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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최희진X김신록

도달해야 할 이상향은 없으므로, 자유롭게

김신록_배우

제177호

2020.03.26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님, 연습실이나 무대에서, 혹은 직장이나 일상에서, 이미 다 짜 놓은 무언가를 반복하는 일이 지겹게 느껴지셨던 적 없으신가요? 순간순간의 차이들을 포용함으로써 기계적인 반복을 다시 살아있게 만드는 ‘열리고 자유로운 연기’에 대해 최희진 배우님과 대화를 나눠봤습니다.
최희진(좌), 김신록(우)
관객으로 체감하기에 대학로에서 제일 공연을 많이 하는 배우인 것 같다. 지난 2월 코로나 한복판에서도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한다>(이하 김이박)를 무사히 마친 것으로 알고 있다. 공연을 계속하게 되는 비결이 뭔가.
희진
제의가 들어왔을 때 시간만 맞으면 다 하는 편이다. 연극에 대한 갈증이 여전히 있고, 연출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는지 항상 궁금하다. 어쩌면 내가 딱히 추구하는 연기술이나 연기방식이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미투 이후에 연극 환경이 바뀌면서, 너무 견디고 애쓰며 일상을 망가뜨려 가면서까지 몸 바쳐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 연극하는 게 조금은 즐거워진 것도 중요한 이유다.
가장 최근작인 <김이박>에서는 연기적으로 어떤 부분에 집중했나.
희진
‘대충’하려고 했다. 성의 없이 했다는 뜻이 아니라 조금 느슨하게 연기하고 싶었다는 뜻이다. 국어사전에도 ‘대충’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쓸 만한 정도’라고 되어 있다. 전에는 모든 걸 계획해 놓고 그 이상을 못 갔던 것 같다. 연습하면서 매 순간의 ‘말과 몸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수행’했던 거다. 사실 그것만큼 재미없는 게 없는데. 사실 너무 지치고 재미없고 괴로웠다. ‘다 만들어지고 짜여 진 걸 반복하는 게 연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최근에 다시 하게 됐다. 틀에 짜인 걸 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는 열어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정되거나 고정되면 소통할 수 없으니까, 상대 배우와도 관객과도.
흔히 말하는 연기에서의 ‘스코어(score)’를 잘못 이해하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매 순간 진짜 ‘액션’을 하지 않고 액션의 결과물만 반복하게 되는 경우가 그런 게 아닌가. ‘어느 정도 열어놓는다’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나. 스코어를 헐겁게 짜서 어느 정도 즉흥을 하는 건가, 아니면 스코어는 촘촘하되 수행을 그날그날 다른 감각으로 하는 건가.
희진
둘 다다. 전자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테라피>(비루테 카푸스틴스카이테 작, 이인수 연출)에서 강애심 선배님과 만나는 장면이 있는데, ‘그날그날에 따라 다르게 해보자’가 됐다. 큰 동선은 반복했지만 많은 세부들이 연습 때부터 공연 때까지 매번 달랐다. 그 경험이 내게 큰 자유로움을 줬다. 처음 만나는 배우와 이렇게까지 하는 게 가능하구나 싶었다. 후자의 경우 역시 <테라피>에서, 내가 암이 재발한 걸 알고 남편에게 전화로 ‘사랑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어느 날 연습 때 연출님이 ‘방금 그 사랑해가 좋다’고 하셨는데, 나는 ‘그걸 반복할 수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해석을 서로 맞춰가되 발화는 그날그날의 감각대로 했던 것 같다. <김이박> 때도 그때그때 분위기나 흘러가는 것에 따라 마음대로 움직였던 순간들이 많았다.
