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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김석주X김신록

주체와 세계의 전복, ‘되어지는 몸’

김신록_배우

제159호

2019.05.15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님, 독자님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이 글을 읽고 계신가요, 아니면 무심하게 메일이나 페이스북을 클릭하다가 우연히 이 글의 링크를 발견하고 읽게 되신 건가요? 혹시라도 이 글이 업데이트되기를 기다렸다가 일부러 ‘웹진 연극in’ 사이트로 찾아 들어와 글을 읽고 계시다면, 이 경우는 ‘주체의 의지’가 발동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매 순간 주체로서 무엇인가를 ‘하면서’ 살아갈까요, 아니면 외부 세계의 자극에 의하여 ‘되어지며’ 살아갈까요?
주체와 세계의 작용 반작용에 대한 치밀한 탐구를 이어가며 현대인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몸의 메커니즘을 찾아가는 극단이 있습니다. ‘극단 동’에서 활동 중인 김석주 배우님을 만나 ‘되어지는 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극단 동 배우와 연기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강량원이라는 연출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극단 동은 배우와 연출가가 함께 연기 방법론에 대한 실제적인 탐구를 이어가고 이 치열한 탐구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내가 하지만 앞으로 내가 할 이야기는 모두 강량원 연출가의 메소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다만 그 메소드를 연습실과 무대에서 실행하는 ‘실천자’의 입장에서 내가 경험하고 이해한 바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석주
나의 경우 강량원 연출가의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저편의 영원>이라는 공연을 함께 하면서 연출가로부터 ‘주체는 없고 세계만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주체가 의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주체에게 영향을 미쳐 주체는 ‘되어질 뿐’이며 결과적으로 고정되고 닫힌 실체로서의 주체는 없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세계가 주체가 되고 오히려 나라는 주체가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주체와 대상의 전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자. 사실주의 연기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에서는 ‘주체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대상을 다뤄내는 것’을 액션, 즉 ‘행동’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내가(주체) 내 오른쪽에 있는 이 종이컵을(대상) 타자치는 데 걸리적거리지 않도록(목표) 내 왼쪽으로 옮긴다(행동)고 해보자. 이때 주체와 대상의 전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내가 종이컵을 옮긴다기보다는 종이컵이 나로 하여금 옮겨내게 하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내 의지가 아니라, 종이컵이 나를 불러서 그것을 옮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체와 대상을 전복시켜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연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극단 내에서는 의지를 전제한 ‘행동’이라는 말을 전보다 덜 쓰는 것 같다. 대신 어떤 세계를 만났는가, 어떤 세계의 작용이 내게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방금 종이컵을 옮기는 행동에서는 어떤 세계를 만났다고 할 수 있나.
종이컵의 무게, 마찰 같은 직접적인 물리성, 혹은 설계에 따라서는 종이컵이 속한 일회용품의 세계, 소비 사회, 자본주의 등도 포함될 수 있다. 사실 이건 아주 심플한 이야기인데 ‘세계’라는 말이 들어가니까 너무 거창한 이야기처럼 느껴질까 봐 걱정이다. 세계는 단순하게 생각하면 내 외부에 있는 모든 것, 내가 만나는 사람들, 사물들, 생각 속의 사람이나 사물들, 혹은 근육의 통증이나 속 쓰림 같은 내 몸조차도 포함될 수 있다. 내 외부에 있는 모든 것을 그냥 세계라고 지칭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외부’를 움직여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라고 지칭되는 외부가 나를 움직여낸다는 관점인가?
맞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가’라는 실천적인 질문에서 출발해, ‘주체의 의지보다는 외부의 자극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몸’에 대한 발견에 이른 것이다. 나로부터의 출발이 아니라 세계로부터 출발하는 관점의 전환이다.
