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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노진씨가 제안하는 연극의 3대 요소

[김은성의 연극데이트] 배우 성노진

김은성_극작가

웹진 24호

2013.05.16

극단 신기루만화경 배우 성노진의 이야기에는 막힘이 없었다. 솔직하고 담담하게 지난 이력을 되짚어 갔다. 조금 망설여지거나 숙연해질 수 있는 대목에서도 주저함 없이, 마치 남 이야기 하듯 자신의 사연을 술술 풀어갔다. 나름 산전수전 다 겪으며 먼 길을 걸어온 자의 호흡이 어쩌면 이렇게도 여유로운가? 행복한 노진씨가 들려주는 유쾌한 만화경 속으로...

 

배우 성노진
  • 극단 신기루만화경 배우 성노진의 이야기에는 막힘이 없었다. 솔직하고 담담하게 지난 이력을 되짚어 갔다. 조금 망설여지거나 숙연해질 수 있는 대목에서도 주저함 없이, 마치 남 이야기 하듯 자신의 사연을 술술 풀어갔다. 나름 산전수전 다 겪으며 먼 길을 걸어온 자의 호흡이 어쩌면 이렇게도 여유로운가? 행복한 노진씨가 들려주는 유쾌한 만화경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연극 아들과 진짜 아들

    요즘 어떻게 지내는가?
    <콜라소녀> 끝나고 4월말에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평상>에 출연했다. 지난주 일요일에는 서울연극제 부대행사로 열린 <배우 100인의 독백>으로 관객과 만났다. 지금은 쉬는 중이다.

    다음 작품은?
    구체적으로 정해진 작품은 아직 없다. 넌지시 술자리에서 같이 해보자고 이야기가 된 건 몇 작품이 있다. 조금 전에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콜라소녀> 재공연을 한다고 연락을 받았다. 일단 그걸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콜라소녀>는 어떤 작업이었나?
    관객들 반응이 좋아서 행복하게 했다. 누구나 한번은 겪었을 법한 이야기다. 가족관계에 있어 한 번씩 경험해 봤을 이야기라 공감대가 만들어졌던 것 같다. 5주 동안 연일 매진이 되었다. 팀워크도 너무 좋아서 연기하기가 되게 편했다.

    <평상>은 어땠나?
    <평상>도 가족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콜라소녀>에 나오는 가족이랑은 아예 차원이 다른 4.5에서 5차원? 6차원? 되는 이야기라 처음에는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다른 집들은 이미 다 나간 재개발 지역에 사는 엄마랑 아들이 중산층 놀이를 하면서 버티는 이야기였다. 작가가 역설적인 문법으로 작품을 썼는데 연기도 거기에 맞게 접근해야 했다. 새로웠다. 생각보다 관객들이 재밌게 보는 것 같아서 좋았다.

    두 작품 다 가족이야기인데?
    그렇다. 두 작품에서 모두 아들 역할로 나왔다. <콜라소녀> 에서는 사업하는 막내아들, <평상> 에서는 외아들. 캐릭터가 전혀 다른 두 아들을 오갔다.

    실제로는 어떤 아들인가?
    삼남 일녀 중 막내인데 큰형, 작은형, 누나들은 다 대학 나와 대기업에 들어갔는데 나는 대학도 안 가고 연극한다고 허구한 날 쫓겨나다가 서울로 도망 왔으니까……. 좋은 아들이 아니다. 연극한다고 속을 많이 썩인 아들이다.

    배우 성노진

  • 일본순사로 무대와 입맞춤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가?
    72년에 대전에서 태어났다.

    연극과는 언제부터 연을 맺었나?
    중학교 때 우연한 계기로 성극을 하게 됐다. 주기철 목사를 고문하는 일본순사 역할을 맡았다. 목사의 등을 인두로 지지는 장면이 있었는데 등에 돼지비계를 붙여놓고 진짜 인두를 들고 지졌다. 연기도 실감났었다. 그게 되게 인상적이었다.

    처음 맡은 역할이 일본순사였는데? 마음에 들었나?
    지금도 그렇지만 (웃음) 그때는 더욱 순박하고 착한 순둥이였는데 교회 다닌 형, 누나들이 어떻게 저런 애가 악역을 저렇게 잘하느냐, 본성을 숨기고 다니느냐, 놀리고는 했다. 뭐, 돼지비계 효과가 강해서 그랬을 텐데……. 연기 잘한다는 소리 들으니 기분 좋지 뭐, 그때나 지금이나.

