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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이종무X김신록

자기에 대한 성실한 발견으로

김신록_배우

187호

2020.09.24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 여러분, 공연이 취소되고 연기되고 영상으로 대체되는 이 시대에 대체 ‘공연이 뭘까, 연극이 뭘까’ 자문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저 역시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더해 ‘이 시대에 연기한다는 행위는, 배우라는 직업은, 연기라는 예술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이어야 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민을 더듬는 와중에, 흔들림 없이 행하고 배우고 가르치는 이종무 배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이종무, 김신록
이렇게 하수상한 시절에 어떻게 지치지 않고 연기를 배우고, 가르치고, 행하나. 오늘도 오자마자 플레이업 아카데미 수업을 듣고 싶다는 이야기, 알렉산더 테크닉을 훈련하고 있다는 이야기, 내년 초에 해롤드 핀터의 <덤 웨이터>라는 작품에 출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나. 나는 요새 부쩍 ‘연극이 뭘까, 이 시대에 연기한다는 의미는 뭘까’ 고민이 된다. 요새 연기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
종무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도 늘 같은 고민을 했고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연기도 못하고,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자존감이 낮은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연기를 하면 할수록 ‘내가 그래도 매력이 있구나, 나에게도 어떤 가치가 있구나’ 발견하게 됐다. 지금도 연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새롭게 훈련하고 배우면서 나의 또 다른 가능성과 개성을 발견하고 ‘나’의 의미를 긍정하게 되는 게 즐겁다. ‘이 시대에 연기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문이 들 때, 많은 배우들이 이런 긍정적인 자기 발견의 과정을 겪으며 인물을 만나가면 좋겠다. 나이가 들면서 잠깐 방심하면 금세 게을러지고 금세 익숙해지는데, 그러면 뭐든 포기하기 쉬워지는 것 같다. 나이를 먹어가도 계속 발견해 나가고 싶다. 요즘 시대에 나도 무기력함이나 무력감을 느끼는 건 마찬가진데 이런 생각을 붙잡고 있다.
본인은 어떤 훈련 과정을 거쳐 자신을 발견하고 배우로서 확장됐던 것 같나.
종무
UC 얼바인(Irvine)의 일라이 사이먼(Eli Simon) 교수님과 함께했던 크라우닝 워크숍(clowning 빨간코 광대 워크숍)이 시작이었다. 대학원 3년에 걸쳐 방학 때마다 훈련하고 마지막에는 공연을 했다. 내가 숫기도 없고 내성적인데, 교수님과 함께 온 말도 안 통하는 미국인 대학원생과 손발로 소통하며 뭔가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줬을 때 다들 너무 웃고 좋아해 주는 거다. 그러면 괜히 자신감이 생기지 않나. ‘마스크를 쓴다, 그 안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마스크의 첫 번째 기능을 너무 잘 경험한 거다. 그때가 나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였고, 자신감을 얻었던 첫 번째 경험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막 뒤에서 빨간코를 쓴 자신의 모습을 아주 잠깐 바라보고 무대로 나오는 것인데, 여기서 ‘아주 잠깐 바라본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잠깐의, 순간 스쳐 지나가는 빨간코 쓴 내 모습을 통해 내 몸과 마음이 전혀 다른 존재로 전이되는 듯한 경험을 한 것이다. 그때 느낀 건, 만약 거울 속 내 모습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면 어떤 판단이 개입되고 의도를 갖게 되면서 흥미로운 순간을 만나지 못했을 것 같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즉흥의 순간에 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종무
이종무
두 번째는 액션 시어터(Action Theater) 워크숍이었다. 대학원 동기들 여럿이 모여서 『Action Theater』(루스 자포라, 현대미학사) 책을 들고 워크숍을 한 게 배우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불같은 에너지와 다른 존재로 전이되는 경험을 하고 나서, ‘이게 뭐야? 내가 이런 경험을! 나한테 이런 가능성이?!’ 하는 발견을 하게 됐다. 이후 ‘뭐지, 나를 변화시킨 이건 뭐지?’ 하면서 빠져들었다. 이 경험을 정리하고 싶어서, ‘액션 시어터’로 논문을 썼다. 주위에서 다 논문이 안 된다, 뭔지 모르겠다고 했고, 심지어 나도 뭔지 모르겠지만, ‘나를 변화시킨 뭔지 모르는 그것’을 논문으로 쓰고 싶었다. 사실 논문이 안 된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액션 시어터의 창시자인 루스 자포라를 직접 만나지도 않았고, 루스 자포라의 제자에게 배우지도 않았는데, ‘너의 주장의 근거는 뭐니?’라는 것이었다. 나의 가장 큰 근거는 ‘나의 변화’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즉흥의 순간’에 경험하게 되는 일치감 - 나의 충동과 호흡, 나의 생각과 말과 움직임이 완벽하게 일치되는 그 순간의 경험이 너무 강렬했다. ‘현존’이란 말을 책에서만 보다가 처음으로 몸으로 경험했다고 해야 할까... 액션씨어터에 ‘즉흥은 뒤로 걷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내가 어디서 어떻게 걸어왔는지는 확인할 수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없는 순간이라는 의미 같은데, 그 순간에 두려워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 경험하게 되는 나의 본성, 나의 잠재된 세계에 대한 믿음이 내가 계속 배우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결국 논문을 썼고, 그 뒤로 의도치 않게 대학 강의나 극단 워크숍을 통해 액션 시어터 수업을 정말 많이 하게 됐다. 반 정도 알고 반 정도 모르는 걸 가르치면서, 오히려 학생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워 나갔다. 그것을 혼자 정리하는 경험을 하게 됐다는 점이 감사하다.
연기 연구의 역사는 결국 내가 경험한 ‘뭔지 모르는 그것’을 어떻게든 소통 가능한 방식으로 인식해내고 공유하려는 노력의 소산인 것 같다. ‘살아있는 경험에서 출발한 연구자는 어떤 가치에 도달하려고 하고, 그것이 곧 자유다’라고 한 빌렘 플루서의 말이 생각난다.
종무
그런 면에서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밝넝쿨(안무가) 선생님과의 워크숍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움직임에 관한 즉흥 훈련들 - 손과 발의 움직임을 일깨워 연결하면서 궁극적으로 Whole Body를 인식하고 운용하기 위한 훈련들이었는데 이후로 항상 공연 전 웜-업을 이때 배운 것들로 한다. 정말 좋다.
다음으로는 수많은 연기 서적들. 연기 서적 읽는 걸 좋아한다. 한동안 가르치면서 무대에 서니까 자괴감이 들 때가 있더라.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내가 하는 연기 코멘트를 내가 연습실에서 연출에게서 똑같이 들을 때, ‘가르치거나 연기하거나 둘 중 하나는 그만둬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이 과정을 지나면서 하나의 철칙을 세웠다.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대로 나에게 말했을 때 나도 바뀌어야 한다.’ 일종의 언행일치랄까, 일치감이랄까. 연기 서적을 볼 때도, 책 내용이 ‘가르치는 현장에서도 유용하고 연기하는 현장에서도 유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지금 떠오르는 건 『액팅 원』(로버트 코헨 지음), 박상하 교수님이 번역한 『스타니슬랍스키 배우교육』 (G.크리스티 지음), 『배우와 목표점』(데클란 도넬란 지음), 크리스틴 링클레이터의 『자유로운 음성을 위하여』 등의 책이 좋았다.

