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유한한 존재로서 영원함을 갈망했다는 것도 큰 기쁨이었어요

극작가 이강백

부새롬_연출가, 무대디자이너

제150호

2018.10.25

<어둠상자> 공연 연습 중이시죠? 몇 년 만의 신작이세요?
<심청> 이후니깐 한 3년 됐나요?
몇 번째 작품인지 혹시 기억하세요?
50번 넘어간 다음에는 안 세었어요.
50번째가 언제쯤이었어요?
얼마 되지는 않았는데, 이후부턴 누가 물어보면 51번째라고 대답을 해요. (웃음)
연극 코너에 가면 『이강백 희곡집』이 쭉 꽂혀 있잖아요. 몇 편이나 쓰셨을까, 몇 편째인지 기억은 하실까, 궁금했어요.
거기에 수록 안 된 것도 있어요. (웃음)
아주 오래 전으로 가볼게요. 극작은 언제 처음 하셨어요?
처음엔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시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수필 할 것 없이 장르가 정해져 있지 않은 채로, 소위 말하는 문청(문학청년)시절을 일찍 거쳤어요. 희곡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장르가 정해진 거죠.
그럼 소설이나 시를 신춘문예에 내보신 적도 있으세요?
희곡이 당선된 후에 소설을 냈는데, 다른 분이 당선이 됐어요. 그때 이청준 선생님이 심사위원 중 한 분이었는데, 전화를 주셔서 만나자고 그래요. 내 작품을 끝까지 밀었지만 당선작이 못돼서 유감이라고 하시면서 선생님이 <현대문학> 추천위원인데 소설 쓴 게 있냐고 물어요. 여러 편 된다고 했더니, 한 편을 더해서 <현대문학>에 추천해주시겠다고 했어요. 당시에 내가 극작 워크숍의 멤버였는데, 그걸 주재하시던 여석기 선생님을 뵙고 제가 이러한 제안을 받았고, 이틀 뒤에 만나기로 했는데 고민이 된다고 상의를 드렸어요. 선생님이 한참 아무 말씀 없다가 "소설가는 많은데 극작가는 드물다" 그냥 그러시는데 그 말이 묘하게 가슴에 와서 얹히더라고요. 이청준 선생님께 죄송하다고, 아무래도 희곡만 써야 할 것 같다고 그랬어요. 그렇게 해서 장르가 희곡 쪽으로 완전히 못이 박힌 거죠.
연극하는 사람이 이런 말 하긴 좀 속상하지만 사람들이 소설가를 훨씬 많이 알아주잖아요.
명성에 대한 생각보다는... 그때는 극단 형태가 동인제여서 연출, 배우, 극작가도 다 동인이니까 따로 작품료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소설가는 소설을 쓰면 원고료가 있으니까, 그게 매력이라면 매력이었지만, 또 그렇게 목숨을 걸만한 매력적인 액수는 아니었어요. (웃음) 다행히도 모두가 다 가난한 시절이어서, 뭘 해서 돈을 벌어야지, 특히 글을 써서 돈을 벌겠다, 이런 사람이 없던 시대였어요. 그게 참 다행이었죠. 지금은 국민소득이 4만 불 시대가 다가오니까, 희곡에 재능이 있는 젊은이들도 1년만 희곡 쓴다고 칩거하면 4만 불이 없어지는 시대가 돼버린 거죠. (웃음) 정신적으로 소득격차를 못 견디죠. 희곡에 2년 매달리면 어, 8만 불이 없어지네? (웃음)
소설은 읽는 장르지만 희곡은 읽기보다는 극을 통해서 접하잖아요. 문청으로서의 아쉬움은 없으셨어요?