    연극을 계속 하고 싶던가?
    그랬다.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같은 동네에 살던 형을 따라 연극반에 들어가게 됐다.

    어땠나?
    되게 재밌었다. 학교에서 해마다 가을에 축제를 하는데 그때 연극반도 공연을 한다. 그러면 한 달 전부터 수업을 4교시까지만 받고 연습을 하러 가도 됐다. 연극반 출신 선배들이 대전 시내의 앙상블소극장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가서 연습을 했다. 그 나이에 얼마나 신났겠는가? 그때부터 재밌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느낌에 맛이 들린 거다. (웃음) 그때 벌써 나중에 커서도 연극을 하고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졸업 후 진로는 어떻게 모색했는가?
    형들과 누나가 모두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대학을 다녔다. 아버지가 너도 네가 벌어서 다니라고 하시더라. 고민을 많이 했다. 어차피 연극하고 살 건데 대학은 꼭 들어가야 되나?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대학 대신에 LG에 들어갔다. (웃음) 카메라와 캠코더를 팔러 다니는 영업사원이 되었다. 양복입고 삐삐차고 다니면서 힘 좀 주고 다녔다. 91년에 삐삐 차고 다니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다녔다. 그때는 삐삐를 일부러 보이게 차고 다녔다. 그 큰 걸, 허리띠에 차고 있다가 진동이 오면 남들 보란 듯이 몸을 일부러 부르르 떨었다. (웃음)

    카메라는 많이 팔았는가?
    많이 못 팔았겠는가? (웃음) 한 6-7개월하고 그만 뒀다. 사회경험은 어느 정도 했으니 이제 연극을 하러 가야겠더라.


    아버지에게 쫓겨난 연극청춘

    어디로 찾아갔나?
    극단에 들어갔다. 연극반 선배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던 극단 새벽이라는 곳이었다. 그때부터 대전에서 5년 동안 극단 생활을 했다.

    극단 새벽 시절을 돌아본다면?
    정말 정신없이 연극했다. 낮에는 아동극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1년에 두 세 작품 정기공연을 만들어 올렸다. 정말 열심히 했다. 단원들이 봉고차 타고 다니면서 이곳저곳 공연도 다니고 포스터도 붙였다. 봉고차 뒤에 열어서 요리도구 꺼내 밥도 지어 먹고 방위병 생활을 하면서도 공연을 두 편이나 했던 시절이었다.

    서울에는 어떤 계기로 오게 되었나?
    집에서 계속 쫓겨나다보니 그렇게 됐다. (웃음) 낮에 아동극하고 저녁에 공연을 하고 나면 몸이 얼마나 피곤한가? 새벽까지 연습이 있는 날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날은 낮까지 자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침마다 아버지랑 실랑이가 벌어지는 거지. "넌 뭐하는 놈인데 해가 중천인데 자고 있냐? 네 형하고 누나는 다 출근했는데! 뭐하는 놈인데 아직까지 퍼 자냐? 밥도 안 쳐 먹고." 나는 나대로 새벽까지 연습하고 들어와서 피곤한데…… 연극 하는 게 아주 싫으셨던 거다. 하루는 자고 있다가 팬티차림으로 쫓겨나왔다. 옷은 입고 나가겠다고 했더니, 그럼 옷을 다 싸서 나가라고 하시더라. 가방에 죄다 싸가지고 나와서 한 한달 있다가 들어갔나?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됐던 거다.

    그러다가 아예 나와 버린 건가?
    허구한 날 쫓겨나고, 다시 들어가고…… 지겹더라. 아예 멀리 가버리고 싶더라. 마지막에 쫓겨날 때 아버지가 "너, 나가!" 그러셔서 "서울 가겠습니다!" 라고 했다. "그래? 그럼 호적 파가지고 가. 너는 서울 가는 순간 내 아들이 아니니까 인연을 끊고 가라." 다행히 큰형이 말렸다. "아버지! 저는 대기업 들어가서 살지만 마냥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노진이는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니까 좋아 보이잖아요? 저는 솔직히 노진이가 부럽습니다. 하고 싶다는 일을 도와주지 못할망정 왜 못하게만 하세요?"

    그래서 허락을 받고 나왔나?
    (웃음) 호적만 면제 됐다. 서울 가면 다시는 오지 마라 하시더라. 배낭 두 개 매고 지갑에 십 만원 넣어가지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96년 1월의 일이다.

