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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양종욱X김신록

새로운 몸-문화를 위한 정거장, 사츠

김신록_배우

제157호

2019.04.11

[배우가 만난 배우]는 배우와, 또 다른 배우 김신록이 만나 연기 이야기를 합니다.
창작자로서 배우, 창작으로서 연기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고민합니다. - 연극in 편집부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님, 만약 자리에 앉아 계신다면 ‘일어나지 않고 일어나려고’ 해보세요. 혹시 서 계신다면 ‘앉지 않고 앉으려고’ 애써보세요. 일어나거나 앉으려고 결정하는 순간과 실제로 그 행동이 수행되기 전까지의 사이에 보류된 상태의 에너지가 느껴지나요? 아니면 지금 위치에서 일어나거나 앉거나 눕거나 돌아서거나 등등을 몸으로 결정해보세요. 수많은 몸의 가능성 안에서 무엇인가 결정되기까지의 긴장감이 느껴지나요? 연기에서는 의도와 행동 사이의 잠재적인 이행의 상태, 어디로든 다음으로 갈 수 있는 선택의 순간에 경험되는 역동적인 가능성의 상태를 ‘사츠(Sats)’라고 명명합니다. 연극팀 양손프로젝트에서 활동 중인 양종욱 배우님을 만나 ‘사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사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 알다시피, ‘사츠’라는 노르웨이 언어를 연기용어로 처음 제시한 사람은 덴마크의 연출가 유제니오 바르바(Eugenio Barba)이다. 그의 책 『연극인류학』(안치운·이준재 역, 문학과 지성사, 2001)에 보면 사츠에 대해 “행동보다 앞서는 순간에, 필요한 모든 힘이 공간 속에 펼쳐질 준비가 되어 있지만, 보류되어 아직 고삐가 묶여있을 때, 배우는 자기의 에너지를 사츠의 형태로, 즉 역동적인 준비의 형태로 체험한다.”라고 적혀있다.
일단, 사츠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 준비된, 고양된 에너지의 퀄러티를 사츠라고 ‘명명한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당시 나에게 ‘배우의 에너지’라는 건 관념적이었는데, 그걸 어떤 식으로든 구체적으로 개념화시키고 명명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경험의 개념화, 명명에서 연기에 대한 탐구를 출발할 수 있다는 중요한 발견이 되었다. 용어의 힘, 개념의 힘이랄까.
배우로서의 경험을 통해 사츠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개인적인 정의를 들려 달라. 아직 공식화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개념이나 명명이 있다면 그것도.
훈련할 때 늘 사츠를 인식해보려고 한다. 사츠의 두께를 인식해보고, 어떻게 운용할지 인식해본다. 사츠를 공간의 사츠, 시간의 사츠로 분리해 훈련할 수도 있고, 배우의 사츠, 인물의 사츠, 드라마의 사츠로 분리해서 이해하고 훈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바르바는 사츠를 근육적 사츠, 신경학적 사츠, 정신적 사츠로 구분해 놓기도 했다.
근육적 사츠, 신경학적 사츠, 정신적 사츠에 대해 부연해 달라.
예를 들어 사츠를 시험하기 위해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거나 내려갈 때 이 에스컬레이터가 멈추는 상상을 한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을 때는 버스가 정류장을 덮치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그것만으로도 내 몸의 근육들, 호르몬, 긴장감 등이 미세하게 조정된다. 부동성 안에서 내 근육과 정신과 신경이 기민하게 준비되어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퀄러티로 채워지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체를 잠재적이고 숨겨져 있는 높은 갈등의 직전에 위치시켜 놓는 걸 의미한다. 좋은 배우, 좋은 역할을 많이 해 본 배우는 이런 극적인 순간을 많이 연기해봤을 테니 사츠를 구현하는 능력이 높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배우의 사츠, 인물의 사츠, 드라마의 사츠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인물의 사츠라는 말이 내겐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사츠는 그것을 인식하는 힘이 없다면 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인물이 짝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고백을 할지 말지 망설인다고 치자. 분명 그 인물은 고백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여러 가지 결정의 가능성, 잠재적인 이행의 상태, 보류된 에너지를 경험하고 있다. 배우는 그 인물의 상태를 이해하고 배우의 근육으로, 신경으로, 심리로 그 사츠의 상태를 발생시키고 운용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인물은 자신이 그런 사츠의 상태에 놓여있음을 알지 못한다. 인물은, 혹은 인간은 많은 순간 스스로의 상태를 인식하기보다는 상황이나 정념에 휩싸여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식은 없지만 사츠의 다른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상태의 인물의 에너지를 아이러니하지만 인물의 사츠라고 부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배우의 사츠를 통해 인물의 사츠를 구현할 수 있고, 구현된 인물의 사츠를 통해 드라마의 사츠가 구축된다고 이해하면 될까.
더 근본적으로 이해해 보자. 인물의 사츠를 생각하면서 깨달은 것인데, 사츠란 중요한 것과 맞닥뜨릴 때 신체의 활성화 상태인 것 같다. 중요한 것과 마주하거나 그 안에 들어갔을 때 나의 신체 상태를 얼마나 잘 사용할 수 있는가, 진짜 중요한 것과 맞닥뜨렸을 때 진짜 내 감각을 얼마나 이용할 수 있는가. (일어나서 설명하며) 어마어마한 것과 만나면 동공이 커지고, 몸이 이렇게(지금의 내 몸처럼) 된다. 그것은 저게(상상 속의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내게 뭔가를 주기 때문이다. 이때 내 몸이 일상보다 살아있는, 생명력 있는 몸으로 조정이 되는 것 같다. 내게 뭔가를 요청하는 것과 맞닥뜨렸을 때 내 몸은 생명력을 높이는 일을 한다. 호르몬(신경), 근육, 심리상태를 조정하게 된다. 최적의 생명력을 갖고 있는 상태, 그것이 사츠가 아닐까.

