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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배선희X김신록

이상하고 생경한 이미지, 인서트

김신록_배우

제173호

2019.12.05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님, 오늘 하루를 돌아볼 때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 이미지가 있으신가요? 어느 날 문득 눈에 들어왔다가 며칠 동안 나를 사로잡고 있는 ‘생경한 장면’은요? 그 이상하고 생경한 순간의 이미지들을 인서트(insert) 삼아 ‘그 이상함이 뭐였을까, 그 생경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를 더듬어가며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들고, 연기하고, 공연을 만드는 배선희 배우를 만나 ‘인서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이상하고 생경한 ‘인서트’들을 모으고, 그 인서트를 통해 작업한다고 들었다. 일단 본인에게 ‘이상하고 생경한’이라는 게 뭔가.
이미 알고 있는, 늘 보아오던 사물이나 사람이 갑자기 ‘뭐지?’하고 생경한 것으로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내 안에서 흘러가고 있던 시간과 지금 눈에 들어오는 외부의 세계가 다른 감각으로 어긋나며 교차하는 순간, 그 이미지에 ‘사로잡힌다.’ 그 순간에 사로잡힌다. 갑자기 느닷없이, 눈앞에 드러난 대상의 형태나 시간이 다 이상하고 생경하게 느껴진다. 전봇대 옆 버려진 의자, 지하철 역사에서 선인장을 파는 할머니...그런 순간들을 만나면 핸드폰 메모장에 ‘인서트’로 기록해 놓거나 사진을 찍는다. 그 인서트에서 소리나 노래와 관련한 아이디어를 얻으면 녹음을 해놓기도 한다.
이렇게 어떤 이상한 장면이나 생경한 순간이나 이미지가 내게 ‘인서트’로 기록되면, 이후 시간을 들여 ‘내가 왜 그 순간을 생경하게 느꼈지? 어째서 그 이미지가 오래 남지? 왜 그 장면에 마음을 주게 됐지?’를 생각해본다. 그러다 보면 삶이나 사유가 깊어지는 순간을 만나게 되고 이전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생경하고 이상했던, 이해할 수 없던 것이 이해 가능한 것이 된다. 그게 찾아지면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욕구가 든다. 그때 공연을 만든다.
‘인서트’는 본래 영화용어로 알고 있다. 일종의 삽입화면, 일련의 화면들 사이에 다른 이미지가 끼어드는 것 아닌가. 본인의 작업에서 인서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
‘골목에 날리는 비닐봉지’ 같은 게 내게는 인서트로 작동한다. 상황이나 줄거리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 순간이 독창적이고 상징적으로 어떤 의미와 이미지를 확보함으로써 앞뒤의 맥락들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내게 공연을 만드는 일은 살면서 모았던 인서트가 지금 나의 깨달음과 연결되는 맥락 하에서 재구조화 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모은 인서트는 이런 것들이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아주머니 세 분이 청소를 하고 계셨는데 두 분은 바닥에 그냥 앉아 계셨고, 나머지 한 분은 두 분과 좀 거리를 둔 곳에서 고무장갑을 깔고 앉아있었다. 그분은 화장한 얼굴에 귀걸이랑 액세서리를 하고 계셨다. 어느 날은 시장 좌판 옆에서 우유박스를 나란히 놓고 그 위에 누워 쉬고 계신 할머니를 봤다. 옛날 같으면 평상에 누웠을 텐데. 어느 날은 골목에 이상하게 놓여있는 비닐봉지를 봤다. 이런 장면들이 내게 인서트로 남아있다. 맥락이 어긋나는 것들, 그것 자체로 어떤 이야기나 드라마가 떠오르는 것들, 형태에서 영감이 떠오르는 것들이다.
배선희
줄거리가 먼저 있고, 그 줄거리를 보조하기 위해 인서트가 쓰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서트들을 먼저 모으고, 그 인서트들이 인상 깊었던 이유를 추적한 다음, 그 사유의 결과로 기존의 인서트들이 새로운 맥락 하에 재조합된다고 이해하면 될까?
맞다. 인서트의 정체가 뭐였는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게 왜 이상해 보였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각각 인서트의 정체를 추적하다 보면, 내 삶의 작은 순간이 사회와, 세계와 연결되어 이해되는 시간이 온다. 그런 사유의 과정에서, 모아놓았던 인서트들이 서로 만나고 엮이는 지점이 생긴다. 이때 인서트들은 내 주관적인 해석이나 감정에 의해 왜곡되거나 변형되기도 한다. 그 왜곡되고 변형된 인서트가 무대에 제시되었을 때, 그것이 다시 관객의 해석에 의해 또 한 번 왜곡되고 변형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경험이 생경하고 이상한 것이 되기를 바란다. 무대에서의 인서트는 현실이라는 리얼 시간 안에서 만나기 어려운, 더 확대되고 부풀려진 이상한 형태면 좋겠다. 시간을 들여 곱씹을 수 있는 것이면 좋겠다.
