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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김진영X김신록

고립의 시대 연결의 경험, 소리동조

김신록_배우

제179호

2020.05.14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 여러분, 내가 내는 소리가 진동이 되어 몸 구석구석을 울리고, 상대를 울리고, 공간을 울리는 경험을 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노래의 형식이나 구조 같은 ‘소리정보’가 아니라 물질로서의 소리 자체를 듣는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요? 원초적인 소리 에너지를 탐구하는 ‘보이스씨어터 몸mom소리’ 대표 김진영 배우님을 만나 ‘나와 너’가 소리를 통해 하나의 파동 안에 존재하는 ‘소리동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진영
거리공연들이 다 취소돼서 어떻게 작업을 이어가야 하나 고민하며 지내고 있다. 뭔가 영상을 만들어야 할 것 같은 요새 분위기 때문에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하하하. 주위에서는 소리를 중심으로 작업하니까 영상을 활용하기 쉬우리라 생각하는데, ‘내게 소리는 물질적인 것’이라 고민이 많다. 소리는 정보 이전에 진동이고 파동인데, ‘만나지 않고 해야 한다’는 조건 하에서, 몸과 몸이 만나는 직접성이 거세된 채 소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 중이다. 코로나 같은 전염병 재난은 또 올 텐데.
소리가 물질적인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부연해 달라.
진영
‘물질’적이라는 말을 ‘몸’적이라는 말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보통 소리는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기본적으로 소리는 몸의 안과 밖을 울리는 물리적인 진동이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물질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우리는 소리가 진동이라는 점을 쉽게 간과하거나 혹은 기술적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사실 소리의 ‘진동’과 ‘울림’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직접적이고 근원적인 방식으로 작용한다. 내가 하려는 소리 작업은, 노래나 언어처럼 소리가 구조화되기 이전에, 예술 재료로서 그리고 치유 재료로서 ‘소리 진동 자체가 가진 힘’을 경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어, 몸의 특정 부위의 울림과 진동에 집중하면, 몸의 울림이 마음의 어떤 부분을 건드려 그와 연결된 상상, 충동, 기억들을 불러온다. 이때 소리는 마치 물질처럼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고 실제적이다. 멜로디나 의미를 지닌 노래나 말이 아닌데도 말이다.
소리 작업이 영상에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하신 분들은 아마 소리의 음악적인 구조나 구성을 먼저 생각하셨나 보다.
진영
맞다. 어떤 사람들은 음악의 구조, 즉 ‘소리 정보’를 중시한다. 그런데 나는 소리를 떠받치고 있는 소리의 몸인 진동과 파동을 느끼게 하고 싶다. 음악적으로나 형식적으로 매끈한 것을 가능한 한 배제함으로써 소리 자체에 귀 기울이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울리는 공간을 찾아가는 <도시소리동굴> 공연을 시작하게 됐었다. 소리는 사람한테만 나는 게 아니라 공간에서도 나니까, 소리가 공간을 치고 공간이 진동을 내면 소리를 내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함께 같은 탕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공명의 순간은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참여한 사람들에게 어떤 상태나 정서를 이끌어 낸다.
김진영
진동이라는 것이 사실 촉각 아닌가. 좋은 스피커는 진동을 잘 전달하기도 하는데.
진영
스피커를 통한 진동과 직접 진동은 다르다. 진동에는 메인 진동만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좋은 스피커라도 소리의 뼈대 너머에 있는 다층적인 진동의 오솔길들을 섬세하게 다 송출하지는 못할 것이다. 청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촉각이고, 다른 감각과도 연결되기도 쉬운 감각이다. 엄마 뱃속의 태아에게 가장 먼저 발달하는 (특수)감각이 청각이다. 이때 물속에 있는 태아의 청각은 촉각에 가깝다. 매질이 공기가 아니라 물이니까. 감각의 발달 과정을 보면, 이미 발달되어 있던 감각 위에 또 다른 감각이 더해지는 식인데, 우리는 청각이 가장 먼저 발달하고, 그 청각과 연계하여 다른 감각들이 발달한다. 그래서 청각은 아주 근원적이면서도 다른 감각들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감각인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지금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사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소리가 들리는 듯 한 느낌이 든다.
