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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이형훈 X 김신록

배우라는 이름의 네비게이터, 정확하게 그러나 살아있게

김신록_배우

192호

2020.12.03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 여러분, 직업인으로서, 취업 준비생으로서, 학생으로서, 아르바이트생으로서, 혹은 무엇이 되었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오늘 어떤 경험과 도전과 탐색을 하셨나요? 배우라는 직업인으로서 항상 새로운 환경과 장르에 자신을 위치시키고자 노력하는 이형훈 배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았습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죽음의 집>, <오만과 편견>으로 이어지는 이력을 보면 소위 말하는 국공립 제작 단체의 공연, 민간 극단이나 개인 예술가들의 공연, 상업극에 두루 출연하고 있다.
형훈
사실 난 다 상업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관객의 돈을 받아서 다음 공연을 위한 종잣돈을 마련하는 거 아닌가. 창작의 시발점이 민간이냐 국공립이냐의 차이만 있는 것 같다. 다만 국가지원금을 받은 작업들의 경우는 관객 수익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으니 다양한 시도를 해 볼 수 있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모든 공연이 어떤 방식으로든, 관객이 보기에 흥미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지속될 수 있다.
연극계는 워낙 소자본이 움직이는 시장이라 상업이라는 말로 업계를 분류하고 분리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다. ‘상업극’이라는 말 대신 ‘컴퍼니 연극’이라고 부르기도 하더라. 다양한 환경의 프로덕션에서 두루 작업하는 건,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건가, 아니면 의도적인 면이 있나.
형훈
2013년도에 <레슬링 시즌>과 <반신>에 연이어 캐스팅되면서 국립극단과 처음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히스토리보이즈>라는 컴퍼니 연극과 연이 닿았다. 어떤 프로덕션에서 공연하느냐에 따라 관객층이 완전히 다르더라. 국공립 같은 경우는 배우 지망생들, 연극 관계자들, 여러 단체, 국공립 공연을 특히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이 온다. 반면 컴퍼니 연극은 또 다른 마니아층이 있더라. 나는 컴퍼니 공연에서 만난 관객들이 ‘나’라는 배우를 통해 국공립 공연도 봤으면 좋겠다. 반대로 국공립에서 나를 본 관객들이 컴퍼니 연극을 보러 대학로에 오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야 관객들이 더 섞이고 통합되고 더 다양성이 생기지 않을까. 지금도 목표는 이거다.
이형훈
이형훈
국공립뿐만 아니라 통칭해서 ‘대학로’라고 부르는 곳도, 민간 극단 연극과 컴퍼니 연극이 제작진들부터 관객층까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 같다. 지리적으로도 여러 신생 극장들이 모여 있는 혜화역 2번 출구 쪽과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연우무대 소극장, 선돌극장 등이 있는 1번 출구 쪽의 연극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형국이다. 올해 <마우스피스>라는 컴퍼니 연극에 참여하면서 우스갯소리로 ‘2번 출구 연극에 처음 출연한다’고 했었다. 어떤 배우는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세월호 페스티벌 공연을 본 관객들이 연우무대에서 하는 권리장전 공연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걸 보면서 2번 출구 쪽 인기 배우가 캐스팅됐다면 그 배우를 따라 새로운 관객들이 유입될 텐데 아쉽다고 하더라. 실제로 형훈 배우를 따라 관객이 섞이고 있나.
형훈
미약하나마 그런 분들이 있다. <죽음의 집>의 경우 소극장이고 객석 간 거리두기를 해서 객석도 많이 안 나왔다. 컴퍼니 연극은 손익분기점이 있기 때문에 이런 작고 좁고 친밀한 환경을 조성할 수가 없다. 관객과 밀착된 소규모의 공연, 이걸 본 관객들이 ‘삶의 한 부분을 본 것 같다’, ‘생활연기’, ‘서사를 따라가는 게 재밌다’는 등의 표현을 하시더라. 민간 극단의 작업은, 어떻게 보면 더 본질적이고 더 동시대 한국에 밀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 같다. 공연도 더 다양해지고 사람들의 입맛도 더 다양해지면 좋겠다. 하나만 먹는 건 재미가 없지 않나. 한식, 중식, 일식도 먹고 싶고, 세상에 얼마나 재밌는 맛이 많나. 이런 맛들을, 이런 세상들을, 소개해주고 싶다. 배우라는 직업을 통해서.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세자전> 등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연극뿐만 아니라 뮤지컬과 음악극 등 출연하는 장르도 다양하다.
