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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Peace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김도담

제212호

2021.12.23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
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상수, 아현, 화정, 봉천
장면
화장실의 좁은 칸막이 세 개가 차례대로 놓여있다. 장면은 칸막이의 안과 밖에서 진행된다.
무대의 좌우측으론 등장인물이 등퇴장을 할 수 있는 문이 있다.
무대 후면엔 스크린으로 활용할 흰 장막.
1막과 2막은 세트 체인지 없이 같은 무대를 사용해야 한다.

1막.

딩동 딩동 이번 역은 상수, 상수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오른쪽입니다. 안내방송. 상수가 종이가방을 들고 입장한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중간 칸막이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사이.
봉천이 뛰어 들어온다. 왼쪽 칸막이부터 차례대로 노크. 모두 반응이 없다. 봉천, 욕지거리를 하며 이번엔 중간 문을 확 열어본다. 밝은 조명. 관객들은 문이 열려 상수가 원피스를 입고 불편한 자세로 서있는 모습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나, 배우들은 문이 닫혀있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연기해야 한다.
늙은 남자. 허공의 보이지 않는 문에 노크를 한다. 녹음된 쾅쾅거리는 소리.
봉천
계시유?
그대로 굳어버린 상수. 노크소리.
봉천
거 누구 있슈?
상수, 답이 없다. 더 빠른 속도로 문을 두들기는 봉천.
봉천
아까 먹은 올뱅이국이 상혔는지 배가 션찮아. 겨 있는거 다 아니껀 엔간치 하고 나오슈.
상수, 답이 없다. 침 넘어가는 소리.
봉천
아따, 대답도 없는갸?
상수, 말이 없다. 천천히 몸을 움직여 종이가방을 집는데- 아뿔싸! 젖어서 찢어져 있다.
봉천
뭐더러 거 틀어박혀서 입 쿡 닫고 있는 겨? 내는 인쟈 여서 한 발자국도 못 가겠슈. 시방 꼬린내 맡아뿌니 거시기, 지뢰 밟은거마냥 움직이면 터질 것 같다유.
상수, 종이가방을 조심스럽게 무대 바닥에 두고 옷 지퍼를 내리려 하는데- 평소보다 더 크게 들리는 지퍼음. 무대에선 녹음된 음향으로 구현한다.
봉천
인쟈 지퍼내리는겨? 워매, 어쩐댜. 시방. 사나이가 시작 핬으면 끝을 봐야쥬. 내갸 딱 오 분만 더 기다려주겠슈. 알갔슈?
상수, 답이 없다, 사이를 두고 울리는 휴대폰 카톡.
봉천
하유- 어쩐댜? 움직이면 나올 것 같은디, 좀만 참아봐? 옥순 할멈 팔순잔치가 근척인디, 내 없으면 노인정이 안 돌아가는디. 참말루 야단났네.
상수, 휴대폰을 연다. 오른쪽 문에서 아현의 등장. 상수를 바라보고 선다. 카톡 배경화면이 무대 후면에 투사된다. 스크린 속 상수와 아현의 대화는 그 배역이 직접 읽으며 연기한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혹은 미리 녹음된 영상이며 문자들이 올라오는 타이밍에 맞춰 발화가 이어져야 한다. 이때 이들의 대사는 관객들만 인식할 수 있다는 설정이며, 무대 위의 배우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아현
어디얌?
상수
내 장실! 좀만 기둘
아현
8번 출구 앞
상수
웅웅 배는 안 고파?
아현
쫄쫄 굶고 왔지. 약속한 건 잘 돼감? (귀엽게 웃는 캐릭터 이모티콘, 배우는 그 표정과 동작을 따라 한다)
상수
뭐어?
아현
원피스! (웃는 이모티콘) 예쁘게 하고 나오기로 했잖아 (손가락 두 개 뿅 이모티콘)
상수
아현
오늘은 자기한테 특별한 날인 거 알지? 밖에서 새로 태어나는. (활짝 웃는 이모티콘)
상수
입잖아. 집에서.
봉천, 또 한 번 문을 노크하려다 참고 주변을 서성인다. 문에 팔을 기대고 심호흡을 하는 그.
아현
에이. 그게 모야. 원피스는! 이런 날씨에 팔랑팔랑 하라고 입는 거야. (샤랄라 캐릭터 이모티콘)
상수
나도 알거든.
