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은퇴한 신의 동체 시력 / 은자(隱者)
은퇴한 신의 동체 시력
손가락질하다가
악수하는 손
바람 없이
천천히 떨어지는 나뭇잎
피 흘리지 않는 과녁에 꽂히는
한때 숲이었던 화살
부르르 떨고 있는 깃털
어제는 백송 아래에서
플라스틱 피리를 주웠다
누가 자꾸 주여, 주여, 부르는데
아까부터 햇빛 속을 유영하고 있는 먼지
이건 저기서
그건 그때부터 왔지
나는 꿈에서 깨어난다
아니다, 나는 삶에서 깨어난다
사라지기 위해서는
사람 없는 영원이 필요하다
은자(隱者)
주거지에서 죽어지내는 사람을 알고 있다
이렇게 말해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는 슬로비디오로 입꼬리를 올리고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말할 것이다
그래, 다들 너무 살아 있는 티를 내려 하니까
그는 모두 잠든 밤에 살그머니 문을 열고 나와 사박사박 산책을 한다
배회 고양이가 간혹 멈추어 서서 그의 배회를 지켜본다
그러면 그도 멈추어 서서 배회 고양이의 정지를 지켜본다
봄은 죽어지내기 좋은 계절
밤 산책이 딱 좋은 계절
어린 쥐들이 돌아다니고 작년의 낙엽이 아직 완전히 썩지 않아
비라도 한번 내리면 소생과 부패가 달콤하게 섞여 공기 중에 퍼져나가고
고비에서 날아온 먼지가 눈 시린 철쭉 꽃무리 위에 온화하게 내려앉을 때
몇몇 새들은 비행을 멈추고
촉촉한 지렁이들은 화단을 벗어나 날빛처럼 저 밝은 지옥으로 가고
거주자는 자기 장지에 돌아와 가슴에 손을 포개고
오늘의 잠을 잔다
아, 형용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갖가지 너무 다양한 냄새들이여, 이 달콤함이여
태만과 쉬이 구별되지 않는 평화여
정한아
신이 만일 있다면, 은퇴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은퇴한 신은 인간이 지긋지긋할까요, 그리울까요. 죽은 듯이 지내는 인간을 상상합니다. 그는 은퇴한 신과 얼마나 비슷하고 다를까요.
2021/08/31
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