진영
소리를 내려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내 워크숍에 ‘소리듣기 세션’이 있다. 들리는 모든 소리를, 판단하거나 거르거나 이름 붙이지 않고 들어보는 거다. 소리를 얼마나 훈련하느냐가 아니라 소리를 얼마나 듣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소리를 잘 들어보면 사람을 만지거나 치거나 건드리는, 소리가 움직이는 느낌이 있다. 소리를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몸의 전체 감각을 다 사용해서 듣는 거다. 며칠 전에 뒷산에 올랐는데 바람이 슬슬 불어오기 시작하더니 온몸을 확 휘몰아쳐 지나갔다. 소리를 듣는 것은 이렇게 바람을 맞는 것과 같다.
페이스북에 올린 ‘불의 노래’ 영상도 잘 봤다. 소리를 끈 채로 영상만 봤는데도 소리가 들렸다. 장작이 타는 사실적인 소리 말고도 춤 같고 노래 같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진영
사람이 바쁘지 않고 멍할 때 감각이 열리는 것 같다. 비로소 주위가 들리기 시작한다. 멍한 시간을 공유한다는 느낌으로, ‘불의 노래’ 같은 걸 시리즈로 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 없이 시각적인 장면만 촬영하고 소리를 상상하게 하는 ‘소리상상 프로젝트’도 좋겠다. 소리를 실제로 듣기도 하지만 상상으로 듣기도 하지 않나. 타닥타닥하는 장작 타들어 가는 소리가 빗소리가 되기도 하고. 오히려 명확하지 않은 것을 알려고 할 때에 더 많은 에너지를 투여하면서 더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소리가 지워져 있을 때 그 소리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 상상을 위해 이전에 체화된 내 경험들, 묻혀있던 경험을 다시 꺼내게 되는 것 같다. 사실 그게 예술과 여행의 작업이지 않나.
불의 노래를 듣다 (출처: 김진영 페이스북)
몸mom소리가 지향하는 바가 ‘소리동조’라고 했었는데, 소리동조라는 게 뭔가.
진영
‘동조’(同調)는 원래 물리학 용어다. 서로 파동이 다른 둘 이상의 에너지가 한 공간에 있을 때, 이 에너지의 파동이 하나로 맞춰지는 자연적인 현상을 말한다. 파동으로 이루어진 소리 작업에는 이런 현상이 매우 잘 일어난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마주 보고 편안한 상태에서 서로의 소리를 잘 들으면서 일정 시간 동안 소리 낼 때, 두 사람 사이에 파동이 겹치면서 ‘너의 소리도 아니고 나의 소리도 아닌 제3의 소리’가 만들어지는 느낌이 드는데, 이것이 바로 ‘소리동조’가 일어난 순간이다. 건조한 물리학 용어 같겠지만, 나는 점점 소리동조라는 말을 ‘신비함과 경이감을 동반한 소리경험’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어쩌면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현상이 일어날 때 우리가 경험하는 묘한 상태, 에너지가 연결되면서 둘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연결의 경험에 더 무게를 두어 이 말을 사용하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전에 배우님의 몸mom소리 워크숍에서 경험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상대의 소리 진동이 내 몸을 마구 쳤고 상대와 내가 하나의 큰 진동 막 안에 휩싸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진영
이스라엘에서 유학할 당시 수업 시간 엑서사이즈로 처음 ‘동조’를 경험했을 때, 굉장히 무서웠다. 처음 겪어보는 진동과 에너지가 확 덮쳐 와서 순간적으로 소리내기를 멈춰버렸다. 선생님이 “두려워하지 마. 너와 내가 하나의 소리가 되는 거야.”라고 해서 선생님을 믿고 다시 동조同調에 들어갔는데, 굉장히 다양한 질감들 사이를 함께 또 따로 왔다 갔다 하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그 경험 전에도 선생님이 좋기는 했지만, 그 후로는 뭔가 엄마 같았다. 연결되었다는 느낌이랄까.
