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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아직도 연출해?”

연출가 김기일

부새롬_연출가, 무대디자이너

제152호

2018.11.22

혜화동1번지 7기 동인 (이하 7기 동인) 되셔서 바쁘시죠?
기일
다른 동인들은 이미 바빠왔고요. 저만 지금 공연이 없어요. (웃음) 하반기에는 삼일로창고극장에서 하는 ‘24시간 연극제’의 프로그래머를 하는 것 말고는 작품은 없어요. 동인이 돼서 내년에 바쁠 게 미리 얹혀진 느낌은 있어요.
동인 제안 처음 받았을 때 어떠셨어요?
기일
전화가 와서 바로 결정을 해야 할 것처럼 그러셔서, 3분인가 고민하고 하겠다고 했어요. (웃음) 사실 연락이 오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긴 했어요.  만약 이런 제안이 오면 어떻게 할까, 동료들한테도 물어봤고요. 당연히 해야지,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선뜻 하겠다고 했었죠. 
왜 연락이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기일
6기 동인이 이 동인제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오랫동안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 고민을 한다는 건 기수가 바뀐다는 얘기니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누가 될까? 혹시 나도? 그런 생각을 한 거죠.
6기는 동인제에 대해 왜 그런 고민을 했다고 하던가요?
기일
제가 6기가 아니니까 조심스러운데 포럼에서 나왔던 얘기들이 있어요. 연출 중심의 연극에 대한 고민, 이윤택이 동인제 출신이라는 데서 촉발된 고민, 동인제가 권력을 넘겨주는 방식은 아닌가, 그런 고민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동인제를 유지하지 말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쉽지 않았겠네요. 7기들은 이 고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기일
이런 고민을 다 알고 있는 상황이니까 각자의 생각이 있겠죠. 아직 서로를 잘 몰라서 파악하고 고민을 공유를 해나가고 있는 상황이에요. 우선은 매주 만나서 실질적인 것들을 정해가고 있어요. 극장 운영이라는 게 가장 큰 일이니까, 누가 사업자 대표를 할 거냐, 당장 1, 2월 대관 공모를 해야 하는데 그건 어떻게 할 거냐, 그런 얘기들부터, 내년 사업을 어떻게 할 거냐, 페스티벌을 유지할 거냐, 그런 것들. 아무래도 알아가는 과정이랑 같이 가다 보니까 서로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는 거 같아요.
공식적인 입장 말고 연출님 개인적으로 동인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나,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바라는 바가 있다면요?
기일
왜 동인을 하겠다고 했는지 말씀드리면 답이 될 거 같아요. 저는 6기 동인이 연출근육을 이 공간에서 키웠다, 라고 했던 말이 제일 좋았거든요. 3, 4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물론 열심히 노력해야 가능하겠지만, 한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잖아요. 포럼 자리라든지, 여기저기서 어떤 중압감 없이 맘 편하게 하고 싶은 작업 다 해라,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앞으로의 활동이) 어떻게 구체화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특히 6기가 활동하던 시기가 그래서였겠지만, 그리고 제 기억 속에 그런 게 더 뚜렷하게 남아서일 수도 있는데, 정치, 사회적인 이슈를 많이 다뤘던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기일
제가 동인이 된다고 해서 짠 하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동인이 아니었던 때에도 공공성과 관련해서 문제의식을 갖고 문제제기를 하고 고민을 해오고 있었어요. 거기에 동인이 되었다는 게 플러스가 된 거죠.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하나, 내가 동인으로서 말하는 게 다른 의미나 겹을 만들어내나, 6기는 공공성과 작업을 일치시켜왔는데, ‘혜화동 1번지’니까 그런 걸 해야지, 라는 게 과연 맞을까, 여러 가지 고민을 하게 돼요. 잘 모르겠어요, 저도 동인은 처음이라. (웃음)