보통 극 행동 위주로 전개되는 일반적인 드라마 연극에서 배우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연기’를 한다. 그러나 우리 메소드에서 배우는 ‘완전히 비어있는 몸’으로 자신이 설계한 인물의 세계를 물리적으로 만나내는 일을 한다. 전자의 경우 인물이 극 행동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 싸우면서 결국 깨달음에 도달하는 식으로 연기가 진행된다면, 이 메소드에서는 ‘내’가 아닌 ‘나와 연결된 세계가 드러나도록’하는 방식으로 연기가 진행된다. 이런 다른 방식의 세상 보기가 현대인을 표현하는데 더 적합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인을 표현한다는 게 뭘까.
‘내일부터 운동할 거야’라는 계획이 온전하게 나의 의지, 나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나. 이 사회의 건강 열풍, 몸매에 대한 외부의 시선, 헬스장의 프로모션 같은 것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사람들이 이런 메커니즘, 이런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살아간다고 이해하고 있다.
내 삶을 돌이켜봐도 내 의지로 되는 일이 뭐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오늘 이 인터뷰 약속 때문에 나는 어제 하루 동안 ‘연극인’에 실린 지난 인터뷰 기사를 검색해보고, 연기에 대한 생각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것은 나의 의지인가, 아니면 이 인터뷰 약속이 그렇게 만든 것인가. 현대사회에서는 주체가 세계를 변화시킨다기보다는 세계가 주체를 변화시킨다. 어쩌면 세계가 주체고 내가 대상일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우리는 세계에 의해 ‘되어진다.’
연기에서 ‘되어진다’는 것은 어떤 감각인지 이야기해보자.
나보다는 대상 쪽으로 에너지가 더 많이 가는 것, 나보다는 대상으로 주의를 더 많이 내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의지적으로 대상을 짚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이 이끄는 대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밧줄을 당긴다고 할 때, ‘내가 당기면’ 내 몸에 주의가 머무른다. 그러면 관객은 내 몸이나 나의 의지를 보게 된다. 그런데 배우가 주의를 밧줄이라는 대상으로 다 옮겨내면, 밧줄 저 끝까지, 밧줄 저 끝에 있는 돌까지 주의를 보내면, 관객 역시 저 밧줄 끝까지, 어쩌면 밧줄 너머 극장 밖까지를 감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배우의 몸은 그냥 ‘되어질’ 뿐이다.
‘물체 없는 행동 훈련’의 일환으로, ‘냉장고 문을 연다’를 수행한 적이 있다. 수행 단계에서 내 손에 닿는 손잡이의 느낌, 내가 느끼는 문의 무게감 등을 상상하거나 염두에 두면, 즉 ‘내 몸의 경험에 주의를 보내면’, 냉장고를 만나내는 일이 아니라 문을 여는 것처럼 보이도록 내 몸을 조형하거나 내 손끝에서 감각을 발동시켜 내는데 에너지를 쓰게 됐던 것 같다.
반대로 내 몸이 아니라 냉장고에 더 많은 주의를 보내려고 했을 때, 이미 존재하고 있는 냉장고의 물리성에 반응할 때 의지가 덜 개입하고 우리 몸은 ‘자신도 모르게 되어진다.’ 냉장고 문의 무게가 이미 작용으로 존재하고 나는 그 작용에 반작용할 뿐이다.
‘자신도 모르게 되어진다’는 말이 흥미롭다. 대학에서 무용, 음악, 영화 전공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학생 한 명이 모서리로 꽉 찬 자신의 좁은 방을 묘사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한 손으로 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계획하지 않은 그 몸이 그 학생이 발화하고 있는 말의 내용과, 혹은 그 말이 묘사하는 방과, 혹은 지금 그 사람이 느끼고 있는 어떤 정서와 너무나 잘 매치된다고 느꼈다.