양종욱

자칫 사츠가 중요한 순간, 극적인 순간에만 존재하거나 필요하다고 오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자크 코포(Jacques Copeau)가 ‘모든 움직임은 매 순간의 중립을 갖는다’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무대 위의 모든 순간은 매 순간의 사츠를 갖는다고 봐야하지 않나.
동의한다. 나의 주된 테마 중 하나는, 내적인 흐름들, 즉 충동, 느낌, 생각, 기억 등이 외적인 움직임과 소리와 말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즉 나의 신체적인 행동이 내면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타인 혹은 세계와 잘 만날 수 있는 지다. 이 테마를 탐구하기 위해 나는 생각, 충동, 느낌, 기억과 연결된 근육의 움직임을 분리해보려는 일을 한다. 움직여보다가 얽히면 다시 사츠, 즉 최적화된 신체의 상태로 돌아간다. 코포가 이야기한 중립, 더 정확히는 사츠로 돌아간다. 지난 인터뷰에 실렸던 황혜란 배우의 ‘빈 그릇’ 역시 내게는 사츠다. 나는 원형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모든 것의 출발점, 나의 기반. 그런 의미에서 사츠는 내게 원형, 정거장, 통로이다. 그 원점에 대한 근육적, 신경적, 심리적 감각이 단단하고 정확하게 내 안에 위치해 있고, 그것이 내적이고 외적인 상태의 상관관계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주면 나는 나를 운용할 수 있게 된다.
동의한다. 다만 ‘최적화된 신체 상태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독자들에게, 단순한 차렷 자세, 무표정한 얼굴의 무개성, 모든 경험을 털어내고 다시 시작하려는 기계적인 0점으로 오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많은 신체훈련에서 ‘중립’이라는 개념이 이런 식으로 오용되고 있는 것 같아서 덧붙이는 사족이다. 훈련의 장에서 사츠 역시 오해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 강도 높은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대기하는 상태로 버티는 순간을 사츠로 오해하기도 하는 것 같다.
맞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진짜 사츠가 아닐 수 있다. 근육적인 사츠와 정신적인 사츠가 어떤 비율을 가지고 만나는지에 대한 퀄러티가 중요하다고 본다.
내게 사츠의 감각은 인식과 몸이라는 두 개의 원이 정확하게 그 궤를 일치시키는 순간, (양손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어 교차시키다 두 원을 정확히 포개며) 시야가 밝아지는 순간, 잡음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요새는 오히려 강력하고 큰 순간의 사츠보다, 작고 섬세한 순간의 사츠에 더 관심이 많다.
그것은 어느 정도 훈련이 된 이후에야 탐구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다. 심리, 정신, 근육, 혹은 사츠나 중립, 센터라는 개념 모두 실제적으로 손에 잡혀야 하므로, 더 큰 순간을 염두에 두며 몸을 훈련하게 되는 것 같다. 훈련을 시작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아닐까. 근육적인 양, 에너지 소모가 많은 사츠를 경험해야 섬세한 탐구로 넘어갈 수 있다고 본다.
동의한다. 그러나 동시에, ‘훈련’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를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메소드나 엑서사이즈든 나를 확장하고 나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지, 반대로 어떤 메소드나 엑서사이즈를 위해 나를 도구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초기 단계의 훈련에도 더 개성 있는 몸, 살아있는 개인의 감각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맞다. 어떤 훈련의 역사나 경험에서 배우는 절대 이상을 구현하거나 증명하거나 발생시켜내기 위한 도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게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이 유니크한 자아를 개발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그 몸이 컨템퍼러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배우훈련이란, 바르바의 말을 빌리자면, 나의 몸-문화를 버리고, 그 몸에 새로운 문화를 입고, 그 위에 다시 내 몸-문화를 세우는 것 자체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개성이 지워진 몸을 거쳐 가는 훈련의 과정도 이해가 된다. 그 몸 너머 진정한 개성을 장착한 몸으로 회귀하는 것, 그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일상적인 몸-문화를 버리고 새로운 몸-문화를 입는 것, 그 위에 나의 진정한 개성이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 아주 멋진 표현인 것 같다.
