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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강말금X김신록

나만의 비밀, 나만의 꽃, 나만의 고유명사

김신록_배우

제185호

2020.08.20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 여러분, 앞에 놓인 사물들, 사람들을 바라보세요.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감각을 불러일으키나요. 그것과 내가, 어떻게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까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강말금 배우님을 만나 ‘나만의 비밀, 나만의 꽃, 나만의 고유명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강말금
‘연극in의 [대화] 코너는 연극을 한 편이라도 올리고 나서 하고 싶다’고 해서 오래 기다렸다. 얼마 전에 여신동 연출의 잘 봤다. 나도 참여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관객으로서 강말금 배우 편을 보면서 좋았다.
오랜만에 연극 하나 했다고 연극in 인터뷰를 떡 하니 하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지난 2년간, 영화도 하고 싶고, 병행하기엔 스케줄도 잘 안 맞고, 체력도 안 따라주고 해서 공연을 거의 못 했다. 공연하면 인터뷰하겠다고 약속해서 하게 됐지만, 어젯밤까지도 후회되더라. 그래도 지금은 좋은 마음이다. 앞으로 3년을 생각했을 때, 어디서 작은 공연이라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고, 마음이 편해졌다.
왜 3년인가?
3년이 어떤 단위인 것 같다. 공연을 해서 실망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도 3년이 지나면 거름이 되기도 하고, 씁쓸하게 헤어진 사람도 3년 후면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도 같고.
이번 공연도 그렇지만, 이전에 배우님이 출연한 다른 공연들을 보면서도 항상 무대 위 배우가 다루는 사물이나 말, 정서, 심지어는 어떤 관념이나 생각까지도, ‘손으로 만져지는 것처럼 실재하는 감각’이 발생한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흔히 ‘그 배우는 생활감이 있다’고 표현하는 것도 사실은 이런 느낌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힘이 뭘까 늘 궁금했다.
생활감이 좋다는 말이 뭘까... 좀 망가지는 게 생활감인가...?
뭔가 다뤄내는 거? 잘 다룬다.....? 예를 들면, 이번 공연에 반찬통에서 김하고 김치를 꺼내는 순간이 있지 않았나. 반찬통에서 김을 꺼낼 때, 그 김, 김치통에서 김치를 꺼낼 때, 그 김치, 이런 것들을 어떻게 다루면 저렇게 김과 김치가 생물처럼 생경하게 보일까 싶었다. 김을 다룬다는 ‘행위’가 두드러지거나 김을 다루는 ‘내면의 상태’가 두드러지면 ‘김 자체’가 살아나지는 않는데, 배우님이 다루면 이상하게 ‘김’이 보인다. 연출적이거나 구성적인 부분을 떠나서 그 사물을 다루는 배우의 방식에 어떤 비밀이 있다고 느꼈다.
연극을 시작하면서 인형극도 좀 해보고 마임도 배우고 해서 그런지, 몸 전체로 하는 건 잘 못 해도 ‘손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 때문일 수도 있겠고... 내가 실제로 김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하하. 김은 자고로 크게 4등분을 해서... 김의 향과 풍미에 늘 감탄해서 무대에까지 올리게 됐는데 막상 그 김은 맛없는 김이어서 아쉬웠다. 김치는 맛있는 김치였다. 나는 김치에 대해서 어떤 신비감을 갖고 있다. 배추의 맛과 소금 절임의 정도와 고춧가루의 맛과 젓갈... 또 시간이라는 변수. 그건 작년 김장김치였는데, 너무 맛있어서 냉동팩에 담아 고이, 부산에서 모셔왔다. ‘엄마가 더 이상 김치를 만들 수 없게 되면 이 기술은 어디로 가나’ 이런 생각도 하고. 김치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고유명사’, 엄마 김치에 담겨있는, 그런 거.
고유명사 이야기를 해 달라.
대본을 받으면 고유명사를 정리해 본다. 김신록, 엘가커피, 대학로예술극장처럼 나에게 당연한 고유명사가 있지 않나. 나와 비교해가며 인물의 고유명사를 끄적이면, 그 단어들에 상상이랄까 추억이랄까 그런 것이 생기고, 인물이 만나는 세계가 조금씩 생겨나는 것 같다.