맞다. 배우가 자기만 아는 아주 개인적인 감각으로, 자신만의 아주 구체적인 몸의 경험으로 세계를 만나낼 때, 관객은 그것이 익숙한 연기 기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직관적으로 ‘맞다’, ‘뭔지 알겠다’고 느낀다. 일종의 무의식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코 즉흥이 아니라는 점을 짚고 갈 필요가 있겠다. 순차적으로 말해보자면, 배우는 대본 분석 단계에서 ‘인물이 만나는 세계의 배열을 설계’한다. 그리고 실행 단계에서 그 배열된 세계의 힘의 작용을 만난다. 매 공연은 스코어대로, 고정된 설계대로 진행된다. 다만 실행에서 중요한 것은 이 순간 배우가 정말로 세계의 힘을 만나내느냐 하는 것이다. 힘의 작용을 정말로 만날 때 배우의 몸은 인물의 조형이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 자신도 모르는 상태로 되어진다. 그 몸을 통해 관객은 배우와 연결된, 혹은 배우가 설계한 인물과 연결된, 나아가서는 관객 자신과도 연결되어 있을지 모를 세계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반작용의 결과만을 재현하거나, 되어지기보다 뭔가를 ‘표현’하려고 하는 순간, 나는 세계의 힘에 대한 ‘반작용자’에서 ‘작용자’로 바뀌어버린다. 이럴 때 배우는 기계적이 된다.
보통 ‘플랜’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설계’라고 표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플랜은 일종의 ‘행동 계획표’인데, 이 메소드에서는 해석 단계의 배우가 행동을 계획하는 게 아니고 인물이 만나는 세계를 배치하고 조립하는 일을 한다. 배우는 장면의 풍경이나 인물의 삶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외부 세계를 찾아내고 이를 배열해 낸다. 우리는 이것을 ‘설계’라고 부른다. 마치 한 인물을 세우는, 한 사람의 삶의 구조를 세우는 건물 설계도와 같다. 인물은 캐릭터나 성격으로 규정되기보다는 그 사람이 만나는 세계의 총합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물은 캐릭터나 성격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만나는 세계의 총합’이라고 말했는데, 인물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나.
우리는 그 사람을 둘러싼 외부를 통해 그 사람을 추측할 뿐이다. 외부의 조합이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 자체라는 것은 사실 없고 수많은 세계의 조합만이 있을 뿐이다. 마치 모자이크처럼. 세계와 진짜 잘 만나지면 나는 사라지고 세계만 남는다. 설명하려니까 복잡하다...
인물을 그냥 드라마적으로 해석하면 인물의 한 성격을 부각해서 그것만 밀고 나가기 쉽다. 혹은 검사, 의사, 교수 등 계층이나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캐릭터’를 규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인간은 정말 다채롭다. 회사에서는 무뚝뚝하다가도 가정에서는 따뜻하기도 하고, 친구를 만나면 또 다르기도 하고. 어떤 외부 세계를, 어떤 외부의 힘을 배치하느냐에 따라 인물의 다채로운 모습이 나올 수 있다. 내게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은 그 사람처럼 보이거나, 그 사람이 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어있는 몸으로 인물이 만나는 세계의 배열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 극단에서는 ‘몸이 있다/없다’는 말을 쓰는데, 사람은, 배우는, 온몸으로, 전면적으로, 세계와 접속되어 있다. 몸으로, 감각으로 존재하지 않고 인물의 감정이나 심리만 드러내는 일은 총체적으로 인물을 보게 하기보다는 인물의 마음만을 따라가게 하는 것 같다. 배우가 온몸으로 뭔가를 뚫고 나가면 관객의 몸이 반응한다. 그렇다고 감정이 없다는 건 아니다. 감정 역시 함께 소용돌이 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연기할 때 ‘주체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접근하면 온통 외부의 자극에 휩싸이게 되는 것 같다, ‘사로잡힌다.’ 물론 현대인이 무언가에 사로잡힌 채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그 휩싸인 인간을 표현하는 것이 어딘가 마뜩잖았다. ‘세계의 노예’로서의 인간을 무대 위에 올려놓는 잔혹한 기분이랄까.
나는 지금 신록이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정신을 다잡고, 눈을 똑바로 뜨고, 단단하게 생각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의지적으로 신록의 말을 잘 들으려고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신록의 말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이성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만나는 세계에 따라 더 명료해지거나 더 강해지기도 한다. 그저 휘청휘청하는 게 아니다. 세계의 힘과 격렬하게 맞서고, 받아들이는 모든 과정이 세계와 만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잘 인식하고 잘 만나내는 것이 무대에서 배우가 하는 일인 것 같다.