 

배우 성노진
  • 죽산에서 달군 꿈

    급히 시작된 서울생활, 어땠나?
    처음에는 잘 때가 없어서 친구 집에 얹혀살았다. 처음 6개월은 옥수동에 있는 음악 하는 친구 집에서 살았고, 그 후 1년은 잠실 사는 직장인 친구네서 지냈다. 그러다가 정릉에 100에 10만원 월세방을 구해서 자취를 시작했다. 극장에서 이런저런 스태프 일을 해서 받는 돈으로는 생활이 안 됐다. 가난하게 살았지 뭐.

    서울에서의 연극 활동은 어떻게 열었는가?
    무작정 대전출신의 배우 남명렬 선배님을 찾아갔다. 도와달라고 말씀드렸다. 당시 선배님이 채승훈 선생님과 연습을 하고 있었다. 96년 3월의 이애자 작가의 신춘문예당선작 공연이었는데 그 작품 <시인과 모델>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데뷔 이후에는 어떻게 보냈나?
    일단 대학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다양한 작품의 스태프로 참여했다. 조명오퍼, 음향오퍼, 기획일도 했다. 그간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었다. 1년 동안 이 극단 저 극단의 공연에서 일을 많이 하게 되다 보니 대학로 시스템을 좀 알겠더라. 그러다가 극단에 들어가게 됐다.

    어느 극단이었나?
    김아라 연출가가 이끌던 극단 무천에 들어가게 됐다. 극단이 안성 옆 죽산에 터를 막 잡기 시작할 때였다. 여름에 거기 놀러 갔다가 발목이 잡혔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스태프로 도와달라고 하시더라. 야외극장을 만들어 처음 공연을 올리는 때였으니 할 일이 정말 많았다. 어쩔 수없이 잡혀서 7, 8월 그 여름에 극장도 짓고 스태프도 하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에 캐스팅 제안을 받게 됐고 자연스럽게 단원이 됐다.

    극단 생활은 어땠나?
    극단 무천은 죽산에서 합숙을 했다. 그때가 스물다섯, 여섯 됐을 땐데 내가 막내였다. 주말이 되면 선배들은 집에 가는데 나는 막내라고 집에를 안 보내더라. (웃음) 극단에 워낙 할 일이 많으니 가고 싶어도 못 간다. 워낙 시골에만 짱 박혀 있으니 너무 답답했다. 막내니까 이런저런 심부름도 많이 해야 됐고……. 재밌기도 했지만 그때는 어쩐지 어디 갇혀있는 느낌이 들었다. 팔팔한 이십대 청춘에 내가 왜 여기서 썩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고. 근데 공연하고 연습할 때는 재밌고 하니까 또 계속 지내게 되고, 결국 그렇게 4년을 보냈다.

    당시 출연했던 작품들은?
    <이디푸스와의 여행> <내마> <햄릿프로젝트> <맥베드21> <임철우의 봄날> 등이 떠오른다.

    아, 98년에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내마> 를 봤었다. 출연했는지는 지금 알았다. 그때 김아라 연출가 명성이 대단했을 때였다. 어떤 분으로 기억하고 있는가?
    나한테는 정말 큰 어른이었다. 내가 하는 모든 연기를 다 마음에 안 들어 하셨으니까. 난 아직 할 게 많구나. 어떻게 하면 저분한테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나의 연기를 제대로 보여드릴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선택했던 게 대역을 맡는 일이었다. 선배들이 연습에 못 오는 날이 올 때를 대비해 미리 대사도 외우고, 연습을 해서 보여드리고는 했다. 어떻게 하면 이 연출가, 이 선배들에게 나를 보여줄 수 있을까? 그 고민과 함께한 날들이었다.

    그때 무천에서 함께 생활했던 선배들은 어떤 분들인가?
    박상종, 전진기, 최경은, 채민석, 이런 선배들이 계셨다.

    무천에는 언제까지 몸담았나?
    서울에서 연극하려고 집까지 나왔는데 (웃음) 대학로에서 연극하고 싶었다. 광주에서 5.18 기념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김아라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보내달라고.
배우 성노진
  • 치열하게, 자유롭게

    대학로로 나오니 어땠나?
    메일로 김광보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너 나랑 같이 할래?’ ‘좋죠.’ 김광보 선배랑은 <한여름 밤의 꿈>으로 일본공연을 잘 하고 다녀온 좋은 기억이 있었을 뿐더러 젊은 팀이랑 연극을 하고 싶었던 열망도 있었다. 그래서 극단 청우 단원이 되었다. 이후 <인류최초의 키스> <웃어라 무덤아> 등에 출연했다.