그 명사와 나의 피드백을 생각한다는 건가. 그렇게 일반명사도 나만의 고유명사가 되는.
상상을 하면서 한 번 써보는 거다. 우리의 경우 ‘대학로예술극장 앞에서 봐’ 이야기하면 머릿속에 쫙 그려지지 않나. 몇 시까지 가야 화장실도 한 번 가고, 지하철 몇 시에 타서 혜화역에 내려서 몇 번 출구로 나가서... 내 경험과 비교해 가며 상상했을 때 그 단어는 까먹어지지 않는 거다. 연기가 너무 안 되고 답답해서 해 본 건데, 좋은 방법이었던 거 같다. <로풍찬 유랑극장> 공연 때는 엠티를 극의 배경이 되는 지역으로 갔는데, 직접 가보는 힘이 정말 컸다. <외로운 사람, 힘든 사람, 슬픈 사람> 때는 출판사 골목 앞에서 택시 잡으려고 서 있어 보기도 하고. 온갖 방법으로 세계를 구성해보려고 했지만... 마지막 공연 전날에서야 ‘이거였네!’ 알게 되기도 하고... 
근데 몇 년을 꽃밭에 씨앗을 심고 물을 줘보니까, 꽃밭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꽃이 만발했을 때가 아니라, 첫 번째 꽃이 피고 막 생장할 때, 덜 피었을 때 제일 예쁘더라. 그 과정 속의 기쁨, 관객들은 공연을 만나니까 모르는, 배우들만이 아는, 혼자서 대본을 보다가 순간 찌릿 하는, 그런 비밀스러운 기쁨이 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연습이 좋으면 공연이 좋을 거라고 착각했었다. 이제는 연습이 좋으면 그걸 새긴다. ‘오늘이 전 과정에서 가장 좋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만이 온전히 내 꺼다.’ 관객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주길 원하지만, 관객이 보는 것을 나는 알 수 없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개봉 과정을 거치면서 배운 것이다. 영화를 보며 컷컷의 아쉬움 같은 걸 생각하는 나는, 감독님이 컷들을 어떤 순서로 어떤 리듬으로 붙여, 그 결과 관객들이 어떤 타이밍에 어떤 느낌을 갖는지 알 수 없다. 연극은 더더욱 내가 모니터를 할 수 없으니 알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열심히 하는 거다. 관객이 무엇을 만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건 큰 수확이다.
집 뒤에 꽃밭이 있지 않나?
꽃밭이 있다. 지금은 장마에 다 졌지만. 내가 씨를 뿌렸고 처음 3년은 물만 주고 보다가, 옆집 할머니께서 토마토, 고추, 장미, 해바라기를 심으셨다. 동네 친구가 생겼다. 할머니랑 꽃밭. 한 송이, 한 송이 클 때 너무 예쁘다. 처음에는 씨를 뿌려놓고 맨날 노려본다. 밤 12시에도 물을 주고. 한 달도 넘게 가만히 있다가, 어느 순간 자기 온도가 되면, 자기 온도가 있는 것 같다, 새싹이 올라온다. 잡초도 올라오고 그리고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큰다.
일상이 ‘자기 감각’으로 피드백이 잘 되는 것 같다. 요새 연기적으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뭔가.
벽에 ‘배우는 몸과 말’ 이렇게 적어 놨다. 운동 너무 하기 싫을 때도 그거 보고 하고, 서울말 연습하기 싫을 때도 이거 보고 하고. 요즘은 운동선수와 비교를 많이 한다. 촬영 전에, 무대 오르기 전에, 운동선수의 경기 전 상태를 생각한다. ‘홈런 치려고 하지 말고 안타치고 오자’ 생각한다. 배우로서 릴랙스와 자연스러움을 오랫동안 갈망했지만, 현장에서 자연스러운 건 하나도 없다는 확신이 강해진다.
‘자연스러운 건 하나도 없다’는 말을 설명해 달라.