아현
근데 뭐! 자꾸 그러면 이제 옷 안 봐준다? 너 패션-쇼의 유일한 관객임을 잊지말라구 (메롱 이모티콘)
상수
(놀람 이모티콘)
아현
백화점에서 007 뺨치는 작전도 펼쳤잖아. 나 없음 돈만 날리고 옷은 받지도 못했을걸? 수요와 공급! 동시에 잃게? (놀리는 캐릭터 이모티콘)
상수
(뜨악 이모티콘)
아현
나 같은 애 또 어디서 찾겠어 ㅎㅎ
상수
(황당 이모티콘)
아현
도착하면 연락해. 기다리는 거 알지? (부끄러움 이모티콘)
상수,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내린다. 잠시 정지되는 스크린. 사이. 카톡! 상수는 휴대폰을 든다. 무대 왼쪽 문에서 화정의 등장. 상수를 바라보고 선다.
화정
아들 어디야?
상수
왜.
화정
엄마가 좀 늦을 것 같아 (촌스러운 웃는 이모티콘) 밥은 먹고 오나 싶어서.
상수
알아서 할게.
화정
부족한 건 없고? 한 달 용돈은 적당해? 옷 사줄까? 필요한 거 있음 뭐든 말해.
상수
괜찮아. 나 바빠.
화정
공부하느라 바쁘지? 맛난 거나 먹고 와. 엄마가 돈 넣어줄게. (캐릭터가 돈다발을 휘날리는 모습)
봉천
(봉천의 노크소리) 거 아직 멀었슈?
화정
아들 사랑하는 거 알지? 허리힘 팍주고, 파이팅!
화정
성공은 매일 부단하게 반복된 작은 노력의 합산이다 괴테. 한계는 마음에서 나온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100% 믿는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할 수 있다. 아놀드 슈워제너거. 꿈은 실현된다. 최후에 웃는 자가 가장 신나게 웃는다. 밴브루. (의미심장하게) 쉬워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어렵다. 괴테
봉천
(봉천의 노크소리) 아이고. 참말루 배 곯아 죽겄슈. 이카믄 내갸 오기가 생기는겨. 시방. 참을만큼 참았는디. 쟈는 왜 말이 없댜.
상수, 고민에 빠진 듯 고개를 숙인다. 마침내 원피스 지퍼에 손을 대는데-
아현
다 와가?
상수
어… 근데…
아현
40분차 탔잖아 (걱정하는 이모티콘)
상수
아까 내려서 화장실 왔대두
아현
거기 전세냈니? (시계보는 캐릭터 이모티콘)
상수
사정이 있어. 사정이.
아현
뭔 일 있어?
상수
아니…
아현
너 설마
상수
응?
아현
창피해서 그러지?
상수
어… 뭐… 뭘!
아현
원피스
상수
… 걸렸네
아현
김상수.
상수
응… (좌절하는 이모티콘)
아현
약속했잖아.
상수
미안해. 나도 모르겠어. 이걸 입고 나가도 될지.
아현
나도 이해해. 근데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는 거잖아.
상수
알아. 아는데/
아현
나도 자기한테 엄청 미안하고 또 고민 많이 했는데. 그때. 결정했잖아 우리. 밖으로 나가보자고.
상수
맞아. 그랬지.
아현
뭐가 그렇게 무서워?
상수
전부다.
아현
내가 말해준 거 기억나?
상수
응. 그건 정말 고마운데.
봉천의 노크소리
봉천
거시기, 여저까지 뭐한다겨 대간하게 방구나 북북 끼고 있는겨?
아현
근데?
상수
시간이 필요해.
아현
어떤 시간?
상수
(울고 있는 캐릭터 이모티콘)
아현
예약한 곳 브레이킹 타임 걸리겠다.
상수
몇 시?
아현
세 시 (2시 50분을 표시하는 휴대폰 시계가 확대된다)
봉천의 노크소리
봉천
워매- 사람 죽겄다. 천상 여가 내 눕을 곳이구먼. 아이고 엄니
아현
(윙크하는 이모티콘) 랫츠 파뤼 투데이에 우리 넘 심각했다 ㅎㅎ 내 맘 알지?
상수
자기야 근데…
아현
왜? 할 얘기 남았어?
상수
지… 지금… 내가 좀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어.
