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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이 만난 사람] 박은선X고주영

예술, 시간, 연대

박은선, 고주영

제156호

2019.03.28

[연극인이 만난 사람]은 현장에서 활동하는 연극인과 그의 초대를 받은 특별한 분이 만나 서로의 작업과 관심사, 연극에 대한 생각, 동시대적 화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연극과 창작에 대한 관점을 흔들고, 확장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 연극in 편집부

‘박은선’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2012년, <움직이는 집@서울>이라는 타이틀로 독립기획자로서 첫 작업을 할 때였다. ‘땅은 누구에게도 소유될 수 없다’라는 신념 하에 법률상 ‘건축물’의 정의에서 교묘히 빠져나가, 땅에 고정되지 않고 바퀴가 달린, 개개인의 삶을 위해 스스로 짓는 최소의 공간을 제안하는 프로젝트였다. 기획을 위해 이곳저곳에 협력을 구할 때, 몇몇이 ‘리슨투더시티 박은선’ 씨를 만나보라고 했었다. 2014년 안산에서 독립국가 프로젝트를 하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리슨투더시티의 이름은 희망버스(2010) 때부터 익히 들어왔지만, 쉽게 연락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지금도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어떤 회의, 정체성,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춥고 음울했던 3월 어느 날, 청계천 자재상 사이의 오래된 건물에 자리하고 있는 리슨투더시티의 사무실에서 박은선 씨를 드디어 만났다.

당사자는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학부와 대학원에서 회화를 공부한 박은선 씨는 도시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면서 도시공학과 석박사과정도 공부하였다. 도시에서 사는 시민으로서 폭력적 도시개발 문제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청계천 복원 사업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개발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목격한 도시 개발은 “일단 살고 있는 사람을 내쫓고, 그곳에 있었던 역사를 무턱대고 매몰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2009년, 그 일관된 개발의 논리가 만들어낸 비극, 용산 참사가 터졌다. 그리고, ‘리슨투더시티’는 이때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단체를 꾸리고 활동을 시작했고, 여러 재개발 현장, 내성천, 옥바라지 골목, 콜트콜텍, 여성예술인연대, 그리고 지금 청계천-을지로에 이르기까지, 많은 ‘현장’을 거점으로 활동해왔다.

고주영
기획자로서, 결국은 수많은 이슈 중에 무엇을 픽업할지에는 개인적인 트리거가 있는 것 같다. 나에게 당사자일 수밖에 없는 젠더문제나, 2014년 안산이라는 도시를 리서치하고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세월호 참사로 인해 무산된 경험이 이듬해 <안산순례길>로 바뀌어 올해로 5년째를 맞는 것처럼. 개인의 경험, 연관관계, 접점이 발생하는 이슈들이 따로 있는 것 같다. 리슨투더시티는 많은 사회적 이슈들에 관여하며 활동을 해왔지만, 지나치게 역동적인 한국 사회에서는 매일 같이 새로운 이슈가 터진다. 리슨투더시티가 관여하는 ‘이슈’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선택’의 기준 같은 것이 혹시 있는지 궁금하다.
박은선
리슨투더시티에게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공통재’(the commons)인데 공기, 태양빛, 강, 삼림, 그리고 도시 역시 공통재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에서 강이나 삼림은 국가나 민간에 소유되어 있지만, 공통재여야 하는 것이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파괴되는 현상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청계천 같은 경우, 대학 때 복원 개발을 한다며 노점상들이 쫓겨나는 장면을 봐왔던 터라 관심이 있었고, 2015년에 세운상가를 부수는 대신 재생하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기뻐했는데, 알고 보니 이전과 똑같은 재개발 방식이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박은선

