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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조연희X김신록

배리어프리 음성해설을 통한 깨달음, ‘역동적인 거리두기’

김신록_배우

제181호

2020.06.18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 여러분, ‘사회적 거리두기’ 말고, 연기에서 말하는 거리두기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흔히 배우들은 어떤 상황이나 순간에 무아지경의 상태로 몰입하지 않도록, ‘행위 하는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받습니다. 최근 몇 년간 영화와 연극에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배리어프리 음성해설’을 도맡아 온 극단 이와삼의 조연희 배우님을 만나 ‘역동적인 거리두기’의 경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거리두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자. 연출적인 관점에서는 즉각적으로 ‘소외효과’를, 배우 입장에서는 ‘배우 자신과 인물 사이의 거리두기’ 혹은 ‘행위 하는 나를 바라보는 제3의 눈’을 떠올릴 것 같다. 작가의 경우는 잘 모르지만 ‘허구의 이야기와 실제 경험 사이의 거리두기’를 고민하지 않을까.
배우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실제 속에 내가 있고 그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힘이 있는데’ 그게 거리두기인 것 같다. 감정이 몰아쳐도 그 상태를 바라봐주는 내 안의 여백. 나는 사실 내적인 것이 선행되어야 움직일 수 있는 부류의 배우다. 쉽게 감정이 움직이고, 몰입이 잘되고, 확 들어가고. 그런데 내가 하고자 하는 배리어프리 음성해설은 되도록 모노톤을 유지하고, 무대 위 혹은 영상 속 배우와 호흡을 같이 하면서도 동시에 거리를 유지해 주는 것이다. 이런 음성해설 경험을 통해 바라보는 힘, 거리두기의 힘이 좀 생긴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음성해설의 어떤 부분이 거리두기에 대한 사유를 불러왔나.
음성해설을 하다 보면 어떤 순간 묘한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중간에 있는 매개자로서 화면이나 무대 위 배우의 행위를 묘사하다 보면 단순한 ‘전달’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경험’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너무 몰입해서 내 일처럼 느끼거나, 반대로 너무 멀어져서 흥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때 내 안에서 어떤 ‘역동적인 개입’이 일어난다. 작용에 반작용, 액션에 리액션이 바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 사이에 또 다른 작용이 있는 것이다. 일종의 ‘알아차림과 거리조절’의 과정인데, 이것을 해내는 ‘흔들리지 않는 나’가 어느 층위엔가 단단히 버티고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조연희
‘흔들리지 않는 나’에 대해 설명해 달라.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고정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힘을 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게 핵심이다. 막연하게 ‘힘 빼라’, ‘비워라’가 아니고, 힘 빼고 비우려면 역설적으로 힘이 필요하다. ‘의식의 힘’이랄까. 힘을 내서 바라보고 힘을 내서 숨을 쉬는 것이다.
역동적인 알아차림의 과정에서, 서술하기와 경험하기 사이 어디 즈음을 더듬는 나의 위치를 계속 조정해 낸다는 말로 들린다. 마치 카메라 조리개처럼. 그런 면에서 배우가 하는 일은 사실 거리두기가 아니라 ‘거리조절’인 것 같다. 나와 나 사이, 나와 인물 사이, 나와 상대 사이, 나와 공간 사이의 다층적인 거리조절. 그런데 이 조절 역시 경험하기 안으로 최대한 가깝게 밀착되어 ‘되어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 핵심 같다. 안 그러면 연출들이 꼭 ‘생각하지 마라’고 하지 않나. 나는 이 디렉션이 가장 싫다.
하하하. 난 반대다. 나는 확 몰입하는 스타일이라 오히려 연출가가 ‘너무 갔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 피드백은 내가 기준을 잡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럼에도 나 스스로 내 안의 여러 층위를 넘나들며 거리조절을 하는 자생력을 길러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내게 음성해설이 도움이 된다. ‘역동성을 가진 알아차림’이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그간 ‘거리두기’라는 말이 ‘가만히 바라보라’는 식으로 막연하게 사용된 것 같다. 마치 배우가 모든 것을 수동적으로 수용하거나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처럼. 거리두기 역시 ‘역동적인 거리두기’가 되어야 한다.
사실 ‘바라본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나와 대상 간의 피드백이 전제된 역동적인 일 아닌가. 바르바가 말한 ‘리듬의 사유’, 메리 오블라이의 ‘이모션’ 혹은 ‘현존’ 이라는 말들 모두 이 바라봄의 역동성에 대한 것, 알아차림과 동시에 이미 변하고 있는, 끊임없이 새로 생성되는 역동성에 대한 사유가 아닐까 싶다.
‘거리두기’라는 말을 알기 전에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있다. ‘감정머리.’ 감정에도 머리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느끼고 감각하는 매 순간에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알아차림이 있는 것 같다. 감정과 감각과 직관 같은 것이 동시다발적으로 흐를 때 그것을 이끌어가는 머리, 일종의 ‘정서적 데이터’를 알아차리는 머리이다. 이 감정머리가 캐치하는 정서적 데이터가 역동적 거리두기를 위한 정보가 되는 것 같다.
흔히 ‘인식하세요’라고 말하면, ‘방금 일어난 일을 머리로 되짚어 생각’하느라 모든 경험을 이성으로 수렴시켜버리거나 실제와 인식 사이 시간 차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감정머리, 정서적 데이터라는 말은 더 직관적인 것 같다. 사실 ‘경험하기-바라보기’는 분리되어 일어나지 않고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하는 나와 보는 나를 시간상으로 분리하면 안 된다. 바라보는 것, 알아차리는 것도 경험이니까. 동시적이고 총체적인 경험의 연속이 있을 뿐이다.
