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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이 만난 사람] 윤미희X허희

희곡, 그대로도 좋거든요

윤미희, 허희

제184호

2020.08.06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며 처음으로 희곡을 쓰게 되었다. 꽤 오랫동안 습작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곡을 써온 이유는 바로 ‘희곡’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희곡을 읽고 또 공연을 보며 나의 희곡이 무대 위에서 발현되는 순간을 꿈꿔왔다. 오랜 기다림 끝에 크고 작은 공연의 기회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고 지금도 계속 이렇게 희곡을 쓰고 있다. 희곡 쓰는 사람뿐 아니라 연극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연극인’이라는 말은 어색하다. 연극에서의 ‘극작가’는 무대가 아니라 지면 위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극작가들이 마음껏 희곡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이 많은 것도 아니다. 요즘 들어 극작가 동인이 늘어나고 희곡 읽기의 새로운 방식이 모색되고 있는 가운데 문학평론가 허희를 만나 문학으로서의 희곡에 관해 이야기해보았다.
윤미희
흔쾌히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우리가 이런 자리로 함께하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네요!
허희
그러게요. 알고 지낸 지 꽤 오래되었는데 이런 자리는 처음이네요.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윤미희
각자 문학이라는 꿈을 품고 한참 열심히 하던 시절, 생계유지 차원의 다른 일을 하다가 만난 사이잖아요. 등단하셨을 때 엄청 부러웠어요. 그 뒤로 활동도 많이 하시고! 종종 보여주시는 글이나 TV 나오는 거 보면서 정말 대단한 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허희
과찬이십니다. 작가님도 이렇게 연희문학창작촌에 입주해 계시잖아요.
윤미희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웃음)
문학평론가 허희
허희
이곳에서의 생활은 어떠신가요?
윤미희
창문을 열면 바로 눈앞에 나무가 보여요. 하루 종일 그 나무만 바라보고 있는 날도 있어요. 요즘 들어 희곡을 쓰는 일이 더 어렵게 느껴져요. 감히 가닿을 수도 없는 곳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예정된 공연이 없을 때는 더욱 그런 것 같아요. 초조하고 막막하고. 다행히 희곡 청탁을 받은 것이 있어서 열심히 쓰고 있어요.
허희
희곡 청탁이 많지 않은데, 잘됐네요.
윤미희
문예지는 많지만 희곡을 싣는 경우는 많이 없더라고요. 신춘문예를 제외하고는 등단의 창구도 많이 없고요.
허희
희곡 자체가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완결성을 갖고 있다는 인식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시나 소설은 그 자체로 완결성이 있지만 희곡은 공연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연극 쪽으로 더 분리하는 거죠. 시나리오가 아닌 영화를 비평의 대상으로 삼듯이 희곡만으로 그 작품성을 따지기보다는 연극에 대한 비평이 더 많이 이루어지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윤미희
희곡은 항상 문학과 연극 사이, 그 경계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문학도 좋고 연극도 너무 좋거든요. 처음 소극장에서 연극 봤을 때 무대 위에서 발현되는 그 에너지가 너무 좋아서 희곡을 쓰게 됐어요. 선생님은 문학이 왜 좋으셨어요? 그 시작이 궁금해요.
허희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요? 문학과 사랑에 빠졌다, 책이 좋았다, 결국 근원을 찾아 올라가 보면 거기엔 어떤 결핍이 있는 거겠죠. 세상과 마주하면서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 생각하면서 그 결핍에 대한 해답을 찾는 방식 중의 하나가 책이었던 것 같아요. 시도 그랬고, 소설도 그랬고, 영화도 그랬고, 만화도 그랬고.
윤미희
모든 ‘이야기’에 매료되었던 걸까요?
허희
현실과는 다른 층위의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지금 여기에 없는 걸 저 세계에서는 구현할 수 있는, 이런 결핍의 욕망을 실현하는 통로가 됐어요. 내가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잖아요.
윤미희
저는 쓰면서 좀 고민인 게 변화와 성장이 있고 어떤 판타지가 일어나는 이야기도 좋지만, 현실은 늘 시궁창인데 내가 작품 안에서 어떤 해결점을 보여주거나 좋은 모습을 만들어내면 그건 결국 마약을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허희
결국 작가가 쓰고 싶은 것과 독자가 욕망하는 것 사이에서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해요. 현실과 어떻게 타협하느냐, 어쨌든 독자나 관객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 충돌 사이에서 작품이 탄생하는 것 같아요.
윤미희
그럼 비평을 하실 때 작품을 보는 특별한 기준이 있을까요?
허희