형훈
배우 입장에서는 다양한 프로덕션 환경이나 시스템에도 적응해야 하지만 그 아래 또 세부 장르라는 게 있다. 연극, 이머시브 씨어터, 뮤지컬, 요새는 음악극이라는 장르도 생겼다. 각각의 환경과 장르에 따라 어떤 연기술을 가지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항상 고민이고 어렵다. 요새는 영상매체에서 연기할 일도 종종 있지 않나. 영상도 드라마와 영화가 다르고, 드라마도 1일 드라마와 단막극과 시트콤이 다르고, 영화도 멜론지 액션인지에 따라 다 다를 것 아닌가. 이 모든 변화하는 환경과 장르에 적응해야 하는 게 배우의 숙제다. 왜냐하면 배우는 직업이고 그러므로 지속성이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일부러라도 환경과 장르를 다양하게 만나려고 한다. 이번에 1인 다역을 했으면 다음엔 인물의 서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 내는 걸 해보려고 한다. <누군가 올 거야>, <죽음의 집> 등에 참여한 것도 이런 이유다. 그래야 배우로서 함정에 빠지거나 함몰되지 않고, 새로운 작업을 위한 상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일단 같은 곳에서 같은 것만 계속하면 재미가 없지 않나.
다른 환경과 매체와 장르에 따라 다른 연기술이나 다른 존재 방식이 필요하다는 데 동감한다. <마우스피스>에서 더블 캐스팅을 경험한 것이 나한테는 큰 도전이면서도 연기적으로 배우고 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관객들 입장에서는 여러 배우의 조합으로 같은 공연을 보는 게 정말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형훈
컴퍼니 연극에서 더블 트리플 캐스팅은 거의 필수인데 요새는 네 명, 다섯 명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젠더 프리까지 더해지면 상대해야 할 배우의 조합이 더 복잡해진다. 이렇게 캐스팅 조합이 계속 돌아가다 보면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연습해서 공연을 올리면 끝이 아니라 매 공연마다 배우 스스로 준비하는 시간과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내가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스코어를 가지고 있어도 상대에 따라 스코어를 다시 짜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길이 외길이 아니라는 열린 마음이 중요하다.
다만 어떤 공연이든 시작점은 대본 아닌가. 그리고 연출 및 스탭들은 원 캐스팅이다. 모두가 텍스트 하나를 놓고 목표지점을 향해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가는 건 똑같다. 이걸 해치지 않고 얼마만큼 자신의 색깔을 낼 수 있는지, 이것이 컴퍼니 연극에서 배우가 가져야 할 제일 큰 숙제 아닐까. 사실 더블, 트리플이 나는 재미있다. 더블 배우가 나와 같은 역을 하는 것을 밖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배우로서 경험하기 힘든 기회 아닌가. 초(超)목표나 비트(텍스트를 쪼개는 단위)는 같아도 장면을 해결하기 위한 작은 전략들은 다를 수 있고 거기서 다양성이 나오는 것 같다. 배우에게도 관객에게도 재밌는 기회다. 다만 전제가 되는 것은 작품이 가려고 하는 방향에 대한 합의가 잘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난 공연이라면 사회에 던지고자 하는 화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중요한 것 같다. 이 방향성이 정해지면 그걸 파고드는 것은 배우와 연출부의 몫이다. 내가 이 연기 잘하니까, 왼쪽 얼굴이 예쁘니까 이렇게 해야지가 아니라, 작품이 지향점으로 가기 위해 내 인물을 어디에 어떻게 위치시켜야 할지가 중요하다. 장르나 환경을 떠나 배우의 공통된 숙제다.
장르나 매체를 막론하고 연기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있나?
형훈
언제나 시도하고 있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기’다.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할 것이냐. 의도와 서브와 의지를 모두 포함한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말하기라는 건 어려운 일이다. 장르별로 자연스러운 건 다르니까. 형식적으로 말하는 게 자연스러운 작품도 있고, 몸이나 뉘앙스로도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포괄한 말하기가 작품 전체가 가고자 하는 바에 기여할 수 있도록, 나의 말하기가 정확한 방향으로 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항상 신경 쓰는 부분이다.