고주영
어떻게 보면 은선 씨나 제가 젠더 이슈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나 은선 씨가 청계천 입주자로서 청계천-을지로 보존연대 활동을 하는 것은 직접 당사자로서의 이슈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저의 경우 세월호, 은선 씨의 경우 내성천 지키기 활동은 직접 당사자는 아니지만 당사자가 되고자 노력하는 이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당사자성을 어떻게 획득하느냐는 기획자의 모티베이션과 직결되는 문제다. 넓은 범위로 보면, 세월호도 내성천도 국민 모두가 당사자이지만, 좁은 정의로 보면,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할 수 있다. 그런 이슈들에 있어서 당사자 되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박은선
중요한 질문이다. 리슨투더시티를 시작하면서 하지 말자고 했던 것이 사회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루는 예술작업이었다. 사회문제를 소재로만 다루는 작업들이 있지 않나. 누군가에게는 고통인데 그것을 소재화한다고 해서 그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당사자의 태도를 갖게 된다. 시혜의 시선이 아니라 우리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뛰어들 수밖에 없다. 인류학에서도 참여냐 관찰이냐의 문제, 시혜적 시선의 극복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있다. 그런데 이것을 건전한 토론이나 논쟁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개입이나 당사자성을 폄하하는 부류들도 있다. 우리는 형식이나 우리의 위치나 정체성보다는 이 사안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 문제의 해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물론 역량이 안 되는 경우도 많고, 우리의 비전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그런데 당사자란 개념은 대체 무엇인가?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찬성 주민들은 당사자의 범위를 좁히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주민의 기준을 거주기간 5년에서 10년으로 늘려 강정 바다와 마을을 지키려는 자들을 제외하듯 당사자에 대한 기준은 인위적이고 제한적이다. 10년 전에 이사 온 사람이라고 모두 마을 문제에 깊이 고민할 리도 없고, 최근에 이사 왔다고 해서 마을에 대하여 고민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모두 기준이 다르겠지만, 결국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성, 간절함이 기준이 아닐까.
고주영
모티베이션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하고 싶다. 세월호와 관련해 안산순례길부터 혜화동1번지 기획초청 공연까지 이러저러한 작업을 해오면서, 나의 모티베이션에 대해 스스로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최초의 계기로부터는 점점 시간의 거리라는 것이 생기고, 진척은 더디고, 반면 세월호 가족이나 활동가들과는 이러저러한 관계가 생긴다. 혹시 현재 나의 모티베이션은 백프로 순수하며, 처음의 분노처럼 강력한 것이 아닌 어떤 관계, 관성에 의해 이끌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모든 사회적 이슈, 특히 한국 사회에서 한 이슈가 결론 지어지고 해결되는 데는 엄청나게 지난한 시간이 걸린다. 이 긴 시간 동안 우리의 모티베이션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박은선
우리나라는 살아있는 지옥(living hell)인데, 굳이 분노를 끌어낼 필요도 없지 않나. 지겨울 틈이 없다. 아무 일도 없으면 오히려 불안하고, 평화로우면 불안하지 않나? 그래도 동기를 처음처럼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콜트-콜텍에도 요즘 적극적으로 함께 하지 못하고 있어 마음이 무겁고, 많은 사람이 우리가 왜 돈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지 이해 못 하겠다고 비아냥거릴 때도 마음이 쓰리다. 오늘도 청계천 거리에서 상인들을 대상으로 기초 설문을 하는데 이거 왜 하냐는 질문이 많았다. 너희들 용돈이라도 벌려고 설문조사 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 분도 있었다. 이럴 때면 정말 기운이 빠진다. 우리는 이런 일이 많기 때문에 더더욱 국가나 기업으로부터 후원금을 안 받으려고 한다. 우리 행동의 목적이 이윤 때문이 아니라, 이 공간을 어떻게든 남기고 제대로 된 도시재생을 할 수 있도록 기여하고자하는 것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더욱 빈곤해지는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환경이나 도시문제의 경우, 그 대안이라는 것이 돈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다. 내막도 잘 모르고 연대도 안 하는 사람들은 대충 얻어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사실을 구성하고 험담한다. 현장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는 이간질과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1)이다.