‘미래포럼’에서 ‘혜화동1번지 동인’의 문제점에 대한 얘기가 많았는데, 이런 동인제가 많이 생기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을 했어요. ‘혜화동1번지 동인’은 세대 자체가 한정적이고 연출 중심이잖아요. 작가라든지, 다른 주체들이 중심이 되는 동인제가 많아지면 좋겠다, 싶었어요.
이상적으로는 좋죠. 어디 동인들은 이런 스타일의 작업을 하고, 저쪽 동인들은 또 다른 걸 하고. 보는 사람들도 골라서 볼 수 있고. 항상 현실적인 게 문제죠.
기일
아직 동인들하고 공유된 게 많이 없는데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조심스럽네요. 순전히 제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걸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웃음) 요즘은 누구랑 술을 마셔도 다 동인 얘기만 하는 것 같아요.
궁금하죠. 저도 연출 시작하고 좀 지나서 동인이 6기로 바뀌었는데 된 사람들이 부럽고, 뭘 할지 궁금했어요. 근데 하는 걸 보고 있으니까, 봄, 가을에 페스티벌하고, 여름엔 ‘세월호’ 하고, 어떻게 저렇게 작업하지? 난 못했겠다, 그런 생각도 했었죠.
기일
6기가 작업량이 너무나 많았었죠. 그게 7기한테도 화두예요. 그 방식대로라면 우리가 소진되지 않을 수 있을까? ‘미래포럼’에서 전강희 드라마터그님이 사회를 보셨는데, 6기가 굉장히 잘해왔지만 본인이 봤을 때 삶과 연극이 일체화된 힘으로 작업을 해온 것 같다, 7기는 삶과 연극이 조금은 분리됐으면 좋겠다, 라는 말씀을 했어요. 공감되는 지점이었어요. 들어와서 보니까 엄두가 안나요. 특히나 저는 ‘자기 착취’라는 말에 되게 민감해져 있는 세대라서 그런지, 저렇게까지 하는 게 좋은 게 아닌데, 생각이 들어요. 동인들 생각은 각자 다르겠지만요. 물론 이해도 돼요. 그렇게 많은 작업을 지속해야지, 가능할 수 있으니까요.
무엇이 가능할 수 있다는 거예요?
기일
유지라고 할까요? 배우들도 그렇고, 연출들도 계속 작품을 해야지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거 같아요. 뭘 안하고 있으면 굉장히 불안해지는 거죠. 되게 이해가 되면서도, 이렇게 많이 하면서 얼마만큼 얻어가는 게 있을까, 생각도 들어요. 지속적으로 작업을 해온 선배연출들을 보면 엄청나게 바쁜 사람이 되어있어요. 멀리서 보면 롤모델처럼 보일 수 있는데 진짜 가까이 가서 보면 늘 피폐해져있고,(웃음) 누구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어떤 모습일지 알 거 같아요. 다들 너무 바쁘죠. 작업에 치이고.
기일
7기 동인들도 그래요. 1주일에 한 번 만나서 얘기하는데 일요일 밤 10시에 겨우 만나요.
'자기착취'라는 말에 민감하다고 하셨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좀더 얘기해주세요.
기일
올해 ‘10분희곡릴레이’ 했던 연출들끼리 자신들이 받은 돈을 작업한 시간으로 나눠서 시급으로 환산을 해봤대요. 그리고 제가 예전에 극단 생활을 하면서 얻은 것도 많지만 되게 힘든 것도 많았어요. 나 스스로 자원을 계속 꺼내서 어딘가에 기여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요. 그런 맥락이에요. 한국 사회에서 되게 보편적으로 청년들이 제기하는 문제, 열정페이 같은 문제인 거죠. 여기도 그런 구조로 이루어져 있구나,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열정페이도 못 받는 경우도 많죠.
기일
자기착취는 열정페이보다 더 심한 다음 단계? (웃음) 등가교환이라는 게 성립하지 않으면 착취가 일어나는데, 그 대상이 스스로인 거죠. 이 판은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탁월성 같은 게 전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니까, 무한대의 노력이 가능하면서 동시에 나 스스로를 무한대로 착취할 수 있는 거죠. 제가 임금노동자라면 받은 만큼 일할 거야, 가 되는데 여기서는 진짜 끊임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으니까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게 창작자의 특징이기도 한 것 같은데, 그런 구조까지 물려있는 거죠.
잠깐 쉬는 시간.
연극 시작했을 때 얘기 좀 해주세요.
기일
