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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이 만난 사람] 장지영X슬릭

페미니스트라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장지영, 슬릭

제183호

2020.07.23

나는 이름에 대해 생각한다. 그 삶의 모양새에 답을 내릴 수는 없으면서도 우리를 명징하게 규정하는 페미니스트라는 이름. 이름을 붙여 우리의 활동을 포착해 낼 필요를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그 이름이 누군가의 전부일 수는 없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말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기만 하다는 말 일수도 없을 것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언어가 필요하고, 이름 없는 자들이 이름을 얻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싸움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삶은, 그 이름 이상의 무엇이다.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건 무엇일까요?’라는 제 3회 페미니즘 연극제의 질문은 나에게도 오랜 화두였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삶의 걸음걸음이 버겁고, 이렇게 사는 것이 괜찮을까 두려워서, 명료한 답을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내가 한 질문은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어떤가요? 였지만, 그가 준 답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방송을 위해 염색했을, 파란색, 회색이 조금 섞인, 가끔은 보랏빛으로 보이기도 하는 그의 머리색을 무엇이라고 내가 정의내릴 수 없듯, 내가 만난 슬릭은 ‘페미니스트’라는 한마디의 말로는 규정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래퍼 슬릭
지영
저는 2018년에 페미니즘 연극제를 시작해서 이제 3년째 하고 있는데, 첫 해와는 다른 느낌이 있어요. 처음에는 연극제 펀딩을 하고 참여를 하는 것에 어떤 사명감이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외에는 자칭 페미니스트라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을 하죠. 슬릭님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페미니스트라고 밝히고 활동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그렇게 몇 년 활동을 하면서 지금은 뭔가 이전과는 다르다는 감각이 있으세요?
슬릭
많은 사람이 페미니즘에 대해서 몰랐다가 잘못 알게 되고 점점 바로 알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면, 지금은 좀 잘못 알고 있는 상태 같아요. 진실을 마주하는 세 가지 단계라는 걸 다큐멘터리에서 봤는데 첫 번째는 조롱과 희화화, 두 번째는 적극적인 거부, 세 번째는 받아들임이래요. 지금은 조롱과 희화화의 단계가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나아진 게 있다면 이제는 (페미니즘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것일까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계속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에, 알게 되는 데까지의 길은 많은 사람에게 열린 것 같아요. 아직은 갈 길이 멀죠.
지영
작업할 땐 우리는 많이 변했다고 느끼면서도 현실에선 여전히 이게 뭐지? 그런 장면들을 많이 마주치게 되고, 그럴 때 우리만 변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왜 우리만 여기서 계속 변해야 하나. 그럴 땐 무기력하고 좌절감 느껴요. 개인적으로 미디어나 SNS에서 활동하시는 걸 보면, 용기 있다고 할지, 망설이는 게 없다고 할지, 그런 모습만 보게 되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저런 힘을 얻을 수 있지? 그런 게 궁금해요. 어떤 마음으로 하시는지.
슬릭
저는 혼자서 살아왔고, 뮤지션이고, 큰 회사에 들어가거나 직장에 다니거나 그렇지 않았어요. 저희 회사는 굉장히 독립적이고요. 그래서 저는 페미니즘을 알고 공부하게 되고 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지속적으로 성차별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해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두지도 못 하게 하는 환경이 없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전혀 몰랐고 어렴풋이는 알았지만, 저한테 중요한 건 아니었고요.
개인이 낼 수 있는 용기라고 한다면 사실 그렇게 크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되게 소심하고 그렇게까지 대의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했던 발언들이 다 쌓여서 결과론적으로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됐지만, 그 순간순간에 필요했던 건 아주 작은 결심들이고 작은 결정들이었어요. 그것들이 모여서 지금의 차원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굿걸> 촬영장이나 행사장처럼 여러 사람이 같은 일을 하는 데 가면 어렴풋이는 느껴요. 내가 하는 일들이 이들에게 생소하고 안 좋게 보일 수 있겠구나. 하지만 전 거기에 속해있을 사람은 아니어서 괜찮았던 것 같아요.
지영
그러면 어디에 속해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혹은 속하고 싶다거나?
슬릭
저는 미래에 속해있고 싶어요. 제가 웬만한 일차원적 욕구나 욕망은 별로 욕심내지 않는 사람인데, 평판에 대한 욕심이 있더라고요. 아주 먼 미래에 이 사람을 봤을 때 이 사람이 앞서나갔다는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것 같아요. 지금에 미련이 있는 바운더리는 없는.
지영
슬릭 보다 더 부각되는 이름이라고 해야 될까요, 페미니스트, 심지어 지옥에서 온. 그 이름을 늘 달고 다니는 거잖아요. 아마 한동안, 굉장히 오랫동안 따라다니게 될 텐데... 어떠세요?
슬릭
별생각이 없어요. <굿걸>에 나오기 전에 계속 들었던 질문이 페미니스트 래퍼로서의 삶에 대한 거였는데, 저는 별생각이 없어요. 제가 24시간 내내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제 개인적인 삶에서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오히려 저를 바라보는 상대에게 아주 큰 의미죠. 저 스스로 저를 돌아봤을 때는 내가 ‘페미니스트 래퍼이기 때문에‘라는 건 사실 2-3년 전에 했던 고민이거든요.
<굿걸>을 찍을 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매회 10명을 다 각자 타이틀을 가지고 설명을 해요. 저는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래퍼’ 인 거고. 처음에는 <굿걸> 멤버들이 지옥에서 왔대, 이랬는데, 몇 주 지나고 저를 알게 되니까 다른 친구들이 먼저 그것 좀 그만하면 안 되냐고 그러더라고요. 그 말의 무게나 정치성이 중요한 지점이긴 하지만, 내가 아는 슬릭은 그걸로만 설명되지 않는 사람인데 왜 그런 수식어로 박으려 하느냐는 항의였던 것 같아요. 근데 제 느낌도 좀 비슷해요. 부정할 생각은 전혀 없고 앞으로도 저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고 다닐 거지만, 저는 아주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이 뭔가 저를 대표하는 정체성일까 생각하면 그렇게 살고 있진 않은 것 같아요. 나는 난데.