이종무, 김신록
지난 학기에 호흡과 발성 1학년 수업을 맡아서, 다시 처음부터 링클레이터 책들을 정리하면서 매일 30분 정도 시간을 내서 훈련을 좀 했다. 알렉산더 테크닉도 더해서. 특히 알렉산더 테크닉 중에 정말 단순한 과제인 세미 수파인 자세를 일주일 정도 매일 해봤는데 너무 좋은 몸 상태가 되더라. ‘스스로에게 지시하고, 지시만으로도 몸이 바뀐다’는 명제가 경험됐다. 세미 수파인 자세를 하고 나서 공간을 걸을 때의 몸 상태가, 액션 시어터 훈련을 하고 나서 공간을 걸을 때처럼, 중립, 전표현 상태가 되는 경험을 했다. 수리야 나마스카라(요가의 ‘태양을 향한 경배’ 동작)를 하고 무대에 서서 걸어갈 때, 액션 시어터 훈련 후에 내 생각과 호흡과 충동이 하나로 탁 만나지는 순간이, 나한테는 다 같은 상태로 느껴진다. ‘아, 새로운 메소드가 필요한 게 아니고, 추세에 따라 다른 게 필요한 게 아니고, 있는 걸 자기 필요에 따라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구나’라고 느꼈다.

