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이 만난 사람] 김윤석X이보람
극장 밖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
이보람X김윤석
제162호
2019.06.27
2014년 겨울이었다. 극장에서 막공을 끝내고 쫑파티 가는 길에 누군가 공연을 잘 봤다면서 인사를 건넸다. 그것이 김윤석 감독과의 첫 만남이었다.
선배가 후배에게 흔히 건네는 빈말인 줄 알았더니 바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말 그대로 공연을 정말 ‘잘’ 봤다. 희곡의 좋은 점 보완할 점, 더 나아가야 할 방향, 그리고 이보람이라는 작가의 성향까지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함께 작업하자는 제안에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이런 선배와 함께라면 작가로서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선배가 후배에게 흔히 건네는 빈말인 줄 알았더니 바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말 그대로 공연을 정말 ‘잘’ 봤다. 희곡의 좋은 점 보완할 점, 더 나아가야 할 방향, 그리고 이보람이라는 작가의 성향까지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함께 작업하자는 제안에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이런 선배와 함께라면 작가로서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김윤석
- 이보람
- 저한테 김윤석 감독과의 작업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단어가 “거두절미” 다.
저는 본론만 말하는 스타일인데. 감독님도 비슷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론 그러한 성향 때문인지 작업을 하는 과정도 헛고생을 덜 했다는 느낌이 있다. 작업하다 보면 막 달리다가 여기가 아닌가 봐, 하고 돌아가고, 막 달리다가 여기가 아닌가 봐, 하고 돌아가고, 그런 경우들이 종종 생기는데, 감독님과의 작업은 한 우물을 계속 판 느낌이다. 아, 이제 다 판 것 같은데 싶다가도 더 파고. 더 파고. - 김윤석
-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내린 나만의 방식 중 하나인데, 일단 이야기를 가장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이야기를 단순화시키는 건 물론 보통 일이 아니다. 그건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이야기를 만들라는 것이지 않나. 그 대신 이 단순한 이야기가 어마어마하게 깊을 수 있어야 하고, 새로운 시각도 보여줘야 하고. 이야기 자체가 너무 복잡하고, 개인의 해석이 강하게 담겨 있으면 공감을 얻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단순화시켜서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놓고, 그 그릇을 어떤 시각으로 보게 하는가. 이 두 가지가 중요하다. 그게 잘 되어야만 관객들과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과정에서 군더더기 같은 것들이 빠지게 되고, 이렇게 할수록 본질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힘든 작업이지만, 그럴 때 나오는 희열이 있다. 그 희열을 느끼고 싶어서 이런 작업을 하게 된다.
영화 <미성년>(감독 김윤석, 2019)
- 이보람
- 옆에서 감독님이 작업하는 걸 보면서 느낀 건 굉장히 성실하다는 것이었다. 집요할 정도의 성실함. 대본도 끝까지 계속 붙들고 고민에 고민, 수정과 수정을 반복했다. 선배가 그렇게 하니, 내가 꾀를 부릴 수가 없었다. <미성년>(김윤석 감독, 2019)을 끝내고 나에게 남은 게 뭔가 돌이켜보면 작가로서, 젊은 창작자로서 작품을 대하는 ‘태도’다.
- 김윤석
- 심지어 극장 버전과 VOD 버전이 다른 데(아주 조금). 개봉하고 나서도 계속 만졌다. 그렇게 해야지 직성이 풀린다. 그래도 아쉬운데, 물리적으로 시간이 안 돼서 멈춘 거지. (웃음) 난 멈추고 싶지 않다. 왜냐면 작업이라는 것은 독립적인 생명력을 띄기도 하지만, 작업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번에 얼마만큼 집중해서 했느냐가 다음 작업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이번에 이만큼 했기 때문에, 다음엔 그 다음 단계에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완벽한 작품은 나올 수 없다. 이 아쉬움을 줄여나가는 것은 결국은 반성이고, 복기하는 것이다. ‘다음에 할 땐 이런 실수 안 해야겠다’ 하는 아쉬움을 최대한 줄이려면 ‘더 생각을 잘해야 하는구나’ 이렇게 반복적으로 해나가는 것이 결국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배경이 되는 거다.