장지영

지영
페미니즘 연극제를 하면 관객들이 페미니즘 연극을 기대하고 오잖아요. 그렇기는 한데, 작품이 가지고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메시지들이 페미니즘 연극이라는 한마디로 정리돼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 같아요. 저의 모든 일이 페미니즘일 수는 없잖아요. 슬릭님이 만드는 모든 곡이 다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진 않은 것처럼. 그럴 때 내가 페미니스트인 것이 사람들에게 하나의 손쉬운 해석 틀을 제공하는 건 아닐까,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요.
슬릭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
지영
지치는 건 없으세요?
슬릭
지쳤죠. 이미 지쳤고 몇 년 새에 힘이 난 적이 별로 없는데, 오히려 지치는 것이 디폴트가 된 것이 마음 편한 것 같아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잖아요. 페미니즘을 모르던 때로. 이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 안다는 것만으로도 피곤하잖아요. 되게 분노했고 막 화도 났고 힘도 났고 이러다가 아주 오래되니까 이제 슬프고 지치고, 그것도 오래되니까 그 사이에서 좀 덜 피곤한 방법을 계속 찾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또 살아있고 싶게 하는 것들을 더 많이 접하고 나를 그만 살게 하고 싶은 것들을 덜 접하는 그런 방법. 지금으로선, 개인으로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영
어떤 태도, 그러니까 지향하는 가치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 말고, 잃고 싶지 않은 태도가 있다면요?
슬릭
저는 쉽게 두근두근하는 사람이고 싶어요. 쉽게 흔들리는 거, 영향을 받는 거. 처음에는 작은 거에 영향을 많이 받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흔들리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무뎌지면 결국 좋은 것에도 무뎌지는 것 같아요. 나쁜 자극에 무뎌지다 보니 좋은 자극에도 같이 무뎌진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냥 안 무뎌지고 좀 예민하고 잘 흔들리고 그게 나은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친한 친구가 나를 배신했는데, 나는 멘탈이 강한 사람이어야 되니까 이런 거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슬릭님의 음악이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이렇게 누가 쓴 댓글에 제가 크게 감동할 수 있을까. 충격을 받으면 그냥 충격을 받고, 그래야 기뻐하는 것도 잘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인 게 별일 아닌데 자꾸만 옆에서 수군대니까 마음이 좋지 않을 때가 있어요. 사람을 좀 안 만나는 대신, 좋은 걸 자주 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최근에 제가 이랑님 글을 읽고 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나랑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똑똑하고 예술가인 페미니스트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게. 너무 재미있으면서 공감도 많이 되고 슬프고. 또 최근에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읽으면서도 느꼈고요. 그럴 때 내가 만약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으면 몰랐겠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생기고 느낄 수 있는 게 생긴 건 좋은 거다, 생각해요.
지영
페미니스트로서의 삶을 지속하시니까, 그 목소리를 오랫동안 내고 계신 거잖아요. 오랫동안 자기 신념을 가지고 뭔가를 해 오는 것. 계속한다는 건 힘이 필요한 일이고 지치지 않아야 하니까, 그걸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부러워하고 거기서 힘을 얻고 싶고 그런 것 같아요.
슬릭
추상적으로, 세상이 바뀌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서 했던 적이 있어요. 근데 그러다 보니까 너무 지쳐서 노선을 바꿨어요. 친구가 바뀌면, 엄마가 바뀌면 너무 좋겠다, 그럼 약간 현실화될 가능성이 보이잖아요.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면 포기할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지금 제가 바라는 게 있다면 저랑 얘기 하고 저랑 관계 맺는 사람들이 조금씩 더 비거니즘에 관심을 갖는 거거든요. 지금까진 괜찮은 거 같아요. 어쨌든 다들 나랑 밥은 먹어야 하니까. 지금까지는 이 정도 속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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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영X슬릭

장지영X슬릭
장지영_드라마터그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많다. july2413@naver.com

슬릭_래퍼
2016년 정규 1집 [Colossus], 2018년 정규 2집 [LMFIL]을 발매한 힙합 뮤지션.
다양한 사회문제에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는, 누구도 해치지 않는 노래를 만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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