큰 아쉬움은 없었고, 처음 희곡이 공연됐을 때 공동작업이 빚어내는 매력이 있었어요. 극작가는 모든 걸 다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파악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희곡을 소설처럼 쓰면 실패하는 이유가 가득 채우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이렇게 말하면 “네 작품은 많이 비어있냐?” 반문할 분이 많겠지만요. (웃음) 극작가라는 영어 단어 playwright가 wheelwright(마차 바퀴를 만드는 사람), shipwright(조선공)에 어원을 두고 있다고 하죠. 마차 바퀴살이 비어 있어야지, 통으로 되어 있으면 매끄럽지 않은 길에서 받는 충격을 흡수를 못 하죠. 그리고 shipwright랑 관련해서도, 빈 배여야지 거기에 사람도 싣고 화물도 실을 수 있죠. 첫 공연 때 살과 피를 가진 배우들이 움직이고, 작가가 생각한 부분뿐만이 아니라 연출가의 해석, 무대디자인, 모든 게 얹어져서 공연이 이루어지는 매력을 봤죠. 그리고 소설가는 독자의 반응을 모르지만, 극작가는 극장 안에서 자기 작품을 보고, 관객의 반응을 볼 수 있죠. 소설이나 시는 개인 작업이니까 전적으로 자기주장과 자기 것을 할 수 있지만 극작가의 작품은 읽는 것보다 공연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접해지잖아요. 요즘 극작가로 데뷔했다가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들 말에 의하면 공연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아서 그만둔다는 거죠. 자기 작품 같지 않게 난도질 돼 있고, 심지어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방향이랑 엉뚱하게 얘기하고 있고. 첫 공연이 어떠냐에 따라서 계속 쓰느냐, 포기하느냐, 갈림길이 되는 것 같아요. 첫 작품의 연출이 이승규 선생님이라고 당시 젊은 연출가였는데, 굉장히 예리하게 분석을 잘 해서 작품에 충실하게 연출하셨어요. 나로서는 여러 가지 행운이 겹친 셈이죠. 작가와 연출가의 갈등은 물론 옛날에도 있었겠죠. 연로하신 연출가들이 “요즘 연출가들은 우리가 작품 대할 때 하고 태도가 달라”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극작가의 편을 들어요. 젊은 연출가들한테 작품에 좀 충실해 달라, 나이가 많이 든 극작가로서 부탁을 하고 싶어요.

작업하시면서 연출 때문에 엄청 상처받으셨던 적 있지 않으세요?
그렇게 상처받는 게 데뷔해서 10년 이내인 것 같아요. 10년만 넘어가면 아, 이 텍스트라는 게 희곡으로 남아서, 또 다른 연출가와 극단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물론 언제 만난다는 약속 어음은 없지만 서도. 한 작품을 두어 번 재공연 하는 걸 경험하고 나면 막 대성통곡하거나, 술을 사흘간 계속 먹게 되거나, 죽을 정도로 상처받게 되지는 않죠. (웃음) 텍스트는 남고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기회는 오니까. 물론 공연할 때마다 연속으로 실패를 거듭할 수도 있지만, 몇 번 공연한 다음에는 실패냐, 성공이냐, 그런 것보다, 또 어떤 버전으로 나올까, 궁금하죠. 전혀 다른 버전으로 나왔을 때의 경이로움도 있거든요.
고전이 아닌 다음에야 한 작가의 작품을 한 연출이 공연하고 나면, 다른 연출이 공연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초연된 작품이 재공연이 잘 안 되는 게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는 지원제도에 있죠. 최근에는 재공연이나 번역극도 지원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신작에 우선적으로 지원을 하다 보니까 지원금을 받지 않고는 공연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여건 속에서 극단들이 신작을 찾게 되죠. 그리고 요즘은 희곡만 쓰는 극작가보다 극작과 연출을 겸하는 경우가 많죠. 그러다 보니까 다른 연출이 그 작품을 공연으로 안 올리게 되죠.
말씀대로 지금은 제도가 좀 바뀌었지만, 한동안은 신작에만 지원금을 주다 보니까 작품을 여물게 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어요.
한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든 초연은 굉장한 위험 부담을 안고 하는 거죠. 우리가 명작이다, 탁월한 작품이다, 하는 건 공연을 통해서 여러 번 갈고 닦은 거예요. 번역극은 이렇게 잘 쓴 작품이 많은데 창작극은 엉망이냐 하는 사람들도 숨어있는 이유를 알면 놀랄 거예요. 한국에 번역되는 작품은 번역되지 않은 작품의 빙산의 일각이고, 그 빙산의 일각도 갈고 닦아지고 걸러진 다음에 소개되는 거죠. 근데 다르게 보면 한국의 극작가가 누리는 축복이 있어요. 텍스트가 두텁게 쌓여 있는 유럽에서는 창작극이라는 말 자체가 없죠. 고대 희랍극에서부터 최근 것까지 아주 두터운 텍스트의 산더미 속에서 새로운 극작가가 자기 작품을 공연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죠. 한 10여 년 됐나, 유럽 여행을 갔을 때 독일 극작가, 프랑스 극작가하고 만난 적이 있어요. 몇 편이나 공연을 했냐고 물어요. 이미 30편을 넘게 공연했다고 했더니, 거짓말하지 말라고. (웃음) 서너 편만 공연을 해도 재는 사람들이 볼 때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거죠. 다행히도 한국은 신작을 지원해주니까 행운이죠. (웃음) 1년 희곡 쓰면 4만 불이 없어진다, 생각하지 말고, 희곡을 쓰면 돈과 명예는 어떨지 몰라도 자기 작품이 공연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요. 물론 실패작이면 괴롭겠지만, 괴로워도 행복한 거니까. 극작계를 떠나지 말고 부지런히 쓰시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런데 극작가들한테는 최근 한국 연극의 경향이 반갑지는 않을 것 같아요. 공동창작 작품도 많아지고, 서사 중심 혹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에서 벗어나려는 흐름이 강해진 것 같거든요.
