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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이 만난 사람] 구자혜X김도현

연기를 하며 생각하고 발견한 것들에 대하여

구자혜, 김도현

제178호

2020.04.16

필자는 2015년부터 ‘세월호 연극’을 만들었다. 연극이 매끈하면 매끈할수록,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기술자로서의 기술을 발휘하고 싶기도 했고, 연출이랍시고 앉아 있으면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는 장면이 보기에 좋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배우들은 연기를 잘할수록, 불편해했다. 결국 돌고 돌아, ‘그래서?’라는 질문이 나왔다. 잘 만들었다가, 부수는 일들이 빈번해졌다. ‘그래서?’라는 말만이 연습실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나이대의 그런 직업을 가진, 그런 인물을 잘 연기해서? 그래서?’ 인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되, 인물과 배우가 공존하는, 관객을 의식하고 있는, 전달해야 할 것을 전달하는 식의 연기 전략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시대 시민이자 배우로서, 극장을 찾은 동시대 시민들과 마주해야 하는 사람은 결국 배우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 배우의 연기 전략에 대한 담론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은 올해 <별망엄마>를 준비 중이었다. 극단 내에서는, ‘이번 공연 <별망엄마>의 정통 연기 전략이 관객을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연기전략이 예전보다 우리를 더 힘들게 한다면, 연습만 하고 공연은 하지 말자.’라는 전제를 두고 연습을 진행했다. 이 극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도현님은 전국을 돌며 총 129회의 무대를 거치면서, 연기에 대한 원리를 발견했다. 앞서 말했듯, 세월호 이후 연극 만들기 방식은 바뀌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배우가 있다. 이에 대한 고민을 이어오던 필자는, 세월호 어머니이며 故정동수씨 어머니 그리고 배우로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도현님을 만나 무대에서 인물을 연기하는 원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혜
당신은 드라마 속의 어떤 인물을 연기 해왔다. 김도현으로서, 故정동수씨의 어머니로서의 당사자성을 드러내고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늘 드라마 속의 어떤 인물을 연기했다. 그 연기론을 듣고 싶다.
도현
무대에 들어갈 때, 세월호 어머니로 들어가지 않는다. 내가 맡은 인물로 들어간다. 그렇지 않으면 공연 중에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나는 세월호 어머니가 맞다.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무대 위에 올라갈 때는 세월호 어머니가 아닌, 내가 맡은 그 인물로 들어가는 거다. 물론 그래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날이 있다.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공연 중에는 영광이 할아버지가 ‘김치찌개에 고기만 쏙쏙 뽑아먹는’다는 독백을 들으며 그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장면이 끝난 후 무대에 남아서, 세찬이라는 인물과 바로 코믹 연기를 했다. 암전이 되고 불이 켜지면 바로 코믹 장면으로 들어가는 거다. 어둠 속에서 동료 배우들이 내 손을 만져주고 간다. 아무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거기에 힘을 받아서 이미경 배우(故이영만씨 어머니)와 코믹 연기를 한다. 혼자만 잘하면 안 된다. 이미경 배우 덕분에 힘을 받아 코믹 연기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날이 있다. 그 대사가 너무 꽂혀서, 울음이 안 멈춰지는 거다. 동수 생일 전전 날인가, 아침에 김치찌개를 끓이고 온 날이었다. 전 장면에서 못 풀려나온 거다. 보통은 한두 번 숨 쉬고, 암전 끝나고 불 켜지면 감정 조절을 했다. 그런데 그날은 울면서 대사를 했다. 정말 안 될 때는 포기하는 거다. 코믹 연기를 울면서 한 거다. 안 될 때는 안 되는 거다. 내가 그런 것처럼, 상대가 그런 날이 오기도 한다. 똑같은 대사인데, 상대의 대사가 내 귀에는 울음으로 들릴 때가 있다. 내가 울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힘들구나, 아프구나. 그럴 때는 공연 중에 상대를 더 안아준다. 내면의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서로 믿고 주고받는 연기를 하는 거니까 그렇게 안아줄 수 있다.