‘이상한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것을 목격하는 시간은 순간적인데, 그 순간의 인서트가 이후에 계속 내 머릿속을 지배하게 되고, 자꾸 질문을 던지게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예전에 어떤 술 취한 할아버지가 전철 안에서 봉지에 든 땅콩을 먹다가 땅콩을 바닥에 엎지른 적이 있다. 퇴근 시간이라 전철에 직장인들이 많았는데, 땅콩이 바닥에 쏟아진 순간 정장 입은 직장인들이 일시에 허리를 숙여서 땅콩을 줍기 시작했다. 곧이어 역에서 내리자 선인장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모두가 다 모른 체하고 지나갔다. 이런 파편들이 다 조합되어서 삶이 감각되는 게 아닐까.
인서트가 단지 비주얼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훨씬 더 총체적인 경험이라는 생각이 든다.
맞다. ‘총체적인 경험’으로서의 인서트. 인서트는 단순히 비주얼이라기보다는 그 순간의 바람, 냄새, 날씨 같은 복합적인 감각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던 나의 기분과 해석이 한 번에 포함되어 있다. 연극을 하는 순간, 혹은 연극을 보는 순간도 이와 같지 않나. 무대에서 배우가 술을 따라 마시면 그 색깔, 냄새뿐만 아니라 술을 따라 마시는 심리, 의미 등이 총체적으로 인식되지 않나. 거기다가 바라보는 사람의 해석까지 더해진다. 총체적인 경험으로서의 이미지, 총체적인 경험으로서의 인서트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삶에서 이런 연극적인 순간들을 계속 발견하려는 취향이 내게 있는 것 같다.
‘연극적인 순간’이라는 게 뭔가.
‘인서트와 내가 만나게 되었을 때’가 연극적인 것 같다. ‘내가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너는 다르지 않나. 내가 만난 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내가 만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만다.
나는 스스로를 ‘너무나 미약한 하나의 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점을 애써 찍지 않으면 사회와 세상과의 관계에서 내가 자꾸 사라져버리는 것 같다. 내가 인서트를 모으고, 그것의 정체를 추적하고, 그것들을 무대에 올리는 이유는 나와 세상을 연결 지으려는 노력의 발로인 것 같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순간의 발견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미약하나마 점을 찍는 것, 이 점을 찍음으로써 다른 점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점을 찍는 펜대를 놓지 않는 것에 모든 마음을 다 쓰고 있다.
앞서 말했던 ‘삶의 작은 순간’, 혹은 ‘점’, ‘단절된 하나의 장면으로서의 인서트’ 등을 떠올려보면 배선희라는 창작자가 미시적이고 파편적인 순간들을 통해 점멸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뉴스를 통해 세상을 보면, 세상은 이해할 수 없고, 나를 무력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든다. 그럴수록 미시적인 것을 더 잡으려고, 찾으려고, 만나려고 노력한다. 옛날에 봤던 애니메이션이 생각난다. <컬러풀>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 왕따인 남자애한테 처음으로 친구가 생겼다. 추운 날 친구랑 둘이서 신발을 사러 다니다가 호빵을 하나 사서 반으로 나누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화면은 호빵을 잡은 엄지손가락을 비추고, 엄지손가락이 살짝 옆으로 이동해서 호빵 한 쪽을 다른 쪽보다 조금 더 크게 나누는 순간을 포착한다. 처음 사귄 친구에게 주는 반쪽이니까. 그 장면을 보고 ‘미시적이라는 것이 이런 걸까’ 생각했다.
미시적인 순간들을 더 발견하고 싶다. 그런 순간들이 나를 지켜주고 세워주는 것 같다. SNS를 통해 보는 뉴스들에 마음이 자꾸 침잠할 때 ‘다르게 작동하는’ 아주 사소한 말이라든가 눈빛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침잠하는 마음을 계속 잡아주고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런 순간들을 더 많이 갖고 싶고, 더 많이 만들어서 나누고 싶다.