교과서적인 이야기이긴 한데, 세 가지죠. 인식적 가치, 미학적 가치, 윤리적 가치. 인식적으로 얼마나 새로운 걸 알게 해줬느냐, 얼마나 미학적으로 나에게 새로운 충격을 안겨주었느냐, 또 얼마나 나에게 기존에 가졌던 도덕적 관념이라고 하는 것이 허위인지를 일깨웠느냐, 새로운 윤리관을 정립시켰느냐. 이 세 가지에 다 부합한다면 엄청나게 좋은 작품이죠. 그중에 하나만 해도 좋은 작품이고요.
극작가 윤미희
윤미희
정말 많이 읽고, 보고, 또 쓰는 것 같아요. 그러한 글들이 엮여 작년 말에 평론집으로 나왔잖아요. 글에서 단단함과 집요함이 느껴져서 좋았어요. 『시차의 영도』, 제목에 대한 설명 부탁드려요.
허희
먼저 ‘시차’는 시간의 차이, 시각(관점)의 차이 두 가지 뜻이에요. 시간이나 시각이나 우리가 어떤 것을 해석하는 데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잖아요. 작품을 볼 때 그 작품의 시간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거기에 나온 인물들의 관점에 따라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그것의 차이가 분석과 해석을 발생시켜요. ‘차이’라는 것은 우리 사이의 개별성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어떤 불화 같은 걸 조장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시차의 영도(0도)라고 하는 것은 시간과 시각의 차이가 근원적으로 무화되는 그 지점, 차이가 발생하기 이전의 가장 근원적인 지점을 말하는 거예요.
윤미희
해석의 기원 그 자체인 거네요.
허희
롤랑바르트가 『글쓰기의 영도』에서 글쓰기의 가장 밑바탕,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으로 돌아가는 질문을 했거든요. 저는 시간과 시각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한다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본 거예요. 영도라는 것이 무엇인가의 근원이 실제로 존재한다기보다는 그 근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도정 같은 거니까, 이 책이 그랬으면 좋겠다, 라는 거였죠.
윤미희
저도 최근에 ‘기원’을 찾아가 보는 이야기를 썼거든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내 고민과 불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나’의 시작점으로 가보고 싶다, 거기에 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는 건데, 뭔가 비슷한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문학’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요.
허희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건 어떤 역동적인 힘이 있는 거잖아요. 그 힘이 발생하는 지점까지 따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 책에 실린 많은 꼭지가 그러한 과정을 담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고요.
윤미희
다루고 있는 작품의 소재나 글의 주제가 제가 평소에 관심 갖고 있는 것과 되게 비슷하고 흡사해서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어요. 우리가 장르는 다르지만 동시대에 같이 쓰고 있구나, 하는 느낌?
허희
그럼요. 동시대를 같이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윤미희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당연히 희곡 평론이었어요. 몇 년 전에 이 글의 다른 버전을 보여주셨잖아요. 그걸 다시 찾아봤는데, 서두에 연극 <열하일기만보>에 대해 이러저러한 논의들이 있지만 난 배삼식 작가의 희곡 <열하일기만보>만 가지고 이야기하겠다, 이렇게 희곡을 바라봐주는 시각이 너무 좋았어요. 연극 평론이 아닌 희곡 평론인 거잖아요. 평론집 안에 있는 유일한 희곡 평론인데 처음에 어떻게 쓰시게 된 건가요?
허희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추천받아서 읽게 됐는데 희곡이 너무 좋은 거예요. 깊이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이것 역시 시간을 키워드로 작가의 쓰기 여정을 따라가 보자는 거였고 시간에 주목하고 싶었던 텍스트였어요.
윤미희
이 글을 읽고 희곡 <열하일기만보>를 다시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앞으로 희곡 평론 더 많이 써주세요. 시나 소설에 비해 희곡은 읽는 사람이 많이 없어요. 연극을 좋아하는 분들도 희곡을 따로 찾아보시지는 않더라고요. 저는 희곡 자체를 굉장히 좋아해서 다른 장르에 비해 희곡을 유독 많이 읽는 편이에요. 다른 분들도 희곡 읽기의 매력을 아셨으면 좋겠는데...
허희
희곡 작품 좋은 거 너무 많죠. 세계문학전집에도 많이 들어 있고요.
윤미희
요즘 나오는 희곡 중에도 좋은 작품이 많이 있거든요.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거나 화두를 던지는 희곡들이요. 고전에 비해 이런 작품들을 읽을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없는 것 같아요.
허희
시나 소설은 문예지라는 특수한 매체가 있어서 재생산의 구조라는 게 문단 내부에 확립되어 있어요. 등단과 등단한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있는 거예요. 문예지에서 작품들이 발표되고 그게 시집이나 소설집으로 묶여 나오게 되니까요. 문학상이나 그런 것도 마찬가지고요. 독자들과 만날 수 있는 지면이 상당히 넓게 열려 있어요. 물론 문예지를 구독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시스템 상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차이인 것 같아요.