외부 때문에 움직이게 되고 외부 때문에 말하게 되면 주의가 다 외부로 나가 있어서, 관객은 결국 그 외부의 힘까지, 어쩌면 이 사회의 시스템과 이데올로기까지 볼 수 있게 된다. 관객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사적인 대화 속에서, 권력관계, 힘의 관계, 사회적인 관계까지 읽어낼 수 있다면, 그 말 뒤의 이념, 권력, 정치, 폭력 같은 것을 감지할 수 있다면, 물리적 세계를 넘어 전체 사회구조 안에서의 힘, 계급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상당히 급진적인 비전인 것 같다. 관객이 우리 삶의 아주 바깥 테두리를 읽어내도록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느껴진다.
급진적인가... 우리는 말 그대로 수많은 욕망이 혼재된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가 무엇에 의해 이렇게 움직이고 있나’에 관해 묻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지금 사회에서는 그 질문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 될 수도 있겠다.
위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던, ‘비어있는 몸으로 인물이 만나는 세계의 배열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부연해 달라.
<게공선>이라는 공연을 했을 때, 바람, 비, 추위 등 나에게 밀려오는 세계들을 나열해 놓고 그 세계의 작용을 만나내고자 했다. 하지만 ‘세계는 총체적으로 오는 것’이라서, 동시적으로 두세 가지가 나를 덮칠 수도 있다. 이 순간 나에게 밀려오는 것과 만나는,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몸’이 중요하다. 세계는 서로 겹쳐있고, 걸쳐있고, ‘몸은 되어지는 것들의 연쇄 속에서 세계를 향해 열린다.’ 온몸으로 세계를 만나내면서 총체적으로 가게 되면 한 사람의 몸을 매체로 그 사람이 속한 세계와 이데올로기가 드러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방식을 탐구하면서 몸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게 됐다. 근육, 근력, 유용성 등의 측면에서 긴장과 이완을 섬세하게 조직해내는 몸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요새는 그런 몸은 수려하고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내가 고민하는 방식에는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몸은 일상에서도 세계에 반응하는 몸이기 때문에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냥 그 사람 몸 그 자체여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표현하려고 안달 나 있는 몸’은 세계를 받아들일 때 약간 가공하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단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는 총체적으로 온다’는 말을 들으니, 일본 연출가 오카다 토시키가 ‘이미지는 총체적이다’라고 했던 표현이 떠오른다. 그 연출가의 워크숍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참가자들에게 각자 자기 방을 설명해보라고 했다. 처음에 참가자들 대부분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 뭐가 있고, 오른쪽에 뭐가 있고...’라고 설명했는데, 연출가가 방의 부분 부분이 아니라 ‘방 전체에 대한 이미지를 총체적으로 떠올려라’라고 주문했었다. 그리고 참가자들이 다시 방을 묘사하기 시작하자 객관적이고 순차적인 정보 이상의,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방에 대해 느끼는 혹은 그 방의 이미지를 통해서 지금 자신이 느끼는 정서, 기분, 느낌, 그 공간에 대한 개인적인 역사와 관점이 담긴 말하기가 가능해졌다. 아울러 그 말에 어울리는 아주 개성적이고 개인적인 몸의 제스처와 포스처가 살아나는 것을 본 경험이 있다.
인간은 총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모든 인간은 일상에서 비논리적이다. 무대에서 개연만을 연결시켜 놓으면 사실 삶과는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격렬하게 세계를 만나기 위해서는 관념적으로 세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를 발동시켜 낼 수 있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세계를 찾아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무대에서는 모든 것을 물리적으로 환원해 내야 한다. 나를 발동시킬 수 있는, 내가 아는 감각을 찾아내야 한다. 굉장히 사적으로 내가 이해한 감각 속에서 무엇이 되어지면, 핍진성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관객 역시 그 감각이 뭔가 낯설지만 그럼에도 적확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낯설고 앞뒤 맥락이 안 맞는데 감각적으로는 동의가 되는 이상한 순간을 무대와 객석이 공유하게 된다.