고등학교 연극반부터 시작했어요. 교지 편집부라고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가는 데가 있었어요. 친한 친구랑 3명이서 들어가려고 했는데 저만 똑 떨어진 거예요. 완전 반발심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어요. 학교에서 소위 양아치들이 모여있다는 연극반에 과감하게 갔다가 완전 발목 잡힌 거죠.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첫  CA 시간에 갑자기 선배들이 복도에서 무릎 꿇고 앉으라고 했는데, 2학년 선배가 피투성이가 돼서 나왔어요. 신입생 군기 잡는다고.
아니, 연출님이 할 땐데 그런 시대였어요?
기일
학교로 갈수록 그런 문화가 늦게 바뀌는 것 같아요. 남자 학교라서 더 그런 것도 있었던 거 같고요. 그게 학교, 학생의 문화라고만 볼 수 없는 게 연극으로 합리화시키는 게 많긴 했어요. 공연 전날 우르르 데려가서 열대씩 때리는 거예요. 공연 전에 긴장하자, 라는 말로 합리화가 되는 거죠.
아는 방법이 그거 밖에 없어서 그랬던 것도 있겠네요. 말죽거리 잔혹사도 아니고, 2000년대에 충격적이긴 하네요. 원래 연극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정말 반발심으로만 시작을 한 거예요?
기일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해서 문학엔 관심이 많았고 대학도 국문과를 갔어요. 공부를 잘하긴 했는데, 어렴풋하게나마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중 2 때 머드게임 하다가 알게 된 대학생 형들한테 술을 배워서 먹으로 다니기도 하고, 연극반도 하고, 실용음악과 가려고도 해보고, 엉뚱한 짓을 많이 했었죠. 밤새워가면서 막 몰두하고, 연극하는 걸 정말 재밌어하긴 했어요. 내 스스로가 책상물림일 수 있다라는 자의식이 있었기 대문에, 내가 무대에서 뭔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그걸 좀 상쇄시켜준 달까? 그런 욕망이 있었던 거 같아요. 넌 이걸 못할 꺼야, 스스로가 생각하기도 하고 남들이 나를 그렇게 보는 것 같으니까, 나도 이거 할 수 있어, 라는 마음으로 연극을 했던 것 같아요.
대학에서는 연극반을 했던 건가요?
기일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죽어도 연극반은 안 할 거야, 그랬어요. 인문대에 외국어연극제가 있었는데, 고등학교 연극반 출신이라고 하니까 한 번 와보래요. 가자마자 대뜸 모놀로그를 시키는 거예요. 그런 문화가 너무 싫어서 안 하려고 했던 거였거든요. 바로 나왔어요. 그러고 한 1년 있다가 국문과 내에서 새로 연극반을 만들어보려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처음 만드니까 선배가 없겠구나 (웃음) 정말 재미있게, 열심히 연극반 생활을 했죠.
현장에 나온 건 자연스러웠겠네요.
기일
학교에서만 계속 연극을 했으니까 재미는 있었지만, 사실 폐쇄적이 되기 쉽잖아요. 연습실을 하나 빌려서 졸업생, 재학생이 섞여서 계속 작품을 만들었어요. 근데 공연은 학교에서밖에 못하고. 지금 생각해보면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였죠.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에서, 학교 주변을 오랫동안 맴돌았군요.
기일
맞아요. 그 팀이 2년을 못 가고 와해가 됐어요. 진짜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고 있는데, 같이 연극반을 했던 선배가 ‘걸판’이라는 데가 있다고 공연을 한 번 봐보래요. 공연을 봤는데 좋았어요. 젊은 사람들이 뭔가를 막 하고 있고, 내가 저기에 들어가서 같이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이런 진취적인 모습이 아니라 되게 쫄려있었지만요. (웃음) 그 선배랑 오세혁 연출이랑 술자리를 하게 됐어요. 오세혁 연출이 ‘B성년 페스티벌’의 <한 번만 때려볼 수 있다면>이라는 작품을 할 외부 배우를 찾고 있었나 봐요. 대본을 보내주고 “한번 해보실래요?” 그랬는데, 되 게 바보 같은데, 그 날 택시 타고 가면서 엉엉 울었어요. 
너무 좋아서요?
기일
물론 좋았죠. 그리고 조금 다른 감정도 있었어요. 지금 젊은 창작자들도 자기 증명을 해내는 게 정말 힘들잖아요. 드디어 기회가 왔다, 나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그런 거였어요. 아무도 안 시켰는데 다음날부터 걸판이 공연하고 있던 극장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제가 할 공연은 두세 달 뒤였는데, 그냥 청소부터 하고 그러면서 쫓아다녔어요. 극단 사람들은 이상했겠죠. 오세혁이랑 술 마시고 나더니 갑자기 나타나서 앉아있으니까요. 그렇게 입단도 안 하고 극단을 6개월을 쫓아다니다가 들어가서 2년 반 정도 극단 생활을 했죠.
이쯤이면 배우로 시작했는데 어떡하다 연출을 하게 됐어요, 라고 물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느껴져요.