    청우에서는 언제까지 활동했나?
    2001년부터 2005년까지 4년 머물렀다. 뭐랄까 좀 더 다양한 작업을 만나고 싶은 욕심이 있어 극단을 나오게 됐다. 당시 김광보 에너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웃음) 어떻게 보면 스파르타식으로 배우들 억압을 많이 했다. (웃음) 너무 힘들더라. 견디다 못해서 자유를 찾고 싶어서 나왔다. 채찍과 당근을 같이 줘야 되는데 맨날 채찍만 주니까 버틸 수 있나? 물론 나 잘되라고 그랬겠지만 나는 잘 한다고 해줘야지 신나서 하고, 혼나면 주눅 들어서 더 못하게 되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자꾸 혼나면 멍해지는 거지, 생각도 안 나고. 어떻게 보면 그런 것들을 이겨내지 못한 거지. 내가. 김광보 연출가를 생각하면 무서운 큰형님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좋아한다.

    그 이후에는 어떤 극단과 만났나?
    극단 신기루만화경에 들어가게 됐다. 나는 작품만 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자연스럽게 단원이 되어 있더라. 의도치 않게.

    어떻게 의도치 않게 엮이게 됐나?
    오달수, 이해제 두 형에게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다. 이해제 작, 신호 연출 <소 등에 나비>라는 작품이었다. 그 후로 공연할 때마다 부르더라. 극단 총회 할 때도 부르고. 어느 날 단원이 되어 있더라. <다리퐁 모단걸> <코끼리와 나> <어느 날 문득, 네 개의 문> <당신의 잠> 등의 작품을 함께 했다.

    <다리퐁 모단걸>을 본 이후, 짜장면을 먹을 때면 영락없이 성노진의 얼굴이 생각난다. 짜장면에 대해 설을 풀던 그 대사, 참 인상적이었다.
    아, 그런가? 반갑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 <배우, 100인의 독백> 무대에서 그 대사를 준비했었는데 10분 분량까지는 안 되어서 결국 다른 작품으로 했었다.

    극단 새벽에서 5년, 무천에서 4년, 청우에서 4년을 보냈다. 신기루만화경에서는 어떤가? 권태기가 찾아오지 않았는가?
    음…… 아무런 정보도 없이 남명렬 선배 하나만 믿고 서울에 와서 정말 버티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 공연 틈틈이 무대설치 및 철거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조명설치 등 가리지 않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이것저것 많이 알게 된 거다. 그러니 어떤 극단에 공연을 하러 가면 자연스럽게 할 일이 보이게 되더라. 조명도 할 수 있지, 무대도 할 줄 알고 도면도 볼 줄 알지. 잡기가 많으면 괴롭다. (웃음) 그간 세 극단에서는 극단의 잡일을 거의 도맡아 했었던 거다. 그래서 신기루만화경에는 약속을 받고 들어갔다.

    어떤 약속이었나?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얼마 전에 극단을 또 나왔다. 형들이 정 원하면 들어가겠는데 대신 나를 구속하지 말라. 작품이 겹쳐도 극단 것을 우선으로 하지 않아도 되느냐? 그래도 좋다면 들어가겠다고 했더니, 그래, 그럼 너 알아서 해라. 하더라.

    그래서 약속은 지켜졌는가?
    물론이다. 자유롭고 좋다. (웃음)

 

배우 성노진
  • 연극의 3대요소를 아는가?

    가장 기억에 남아있는 작품을 꼽자면?
    고연옥 작, 김광보 연출의 <인류최초의 키스>. 공연 성과도 좋았고, 공연이 끝났는데 사람들이 나를 많이 기억해주더라.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때의 힘으로 아직까지 계속 연극을 할 수 있었던 거 아닌가, 지금도 고마운 작품이다.

    그동안 배우 성노진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연출가는?
    김광보와 최용훈.