고주영

고주영
그런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같은 것은 어떻게 이겨내나. 심지어 리슨투더시티는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서의 공격도 적지 않다. 홈페이지에 사찰하지 말라고 경고가 쓰여 있고, 구성원들 실명도 가려져 있더라. 어떻게 견디나. 애써 만든 공연에 대해 관객의 표정, 내부 구성원의 불평, 소문으로 들려오는 악평 한마디에도 맞서서 대응하기보다는 숨어서 스스로를 질책하는 나로서는 그런 속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너무 대단해 보인다.
박은선
나도 이겨내지 못한다. 지금도 시공업체들이 공격 전화를 많이 한다. 속된 말로 ‘드러워서 하기 싫다’는 생각도 든다. 시행사에게 시달릴 때, 언론의 공격을 받고 댓글 공격받을 때, 이유 없이 사이버 불링을 당할 때 특히 여성예술가, 활동가로서 공격당할 때, 왜 이런 활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보람도 없다. 하지만, 동료들과 함께 고민하고 바꿔 나가려는 과정이 있어 참을 수 있다. 그래서 잘 이겨낸다기보다는 애써 참으려고 노력한다는 편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반성 없는 가해자들을 보면서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듯하다. 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 운동권 내 여성 혐오는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그걸 늘 뒤로 미뤄왔다. 나중에 처리하자, 그것보다는 여기는 철거 현장이니까 철거에 더 신경 써야 한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게 10년이다. 그러다가 방관해왔던 잘못을 성찰하면서 2016년부터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때부터 여성예술인연대를 꾸려 활동했다. 이 활동을 하면서 그동안 경험해온 젠더 폭력을 어떻게 이야기로 구성할지 더욱 구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었다. 함께 하는 동료들이 있어서 버티고 있다.