나도 예전에는 말이나 몸의 리듬을 설계하고 그 고정된 리듬을 지키는 방식으로 연기하는 경향이 있었다. 최근에는 점점 ‘경험으로 열려있는 말하기, 관계로 열려있는 몸’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최희진
희진
진짜 아이러니한 게 이삼십대 때는 내 몸이 기능적으로 내가 정해놓은 것들을 실수 없이 반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 마흔이 넘어가니까 무릎도 아프고 무대에서 단어나 말들이 머릿속에서 입 밖으로 나올 때 실수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신체적, 심리적으로 문제가 생겼나 걱정될 정도로... 그런데 그러고 나니까 오히려 ‘진짜 말하는 게 뭐지? 무대에서 진짜 해야 할 게 뭐지?’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연기가 좀 힘들고 괴로운 거였는데 요새는 조금 재미가 있다.
말에 대해서는 어떤 궁금증이 생겼나. ‘진짜 말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나.
희진
요새 말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는데, 아직 답을 찾는 중이다. 故김동현 연출님이 ‘단단하고 깨끗하게 말하기’에 대해 역설하셨는데, 그 말이 뭘까 하는 궁금증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다. 어렴풋하게 ‘인물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이 인물을 끌어간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20세기의 여인>이라는 작품에서 배우들이 실제 기록에서 발췌된, A4용지에 쓰여 진 대사들을 ‘단단한 말하기’로 발화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발화된 말들이 극장에 쌓이면서 공간에서 인물들이 느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명료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배우가 인물을 연기한다기보다는 ‘말들 사이에서 인물이 살아나는 경험’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인상 깊게 남아있다.
손원정 연출님과 <애들러와 깁>을 할 때는 말이 무너지지 않게 애썼다. 말이 일상으로 미끄러져 내리지 않도록, 말을 단단하게 잡아 올리려고 했던 것 같다.
그 외에도 <인정투쟁: 예술가 편>(이연주 연출, 극단애인) 공연 때 무대 뒤에서 배리어 프리 음성 해설을 한 적이 있는데, 백우람 배우가 연기할 때 대사가 바로 나오지 않고 말이 유예되는 시간 동안 무대 위의 모든 배우가 그 시간을 함께 기다리는 순간이 정말 인상 깊었다. 그 말 한마디가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상황은 다르지만 나는 무대에서 불필요한 시간을 쓰면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 때문에 말을 해치우듯이 내뱉었던 것 같다. 요새는 일차적으로 말을 좀 천천히 해보자 생각하고 있다.
사실 말에 그 인물의 역사가 담겨있지 않나. 환경, 성격, 지식정도, 부모의 교육, 그런 것들이 말하는 방식 안에 다 들어가는 것 같다. 그런데 그동안 인물에 따라 목소리를 변조하거나 발성에 변화를 주려고 시도했던 적은 있는 것 같은데, 말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나도 무대에서 구조적이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방식에 익숙해서 어떻게 해야 더 살아있는 말하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다. 오히려 몸은 과정을 더듬기가 수월한데 말은 워낙 분절적으로 세계와 대응되어 있어서 의미와 의미 사이, 형식과 형식 사이를 더듬는 방법을 찾기가 몹시 어려운 것 같다.
희진
결국 연기에서 말하기란 ‘말과 말 사이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물의 말과 말 사이, 인물들 사이의 말과 말 사이...
‘말과 말 사이를 찾는 것’에 대해 더 설명 부탁한다.
희진
아직 잘 모르겠다. 음..신록씨는 어떤가? 이렇게 어물쩍 떠넘기면 미워할 건가?(웃음)
(웃음) 내 경우, 말과 말 사이만큼이나 의식 속의 경험이 말로 대응되는 과정, 즉 ‘의식과 말 사이’가 궁금하다. 의식 경험이 말로 전환되는 과정을 확장해서 들여다본다면 살아있는 말하기의 힌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총체적인 의식 경험 안에서 그 순간 그 단어가 선택되는 과정, 그 선택이 발화로 이어질 때 언어의 세계로 미처 편입되지 못하고 탈락하는 의식의 영역들까지 품을 수 있는 ‘잠재적인 말하기’는 뭘까 궁금하다. 말의 윤곽이 더 열리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랄까.