그래서 이 메소드에서는 삶의 풍성한 경험이 중요한 것 같다. 예전에 나는 기술에 많이 의존하고 있어서 삶의 경험이 연기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는데, 요새는 내 삶의 폭이 너무 좁은 탓에 내 경험 안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다채로운 감각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내가 몸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게 좁다. 그러니까 아는 감각을 만나내기보다는 모르는 감각을 자꾸 모방하거나 애쓰게 되고, 내가 아는 감각으로 설계를 못 하니까 내가 잘 발동이 안 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무대에 오르기가 무섭다.
‘무대에서 개연만 연결시켜 놓는 것은 삶과는 다른 모습’이라고 했다. 어떤 대안이 있나.
일상에서 우리를 관찰해보면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는 게 아니라 가려우면 긁고, 잠시 딴 생각했다가, 밖에서 소리 나면 보고, 어깨도 주무르고, 다시 이야기하는 등 여러 맥락의 결이 직조되어 있다. 삶에는 이런 돌발성이 있다. 배우는 한 사람이 만나는 외부 세계를 잘 직조해서, 심리나 감정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몸, 인식, 무의식의 저변을 만나냄으로써 한 인물의 삶을 무대에 세우는 일을 한다. 실행 단계에서 이 설계된 외부 세계를 하나하나 진짜로 만나지 못하면, 힘의 차이, 질감의 차이가 사라지면서 심리적 근거나 내적 정당성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러므로 실행단계의 배우는 무대에서 ‘인물을 산다’기보다는 ‘수행하는 감각’을 가져야 한다. 수행의 감각을 잃어버리는 순간, 배우는 감정이나 심리의 흐름을 타게 되기 쉽다. 그러면 비이성적이고, 이상하게 충돌하고, 다채롭고, 여러 결들이 중첩되어 있는 스코어가 그 차별성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선 안으로 수렴해 버린다. 삶의 돌발성이 사라지고 심리적 개연, 논리적 개연만을 타고 가게 되는 것이다. 배우는 강한 힘, 차가운 힘, 따뜻한 힘 등이 변모하는 외부에 매 순간 자신을 내 맡기고 가야 한다.
‘수행의 감각’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자. 위에서 ‘격렬하게 세계를 만난다’는 표현도 썼는데 이 역시 수행의 감각이 있을 때에야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격렬하게 세계를 만날수록 연기는 가벼워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행의 감각이 필요하다. 분석 단계에서 충실한 설계도를 만들고, 실행 단계에서는 설계도에 배치된 세계 하나하나를 애쓰지 않고, 비어있는 몸으로, 무심하게 만나내는 것이다. 그러면 몸의 조형, 리듬과 템포, 감정 등은 그 결과로 되어진다. 무대에서 배우는 자칫 잘못하면 세계를 만나는 게 아니라 결과를 짚어가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면 배우는 기계와 같아진다. 결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혹은 심리적인 흐름을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설계된 세계 하나하나와 집요하고 격렬하게 만나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수록 배우는 자유로워지고 관객은 배우 너머를 보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구도(求道)와도 같다.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님, 지금 이 순간 어떤 세계를 만나고 계신가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다음 일정이 예정된 종로 5가 근처’ ‘와이파이가 되는 한 카페’에서 ‘아인슈페너’를 마시고 있습니다. 아메리카노를 시키려다가 얼마 전에 종영한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 나왔던 ‘아인슈페너’를 시키고 말았네요. 테이블 위에는 ‘버거킹에서 받은 플라스틱 물병’이 놓여있습니다. 가방에는 ‘언젠가 광화문에서 받은 세월호 배지’가 달려있어요. 자라에서 산 자켓, 아이폰 6S, 유니클로 진, 아디다스 운동화... 그 사람이 만나고 있는 세계의 총합이 결국 그 사람이라니... 아, 들꽃이라도 한 송이 꺾고 싶은 심정입니다. 내가 만나는 세계를 잘 인식하면서 내게 끼쳐오는 세계의 힘에 잘 맞서고 잘 반응하는 것을 연습하러 연습실로 가야겠습니다. 연극은 삶의 연습이니까요.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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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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