아현
엥? 왜왜왜 뭔일인데 괜찮아? 누가 쫒아와? 사람들이 뭐라 해?
상수
여서 원피스 입으려 했는데 밖에 할아버지가 와선 안 나가고/
아현
응?
상수
문을 막 두드리면서 나오라고 난린데/
아현
에휴…
상수
진짜야 카페 화장실 가기엔 시간도 없고/
아현
(찌릿하는 캐릭터 이모티콘) 너 또 하기 싫어서 말 지어내지.
상수
내 진짜루 심각한데 ㅠㅠ
아현
자꾸 헛솔하면 나 간다.
상수
아니 이걸 입고 지하철을 어떻게 타! 갈아입을 수밖에 없는/
아현
또또또 전에도 그랬어 너. (삐지는 이모티콘)
봉천의 노크소리
아현
난 자기가- 당당했으면 좋겠어. 인간들 시선? 뻑큐 날려주고 런웨이 제대로 달려버리자. 꽃밭이 아니라 똥밭이라도, 가는 곳 그대로 직진 해버리자구.
봉천의 노크소리
아현
말했지. 데이트 할 때면 언제나 덤으로 끼는 종이가방을 보면서. 응원한다고. 잘 어울린다고. 같이 끝내주게 페미닌한 트윈룩 입고 돌아다녀 보자고. 야. 괜찮아 입고 나오자. 넌 예뻐. 난 자기 모습 그대로를 좋아해. 숨고 도망가고. 그런 상수가 아닌. 너가 좋아하는 걸 즐길 줄 아는 상수를.
상수
오글거리게 왜 그래.
아현
오글이 아니라 섬세한 거야 자기처럼. 나 가족 일로 힘들 때 먼저 알아채고 같이 있어준 사람이 누구야. 이번엔 내 차례지.
봉천의 노크소리
봉천
으어아아아으 허어어 참말류- 성, 성이라고 불러 드리면 되겠유? 여보슈. 대체 우짜면 나오겠슈
아현
됐고, 선택해.
상수
아 있어보라니깐……. (엎드려 싹싹 비는 캐릭터 이모티콘)
아현
방금 한 말들 하나두 이해 못했지?
상수
왜그래 ㅠㅠ
아현
넌 암것두 몰라
상수
아직 마음의 준비를 ㅠㅠㅠㅠ
아현
준비만 하다 놓치던가.
상수
뭘? 자기야 진짜 내가 좀만 있다 나갈 거니깐-
봉천의 노크소리
봉천
성… 잘생긴 면상이라두 봅시데이. 성… 진로 쐬주 넉병이래두 사드릴테니깐
아현
알잖아. 세시에 간다.
상수
(대성통곡 이모티콘) 어디 맥날이라도 가 있을래?
봉천
(봉천의 노크소리) 성… 거시기, 거시기하다가 하마 팬티에 쪼마 지려부리겠슈. 바지라두 살리게 지발 좀
상수
아현아 미안해 곧 갈게. (카톡!)
이따 우리 맛난 거 먹자. (카톡!)
나 차단했니? (카톡!)
야 김아현.
사라지지 않는 1. 상수 아현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받지 않는다.
봉천
아이고 어무이. 소자 곧 갑니댜 자식 똥독올라서 만납니다유
상수
내 인생은 왜 요모양 요꼴인지.
봉천
참말루 무섭댜. 거시기 하린내 요지룰하게 살아왔건만 염라대왕한테 혼날 생각에-
상수
한 발자국만 나가면 되는 건데. 뭐가 무서워서 망설이고 있는 걸까. 나도 취미라는 걸 플렉스 하며 살고 싶은데. 왜 여기 콕 박혀서 바들바들 떨고 있어야 해?
봉천
(봉천의 노크소리) 거시기 거 참 거시기갸 거시가 안합네까!!
상수
오늘 진짜 맘먹고 나왔다고. 더 미루기도 싫고. 아현이 앞에 딱! 하곤 등장하고 싶었다고. 그러면서도 종이가방은 또 들고 나왔고… 나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 나가고 싶다고. 근데-
봉천의 노크소리 상수 휴대폰을 본다. 3시 1분 전. 상수는 옷매무새를 세심하게 고친다.