배우들이 영화나 연극을 보고 음성해설을 해보면 감정머리를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배우는 무대에 서면서 성장하는데 1년에 3~4편 공연에 참여하기도 힘든 여건 속에서 ‘역동적인 거리두기’를 연습하고 훈련할 방법이 없지 않나. 다만, 이런 음성해설도 공부가 필요하다. 장애에 대한 이해, 배리어프리 개념 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김신록
어떤 계기로 배리어프리 음성해설에 처음 참여하게 됐다.
배리어프리를 처음 만난 건 2013년도였다. 우연히 공고를 보고 베리어프리 영화 위원회에서 기획한 여러 차례의 포럼에 참석했다. 여러 상업 영화들을 배리어프리로 제작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보도록 함으로써 배리어프리 콘텐츠를 홍보하는 기획 사업이었다. 참여자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는데, 자꾸 질문하는 내가 인상적이었는지 위원회 측에서 관심을 보였고, 내가 배우라는 걸 알고는 영화제 때 라이브 음성해설을 해달라고 요청해왔다. 그때 음성해설사로 첫 작업을 한 이후로 위원회 측과는 지금까지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관련한 거의 모든 작업은 배리어프리 콘텐츠 제작 플랫폼인 ‘사운드 플렉스’의 강내영 화면해설 작가와 함께하고 있다.
포럼에서 처음 접했던 배리어프리 음성해설 영화가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나.
기존에 이미 봤던 영화인데도 새롭게 보였다. 예를 들면, 보통 영화 볼 때 주인공 외에 다른 인물들의 이름을 알기 힘들지 않나. 그런데 화면 해설에서 행위 주체자의 이름을 자꾸 불러주니까 주인공 아닌 다른 인물의 이름도 알게 됐다. 또 화면에서 문이 쾅 닫히면, 시각 장애인에게는 문이라는 정보가 필요하니까 음성해설로 ‘문이 닫힌다’라고 언급된다. 그럼 관객은 주인공이 아닌 ‘문’으로 시선이 간다. 스크린에 배우의 얼굴이 가득 찰 때조차 해설로 들려오는 다른 정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점이 흥미로웠다.
감독의 관점과, 음성해설 작가의 관점과, 음성해설사의 관점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관점이 동시에 교차 작동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술 작품에 대한 체험은 정보보다 감각이 앞서는 경험일 것 같은데, 해설이 오히려 분위기나 정감을 정보로 치환해 버리는 문제는 없나.
좋은 지적이다. 연극에서 화면 해설을 진행했을 때 시각장애인분들께 ‘음성해설 모니터’를 부탁드린 적이 있다. 공연을 보시고는 어떤 부분은 해설이 ‘투 머치’라고, 정보가 없는 것이 더 낫다고 하셨다. 비장애인들은 다 설명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끼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감각할 수 있는 것을 굳이 설명으로 들을 필요가 없는 거다. 들리는 감각으로 방향을 알 수 있는데도 ‘오른쪽에서 말한다 왼쪽에서 말한다’ 이럴 필요는 없다. 극을 이해하는데, 혹은 분위기나 정감을 느끼는 데 꼭 필요한 정보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행위만이 아니라 분위기를 읽는 눈’을 기를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한 장면이나 순간의 분위기나 정서, 정감,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툭툭 바닥을 차고 있는 발인지, 한쪽으로 기울어진 머리인지, 딴생각에 잠긴 시선인지 등을 캐치할 수 있는 힘 말이다.
강내영 음성해설 작가님과 협업하는 과정에서 그런 이야기를 종종 나눈다. 같은 장면이지만 어떤 정보를 언급해 주는 것이 극의 진행에, 장면의 결을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될지를 세심히 살피려고 한다.
얼마 전 외국에서 배리어프리 해설사로 일하시는 분들이 남산드라마센터에서 기획한 포럼에 참석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안나’라는 분이 자신의 작은 노트를 소개했는데, 어떤 장면을 볼 때 어떻게 해설할 수 있을까를 적는 노트라고 했다. 배우들에게도 이 노트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 성곽길을 걸으며 그날 보이는 것을 적어보고, 다른 날 같은 길을 걸으면서 또 적어보는 거다. 그럼 같은 길인데도 그날의 기분이나 분위기,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날은 길, 둘째 날은 창문으로 보이는 길, 셋째 날은 구름이 눈에 들어온다. 같은 스팟에 서도 매번 다른 문장들이 나오는 게 재밌다. 나는 이 일기장에 ‘시각일기’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이 역시 매 순간 달라지는 역동적인 알아차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각일기는 줄거리 중심, 행동 중심이 아니라 정감과 분위기를 캐치하고 디자인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음성해설과 관련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곳이 있나.
작년에 남산에서 배리어프리 공연을 시작했고 두 번의 포럼을 진행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연극센터 플레이업 아케데미에 관련 수업이 개설된다고 알고 있다. 강내영 작가가 수업을 진행하고 내가 보조강사로 참여할 예정이다. 이 수업을 듣는다고 실전을 뛸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장애인지’에 관한 개념을 알고, 화면해설 작, 자막 제작, 음성해설을 진행해보는 일종의 체험판이 될 것 같다. 강내영 작가가 이런 워크숍을 하는 이유는, 연극계 내에서 배리어프리 콘텐츠 제작에 대한 자생력을 키워보라는, 연극계 안에서 인프라를 구축해보라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 여러분, 지금 나와 나 사이, 나와 역할 사이, 나와 상대 사이, 나와 공간 사이에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기분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알아차려 보세요. 그 알아차림의 순간 이미 역동적인 거리두기는 시작되었어요!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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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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