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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이자람X김신록

익히고 부수고 새로 세우는 ‘형’

김신록_배우

제174호

2019.12.19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님, 어떤 ‘형(型)’을 익히고 그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껴보신 적이 있나요? 발레나 태권도 같은 몸의 형이든, 단단하고 오래된 관계의 형이든지요. 그 익숙한 형을 부수고 지금 내가 정말로 원하는 새로운 형을 구축해보신 적은요? 전통이라는 틀 안에서 전수되는 ‘원형’을 익히고 따르다가 정말 자신이 원하는 형을 구축해가는 소리꾼, 판소리 창작자 이자람 배우를 만나 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이자람
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전통 판소리는 대대로 전수되는 소리의 원형이 있지 않나. 소리꾼은 그 형을 구성하는 기술을 익히고 연마함으로써 무대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그 형을 구현하고 전승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서양 연극 기반의 무대 연기에는 도달하고 구현해야 할 ‘연기의 원형’이랄 것이 없다. 특히 현대 연극에서는 더 그런 것 같다.
자람
소리꾼은 딛고 있는 땅이 전통이지 않나. 형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전통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것도 전통 소리이고, 나는 형을 잘 보존해서 갈고닦은 기술을 가지고 무대에 서는 것이 제1덕목이었던 사람이다. 내가 지금 과거형으로 말했나? 아무튼, 배우는 무대에서 형을 구현한다기보다는 매 순간 실존해야 하니 어려울 것 같다.
요새 연극에서 지향하는 화술이나 움직임은 더욱 형을 만들지 않는 쪽으로 흐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배우들이 유효한 훈련 방식을 발견하고 수련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은 면이 있다.
자람
어떤 가까운 배우가 나한테 ‘샘이 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고 하더라. 소리꾼은 전통 연습하는 곳으로 도망칠 수도 있고, 기술을 갈고닦을 수도 있고, 쏟아부을 수 있는데, 배우는 어디에 무엇을 쏟아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고민이 많을 것 같다.
연극 <문제적인간 연산>, 뮤지컬 <서편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등에도 출연하지 않았나. 연기할 때는 어떤가.
자람
난 연기할 때 연기한다고 생각 안 한다. 연기할 때는 인과 관계를 계속 생각한다. 연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고, 내게 연기술을 가르쳐 준 것은 판소리가 다다. 소리 선생님들이 ‘얘가 여기서 왜 손수건을 떨어뜨려야 하냐면...’이라면서 인과관계를 가르쳐준 것 같다. 그래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무대에서도 직전의 역사와 지금의 상황을 잘 인지하고 무대에서 벌어지는 인과에 집중하고 있었다.
인과를 잘 따져보고 무대에서 인과를 잘 수행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인물이라기보다는 인물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면 될까?
자람
맞다. 그래서 그날그날 다 달랐던 것 같다. 연기할 때 내가 머리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실시간의 새로운 인과를 만날 때 재밌다. 물론 판소리도 관객이 어떤가에 따라, 그날그날 나의 상태에 맞춰 공연이 달라진다. 그게 다 ‘능청스러움’인 것 같다. 우리나라 예술에는 다 능청맞음이 있다. 무당들, 소리꾼들, 농악하는 사람들, 탈춤 추는 사람들 모두 얼마나 능청맞나. 무대에서 인물을 잘 수행하는 것, 즉각적으로 인물을 변화시키는 것도 다 이 ‘능청의 짙음’에 있지 않을까. <억척가>를 할 때도 대성통곡하다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꾼이 되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하냐는데 나는 그게 하나도 안 어렵다. ‘이건 다 소리꾼이 하는 이야기야, 난 울다가도 웃을 수 있어’라는 능청 같은 게 바탕에 깔려있으니까. 이야기가 제일 전면에 있고, 인물보다는 화자가 더 상위에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억척어멈보다 소리꾼 이자람이 더 중요하니까.
나는 요새 밖에서 까불 데가 없다. 그럭저럭 나이가 들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말하고 글 쓰고 했더니 너무 엄숙해졌다. 망했다.
김신록
자람
나는 지금 오히려 자유로워진 것 같다. 4년 전에 정확히 내가 한 일이 뭐냐면 각종 ‘사명감’들을 버리는 거였다. 극단 예술감독도 그만뒀고, 예술을 최상 위에 놓던 습관을 버리고, 나에게 엄숙을 요구하던 것들을 억지로 떼어내고 났더니, 사명감을 요구하는 것들에 내가 발맞추어 갈 필요가 없어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남들이 내게 요구하는 것들에서, ‘이 즈음이면 응당 이 정도는 누려야 하는 것 아닌가’ 자문하는 나로부터 떨어져 나왔을 때 자유로워졌다. 나는 그것을 진짜 잘 부순 것 같다. 관계를 잃을까 봐 두려워할 때가 가장 나약했다. 그런데 막상 혼자가 되는 일을 했더니 오히려 재미나지더라.
<노인과 바다>까지 오면서 ‘내 무대는 결국 내가 홀로 만드는 일이구나’ 느꼈다. 전에는 늘 동료를 찾았다. 늘 나를 떠날까 봐 두려웠다. 물론 이번에도 박지혜, 여신동이 같이 했지만, 이들은 ‘너 혼자 좀 해. 우리 없어도 할 수 있잖아’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해주는 파트너들은 처음이다.
<노인과 바다>는 어떤 계기로 작업하게 됐나.
자람
<노인과 바다>의 경우는 ‘내가 나의 소리를 구축한다면 어떨까’, ‘형’이라는 언어를 빌리자면, ‘내가 내 형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워지면 어떨까’를 생각한 것이다.
‘내가 내 형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유로워진다.’
자람
그렇다. 왜냐면 전통 판소리를 할 때 너무 재밌고 자유롭다. 형이 완벽하기 때문에, 내가 형을 믿고 기댈 수 있기 때문에, 기술만 잘 닦아 놓으면 기술을 가진 나는 너무 자유로워진다. 사람들에게 ‘별주부 진짜 웃기지 않냐?’라고 말하는 나를 가질 수 있다. 이 형은 믿어 의심치 않을 수 있는 것이니까.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감각을 가져 본 적이 없어서 그걸 만들어 본 것이 <노인과 바다>다. ‘나의 형’, 내가 믿고 기대서, 관객을 만날 때 ‘야! 이 노인 너무 웃기지 않아?!’ 라고 할 수 있는, 내가 붙들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형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노인과 바다>는 <사천가>, <억척가>, <이방인의 노래> 등 지난 창작품들에 비해 훨씬 소박해지고 ‘소리꾼과 청중이 소리를 통해 만나는’ 판소리의 본질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자람
사실 이번 작업을 통해 하고자 했던 것은, 어떤 성과로써 음악의 퀄리티였다. 음악 자체의 완성도. <사천가>, <억척가>도 음악적으로 후지지는 않지만, 전통 판소리를 잘 배운 나로서, 전통과 내가 만든 소리들이 ‘견줄 만하냐’ 물었을 때 그렇지 못했다. 그렇지 못하니까 무대 장치도 많았고, 연기도 하고, 다른 악기도 썼던 것 같다. ‘<노인과 바다>는 견줄 만하냐’하면, 역시 깨갱할 걸 알지만 ‘견줘보고 싶은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소리만으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작곡하는 데 공을 엄청 많이 들였다. 사실 <사천가>, <억척가> 이후에 덜어내고 싶어서 만든 작품이 <이방인의 노래>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전에는 작창으로 부족한 부분을 액팅이나 다른 악기들로 꽉꽉 채워서 전통 판소리만큼의 무대를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근데 다 걷어내도 되더라. 코어만 있으면.
이자람의 코어는 뭔가.
자람
내 코어는 나다.
멋지다. <이방인의 노래> 이후에 <노인과 바다>에 이르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나.
자람
<이방인의 노래>이후 <노인과 바다>까지 3년 동안, 먹고살기 위해 이것저것 다 했다. 그것이 다 나에게 도움이 됐다. 소리 없이 연극 무대에 서보기, 소리꾼이 아닌 스태프로 공연에 참여하기(<흥보씨>), 다른 소리꾼의 1인 창극 만들어 보기(<소녀가>), 큰 스케일로 음악 써보기까지(<패왕별희>). 다 하고 났더니, 이제 내 작업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넣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전까지는 난 연기도 할 수 있고, 움직임도 잘하고, 음악적으로도 뛰어나다는 것을 작품에 틈만 보이면 넣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작품에 필요하지 않은 것을 한 적은 없지만. 그런데 지금은 나의 본능조차도 ‘소리에만 온전히 집중해도 돼!’라는 허락을 내린 게 아닐까.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게 아닐까. 연기하고 싶은 욕망, 움직이고 싶은 욕망, 다른 걸 화려하게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다 해소됐기 때문에 <노인과 바다>에서는 소리만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사실 이런 생각은 <노인과 바다>를 연출했던 박지혜가 말해 준 것이고, 난 끄덕끄덕했다. ‘그렇구나.’