자혜
<장기자랑>에서 일인 다역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루피라는 만화 속의 인물을 연기할 때, 연기의 전략이 궁금하다.
도현
동수가 루피를 좋아했다. 루피가 동수의 짝꿍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극 중에서 소극적이고 혼자인 인물 아영이가 나온다. 루피는 아영이의 상상 속 친구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영이가 동수가 되었다. 그러니까, 루피를 맡은 나는 아영이를 너무 안아주고 싶게 된 거다. 동수가 루피한테 위로를 받았다는 걸 깨달았고, 그때 내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알았다. 루피라는 캐릭터를 꾸미는 것보다는, 루피가 되어 안아주고 싶은 대상이 있으니까, 과감한 연기가 나올 수 있었던 거다. 극중 인물인 아영이가, 나의 아들인 동수로 보였다. 그래서 루피를 연기하는 나는, 아영이를 안아주고 싶어진 거다.
자혜
그 인물이 누구를 바라보고 누구에게 무엇을 해주고자 하는지가 정해지면, 즉 그 인물의 일이 정해지면, 캐릭터를 어디까지 갈 것인지 수위가 정해지는 것 같다.
도현
<장기자랑>에서 루피는 상상 속의 인물이지만, 그걸 연기하는 나도 보는 사람도 루피의 행동이나 제스처 하나하나에 위로받았던 거 같다. 내가 위로받고 싶은 만큼 연기를 했던 거 같다. 물론 만화 영화도 찾아보긴 했다, 루피의 표정 같은 거를 보고 루피의 매력을 알았다. 하지만 전적으로 거기에 의존하지는 않았다.
자혜
연기의 뼈대는 스스로 구축한 거 아닌가? 무엇을 어떻게 연기하고, 내가 상대를 무엇으로 바라볼지.
도현
그걸 ‘세워놓는다’고 한다. <장기자랑>은 모두 아이들 에피소드이다.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에서 은주로 돌아갈 때마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장기자랑>에서는 7명이 교복 입고 250명의 아이들을 이야기하며 같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외롭지 않았다. 외롭지 않다 보니까, 내 아이에 대해 밝고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밤마다 조금씩 장기자랑 준비한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 꿈을 이루어주자는 생각으로 연기를 했다. 초창기에는 내가 연기를 하면서도, 내가 연기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몰랐다. 지금은, 내가 누구를 연기할지 세워놓는다.
자혜
누군가를 계속 무대 위로 불러내는 것. 이것이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연기론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현
사실, 다른 일이 많은데 짬을 내서 연극을 한 거다. 그런데 무대에 서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공연을 가면서 눈치를 많이 봤다. 진실규명도 책임자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급했다. 그래도 연극이, 합창이, 소모임이 우리 아이들과 관련이 없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우선순위가 될 수 있냐는 질타 속에서, 연극을 했고 그게 인정을 받았다. 다른 부모님들도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우리가 힘을 내고 있다는 것에 힘을 받았다고 했고, 우리 아이들을 안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장기자랑>에서 엄마들은 안 보이고,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돌아보게 되고, 위로받았고, 다시 살아갈 원동력이 되었다고 했다.
김도현
자혜
배우의 몸은 누군가의 삶이나 말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배우가 그런 매개체만은 될 수는 없다. 내가 이 연극에서 무언가를 얻지 못한다면, 연기의 동력은 생기기 어려운 것 같다.