첫 경험의 이상하고 두려운 느낌이 뭔지 알 것 같다. 동조에서 경험되는 연결감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교류’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신체적이었다. 내 소리와 상대 소리가 동조를 일으키면 그 결과는 두 소리의 합이 아닌, 그 합보다 훨씬 증폭되고 변형된 다른 질감과 에너지의 소리 진동으로 확장됐었다.
진영
공연을 하다 보면 가끔 퍼포머도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지 않나. 상대를 바라만 보고 있지만 움직이는 상대와 완전히 동일시되는, 그 사람의 질(質)이 바뀌고 동시에 나의 질이 바뀌는 경험 말이다. 동조될 때에는 나와 상대의 에너지가 섞여 있다. 마치 상대를 미러링하는 것처럼 자극과 반응이 단숨에 일어난다. 좋은 공연에서는 무대와 객석 사이에도 이런 몸의 연결감이 발생하는 것 같다. 개인의 막이 없어지고 서로 연결된 느낌이랄까. 그런 순간들이 지속되다 보면 상대와 사회적인 친밀감이 아닌, 존재 대 존재의 친밀감이 느껴진다. 그게 매력적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 다른 정보 없이, 동물처럼, 즉각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는가, 링크를 걸 수 있는가. 이런 것이 수업할 때도 필요하고 공연할 때도 필요한 것 같다.
김신록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보이스테라피 수업도 한다고 알고 있다.
진영
2008년에 보이스테라피를 시작하면서, 동조가 단순히 소리 훈련이 아니라 치유적인 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4년 이스라엘에서 돌아온 초반에는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워크숍을 주로 했는데, 얼마 후 슬럼프에 빠졌다. 내가 원하는 것은 ‘소리의 신비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는데, 전문가들이 원하는 방향은 아무래도 소리를 훈련하고 연마하고 이용하는 것에 중점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나. 하지만 소리는 도구가 아니고 ‘내 안의 정서, 내 안의 다른 에너지와 다른 인물을 끌어낼 수 있는 핵심 열쇠’가 될 수 있다. 소리와 관련된 ‘정보’와 소리를 연마하려는 ‘목표점’을 오히려 지우고 싶었다. 소리에 대한, 소리를 내는 자신에 대한 호기심과 신비감이 중요하다. 그래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수업할 때 과정도 결과도 더 좋은 경우가 많다. 호기심과 신비감이야말로 소리를 연마할 수 있는 동력이다.
동조도 마찬가지다. 기술적으로도 동조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럴 때는 기쁨이 덜하다. 목적성이 강해지면 동조하는 순간의 경험치는 훨씬 떨어진다. 내게는 동조를 만들어내겠다는 목적이나 동조라는 현상 자체보다 동조했을 때 연결감의 경험이 훨씬 중요하다. 이 사람이 남자다, 여자다, 뭐 하는 사람이다, 하는 정보들이 날아가 버리는 경험 말이다.
정보들이 사라지는 것, 정보나 규정이 쌓이기 이전의 상태를 중시하는 것 같다.
진영
맞다. 매번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어떻게 하면 경험을 통해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조건을 지우고 그 순간에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살아있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마치 수행이나 명상처럼. 젊었을 때는 삶과 동떨어진 예술에 매료되기도 했던 것 같다. 이제는 예술을 삶으로 끌어들인다기보다는 삶 안에 예술이 될 수 있는 씨앗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싶다. 우리가 ‘삶’이라고 지칭할 때 삶을 너무 단순하게 사회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나는 반대로 ‘규격화된 경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오히려 삶’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발견하는 것은 예술을 발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상적 삶이라는 표피 말고 그것을 뚫고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어떤 살아있는 감각, 말 그대로 ‘삶’ 말이다.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 여러분, 여전히 코로나 때문에 심리적 신체적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반 고립된 상태로 지내고 있지 않으신가요? 연극인들에게도 자꾸 ‘서로 만나지 않고 뭔가를 하라’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계신 곳에서 조용하게라도 말이 아닌 소리를 내보세요. 그리고 그 소리의 진동이 내 몸을 울리고, 내 앞의 커피잔을 울리고, 창밖의 나뭇잎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경험해보세요. 음~~마~~~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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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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