상수
하필이면 오늘따라 완벽해. 이대론 벗기도 아깝잖아. 이 정도 셋팅운은 한 달에 한 번씩만 오는 걸. 어차피 손에 들고 나가면 더 이상하게 보일 거고. (사이) 맞아 아현이가 다 맞아. 언제까지 숨어 살 거야? 나가자. 나가야 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약속이야. 내가 바랐던 약속이고. (되뇌며) 상수야. 탓만 하며 시간 다 가겠다. 오늘이야. 오늘. 밖으로 나가는 날. 예뻐질 날. 소중할 날…
봉천
거시기가 거시기 하다 거시기하는데 거시기가 거시기는 거시기해서 거시기는 이거시 저것 같고, 저거시 이것 같고, 거시기가 저시기이고, 저시기가 그 거시기이고….
상수
아현이가 해준 말은 이거였어.
봉천
거시기…
상수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해보라고.
상수 휴대폰을 본다. 3시 정각.
봉천
시방…
상수
난 아현이를 만나야해. 그리고…
봉천
엄니…
상수
원피스.
봉천
(단말마의 비명에 가까운 신음)
마침내 상수는 옷차림 그대로 벌떡 일어나선 밖으로 나간다. 봉천과 눈빛 교환. 정적. 긴 사이. 이상하게도 봉천의 반응은 차분하다. 욕을 하지도 놀라지도 않는다. 마치 그냥 평범한 정장 입은 사람을 본 것처럼 대사 하나만 던지며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것이다.
봉천
으흠, 흠흠. 아우 옷이 참 예쁜겨 우리 옥순이 사주면 좋아하겠댜. 젊은 총각! 고생했슈!
사이. 굳어버린 상수의 뒤로 아현의 인기척. 그는 아현을 돌아보고 정신을 차린 듯 그녀에게로 달려간다. 아현, 반갑게 상수를 맞이하곤 안는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어색한 듯 쭈뼛쭈뼛 풀곤 서로의 옷매무새를 체크해준다. 둘은 손을 잡고 꽁냥거리며 퇴장한다.
암전.

2막.

딩동 딩동 이번 역은 화정, 화정역입니다. 내리실문은 왼쪽, 왼쪽입니다. 상수의 등 뒤로 화정이 들어온다. 그녀는 손엔 과일 쟁반을 들고 문 앞에 선다.
화정
아들, 친구는 잘 만나고 왔어?
상수
늦는다면서.
화정
일이 일찍 끝났는걸. 과일이라도 챙겨왔어.
상수
안 먹어요.
화정
중간고사 별로 안 남았더라. 우리 상수 열심히 하는 거 엄마도 알아.
상수
그거 거기 두고 가세요.
화정
조금만 더. 힘내서 해보는 건 어때? 엄마친구아들은 대학교 들어가서 장학금 받았다는데.
상수
(침묵)
화정
엄만 밖에서 힘들게 고생하면서도 우리 상수 생각만 하고 버틴다고.
상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화정
엄만 모르는 게 없어. 알지?
상수
(침묵)
화정
여드름도 자꾸 생기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무슨 일 있어?
상수
없어.
화정
그러지 말고 엄마한테 털어놓아 봐.
상수
없다니깐.
화정
엄마는- 상수가 말하고 싶은 게 있어 보이는데?
상수
없어. 나가라니깐 제발.
화정
그럼 아까는 뭔데?
상수
취미 생활.
화정
어떤?
상수
옷 입는.
화정
상수야 그건 나도 봤어. 그러니깐 어떤 옷을 입냐고.
상수
봤으니깐 알겠네.
화정
엄마한테 하는 말투가 그게 뭐니.
상수
뭐 처음 안 것처럼 그러세요. 아까도 봤고. 저저번에도 봤고/
화정
엄만 너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
상수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화정
빙빙 돌리지 말고.
상수
후…
화정
괜찮아. 말해봐.
상수
싫은데요.
화정
숨긴다고 숨겨질 게 아니야.
상수
그동안 가져간 옷들이나 돌려줘요.
화정
무슨 옷.
상수
알잖아요.
화정
니 입으로 직접 말하면 돌려줄게.
상수
(침묵)
화정
일단 말해보라니깐.
상수
그 옷들… 진짜 돌려줄 거죠?
화정
그래 약속할게. 다 챙겨 뒀어.
상수
원피스들… 돌려줄 거죠?
화정
안 들려. 뭐라고?