도현
<장기자랑>에서 루피인 내가 안아주고 싶었던 아영이 역할을 맡은 김명임(故곽수인씨 어머니) 배우는 같은 2학년 7반 반대표이다. 참사가 나고, 올라와서 처음 대면한 분이 그분이었고, 그분 덕분에 연기하게 되었다. 나에게 엄마 같은 존재이자 동생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장기자랑>에서는 내가 안아줘야 할 아영이라는 인물, 그러니까 그 옆에 루피라는 짝꿍을 놓고 싶은 인물이 되었다. <그와 그녀의 옷장>에서는 아들과 엄마로 만났다.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에서는 아빠와 딸로 만났다. <장기자랑>에서는 친구로 만나, 안아줄 수 있었다. 그날그날 컨디션 따라 호흡이 달라지는데, 그건 어쩔 수 없다. 김명임 배우가 연기를 좀 크게 하면 내가 다운시켜서 잡아준다. 그건 그분도 마찬가지일 거다.
자혜
그걸,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도현
‘캐치’. 상대의 기분이나 호흡을 캐치하는 거. <장기자랑>에서 아영이가 내 손을 잡아줄 때가 있다. 그 손의 느낌이 평상시랑 다를 때가 있다. 그러면 내 마음이 내려앉는다. 그럴 때는 평소보다 더 살짝 아영이를 안아주고 간다. 내가 그분에게 위로를 하지만, 나도 위로받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대부분 아영이가 나를 안아줬던 거 같다. 그 손이 굉장히 따뜻하다.
자혜
동력이 상대배우인 거 같다.
도현
그렇다. 그래도 안 되는 날이 있다. 둘 다 컨디션이 굉장히 안 좋을 때도 있다. 4월에 공연이 제일 많다. 일부러 많이 하기도 한다. 무대에 올라가서 힘든 만큼 표현했던 것 같다. 더 힘차게, 더 뛰었던 것 같다. 연습이든 공연이든. 각자 힘든 시기가 있다. 아이들의 생일 다가오면 더 그렇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이, 내가 힘들다고 분위기다운 안 시키려고 한다. 그래도 안 되는 날이 있다. 그럼 그날이 왔나보다 한다. 배려하는 거다.
자혜
<장기자랑>에서 일인 다역 한 이야기를 더 해줄 수 있나? 만화 속 인물, 그리고 두 남학생 역할을 했다. 의상과 가발을 착용했다. 본인이 인지하고 있는 성별과 나이도, 인물과 다 다르다. 어떤 것을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도현
<장기자랑>에서 태수와 룡이 역할을 했다. 태수는 다국적 기업에 취직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태수라는 극중 인물은 김명임 배우의 아들 故곽수인 씨다. 나의 첫 번째 목표는 못 해도 좋으니까 대사 틀리지 말고 잘 표현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이의 부모가 보고 있으니까. 태수는 오로지 수인이를 생각하고 연기했다. 극중 인물인 룡이는 나의 아들인 동수이다. 룡이 대사 중에, 양자역학에 대한 대사가 있다. 역시 틀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아들인 동수가, 로봇 공학과를 가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장면이 들어간 거다. 두 명의 인물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피, 태수, 룡이 다 다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미있었다.
자혜
소위 말하는 배우의 해석이나 창조력 보다, 배우가 전달해야 할 인물과 그 인물의 삶이 명확하게 있기 때문에, 연기할 때 집중해야 할 것이 분명해지는 것 같다. 그리고 공연의 전략이 선명하다. 예를 들어, <장기자랑>에서는 코미디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표방했다. 공연이 무거워지면, 관객도 무거워진다는 식의 말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을 것 같다.
도현
우리가 무거워지면 이야기도 잘 전달되지 않는다. 무거운 이야기를 무거운 우리들이 하면, 우리도 헤어나지 못한다. 가면 갈수록, 그 인물이 내가 된다. 잘하면 잘할수록 힘들어진다. 마음 같아서는 큐, 하면 빠져나왔으면 좋겠다. 역할이 버거워질 때가 있다. 그래, 나는 세월호 어머니 맞다. 거부하고 싶어도, 이건 거부할 수 없는 거다. 갈림길에 놓일 때가 있다. 그래도 무대에 세월호 어머니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 위해, 코미디로 가는 거다.