지난 11월에 신촌극장에서 공연했던 <플라스틱 새>에서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을 담은 인서트들이 이미지, 오브제, 노래, 텍스트, 움직임, 영상 등 표현 양식을 가리지 않고 조합되는 양상이 흥미로웠다.
인서트들이 모이고, 꼭 나누고 싶은 생각이 생기면, 그 표현 형식에는 제약을 두지 않는다. 내 역사 속에서 내가 좋아하고 할 수 있게 된 것들이 있고, 그 역량과 취향 안에서 인서트를 구현하기에 어울리는 방식을 찾는다. 2008년 과천축제에서 스웨덴에서 온 <특별한 동행>이라는 공연을 보고, 그때 처음으로 말이라는 것도 힘이 있지만 모든 말들을 넘어서는, ‘모든 말들을 다 껴안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동행>은 굴삭기랑 남자 무용수가 만나서 둘이 함께 춤을 추는 작품이다.
<플라스틱 새>에서는 ‘버려진 물건’에 대해 생각했다. 버려진 천을 보면 그것이 옷이나 커튼이었던 시간, 옷이나 커튼을 만들기 위해 천이 직조되던 시간, 섬유를 추출하기 위한 시간, 식물을 기르는 노동자의 시간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얼마 전에는 친구가 준 전복으로 버터구이를 해 먹는데, 전복을 들고 까면서 ‘이게 바다에 있었겠구나.’ 이게 자라고 이동하고 내 손에 오기까지의 시간들에 마음이 간다. 귤을 선물 받으면, ‘이게 나무에 있었을텐데...’ 하는 식의 상상을 좋아한다. 무가치하게 생각되는 것들을 아주 약간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의미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잠깐 동안만이라도 감각해볼 수 있는 이미지들을 만들고 싶었다.
<플라스틱 새>에는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가 여러 곡 쓰였다. 노래도 인서트를 통해 만들어지나.
비슷하다. ‘노래로 부르고 싶은 존재’가 먼저 떠오르고, 노래를 왜 부르고 싶은지를 계속 생각하다 보면 어느 날 노래가 흥얼거림으로 만들어진다. 그걸 녹음 해 놓는다. 얼마 전에 보이스씨어터 몸소리의 자장가 워크숍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어떤 분께서 ‘말은 끝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누군가의 생각과 흐름을 끊으면서 이어지게 되는데, 소리는 누군가의 소리 위에 더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 게 인상적이었다. 언어로 정리하기 이전에 감정을 실어 보낼 수 있는 것이 소리라고 생각한다. 그 소리에 점차 단어들, 이야기들이 따라와서 노래가 되는 것 같다.
직접 만든 노래 하나 들려줄 수 있나.
예전에 <자장가>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서울에서 겪은 일이 너무 많은데, 아무 곳에도 말하지를 못했고, ‘내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노래를 만들어야겠다’ 생각했다. 1절은 엄마가 아기에게 2절은 아기가 엄마에게 들려주는 노래다.

1절
하늘에 별들도 우리를 비춘다. 아가야 내 아가야 편안히 쉬어라. 말 못한 네 얘기를 내 가슴에 내려놓고 아가야 내 아가야. 편하게 쉬어라. 금자동아 은자동아 우리아가 예쁜 아기. 멍멍개야 짖지마라, 우리 아가 잘도 잔다. 하늘에 별들도 우리를 비춘다. 아가야 내 아가야 편안히 쉬어라.
2절
엄마엄마 우리 엄마 내 걱정은 하지 마요 말 못한 이내 맘을 엄만 이미 알잖아요. 굽어진 허리 위에 갈라진 손가락에 나를 향한 사랑 꽃이 아름아름 피었네요. 하늘에 별들도 우리를 비춘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내 걱정은 하지 마요.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님, 지금 이 순간 주위를 둘러보세요. 관심을 기울이고 바라보면 맥락에서 어긋난, 마음이 가는, 이상한 형태로 놓여있는 이상하고 생경한 ‘인서트’를 발견하게 되실지 몰라요. 그 인서트를 마음에 담아두고 시간을 들여 곱씹으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이해되는 순간이 올지도 몰라요. 혹은 짧은 흥얼거림이라도.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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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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