- 이보람
- 정말 힘든 일이다. 일단, 체력적으로 힘들다. (웃음)
- 김윤석
- 쓸데없이 자신을 괴롭히면 안 된다. 때론 이 난감함을 즐길 줄도 알고. 이 섭섭함도 즐길 줄 알고. 완급조절을 해나가면서 버티는 거다. 저것들 놈팽인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머리로는 계속 안테나를 세워놔야지. 집중할 땐 하고. 쉴 땐 쉬고. 너무 빨리 좌절 하면 안 된다. 사실 그 좌절의 대부분은 인간 때문에 한다. 그러니 타인에게 관대할 수 있는 여유도 있어야 하고. 나의 정신적인 동지들을 만드는 법도 알아야 되고. 또 그 동지를 아끼는 마음도 알아야 하고. 이 작업이라는 것에 환상을 갖고들 오지만, 막상 해보면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만만치 않음이 있지 않나. 하나둘씩 떠나가고 그러는데. 결국 남은 자들이 모여서 다시 만들게 된다. 남은 사람들은 애정이 더 큰 사람들이다. 그러니 서로 사랑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애정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인데, 서로에게 상처가 돼서 찢어지면 그건 너무 큰 상처지 않나.
- 이보람
- 창작을 한다는 건 끊임없는 의심과 확신 그 사이를 계속 헤매는 것 같다.
이보람
- 김윤석
- 어떻게 열 번의 작업을 열 번 다 성공시킬 수 있겠나..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하는 경우도 있고...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이런 게 겉치레 같은 말이라고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제대로 해서 실패를 했던 작업은 어쨌든 간에 남는다고 생각된다. 함께 노력했던 시간이, 어떻게든 남는다.
- 이보람
- 처음 만났을 때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본인의 계획을 다 말하고. 내가 무엇을 해줬으면 좋겠는지 솔직하게 다 말씀하셨다. 정중하면서도 단도직입적이고 확실했다. 그게 인상적이었다. 한참 어린 후배인데도 자신이 갖고 있는 패를 다 까서 보여준 느낌이었다.
- 김윤석
- 이게 선거 전략도 아닌데. 그냥 편안하게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작업의 방향이나 그런 것들, 해석 같은 것들, 서로 편안하게 공유하는 것이 좋지 않나. 쓸데없는 소모전을 하고 싶지 않다. 그 다음에 갈 길이 머니까.
- 이보람
- 연극도, 영화도 결국 협업이다. 감독님은 지금까지 굉장히 많은 사람과 협업을 하셨다. 함께 작업하는 사람과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 경우는 어떻게 하나.
- 김윤석
- 일단, 상대의 이야기가 맞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항상 얘기해야 한다. 서로 간의 시너지가 일어나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가장 좋은 방향이다. 그게 아니고 트러블이 일어나고 해결이 안 된다면, 결국 어느 한쪽이 포기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경험을 통해 나와 잘 맞는 사람을 찾는 눈이 생겨야 한다. 그리고 내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도. (이 작품에 대한 해석과 그것에 대한 공유. 충분히 설득을 시키고. 설득이 안 되면 안 하면 되는 거고.) 연극, 영화 마찬가지지만 전체가 함께 가는 분위기가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각자가 자신이 맡은 일에서 철저하게 프로페셔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자가 담당한 일들에 자기 검열을 철저하게 해주면.. 공동 작업이라는 것은 서로 모두가 자신의 일에 집중할 때 전체의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 이보람
- 정말 어려운 일이다. (웃음)
- 김윤석
- 어렵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그런 말을 했다. “뒷담화만 안 해도 성인군자다” (웃음) 협업이라는 게 정말 힘든 거다. 10년을 꾸준히 해온 관계도 아니고. 처음 만나고. 서로의 개성도 있고. 그렇게 자유로운 사람들이 만났는데, 쉬울 리가.
- 이보람
- 예전에 제가 연습하던 중에 마지막 장면이 막혔다는 이야길 한 적이 있다. 요령을 좀 얻고 싶었는데, 그때 감독님께선 아예 장면을 바꾸라고 하셨다. 제가 공연 일주일 남아서 안된다고 했더니, 감독님께서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연극배우들은 다 할 수 있다고. 혼을 불사르는 사람들이라고. 그 말을 듣고 얼핏, 감독님께서 연극 할 때 참 치열하게 했구나, 하는 게 느껴졌다.