무대에서 울지 말자는 것을 불문율로 가져왔다. 이유는 하나다, 우리는 당사자가 아니며 연극 기술자로서, 감정을 과잉되게 표현하면 관객이 느낄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박하기 힘들기에, 별생각 없이 따라온 연극의 경전과도 같은 말이다. 습관처럼 전제로 들여왔지만, 그 이상 그 너머 조금 더 정교한 합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왔다. 드라마 대본 속의 인물을 잘 연기하면 할수록, 회의감이 있었다. ‘그래서 무엇을 하나? 그래서 무엇을 얻나? 잘 만들어진 드라마를 잘도 했구나. 연기도 이정도면 나쁘지 않구나. 빛과 소리가 참 적당한 타이밍에 잘 섞여 들어갔구나. 의상과 무대의 배색이 참 좋구나. 누굴 연기하나? 무엇을 연기하나?’ 묻고 싶다.
자혜
무엇을 위해, 누구를 연기하나?
도현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에서는 한소리라는 인물로 무대에 올라갔다. 한소리를 연기할 때에는, 동수 동생이자 나의 딸인 수빈이를 인물의 모티프이자 콘셉트로 가져왔다. 수빈이가 중3 때 오빠인 동수를 잃었다. 나에게 수빈이가 안 보였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수빈이가 이야기했다. 엄마가 연기를 하다 보니까 자기한테 웃고 있더라고, 보기 좋다고. 그제야 수빈이도 보이고 남편도 보였다. 엄마인 내가 딸에게 바라는 상상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바라는 밝은 수빈이를, 소리로 연기했다. 친구들 만났을 때에는 이렇게 웃을 수빈이. 극 중 유리랑 놀 때는 조금 더 밝았으면 좋겠는 수빈이. 그리고 말은 땍땍거리지만, 감정 표현에서는 사랑이 있는 수빈이. 수빈이가 나한테 해주길 바라는 감정들. 힘들겠지만, 밖에서는 친구들하고 잘 지내고 자신의 생활을 했으면 좋겠는 수빈이. 가족 간의 위로를 못 받으면 무너진다. 6년 견딜 수 있었던 건 남편과 딸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혜
연기해야 할 대상이 가족들이기도 한 건가?
도현
세상에서 나만 아픈 줄 알았다.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에서 소리를 연기하면서, 수빈으로 콘셉트를 잡으면서 수빈이도 남편도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그전까지는, 내 아픔이 크다 보니까 주위를 못 봤다. 배우는 남의 역할 해봐야 한다고 하지 않나? 항상 동수에 갇혀 있었다면,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에서는 우리 가족을 연기하며 우리 가족을 보게 되었다.
자혜
언제, 어느 지역 혹은 어느 극장에서 공연을 하느냐에 따라 연기의 감각이 달라질 것 같다. 제주도에서 공연할 때는 어떤 감각이었나.
도현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공연을 하기 위해 제주도를 갔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간 거였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동수 나이 때 수학여행으로 제주도를 갔다. 공연으로 제주도를 가는 거였지만, 수학여행처럼 가는 거였다. 비행기에서 아팠다. 그래도 제주도는 우리 아이들이 오고 싶은 곳이었고, 아이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열심히 했다. 그리고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 공연은 거기서 막공을 했다. 일부러 잡은 것도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가고 싶었던 곳에 가서 공연을 하자. <장기자랑>에서 아이들이 하려고 했던 장기자랑 장면도 같은 마음이었다.
자혜
광장극장 블랙텐트에서는 어땠나?