현실하고 섞으면 안 된다. 예전에는 ‘자연스러움’이라는 욕심이 커서 그러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특히 촬영 현장에서 카메라 밖 현실과 카메라 앞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카메라 앞에 있는 나는 어떤 경우에도 이 세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연도 마찬가지다. 라는 1인극을 3회 공연했을 때, 첫 공연은 첫 공연의 긴장감으로 했고, 두 번째 공연은 편한 마음으로 했다가 망쳤다. 세 번째 공연 때는 무장을 갖췄다. 나라는 배우가 겪는 현실을 지금까지 구축해 온 이야기나 세계와 함부로 섞어 버리면 안 되더라. 공과 사를 드디어 구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강말금 특유의 화술이나 화법이 있는 것 같은데 서울말은 왜 배우나.
내가 조곤조곤 말하는 걸 좋다고 말해주는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고집부릴 수 없는 때가 온 것 같다. 나는 지방 사람이고 연극을 약간 기죽어서 시작했기 때문에 서울말로 연기해야 할 기회가 왔을 때 말이 부자연스럽게 정착된 것 같다. 작년에 영상 연기를 하면서 문제가 크다는 걸 인식했다. 오디오의 세계는 내가 진실한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더라. 내가 표현의 세계를 모른다는 걸 알게 됐다. 말이 안 되니까 자꾸 내면을 더 채우려고 했다는 걸. 그런데 연습 방법을 찾았다. 언어학자 친구가 추천해준 방법인데, ‘서울 지역 사람 말을 열심히 따라 해라.’ 우리한테는 유튜브가 있지 않나. 다양하게, 무식하게, 매일 30분씩 따라 하는 거다. 설거지하면서.
하루 30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루 30분 꾸준하게 하는 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거 말고는 안 변하니까. ‘그래도 운동선수에 비하면!’ 이렇게 생각한다. 막상 연기를 업으로 삼으면 좋아했던 연기의 세계와는 전혀 별개로 비즈니스의 세계가 시작되지 않나. 소소한 인간적 문제들이나 ‘나는 언제쯤 돈 벌지’, ‘저 배우는 왜 저렇게 잘 살지’, 이런 온갖 잡스러운 생각 속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 같다. 운동과 이건 확실하다. 정직하다.
사실 진단이 안 내려질 때가 제일 답답한 것 같다. 작년에 언어학자 친구가 음성학자 한 분을 소개해줬다. 내 영상을 그분한테 보냈더니 ‘프랏’이라는 기계로 내가 음을 쓰는 패턴을 분석해서 보여주는데, 그게 서울 사람들하고 다르다고 했다. 말을 음절 단위로 한다고도 했다. 책 읽듯이 말한다는 거다. 그런데 이건 금방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지 않나. 작년에 석 달 정도 일이 없을 때, 그때부터 운동하고 유튜브로 서울말을 따라 했다. 배우가 쉴 때 할 게 없지 않나. 지금은 기계적으로 한다. 작년에 언어학자 친구가 그러더라. ‘요새는 연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냐. 연습은 운동선수처럼, 실전에서는 감정을 표현해라.’ 어쨌든 방법은 찾은 거다. 답답하고 괴로운 것은 진단이 없을 때고, 진단만 내려지면, 맞는 훈련을 찾으면 되지 않나.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불행하지 않다.
결국 자기 방법을 찾으면 되는 거다.
그런데 배우술이라고 하는 것, 말이 뭔지, 자연스러움이 뭔지, 이런 것들은 현장에서 드러나면 안 되는 것 같다. 배우 안에 숨어있어야 하는 거다. 배우술과 관련된 화두가 있다면 살면서 질문으로 품고 훈련 방법을 찾고 이렇게 해야 하는 거다. 나만의 비밀스러운 것이다.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 여러분, 오딘극단의 배우 로베르타 카레리는 ‘배우는 자기만의 비밀의 화원을 가꿔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꽃밭에는 어떤 씨앗이, 어떤 꽃봉오리가, 어떤 꽃이 자라고 있나요. 나만의 비밀, 나만의 꽃이 자기만의 온도를 만날 때까지 열심히 물을 주며 노려봅시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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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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