- 김윤석
- 제일 좋아하는 말이 “가내수공업” 이다. 모든 위대한, 덩치가 얼마나 크던, 공룡을 만들던, 전부 가내수공업이라고 생각한다. 이 가내수공업이라는 것이 한땀 한땀 따는 거지 않나. 모든 예술은 거기에서 시작하고.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인간이 하기 때문에. 게다가 연극은 상상력으로 채우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있다. 사람이 모여서 하면.
- 이보람
- 얼핏 보기엔 연극과 영화라는 세계가 아주 다르다고 느꼈다. 일단 예산과 인원의 규모가 다르고. 그러다 보니 대중성, 상업성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가치인 것 같고.. 감독님께선 연극을 오래 하다가 영화라는 세계로 넘어갔는데. 적응하는 게 어렵진 않았나. 어쩌면 지금도 많은 연극인이 그런 고민 속에 있다고 생각된다.
- 김윤석
- 아침에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게 충격이었다. (웃음) 연극은 늘 저녁에 연기를 하니까.
소극장 연기술은, TV 영화의 연기자들이 하는 연기와 거의 비슷하다. 그래서 적응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스스로의 중심이 딱 잡혀 있으면 적응하기 괜찮다. 어차피 창작이고 인간에 대한 이야길 다루는 것이지 않나.
점점 매체가 다양해지고 있다. 어차피 이 모든 것들에 배우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 시대의 모든 장르에 적응해야 한다. 그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거다. 관객들도 매체를 가리지 않고 다 보지 않나. 우리가 소통하는 건 그런 관객들이다. 그러니 다른 장르의 다른 점들, 특성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찾아야 하고. 또 그런 변화들을 즐겼으면 좋겠다. - 이보람
- 2019년에 연극을 한다는 건...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어야 한다고 느낀다. 연극을 한다고 하면, 다들 ‘연극을 왜 해?’라는 질문을 하니까. (웃음) 이 오래된 예술의 미래가 어디에 있을지... 그런 고민을 항상 안고 있다.
- 김윤석
- 좋아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이다. 기왕 그렇게 좋아서 하면 잘해야지. 스스로에게 불신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자신을 믿고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연극이 어떤 건지, 그 미래나 그런 거창한 이야길 하기 엔 내가 적절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단지... (잠시 생각하다) 연극은 참 재미있는 게, 변두리 시골 어느 작은 소도시에 가도 항상 극단이 있다. 정말 신기하다. 조그마한 어디에 극단이 세 개가 있고 그렇다. 왜 그럴까? 일단 오는 사람은 마다 안 하지. 일이 많으니까. 그래서 거기가 참 정겨웠다. 누구나 다 받아주고. 누구나 다 공동작업을 할 수 있고. 이렇게 얘기하니 쌍팔년도 같다. (웃음)
이런 말 있잖나. 누군가는 본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누군가는 본다. 우리는 보는 사람, 관객을 위해서 좋은 작품을 해야 하는 거다.
인터뷰를 시작할 때 프로필에 쓰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고, 그가 어떤 작품을 했는지는 검색하면 나오니까. 그곳에 적히지 않은 게 없을까? 싶었다. 호칭도 고민됐다. 배우이자 감독, 연극인이었고 지금은 영화인. 그를 어떻게 명명해야 하나 고민됐다. 그런데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매표에서 조명, 무대 감독, 연출, 희곡, 배우, 시나리오, 영화배우 ... ’ 그가 지금까지 했던 일들이 줄줄 나왔다. 사람들은 그를 무대의 앞, 카메라의 앞에서만 봤지만 사실 그는 무대의 뒤, 극장의 밖, 카메라의 뒤에도 항상 있었다. 왜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느냐는 질문에, 다 알고 싶었다고 했다. 다 알고 싶다는 건 무엇일까. 내가 하는 일의 정체를 알고 싶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하는 일을 진정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이 저절로 밟게 되는 수순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