도현
진짜 추웠던 기억이 난다. 줄이 길어서 못 들어오고 가신 분도 있다. 그때만 해도 진짜 초창기였다. 각양각색의 예술인 그리고 투쟁하시는 분들이 오셨다. 그분들이 우리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다시 시작 할 거라고, 힘내시라고 했다. 우리도 힘을 받았다. 예술인들이 블랙리스트와 싸우기 위해 만든 극장. ‘우리가 뭐라고 이곳에서 공연을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힘을 주시니까 전환점이 되었다. 팽목항에서 올라와서 투쟁을 시작한 게 광화문이었다. 아이 장례 치르자마자 앉았던 곳이다. 아이들이 보고 있는 느낌이 있었다. 최전선에서 최선을 다하자. 우리끼리는 부딪치지 말자. 그때만 해도 내가 제일 힘든 줄 알았다. 광화문에서도 했는데 우리가 어디 가서 못 하겠냐.
자혜
감정의 최전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근처에 태극기 집회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나.
도현
그리고 바로 옆에 분향소가 있었다. 단식하고 있는 유가족이 있고, 물대포 맞아가며 투쟁했던 그곳. 그곳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공간성이 있다. 블랙텐트는 우리에게 전환점이었다. 우리가 듣지도 못했던 시민단체들, 투쟁하시는 분들, 블랙텐트의 아우라가 있다. 긴장을 많이 했다. 춥기도 했지만, 배우들이나 작가들이 와서 많이 보니까, 긴장도 했다.
자혜
아, 그게 신경 쓰였나?
도현
신경 안 쓴다면 거짓말인 거 같다. 우리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까. 우리를 배우로 보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다.
<장기자랑>공연사진 (사진제공_416가족극단 노란리본)
자혜
그럴 듯한 인물을 연기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캐릭터라는 미명 하에 전사를 구축해서, 빛과 소리를 뿌려대는 시대도 지났다고 생각한다. 상상 속의 누군가를 창조해서 연기하는 게 가능한가? 무대 위에 어떤 존재로 서야 할까?
도현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세월호 어머니라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관객들은 무대 위의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맡고 있는 인물로 본다.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라, 아이들로 올라간다. 그런 의미에서 무대에 들어갈 때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는 거다. <장기자랑>에서는 250명 아이들의 모습으로 올라간 것도 있다. 생존자 장애진씨의 어머니 김순덕 배우는, 아이들을 최대한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무대에 올라가면 실컷 잘 놀 거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까 연기가 나왔다. 김순덕 배우가 맡은 인물인 지수가 무대에서 활활 웃는다. 어차피 우리가 그 아이들로 올라가도, 세월호 엄마라는 건 사라지지 않는다. 관객들은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라 그 아이가 보인다고 했다. 그때, 우리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장기자랑>을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했을 때도 이런 느낌 날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아니다. 내 아이를 내가 표현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지. 다른 사람이 한다고 해서 그게 나올까. 내가 나의 아이를 연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동시에 나밖에 못 한다는 거, 그게 더 어렵다.
자혜
작년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세월호 포럼에서, ‘은주로 들어갈 때마다, 외롭다’고 했다.
도현
<이웃에 살고 이웃에 죽고>에서 은주 역할로 ‘들어가면서’, 은주는 백 퍼센트 우리 아이‘들’이 된다. 그리고 동수가 된다. 그날 돌아 올 수 없는 우리 아이들이 동수가 된다. 그걸 깨닫는 순간 너무 힘들다. 은주는 말 그대로, 잃어버린 아이가 되는 거다. 그리고 내가 아이가 되는 거다. 그게 들어오는 순간, 감당이 안 된다. 그 장면을 할 때마다 나와 은주는 등을 돌리고 있으니까, 관객들은 모른다. 울지 않았던 적이 없던 거 같다. 내가 그리워하는 동수가 아니라, 그날 뱃속에 잇는 우리 250명 아이들이 되는 거다.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아들이 아니라, 잃어버린 아이가 되는 거다. 그제야, 세월호 어머니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낀다. 다른 배우들과 무대에 같이 있어도, 그 장면에서는 너무 외롭다. 때로는 내 마음을 내가 가둬서, 우리 극단 언니들과 거리를 두고 멀리 있으려고 했고, 안 만나려고도 했다. 내 가정이 힘들 때도 있었다. 은주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그 장면에서는 세월호 아이들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 장면은 위험하다.