관객과 무대가 새로운 몸-문화로 만나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몸-문화를 위한 정거장이 바로 사츠가 아닐까. 그런데 이런 몸으로부터 출발하는 작업, 몸 연극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과연 그런가. 나는 몸 연극에 대한 생각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소위 말하는 ‘피지컬 시어터’의 몸만을 몸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허구가 거세된 퍼포먼스의 몸만을 몸이라고 부르고 훈련하는 것은 편협하다고 본다. 반대로 소위 ‘역할 창조’를 위해 허구 속 인물의 몸을 구축하는 것에 머무르는 몸 이해 역시 편협하다. 나는 허구 안의 몸, 인물의 몸, 일상을 재현하는 몸에서도, 그리고 그 몸과 배우의 몸이 뒤섞여 있는 몸에서도 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이 발견되고 탐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맞다. 나는 개인적으로 상황이나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를 넘어서 몸으로부터 출발하는 퍼포머로서 작업을 해나가려고 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양손프로젝트의 다음 작업은 해롤드 핀터의 <배신>이다. 이런 심리적 사실주의를 하면서도, 몸 연극을 할 수 있는 가능성, 심리적인 작업이나 역할에 대한 작업에서 어떻게 확장된 몸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가 숙제이다. 존재의 방식에 대한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 말이다.
그런 확장된 방식의 탐구와 이해가 이루어져야만 몸 훈련이 실제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주로 프로덕션 체제로 흘러가는 한국 연극 현장에서, 배우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장르, 어떤 양식의 작품에서 연기하든, 자신만의 몸에 대한 화두를 가지고 있는가라고 생각한다. 어떤 작품에서든 자신의 화두를 가지고 몸을, 존재를 탐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없다면 몸에 대한 훈련과 현장은 계속 괴리 될 수밖에 없다.
맞다. 이미 규정되거나 낡아버린 것을 새롭게 만들거나, 관객과 배우가 새로운 관계를 발견해내기 위해서는 몸에만 답이 있다. 몸이라는 것을 중심에 둔 화두로 뭔가를 감행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그룹이나 예술가든 자신의 철학과 개성을 담은 ‘몸-문화’를 발전시켜가지 못하고 ‘아이디어’에만 머무르는 것은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배우가 출연하지 않는 연극이 아니라면, 물론 그런 연극이 있을 수도 있지만, 무대 위에 존재하는 것은 결국 배우의 몸이기 때문이다.
‘관객과 배우가 새로운 관계를 발견한다’는 표현을 들으니 ‘말해진 말과 말하는 말’이라는 철학적 화두가 생각난다. 이미 규정되고 사용된 ‘말해진 말’ 말고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생성하고 관계 맺는 ‘말하는 말’을 발견하는 것이 예술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동의한다. 동시대, 현재 스코어, 지금, 현재를 첨예하게 붙들고 있는 힘, 그 역시 사츠 아닐까. 우리 집 현관문에 이런 문구를 붙여 놓고 들고날 때마다 읽어본다. “우리는 지나버린 과거의 대표자들인가, 아니면 저물어가는 시대의 극단적인 경계에서 거의 식별되지 않는 미래의 선구자들인가”(Are we the representatives of a lost past? Are we, on the contrary, the precursors of a future which can hardly be discerned at the extreme limit of an ending era?) 나의 스승님의 스승님인 자크 코포의 말이다.
스승님은 누군가.
에띠엔느 드쿠르(Etienne Decroux)를 나의 스승으로 삼고 있다.
이 글을 다 읽은 독자님, 혹 오늘도 치맥을 드시며 ‘내일부터 다이어트’를 외치고 계신가요? SNS에 접속하는 시간을 줄이기로 마음먹었지만 이 글도 페북을 타고 들어와서 읽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사츠! 내 몸의 ‘결정과 이행 사이의 보류된 에너지’를 인식해보세요. 그리고 그 찰나 같은 ‘사이’에 언제든 어디로든 나의 결정을 새로이 할 수 있다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인식해보세요. 사츠, 나와 세상이 만나는 ‘새로운 몸-문화’를 위한 정거장입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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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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