상수
원피스 입는 취미를…
화정
더 크게 이야기 해봐. 엄마 눈 똑바로 보고.
상수
여자옷 입는 취미를 가지고 있어요. 됐어요?
화정
(침묵)
상수
이제 나가세요. 약속한 거 잊지 말고.
화정
그거 말곤?
상수
뭐.
화정
또 있잖아
상수. 말이 없다. 붉은 조명이 켜진다. 이 불빛 아래의 화정과 상수의 대사는 각기 다른 사람을 향해 말하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게 발화된다.
화정
엄마는… 진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엄마는 많은 걸 털어냈어. 이제 가족도 너 하나 남았고- 거기에 대해선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해.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너 아빠 볼 수 있잖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수
그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와요?
화정
우리 아들 옥스포드 딱 입은 모습 보는 게 엄마 소원이야. 지금까지 잘 따라 와줬잖아.
상수
따라오긴요. 그것들 바란 적 한번도 없어요… 학원 3개 과외 3개 인강 3과목… 이걸 어느 열일곱이 다 원하겠어?
화정
노력한 만큼은. 투자한 만큼은 나와야지. 넌 내 유일한 미래이자 선물이라고.
상수
직접 학위 따고 인정받으시면 되잖아요. 엄마가 못 이룬 삶인데. 왜 날 보고 이루라고 하지?
화정
세상일 마음 먹은 만큼 안 풀린단다.
상수
난. 이미 지쳐버렸어요. 하루라도 제대로 살아있고 싶은데. 이런 마음들. 알고 있긴 해?
화정
너 인생마저 어긋나버리면 엄만 어떻게 사니.
상수
무슨 대단한 탈선을 한다고 한 것도 아닌데, 세상 무너진 듯이 받아들이는 엄마가 젤 이해 안 가.
화정
사춘기치고는 너무 길다 아들아.
상수
말이 안 통해 말이.
화정
이렇게 또 엄마 힘들게 할 거니?
상수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요.
화정
너 혹시… 게이 그런 건 아니지?
긴 침묵, 상수, 뒤를 돌아 화정을 바라본다. 미리 녹음된 화정의 대사가 들려온다.
화정
엄마 옷을 입어보진 않았어? 빨래가 하나둘씩 사라지던데. 너가 한 짓이지? 옷장에 그건 어디서들 구해 온 거야? 요즘 어울려 지내는 아현인가 걔한테 받은 거야? 엄마가 친구 잘 사귀라고 했지? 돈도 엄마도 없는 애를 뭐하러 만나서. 동네 사람들 부끄러워서 진짜. 그거 입고 아파트 단지 나가는 건 아니지? 그 옷 입고 화장실은 어디로 들어가니? 남자? 여자화장실? 변태로 신고 받는 거 아니야? 이러다 탈의실도 같이 쓰겠다. 가족 생각은 안 하니? 같이 다니는 친구들은 알고 있어? 즐기고 싶으면 혼자서나 즐길 것이지 왜 남들 못 볼 꼴 보게 만들어? 제모는 했어? 가슴은 어떻게 만들어? 너 체형에 여자옷은 안 어울려 상수야. 그거 입으면 막 흥분되고 그러니? 성전환 그런 거 생각하는 건 아니지? 더럽다 정말. 엄만 너한테 실망했어.
화정의 마지막 대사를 기점으로 그녀들이 하는 말들은 수군거리는 소리로 바뀐다. 반복되는 소음들에도 상수와 화정은 서로를 끈질기게 쳐다보고 있다. 사이. 조명이 돌아온다.
상수
그놈의 게이. 게이. 게이. 이젠 질린다. 질려. 엄마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세요. 난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거고. 지금 당장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건데. 게이다 아니다. 왜들 난리인 거야.
화정
방금 뭐라고 했니?
상수
그래요. 나 게이 아니에요. 이제 맘이 좀 편해?
화정
그럼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상수
처음엔 호기심이었어. 선생님이 신고 오는 검정 타이즈가 편해 보여서, 하늘거리는 레이스들이 칙칙한 남자 옷과는 달리 예뻐 보여서. 언제는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에 반 애들이 여장을 해줬어. 쏟아지는 환호성들. 난… 그날 처음으로 주인공이 되었어. 그때 알아버렸지. 가슴 속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막 올라와. 그게 참 몰랑하기도 하고, 찌릿하기도 한데, 내 안을 꽉 채워버리는 게-
사이. 상수, 자리에서 일어나서 화정의 돌아선 등을 보고 칸막이의 경계에 선다.