여성이자 시민이자 활동가이자 예술가이자…

고주영
예술가냐 활동가냐, 그런 질문 많이 받으셨을 것 같다. 사실 어느 쪽의 정체성이 더 강한지 그런 궁금증도 있다.
박은선
그런 구분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 안에는 여러 가지 페르소나가 있다. 다방면으로 사물을 사고하고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데, 나에게 활동가냐, 예술가냐, 연구자냐, 하나를 정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고 전근대적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형식을 내용에 맞게 나중에 정한다. 즉 어떤 활동은 조금 더 예술적일 수도 있고 어떤 것들은 필요에 따라 법적 소송이나 행정 대응이 될 수도 있고 학술적 논문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청계천 도시재생 문제를 놓고 이 이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런 방식이 옳겠다 판단하고 실행하면 누군가는 그걸 활동이라고 보고 누군가는 예술로 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과정으로 누구와 어떤 결과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 배우고, 안 해본 일을 새로 배우기도 하면서 여러 정체성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고주영
나는 사실 은선 씨가 하듯이 일 년 내내 세월호, 혹은 어떤 이슈와 관련해 활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가령 세월호 관련 작업을 많이 했다고 소개되거나, 하게 될 때 사실은 굉장히 조심스럽다. 내 일상 속에서 얼마나 세월호에 대해 고민하고 부딪히며 살고 있나, 고작 그 정도, 일 년에 손에 꼽을 날짜만큼 세월호 작업을 하면서, ‘예술’이라는 이름에 기대어 너무 쉽게 ‘세월호’를 입에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늘 자괴감이 든다. <움직이는 집@서울>을 했을 때, 여러 사람에게 리슨투더시티를 만나보라는 조언을 들었음에도 선뜻 연락하지 못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직감적으로 필요한 작업, 지금, 이 타이밍에 꼭 같이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판단해 프로젝트를 기획했지만, 나는 공통재를 평생의 키워드로 삼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은선 씨처럼 일상 자체가 그 현장, 싸움에 맞닿아 있는 활동가도 아닌데 감히... 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박은선
고민조차도 안 하는 사람이 더 많다. 최악의 경우 뻔뻔하기까지 하다. 성폭력 가해자였던 사람이 갑자기 여성문제에 관한 영화를 만들거나 하는, 반성 없이 작업하는 사람 정말 많다. 일부 활동가들은 연대자들,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주는 역할을 하다가 자신의 목소리가 가장 합리적이라고 굳게 믿고 의견을 무시하기도 하는데, 성찰의 과정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성찰성이라고 생각한다. 참여와 관찰의 정도를 결정 짓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누구나 자기의 삶이 있다. 강에 대한 작품을 만든다고 해서 매일 강에 가서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야만 좋은 예술 혹은 활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가와 사회적 참여가 이분법처럼 나누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자신의 관점은 불편부당하며, 이성적 중립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이며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예술이나 행동을 맥락 속에서 고민하고 성찰하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고주영
연극계 성폭력 가해자들이 무대 위에서 그렇게 열띠게 부르짖던 정의가 일상에서 하나도 지켜지지 않는 것과 혹여 나의 알량한 작업도 같지는 않을까, 그런 두려움과 주저함이 점점 커진다. 시장도 관객도 점점 작아지는 이 판에서 저 거대한 공공과 대기업이 제시하는 기회와 예산에 선뜻 의존해 정의를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런 회의감도 적지 않다. 과연 이런 연극이,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박은선
우리나라 예술계는 국가 기금 없이 예술 창작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고 이것이 가장 근본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관객으로부터 수입을 얻을 생각을 못 하고 있다. 나는 이 문제가 노동시간과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장시간 노동을 하고 여가시간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예술에 절대 시간을 쓰지 않는다. 국가로부터 예술계가 지원금을 얼마나 받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예술을 만들고 향유할 수 있는 관객을 만들 수 있는지 더욱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가가 국가 기금이나 기업 후원을 받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자기 예술 작품을 기금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리슨투더시티도 생계가 막막하기 때문에 국가 기금에 지원하기도 하지만 낸다고 된다는 보장도 없고, 정산 과정이 너무 힘들고 복잡한 데다 창작 기간이 일 년밖에 안 되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벌어서 하고 싶은 것 하자고 생각하고 있다.

박은선 씨의 몇 가지 유레카적 이야기는 ‘시간’이었다. 몇 년이고 들이는 ‘시간’이 결과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가장 많이 연대해주는 주체들은 ‘시간’이 많은 예술가였다. 예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노동시간’ 축소가 답이라고 이야기했다. 박은선 씨의 시간이 촘촘히 새겨지고 있는 리슨투더시티의 다양한 활동과 프로젝트는 홈페이지와 SNS에서 볼 수 있다. 각기 다른 맥락이겠지만, 또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번 생은 망”한 은선 씨와 나의 시간의 끝은 어디로 향해가고 있을까.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1. 사이버 폭력. 특정인을 사이버상에서 집단적으로 따돌리거나 집요하게 괴롭히는 행위.[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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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선X고주영

박은선X고주영
박은선
리슨투더시티 디렉터로 2009년에 팀을 시작했다. 리슨투더시티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예술과 창의성이 재화를 만드는 또 다른 하나의 도구가 아닌 공통의 것을 공통의 소유로 만드는 일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산, 공기, 하늘처럼 도시 공간도 우리 모두가 함께 공유해야 하는 하나의 공통재로 생각하고 있다.
www.listentothecity.org 

고주영
몇몇 공연예술 축제, 지원기관을 거쳐 2012년부터 공연예술 독립프로듀서이자 한-일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움직이는 집@서울> <서울시주거대책위원회> <제로 리:퍼블릭> <변칙판타지> <안산순례길> [권리장전權利長戰2016_검열각하] [혜화동1번지 6기 기획초청공연 세월호 2017-2018] [연극연습 프로젝트] 등의 작업을 해오고 있다. 연극·극장·예술과 그 바깥의 사이에 있고자 한다.
breeeez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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