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소매가 긴 푸른 셔츠에 검정 바지 / 여주
소매가 긴 푸른 셔츠에 검정 바지
뒷문을 열고 나간 것까지는 기억해. 문득 정신 차려 보니 소철 나무 앞에 앉아 있더라고. 내가 아는 소철이었어. 키운 지는 몇 년 됐고. 시간이 좀더 지난 후에는 소철이 아니라 푸른 이끼로 뒤덮인 돌멩이라는 걸 알게 됐지. 생명력으로 가득한데다가 부드럽고 축축해서 손바닥으로 쓸어도 보고 고개 숙여 냄새를 맡기도 했어. 동작을 반복하는 동안 나는 점점 견딜 수가 없었어. 뭘 더해야 이 푸른 것 옆에 있게 될까. 한번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까 이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한 게 없고 이런 나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거의 울먹이는 심정이 됐을 때 멀리서부터 해가 비치기 시작하는 거야. 새들이 나무와 나무 사이로 옮겨 다니느라 온통 시끄러웠어. 여기서 뭐하세요? 아이 손을 잡고 서서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소매가 긴 푸른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었더라고. 지금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주변의 다른 생물이 그러하듯 저기 해가 비치는 지평선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지. 두 사람이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겠더라고. 지금 생각해도 신통한 건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이야.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끼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내가 어떻게 됐을지 누가 알겠어.
여주
여주 가기 전에는 여주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여주를 상상했다. 여주를 상상하는 가장 손쉬운 길은
여주의 입구에서부터 여주의 안쪽으로 천천히 걷는 것. 아, 어서 와요. 오래 기다렸어요. 어디까지나 상상이므로 새가 인사하도록 둬도 된다. 나처럼 사람과 사람의 손길이 닿은 식물을 좋아하면 그 사람의 정원으로 안내받는 것도 좋다.
햇빛에 노출된 시간이 길어져서
웃음이 묻어나지 않게 웃을 줄 아는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된 나무의자에 앉아 담배 한 대 피우고
자, 이제 뭐부터 시작할까
생각에 잠기면
오후에 모이기로 한 연재와 지수와 은성이가 하나 둘 손을 흔들며 여주로 들어온다. 여주에 가기로 마음먹고 여주를 기다려 기어이 여주에 다다르게 된 사람들로서
우리는 웃는다. 어서 와요.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마치 웃음이 묻어나게 웃는 게 뭔지 아는 사람들 같다.
임승유
가만히 내버려두면 종종 엉뚱한 곳에 가 있는 사람을 지금 이곳으로 데려다놓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2021/08/31
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