상수
엄만, 단 한순간이라도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있어 본적이 있어? 이게 바로 나야. 이게 나의 눈이고. 나의 입이고. 나의 몸이고. 그 누구도 아닌. 상수.
화정은 몸을 돌려 상수를 바라본다.
상수
혹시 게이라면 어때. 남들하고 다르다고, 원피스를 입는 걸 좋아한다고 난 엄마 아들이 아니야? 단지 내 취미를 갖고 싶은 거야. 어항의 물고기가 수면 위로 올라와 헐떡거리는 것처럼. 다들 힘들어도 빠져나갈 구멍 하나쯤은 만들고 살아가는 거잖아.
화정, 상수에게 다가간다. 사이. 조명이 서서히 꺼진다.
상수
엄마는 그런 아가미도 없어? 아님, 날 당신의 아가미로 생각해버린 거야? 엄만 자신을 보지도, 진짜 나를 보지도 않잖아. 그래서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서라도 날 사랑하고 싶었던 거야. 엄만, 언제 내가 뭘 좋아하고 뭔 생각하며 사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어? 지금도 봐.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아? 내 생일이야 생일. 며칠 지나고 축하받는 것도 이젠 질렸어. 생일인데 슬퍼하는 것도. 쫄쫄 굶고 있는 것도 다 싫어. 엄만 왜
화정,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상수를 안는다. 어두워진 무대, 꺼져있던 스크린에 한 영상이 상영된다. 상수가 여자옷을 입고 활짝 웃고 있는 모습들을 담은 슬라이드쇼, 1080X1080 인스타 픽셀로 재생. 2-3분 동안의 투사 시간 동안 화정과 상수는 나란히 서서 그것을 바라본다.
화정
엄마가… 너무 무심했다 그치. 아들을 사랑하면서… 정작 너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네.
화면이 꺼지자 이번엔 상수와 화정이 서로를 마주본다. 긴 사이. 이어서 무대 밖에서 삐이익-거리는 소음이 들려온다.
화정
아 맞다! 주전자야 주전자. 놀라지 말고. 잠깐 쉬고 있어.
화정, 오른쪽 문으로 뛰어간다. 사이. 주전자음이 멈추고 잠깐의 정적이 흐르는데. 화정 다시 등장. 화정의 손엔 오래되어 보이지만 화사한 원피스가 있다.
화정
이거. 입어볼래? 너 할머니가 물려주신 옷이야. 결혼식 사진에서 봤지?
상수, 놀란 눈으로 원피스를 보면서 경계한다.
화정
괜찮아. 입어봐.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딱 맞는 사람이 태어나면 언제든지 입혀주라고. 소중하게 보살피며 자길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며.
상수, 머뭇거리며 칸막이 문밖으로 나와 원피스를 받는다.
화정
받았으니 화해하는 거다? 엄마가 미안해. 우리 아들 생각이 글케 깊은지도 모르고.
상수
… 고마워요.
화정
다 죽어가는 소리로 고맙대. 그러지 말고 일단 걸쳐볼래?
상수가 원피스를 입기 시작한다. 화정은 그 모습을 응시한다. 상수는 시선이 신경 쓰이는지 서투르다.
상수
잘 못 찾겠어요.
화정은 퉁명스럽게 다가와 상수를 도와준다.
화정
이건 이렇게 하면 돼. 에고. 이것도 잘못 끼웠구나. (웃으며) 이건 이렇게-
모든 착장이 끝나가고, 상수는 등 쪽의 지퍼를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사이. 화정이 손을 뻗는다. 사전에 녹음된 지퍼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무대 조명 서서히 꺼져가며. 칸막이 문밖에서 상수와 화정이 도란거리면서 옷매무새를 체크하는 모습. 함께 들려오는 마지막 대사.
화정
어우 옷이 참 예쁘다! 우리 상수한테 딱 맞네. 젊은 총각! 다 컸네!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 안내방송. 사람들의 소음. 딩동 딩동. 이번 역은 상수, 그리고 화정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일본어 중국어 영어로 번역되어 함께 들려온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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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담

김도담
나는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gimdam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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