    김광보 이야기는 많이 했으니, 최용훈 연출가는 어떤 면이 좋았나?
    배우를 되게 편하게 해준다. 워낙 분석력이 뛰어나서 연출로서 이 작품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미리 계산이 다 서있어서 캐릭터를 어떻게 잡고, 어떻게 만들어 갈지 배우에게 연습 초반부에 주문을 한다. 그걸 잘 못 따라 갈 때도 끝까지 기다려준다는 점이 좋다. 호흡도 잘 맞는 편이다. 서로 눈치만 봐도 뭘 원하는 지, 서로 아는구나, 그런 느낌? 자꾸 새로운 걸 보여주게 되고, 그러면 그것에 하나를 더 제시받는 그런 느낌? 뭔가 같이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다.

    친한 동료 연극인은 누구?
    정세라, 정나진, 강진휘, 또래 배우들이다. 이들과 친해질 수밖에 없는 게 좋아하는 게 같다. 산과 자전거, 술.

    존경하는 선배가 있다면?
    아무래도 남명렬이다. 남명렬이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까지 연극을 할 수 있었을까? 만난 지 20년 됐는데 참 곱고 멋있게 늙는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살도 안찌고, 머리가 백발이 되도 멋있고. 멋진 형님이다.

    20년 전, 언제 어떻게 만났나?
    대전에서 만났다. 93년이었을 거다. 대전연극제를 하는데 그때 우리 극단이랑 남명렬 선배 극단과 경합이 붙었다. 결국 우리 극단이 전국연극제의 출전권을 따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 알게 됐다. 라이벌 극단의 선배로. (웃음)

    결혼은 했는가?
    아니.

    애인은 있는가?
    있다.

    연극하는 분인가?
    그렇다. 배우다. 열여섯 살 차이가 난다. 처음에는 도둑놈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러다가 스물한 살 차이 나는 연극커플이 나타나면서 조금 잠잠해졌다. (웃음)

    지금 아버지는 여전히 연극하는 것을 반대하시는가?
    돌아가셨다. 2010년에.

    화해는 했는가?
    집 떠난 지 2년 만에 집에 갔는데 <이디푸스와의 여행> 독일공연을 마친 직후였다. 양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가서 해외 공연 다녀왔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때부터 약간 수그러들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쓰러지셔서 자주 대전 병원에 수발을 하러 갔었다. 그때부터 아버지가 가족으로 인정을 해주시더라.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그동안 이런 저런 역할을 많이 했는데, 음…… 나한테 잘 맞는 역할,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의 색깔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맡고 싶다.

    질투심이 생기는 배우가 있는가?
    코미디 잘하는 배우가 부럽다. 호흡이 다르더라, 그런 배우들은. 약간 엇박일 수 있고 박자가 빠를 수도 있고. 서현철, 백원길, 박수영, 이런 배우들의 호흡을 좀 따라가고 싶을 때가 있다.

    꼭 만나고 싶은 연출가는?
    얼마 전에 이성열 연출가를 성북동 주점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야, 너는 대학로에 있는 연출들하고는 거의 다 해봤지?” 그래서 “선배님이랑만 만나면 된다.” 하면서 웃은 적이 있다.

    성노진에게 연극은 뭔가?
    연극? 나에게는 변화다. 그리고 버티기. 배우로서 행복하려면 끊임없이 무대에 서는 게 중요하다. 계속 무대에 서려면 지금까지 내 모습을 고수하기 보다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선택을 받아야 하는 거다. 변화하면서 버티는 거다. 또 그런 이야기가 있다. 연극의 3대 요소가 무엇인줄 아는가?

    배우, 무대, 관객 아닌가?
    아니다. 나는 연극의 3대 요소가 시파티, 엠티, 쫑파티라고 생각한다. 공연 전, 연습과정도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즐거운 연습, 그것이야말로 좋은 연극을 만든다. 배우는 행복하게 연습해야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그 행복감이 관객에게 갈 수 있도록..
  • 배우 성노진
  • 성노진 (배우)
    주요작품
    연극 <평상><콜라소녀><삼국유사 프로젝트-멸>
    <3월의 눈><팝콘><연><스페이스 치킨 오페라>
    <눈속을 걸어서><사카테요지 페스티벌-다락방>
    <어느 날 문득, 네 개의 문><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철로><그때, 별이 쏟아지다>
    <다리퐁 모단걸><자객열전><인류최초의 키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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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성

김은성 극작가
극단 달나라동백꽃 대표
주요작품 <로풍찬유랑극장><뻘><목란언니><연변엄마><순우삼촌><시동라사>외 다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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