아마 그러한 경향은 앞으로 점점 강해질 거예요. 공동창작이라는 작업 방식이 최근에 나타난 게 아니에요. 그 방식으로 제일 많이 재미 본 사람이 브레히트죠. 브레히트의 오리지널 희곡은 <한밤의 북소리> 한편 뿐이에요. 나머지 <서푼짜리 오페라>를 비롯한 작품들은 다른 작품의 이야기나 아이디어를 가져와서 단원들하고 같이 만든 거예요. 그런 방법은 극단을 결속시키고 운영하는 데 굉장히 큰 자산이 되고 배우들한테도 메리트를 주죠. 예전에는 작품의 토씨도 고칠 수 없었던 수동적 입장에서, 극작가이자 배우로 참여하게 되면 자기 삶의 체험이나 생각이 작품 안에 녹아드니까 공연할 때, 그래 바로 이거야, 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공연을 해보면 한 사람이 쓴 작품보다 관객들과의 접점지역이 많으니까 여러 가지 매력이 있을 수 있죠 그리고 기승전결, 플롯에 얽매이지 않는 건, 잘 짜인 연극이 보여주는 경이로움도 있지만 그렇게 분명하게 잘 짜인 것을 우리 삶 속에서는 체험하기가 어려우니까, 저건 연극이지 (웃음) 우리 삶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라고 느끼기 때문이죠. 부조리극이 쓰나미처럼 휩쓸었던 그 이유 때문이었어요. 기승전결, 어떤 사건이 분명히 발생하고 전개되어가고, 그 과정 속에 갈등이 있고, 갈등의 클라이맥스가 있고 죽든, 살든, 비극이든, 희극이든, 일단 결말이 선명하고, 이런 걸 보면서 무대와 삶이 점점 멀어진다고 느꼈던 거죠. 우리의 삶은 시작도, 끝도, 결론도 없이, 애매모호하고 흐지부지한데, 잘 짜인 극 형태에서 관객들이 오히려 답답함을 느낄 수 있죠. 지금의 경향도 연극의 다양성이라고 할까, 어떤 제약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죠. 그렇지만 부정적인 요소도 있어요. 그렇게 쓰인 작품이 소위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명작이란 세월을 이긴 작품들이죠. ‘지금, 여기, 우리’에 초점을 두면 설득력을 얻는 장점 대신, 시간이 조금만 변해도, 여기는 거기가 되고, 지금은 예전이 되고, 우리는 또 너희가 되니까. 그런 텍스트가 살아남았다고 해도 공연을 해보면 뭔가 올드하거든요. 시간을 2, 3년도 견뎌내지 못하는 연극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죠. 예술 하는 사람들한테는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영원함에 대한 갈구가 있죠. 공연은 사라진다 할지라도 텍스트는 남으니까 특히나 극작가는 그럴 수밖에 없죠.
세월호 참사 이후 지금까지, 사회가 크게 요동치면서 많은 창작자가 ‘지금 여기 우리’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오랫동안 연극판에 계셨잖아요. 바뀌어서 좋은 것과 바뀌어서 안 좋은 게 뭐가 있을까요?