기일
극단에서 연출을 시작하게 됐는데, 계기가 좋게 말하는 버전, 나쁘게 말하는 버전이 있어요. (웃음)
나쁘게 말하는 버전으로요.
기일
극단에서 연출을 할 사람이 필요했었어요. 한 번 해보겠냐 해서, 했죠. 저녁에는 배우로 공연하고 끝나고 머리에 흰 칠을 한 분장 그대로 가서 연출회의 하고, 정말 정신없었어요. 저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으니까 냉큼 받았던 거 같아요. 배우를 하면서 “아, 나는 배우 안 되겠는데” 그런 생각이 많아졌던 거죠. 무대 올라갈 때마다 너무 긴장되고,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하지만,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으니까 배워야 되는데, 누가 좀 가르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때는 많이 했어요. 그리고 걸판이 대학로의 일반적으로 프러덕션이랑은 달라요. 전국을 다니면서 마당극 같은 공연을 1년에 백 몇 개를 해요. 나는 책상물림이라는 자의식이 계속 있다 보니까, 오히려 그런 면에 끌렸던 것 같아요. 군대 가는 느낌으로, 걸판에서 이런 걸 경험하면 완전체가 되지 않을까? (웃음) 하지만 하면서는 내가 배우가 아닌가 보다, 라는 생각을 계속한 거죠.
이제는 배우를 다시 하고 싶지 않으세요?
기일
연극의 연장선으로서는 할 수 있겠지만, 업으로서의 배우에 대해서는 미련이 없어요. 돌이켜보면 예전에도 연기 자체보다는 연기술, 연기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같은 이론적인 측면에 관심이 더 많았어요.
문학에 관심 많았다고 하셨는데 극작도 하세요?
기일
작년에 처음 써봤어요. 주변에서 한 번 써서 해봐, 그래서 했는데 정말 죽을 뻔 했어요. 그래도 생각보다 좋은 평을 들어서 욕심이 좀 생기기도 했고, 매년 한 편은 작/연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대학 다닐 때 연극도 되게 열심히 했는데, 시도 열심히 썼어요. 시 동인도 만들고, 1년에 2번씩 동인지도 냈어요. 등단하려고 신춘문예도 여러 번 내보고. 그것도 해보니까 아닌가 보다, 싶었죠. (웃음) 애초에 말 차체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시를 썼던 것 같고. 창작자로서의 욕심이 글에 닿아있는 게 있어요. 그리고 작가를 만나는 것보다 쓰는 게 빠르기도 하니까. (웃음) 도대체 작가라는 사람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관계를 쌓아가야 되는지 모르겠고, “작품 좀 줘보실래요?” 이거밖에 없더라고요. 이틀 전에 동료랑 우리는 작가 만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얘기를 했었어요. 기획자도 그렇고요. 분명 어딘가에 있는데 못 만나고 있는 거죠.
뭐를 꿈꾸세요?
기일
죽을 때까지 연극하는 게 목표예요. 농담이자 진담인데, 제가 6, 70이 됐는데 “김기일, 그 사람 아직도 연출해?” 이런 얘기 나오게. (웃음) 누군가는 동인이 돼서 더 큰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사실 전 큰 기회가 오면 ‘죽을 때보다 10년 먼저 은퇴해야 될 거 같은데?’ 이런 걱정이 먼저 들어요.
너무 멋있네요. 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웃음) 연출님 얘기도 너무 재미있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은데, 지금껏 얘기한 것도 다 못 실을 것 같아요. 아쉽지만 마지막 연극데이트 공식 질문드립니다. 김기일한테 연극이란?
기일
계속하고 있고, 해야할 것. 너무 내용이 없는 말 같지만, 그 정도밖에 말을 못하겠네요.

김기일(연출가)

극단 둘이서. 혜화동1번지 7기 동인.

<화학작용>, <15분 연극제> 등 주로 젊은 창작자들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플랫폼에 힘입어 작품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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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새롬

부새롬 연출가, 무대디자이너
달나라동백꽃 대표
주요작품 <뺑뺑뺑> <달나라연속극> <로풍찬 유랑극장> <뻘> 외
purom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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