자혜
그 인물 안에 배우가 들어가서, 같이 앉아 있었다는 것 같다.
도현
내가 놓쳐버린 아이들. 말 그대로 세월호 아이 그리고 아이들. 거기에 내가 있었다.
자혜
인터뷰 내내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공연 중에 김도현은 어디에 있었나?
도현
나는 없었다. 나, 김도현은 없었던 거다. 무대에 올라가서 김도현으로 대놓고 이야기한 적도 없고. 나는 내 딸을 모티프로 한 소리라는 인물로 올라갔고, 내 아들을 모티프로 한 룡이라는 인물로 올라갔고, 내 아들이 좋아한 루피라는 만화 주인공으로 올라가서 아영이를 안아주었다. 그런데 은주가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장면에서는 그게 아니었던 거 같다. 나는 세월호 아이가 되어버렸다. 그 외로움 때문에 너무 무섭고 아팠다. 세월호 어머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나는 나인데, 잃어버린 나인 건가? 그것이 인식된 순간부터, 외로웠다.
자혜
내가 누구를 연기하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공연이 진행되는 중에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순간들이 많은 것 같다. 왜 그럴까.
도현
보통 그건 내 심리와 ‘부딪힐 때’ 온다. 내가 알고 있는 동수를 연기할 수 없었다. 잃어버린 아이들이 인식이 된 거다. 이 공연이 끝나면 없어질 아이, 없어진 아이.
자혜
부재를 공연 중에 인식하게 되는 건가.
도현
상상 장면이었다. 상상을 멀리서 바라보는 장면. 그걸 봐버린 거다. 옛날에 이렇게 놀았지 하면서, 소리가 은주로 바뀌면서 세찬이랑 주고받는 장면이자 엄마랑 노는 장면. 이걸 하고 있으니까, 돌아오지 못한 우리 아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다. 은주가 등을 돌리면 그림자가 생긴다. 이걸 인식하게 되니까,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 안에 내가 들어앉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걸 알게 되면 외로움이 찾아온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안 되는 날은 안 되는 거다.’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신작 <별망엄마>를 연습하다가, 우리가 힘들어지면 공연은 하지 않기로 한 것처럼. 그 외로움과 고통의 정체가 무엇인지, 같이 이야기하는 것. 나의 생각, 나의 창조력, 나의 자아실현 보다 이미 내가 연기해야 할 대상과 무대에서 할 일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 내가 전달해야 할 삶이 있다. 소리는 실존하는 수빈을 모티프를 갖고 연기했고, 루피를 연기하며 아영이를 동수로 바라봤다. 그리고 루피의 일은 아영이를 안아주는 것이었다.
세월호 6주기를 맞이하는 지금, 저 사람의 외로움 앞에서 이 글이, 나의 연극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와 같은 일시적 자기 성찰은 아니길 바란다.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공연을 보아오면서, 나와 나의 동료들은 불필요한 것이 전혀 없이, 그러나 완전하게 맞아떨어지는 한 편의 연극 앞에서 연극을 직업으로 가진 기술자로서 흔들려 왔고, 그 정체를 알고 싶었을 뿐이다. 기술은 무엇인가. 기술에 수반되는 기술의 수위는 무엇에 의해 조절되는가. 관습적 기술 너머에 존재하는 기술을 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연극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언제까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서로 나아가면서, 계속 발견되는 개인들의 외로움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집단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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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혜X김도현

구자혜X김도현
구자혜
글을 쓰고 연출을 한다고 한다. 지금은 아니다. redneckpast@empas.com

김도현
416가족극단 노란리본. 동수엄마 김도현. 안전한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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