사실 그런 걸 생각해보지 않았는데요. 뭔가 요지부동한 평지 위에서 산 느낌보다 요동치는 파도 위에서 연극계의 한 사람으로 살아온 것 같아요. 물결에 순응했다는 말도, 저항했다는 말도 정확하지 않은데, 물결 위에서 내려오면 그때야 비로소 이건 유지됐으면 좋겠다, 이건 고쳐야 한다고 할 수 있겠죠. 이를테면 70년대에는 공연윤리위원회라는 제도적 장치가 있어서 검열을 통과해야만 공연을 할 수 있었어요. 검열 있어도 돼, 그 안에서도 내 할 말 할 수 있어, 그런 사람도 있었고, 검열 때문에 위축이 돼서 한국 연극이 발전을 못 한다, 검열이 없어지면 작품이 풍부해지고 굉장히 발전할 수 있다는 사람도 있었죠. 물론 검열은 없어져야 하지만, 아주 시니컬하게 얘기하면 철폐된 이후에도 급격히 발전된 것 같지는 않은데. (웃음) IMF가 터진 이후엔 공연예술계 쪽이 이러다간 다 고사하겠다, 그러면서 지원제도가 확대됐어요. 예술계의 고통의 부르짖음을 들어줬다는 건 정말 다행이었지만, 지나서 보면 인디언 보호구역처럼 돼버린 거예요. 인디언 보호구역은 어쨌든 보호는 해주지만 그 삶은 차라리 보호구역이 아니었을 때보다 더 비참해졌거든요. 조금 더 좋은 공연을 만들기 위해서 재력을 투입하면 곧 그게 적자로 돌아오니까 지원 받은 만큼만 투입을 하고, 공연의 질도, 배우들의 생계도, 그때에 비해서 그렇게 나아지지도 않으면서 그냥 목숨만 간당간당 유지되고 있어요. 그렇다고, 그래 죽어야 선다, 라는 객기로 어떤 뛰어난 작품 하나 만들고 우리는 다 죽자 (웃음) 그런 것도 없으니까, 그저 고만고만한 작품들이 양산되는 것 아닐까. 무엇이 남고, 무엇은 더 활성화되고, 무엇은 그만해도 좋겠다, 라고 말하기 어려워요. 아까 세월호 얘기가 잠깐 나왔는데, 마치 아우슈비츠가 서구에 끼친 영향처럼, 세월호가 연극계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끼친 영향이 너무 커요. 아마 몇십 년 후에도 그 상처가 치유될까, 할 정도죠. 근데 이게 묘하게도 “이건 우리 책임이 아니야, 네 책임이야” 이렇게 될 수 있어요. 선과 악을 구별 짓는다, 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데, 자칫하면 선과 악의 구별의 고착화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세월호에 대한 젊은 연극인들의 옳지 않음에 대한 분노,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하는 것에 대해 대단히 경의를 표해요. 그런데 또 한편 협소한 한 부분으로 책임을 모으면서 내 발을 거기에서 빼게 될 수 있는 거죠.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네요. 금방 젊은 연극인들 말씀하셨는데 후배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씀 없으세요?
글쎄요. 나 혼자 살기도 급급해서. (웃음) 졸업한 제자들이 “선생님은 성심 성의껏 우리를 안 가르치셨죠? 같은 업계의 종사자니까.” 그러면 “그럼, 유능한 너희들을 잘 가르쳤다가 내가 같은 업계에서 살 수 있겠느냐, 내가 살고 보려고 대충대충 엉뚱하게 가르쳤지.” 그런 농담을 나눠요.(웃음) 학교 제자들이나 후배 극작가들이 저기 이강백이라는 극작가가 있는데 희곡 써서도 잘 살고 있어, 굶어 죽었다는 얘기는 못 들었어, (웃음) 라고 하면서 내가 은연중에 어떤 롤모델이 돼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를 롤모델로 만들겠다, 라고 한 적도 없고 원한 적도 없지만, 이강백도 살고 있는데, 내가 이강백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딨냐, 그리고 은연중에 나와 자기를 비교하면서 이렇게 될 수 있다, 라고 생각한다는 건 고마운 일이죠. 비록 선생 자체가 어설퍼서 제자들을 어설프게 가르쳤지만 (웃음)
앞으로 꿈이 있으시다면요?
