본 것뿐이니까요.
정의의이름으로널
엄마, 보고 있어?
여성 스트리머가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살짝 열린 틈으로 여성 스트리머가 얼굴을 집어넣는 순간,
형체를 알 수 없는 초록생물체가 방송 화면을 가득 덮는다.
여성 스트리머와 채팅 창이 동시에 비명을 지른다.
비타민 박스에서부터 퍼져 나온 초록곰팡이가
방과 사람의 형체를 완전히 덮어 버렸다.
WHEREISMYKAIROS
어머니, 조금 늦게라도요.
지금 라이브를 놓치셨다고 해도요.
이 전 영상들처럼, 업로드해서 박제해 둘 거니까.
채널이 폭파되지 않는 한-
지상의 제 모습은 계속 거기에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지하의 쪽방. 남성 스트리머의 핸드폰에서 계속 진동이 울린다.
시청자 수가 급상승하고 채팅 창이 쉴 새 없이 내려간다.
그러나 더 이상 채팅 창을 보고 있지 않은 남성 스트리머에게는 무관한 일이다.
WHEREISMYKAIROS
나중에라도 제 방송을 보신다면요.
혹시라도, 아직 이 위에 남아계신다면-
저희는 지하에서 기다릴게요.
누가 짐작이나 하겠어요?
어쩌면 신화 속 전설처럼 회자될지도 몰라요.
저희가 사라진 자리에서 초록곰팡이가 피었다고요!
꽃말은 기다림. 기다림으로 할래요.
아니면 그냥 제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어머니가 부르면 다시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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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훈

강동훈
1996년 생.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글을 쓰고 연출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2020 국립극단 희곡우체통 「그게 다예요」로 데뷔했고, 공연/음악/패션계의 글로벌 창작브랜드를 꾸려보자는 오늘의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whereismytouch, rkdgns7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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