윤미희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희곡의 특성상 그런 문학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고, 희곡이 많이 읽히기 위해서는 희곡만의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본 공연을 만들기 전에 낭독 공연을 많이 하는데, 그것이 본 공연으로 가기 위한 전 단계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희곡 읽기 방식이나 플랫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허희
요즘은 등단의 경계도 많이 흐려지고 있잖아요. 미디어를 통한 작품 발표 루트도 많이 생겼고요. 희곡만의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윤미희
맞아요. 요즘 희곡 작가들도 다양한 방법을 통해 희곡을 세상에 알리려고 하시더라고요. 아는 작가 중에 창작 희곡을 주로 싣는 웹진을 만들겠다고 준비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요. 영어, 일본어로 번역한 것도 같이 싣고요. 또 다른 작가는 오디오극 같은 걸 만들어 볼 계획을 갖고 있어요. 팟캐스트를 진행하신 지 꽤 오래되었는데, 희곡도 시나 소설처럼 그런 오디오 콘텐츠가 효과가 있을까요?
허희
워낙 스마트폰이 보급되어 있으니 이러한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건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오디오북도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으니 시각이 아닌 청각이라는 다른 감각에 호소한 거잖아요. 소리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일이나 새로운 감성을 열게 한다는 측면에서 희곡의 저변을 넓히기 위한 방식으로 오디오북을 제작해보는 것에는 의의가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좀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이미 검증된 작품이 오디오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의 확산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아요.
윤미희
결국 독자들의 폭넓은 지지가 필요한 지점이네요. 마지막으로 선생님 책에 전반적으로 깔린 어떤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사회 문제나 쟁점이 되는 사건들에 대해서 묵인하지 않고, 좌시하지 않고, 끝까지 논의를 이어나가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허희
오늘 여기에서 세세히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 때 충분히 논의되지 않고 일단락되는 것에 대해서는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논쟁이 벌어지더라도 문학에 대해서,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지속해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윤미희
저도 글을 쓸 때 끝까지 가봐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 집요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야 문학이든 연극이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이렇게 대화하면서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니 더욱 동시대를 살아가며 같은 고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희곡도 많이 읽고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우리 계속 같이 뭔가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허희
좋습니다. 또 불러주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글을 정리하며 희곡이 시나 소설처럼 많이 읽히는 세상, 연극 평론만큼이나 희곡 평론이 많아지는 세상을 상상해본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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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희X허희

윤미희X허희
윤미희_극작가
희곡 쓴다. 그동안 <상상해볼 뿐이지>, <투명한 집>, <나에게는 얼굴을 쓰다듬을 손이 없다>, <우리가 슬픈 건,>, <물고기 뱃속> 등을 썼다. ymhlife35@naver.com

허희_문학평론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2년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해 글 쓰고 이와 관련한 말을 하며 살고 있다. 2019년 비평집 『시차의 영도』를 냈다. https://blog.naver.com/samdoli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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