글쎄, 희곡집 10권이 내 소원이라고 다른 인터뷰에서도 답을 한 적이 있어요. 지금까지 8권 냈는데, 9권째 내려면 곧 공연하는 <어둠상자> 말고도 한두 편 더 해야 돼요. 어떻게, 어떻게 하면 9권까지는 해보겠는데 이건 진짜 하늘이 돕기 전에는 어려운 일이구나, 10권까지만 내게 해주세요,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될지 모르겠어요. 나이가 든다는 건, 보니까 뭘 이렇게 내려놓는 과정이에요. 예전에는 저렇게 능력 있고 경험이 풍부한 분이 왜 은퇴를 하는 걸까, 오히려 저분이 좀 더 일하시는 게 사회에 유익할 텐데, 그랬어요. 살면서 느끼는 건, 어떤 나이가 되면 자동으로 입력돼있는 어떤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것 같아요. 20대에는 짝을 찾는 프로그램이 작동해서 그거 이상 재미있는 일도 없고 제일 열심히 하게 되죠. 6, 70대가 되기도 전에, 벌써 50대가 되면 이제 내려놓도록 슬슬 작동을 하죠. 뭘 갖고 있거나, 이런 것들이 굉장히 부담스럽고 부질없어져요. 희곡 한편 더 써서 뭐 할래, 라고 부질없어하는 나에 대해서 저항을 하는데, 이게 너무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저항이라 (웃음) “한편 더 써서 뭘 할래? 너 이미 많이 썼고, 또 써봐야 새로운 거 안 나와, 솔직히 새로운 게 뭐 있어? 네가 살았던 세상은 지금 태어나서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하고는 전혀 다른 세상이고, 네가 말하려고 하는 거, 그거 못 알아들어, 이미 세상이 바뀌었는데 젊은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한 권당 5편씩 들어가는데 앞으로 7편을 더 쓸 수 있을까, 나를 계속 설득해가면서? (웃음) 젊으면 그런 게 필요가 없죠.
어른을 뵙는다는 게 이런 느낌인 것 같아요. 해주신 말씀 중에 인상에 남는 것도 너무 많고, 질문 드리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데요. 시간이 아쉽습니다.
뭐 부질없죠. (웃음)

마지막 질문 드릴게요. 연극데이트 공식질문입니다. 이강백 선생님께 연극이란?
연극 아니었으면 내가 뭐 하고 살았을까? 그 삶이 행복했을까? 이미 다 살아본 다음에 하는 귀납적 대답인지도 모르죠. 시작할 때부터 연극이 내 인생이야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대개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을 거예요. 그런 확신을 갖고 시작했더라도 내가 이 길 아니고 다른 길을 갔더라면 더 행복했을까, 중간 중간 많은 회의가 있겠죠. 근데 이제 다 산 삶에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오직 그 길뿐이었던 것 같죠. (웃음) 맞아, 난 처음부터 그랬어, 라는 착각도 생기고. 행복했던 것만은 사실이에요. 일단 연극 공연이 주는 소멸이라는 것, 막이 탁 내리면 가장 좋은 공연도, 가장 나쁜 공연도 소멸하죠.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空), 그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그런데 또 오직 소멸만이 아니라 텍스트는 남는다, 라는 위안이 있죠. 그렇게 많이 썼지만 한두 개만이라도 아니 두 개도 너무 많고 (웃음) 하나만이라도 영원히 남을 수 있을까, 유한한 존재로서 영원함을 갈망했었다는 것도 큰 기쁨이었어요. 또 현실적인 것도 있어요. 날카로움에 피를 많이 흘리고 깊은 상처를 받을 뻔했는데 연극이라는 쿠션이 있어서 그 예리한 칼날로부터 간격이 있었다는 게... 사실 그러한 쿠션이 없이 휘두르는 칼날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저런 삶을 어떻게 살지 안타깝고, 그래요.  뭔가 우리가 상상하고 생각하는, 그런 것의 가치, 꼭 ‘있는 것’ 만이 아니라 ‘없는 것’도 ‘있는 것’과 같은 그 가치에 눈을 떠서 만끽도 하고, 또 조금이나마 그걸 만들어봤던 거죠. 늙으면 다 그래요, 행복했다. (웃음) 죽을 때 비명을 지르기가 싫으니까 프로그램이 그렇게 작동을 하는 거 같아요. “이왕 죽는 건 똑같은데 너 비명 지를래? 아니면 난 참 행복하게 살았어, 하고 죽을래?” “아주 잘 살았다”라고 하게 되는 거죠. 이게 무슨 유언을 남기는 것도 아닌데 (웃음) 같이 연극을 하는 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일지도 몰라요. 우리가 이 풍요로운 세계 속에 비록 현실적으로는 빈곤하다 할지라도, “이제 죽을 때 봐라, 최소한 비명은 안 지르고 죽는다.” 어차피 태어났으니까 죽음을 피할 수는 없죠. 아마 연극하는 사람들은 비명 안 지를 거 같아요, 만족하는 삶을 살았다고 할 것 같아요.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부새롬

부새롬 연출가, 무대디자이너
달나라동백꽃 대표
주요작품 <뺑뺑뺑> <달나라연속극> <로풍찬 유랑극장> <뻘> 외
puromy@gmail.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