전통 판소리 무대를 안 하는 이유는 뭔가.
자람
전통 판소리도 한다. 그런데 전통만 하기에는 다섯 마당이 전부가 아닌가. 게다가 옛날 문학이라 힘든 점이 많다. 여성혐오가 너무 많지 않나. 꼴 보기 싫은 것도 많다. 난 이몽룡도 싫어하고, 흥보도 싫어하고, 심봉사도 싫어한다. 다 너무 무능하고 여자한테 빌붙어 먹는 사람들 아닌가. 이걸 내 입으로 부르고 다니기 힘들어서 나의 소리가 필요한 거다. 마치 햄릿이 없는 여성 배우들이 자기 서사를 쓰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전통은 좀 짱이니까 전통도 한다, 양해를 구하면서. ‘고전이라 어쩔 수가 없다’ 이러면서.
예전 인터뷰에서 판소리의 ‘현대화’가 아니라 ‘현재화’를 추구한다는 글을 읽었다. 현재화라는 것은 결국 동시대성을 획득한다는 것일 텐데, 동시대를 어떻게 감각하나.
자람
트위터를 한다. 이건 반 농담 반 진담이다. 나의 동시대성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은 트위터다. 2010년인가 시작했는데, 트위터를 통해 재미난 누군가를 팔로우하고 그들이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되게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된다. 정말 많은 것을 트위터에서 만났다. 우리 강아지 ‘로키’도 트위터에서 만났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밴드하는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 밴드하는 이자람으로(아마도이자람밴드) 어디 행사에 불려가고 공연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 여러 환경과 치열하게 싸우는 동료들과 우리가 몸담은 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먹고사는 이야기를 하며 나와 내 음악의 위치를 가늠하는 것이 나를 좀 더 살아있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근데 사실 ‘동시대성’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다. 그걸 획득하려고 트위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하는 일이 트위터 아니면, 밴드 아니면, 작업이니까. 모르겠다, 동시대성을 어디서 획득하는지. 다 필요 없고, 그냥 ‘나’ 인 것 같다. ‘내가 지금 어떠냐’가 동시대인 것 같다. 나도 여기 있으니까. 딴 사람에게서 찾으면 오류가 날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님, 여러분은 어떤 형을 배우고 익히고 싶으신가요? 혹은 어떤 형을 부수고 새로 세우고 싶으신가요? 우리는 각자 그리고 함께, 어떤 새로운 형을 부수고 세우며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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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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