요새 이런 주제로 논문을 준비 중이다. 제목은 정하는 중인데 「반응하는 몸을 위한 호흡 훈련의 중요성에 대해서-알렉산더 테크닉과 링클레이터 훈련법을 중심으로」 아니면 「링클레이터 훈련법에 있어서 반응성과 수동성에 대하여」 정도를 생각 중이다. 링클레이터를 다시 공부하고 훈련해 보니까, 연구개1) 훈련이든 부비강2) 훈련이든, 근육을 의지로 움직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근육이 그렇게 반응하도록 ‘허용한다’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이번에 새롭게 훈련하면서 크게 다가온 ‘지시받는 것의 자유로움’에 대한 감각을 ‘수동성’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정확한 워딩은 ‘반응하도록 허용한다’이다. 말이 되는 것 같나?
(끄덕끄덕)
종무
액션 시어터에서도 ‘마치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시를 받듯이’란 주문을 많이 한다. 알렉산더 테크닉에서도 ‘스스로에게 디렉션 한다’는 표현이 있다. 링클레이터에서도 리액션한다가 아니라 ‘근육을 리액션하게 만든다’가 중요하다. 흔히 능동적인 것은 긍정적, 수동적인 것은 부정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받아들인다’는 의미의 수동성을 ‘지시받을 수 있는 몸의 상태’, 의지가 들어가지 않은 ‘지시받는 것의 자유로움’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

연기는 자발성과 주체성이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만, 자존감이 있으면 수동성이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자존감이 낮을 때 수동성은 이끌려가고 부정적인데, 자존감이 있을 때의 수동성은 나에게든 남에게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정말로 다 받아줄게, 뭐든지 해봐’ 혹은 ‘무대에 나가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너 마음껏 해봐. 내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게.’ 이런 마음? 물론 텍스트에 맞춰 플랜을 짜지만 무대에 나갈 때는 항상 ‘어떻게 될지 몰라, 다 받아들이자’ 이런 의미의 수동성을 가지려고 한다. 뭔가 해야 한다는 의지 없이 내 몸이 수동적으로 반응하도록 허용한다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서론도 시작 못 했다. 옛날에는 이런 생각이 들면 막 누구한테 물어보고 했는데, 지금은 물을 사람이 없어져서... 누가 이야기 좀 나눠주면 좋을 텐데....

이종무, 김신록
연기에 대해 대화하는 문화가 없어져서 아쉽다. 배우들끼리도 연기는 각자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연출들도 연기는 배우의 몫이니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다들 조심하느라고 그러는 것 같다.
종무
코로나 때문에 만나는 사람이 제한적이 된 것도 영향이 있고... 솔직히 나는 이런 대화 나누는 게 재밌다. 그런데 ‘배우가 몸으로 보여줘 봐, 너는 왜 말만’, ‘그건 학교에서나 하는 이야기지 왜 현장에 와서, 선생 같아’, ‘머리로... 그건 이론이잖아’, ‘어디 한 번 해봐’, 이렇게 말하면.... 하하하. 그래서 조심하게 된다. 그렇게 비춰질까봐. ‘잘난 척하니?’ 이럴까 봐. 내가 막 연기를 섬세하게 잘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이런 거 떠들고 다니는 게 나한테는 또 ‘언행불일치야’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말하기보다는 주로 듣고 그랬는데... 그래도 더 많이 대화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는 발전할 수 있으니까. 대화하는 문화가 없는 게 편하지는 않다.

이런 시절에 오히려 본질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요새 대학원 때 읽었던 『배우훈련』(엘리슨 호지, 동인)을 다시 보고 있는데, 반세기 전의 이야기인데도 그 본질은 여전히 의미가 있고 크게 다가오더라. 연극이 뭘까 고민할 때, ‘고민하지 말고 대면하자.’ 안전이 무엇보다 제일 중요하지만, 온라인 스트리밍이나 무관중은 오히려 본질을 피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상 스트리밍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새로운 분야로서 필요하다고도 생각하지만 그것이 극장에서의 공연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추진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감각하는 연극과는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실제 공연을 올리자, 그렇게라도 마음을 먹자’ 이런 생각을 했다. 연극을 오래 계속해 온 사람으로서 연극의 본질을 어떻게 지킬까 고민이 되고 마땅한 대책은 잘 모르겠어서 무기력해지기도 하는데, 어쨌든 지키고 싶다, 더 ‘연극연극’ 하고 싶다.
이종무, 김신록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 여러분, 우리에게 처음 닥친 팬데믹 시대의 무기력과 무력함의 고개를, 자기에 대한 성실한 발견으로,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고 반응하겠다는 긍정적인 수동성으로, 나에게 필요한 것을 꾸준히 해나가는 묵묵함으로 걸어 넘어갈 수 있을까요? 당신은 이 시대 연극에 대해, 연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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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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