희진
흥미롭고 궁금하다. 무대에서의 말하기가 변해간다. 예전에는 정확한 말하기가 중요했다면 요새는 ‘자연스러운 말하기’가 중요해진 것 같다. 버벅대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곳에서 끊어 읽을 수도 있고. 그만큼 생각이 더 중요하지 발화되는 결과물이 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것 같다. 많은 소극장 연극에서 배우와 배역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배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직접 말하는 작품들이 많아지면서 무대에서의 자연스러운 말하기가 더 두드러지게 된 것 같다.
‘자연스러운 말하기’의 핵심이 뭐라고 생각하나. 버벅대거나 의외의 곳에서 끊어 읽는 것은 어떤 과정의 결과이지 스타일로 지향될 바는 아니지 않나. 발화되는 결과물보다 그 이면의 ‘생각’이 더 중요하다면 그 ‘생각’이란 뭘까. 의식경험, 기억의 총체, 활자가 지시하는 대상, 그 대상과 연결된 세계 등등.
희진
좀 다른 대답 같지만, 아마도 호흡일까?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결과로서의 말에 신경 쓰다 보면 호흡을 억지로 잡고 있거나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떨리면 떨리는 대로 호흡할 수 있는 게 자연스러운 말하기의 시작점 아닐까?
복잡한 질문에 명쾌한 대답 같다. 예전에 한 교수님께서 ‘말 이전은 소리, 소리 이전은 호흡이다’라고 하셨던 말이 기억난다. ‘생각=충동=호흡’이라고 하셨던 말도.
희진
확실한 건 말의 형태를 정해서 그걸 외워서 공연 때 반복하는 것은 재미없다는 거다. 말 역시 이상향을 정해놓고 그걸 지향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지금은 예전처럼 고정적인 화술 법칙보다 자기만의 말하기 방식이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더 어렵기도 하고.
결국 배우가 수행하는 말하기, 움직이기, 인물 되기 모두에서 이데아에 대한 지향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 아닐까. 연습에서 결과물, 완성형, 이상향을 만들어 놓고 공연에서 그 결과물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기보다는, 말과 말 사이, 의식과 말 사이, 스코어와 스코어 사이를 더듬으며 발생하는 생성의 순간을 배우의 몸과 말이 더 많이 매개하는 방식으로 무대 언어가 열리고 있는 것 같다.
희진
그런 의미에서 내가 ‘대충’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 같다. 완벽주의, 이상향, 규칙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자기만의 방식을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말도 몸도 더 열어놓고 매 순간이 다를 수 있는, 무대에서 그런 순간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조금은 나이를 먹어서, 연습실에서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럴 수도 있겠다. 내 것만 하는 게 아니라 전체가 어떻게 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니까, 시야가 조금은 넓어져서? ‘대충’은 워낙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니까 오해 없이 ‘가벼움’이나 ‘애쓰지 않음’으로 바꿔도 좋겠다. 이 단어가 지금의 내가 공연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 선택한 방법 중 하나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나?
희진
<김이박> 공연이 끝난 지 20일이 지나간다. 한참 지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토록 원했던 휴식인데 뜻하지 않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불안에 점점 잠식되어가는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곳곳에서 연습 소식과 공연 소식이 들린다. 다들 불안함과 초조함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고 있을 것이다. 극장으로 찾아왔던 동료들처럼 나도 마스크와 손 소독제를 챙겨서 극장으로 나가봐야겠다.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님, 반복되는 일상이 부쩍 견디기 힘들다면 내가 지금 ‘무엇을 반복하고 있나?’하고 한 번 되돌아보세요. 정해진 일과와 일과 사이, 습관적으로 나누는 말과 말 사이에서 기계적인 반복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작은 차이들을 발견하고 그 차이들에 좀 더 세심하게 집중해보면 어떨까요. 도달해야 할 이상향은 없으므로, 자유롭게!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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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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