하지만 동시에 살아있어야 한다. 살아있게 말하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배역이 아닌 ‘배우가 어떤 상태인가’이다. 왜냐하면 상황이나 현장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배역이 아니라 배우니까. 가끔 무대에서 발견하는 순간들이 있다. 이 발견의 순간을 반영할 수 있는 것은 그 순간의 살아있는 말하기다. 정확하게 말하기는 해석이 다 되어 있고 어떤 길을 거쳐 종착지로 갈지가 네비게이팅 되어있는 상태라면, 살아있는 말하기는 막히는 곳에서 어떤 샛길을 찾아갈 것인가에 해당된다. 이 두 가지는 늘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새는 연기적으로 어떤 것을 탐색하고 있나.
형훈
무대에서 마이크를 쓰는 게 아직 어색하다. 극장에서 마이크를 쓰는 건 카메라 연기에서 마이크를 쓰는 것과 또 다르더라. 연극은 극장이나 무대 사이즈에 따라 호흡과 발성과 말하는 방식이 다 달랐는데, 마이크를 쓰는 공연은 극장의 공간성을 무시하고 오히려 똑같이 말해야 한다. 그런데 몸은 여전히 공간성과 현장성을 가져가야 한다. 마이크가 요구하는 몸과 말의 격차를 해결하는 게 도전이고 숙제다. 계속해보는 수밖에 없다. 하면서 찾는 거다.
이번에 주연으로 단편 영화를 처음 찍어봤다. <칠흑>이라는 작품인데, 이 작품을 찍으면서 좋았던 게 긴 호흡으로 작품 전체에 걸쳐 나오니까, 스코어를 짜면서 연출과 조율이 가능하더라. 감독이 ‘다음 장면이 이렇게 붙으니까 이 장면에서는 화를 덜 내셔도 될 것 같아요’하는 말을 듣고 ‘아, 연극하고 완전히 다르구나. 단역과 조단역일 때와 주연일 때와는 또 완전히 다르구나’ 생각했다. 공연도 연극, 뮤지컬, 음악극 등 표현 방식이 다르듯이, 영상은 컷, 디졸브 등 그들의 언어가 있다. 이 언어를 이해하고 적응하려면 결국 해보는 수밖에 없다.
연기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나.
형훈
“배우는 기능만 수행할 수도 있다.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 기능적으로만 쓰면 문제지만, 배우를 하다 보면 기능적인 것을 요구받을 때도 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1막에서 말로 출연했다. 아무도 그 말이 나인지 모른다. 그 장면에 말이 필요하고, 나밖에 할 사람이 없으면 하는 거다. 이 프로덕션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그게 필요하다면 하는 거다.
위치, 방향, 지향점, 전체, 기능, 역할... 큰 그림 안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2020년이 연극사(史)뿐만 아니라 연기사적으로 중대한 전환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형훈
연극사는 항상 시대를 대변하면서 바뀌어왔지 않나. 언텍트라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거다. 그런데 우리는 대면해야 하는 예술가 아닌가. 콘서트나 공연이 영상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대면하는 공연도 제4의 벽, 마스크라는 벽, 거리두기라는 벽까지 겹겹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문진표 작성, 열 체크, 거리두기 등등으로 관객들 사이의 예민함도 높아졌다. 코로나 이후에 공연은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지속되어야 하는가. 그렇다고 NT라이브처럼 한 번 찍어 틀어주는 것을 위해서 한 달, 두 달 연습할 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해봐야 한다.
2020년 이후에 연기는 무엇이 되어야 하고, 연기 훈련은 어떻게 되어야 하나 고민이 깊다. 만약 이런 판데믹이 정말 반복되고 지속된다면 연습복 입고 한 공간에서 땀 흘리며 뛰고 구르고 이러는 게 가능한가, 혹은 이러는 게 맞나 싶기도 하다.
형훈
요새는 콘텐츠가 많아지지 않았나. 넷플릭스, 웨이브, 왓챠, 각종 숏 폼까지. 직업인으로서 배우는 이 모든 변화를 기민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배우 스스로가 자신의 몸에 대한 인식을 키우고 연기술을 익히는 건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로서 자기 말을 하는 것도 여전히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 배우 훈련은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다만 지향점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배우는 자기 몸을 잘 알아야 한다’는 그 씨앗 같은 한 마디에 매달려 이제까지 배우들이 그렇게 훈련을 해왔던 거 아니가. 우리가 선지자들의 말을 따라 어떤 배우가 되어 있다면, 이제는 우리들이, 이 언텍트 시대를 개척해 내야 하는 것 같다.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 여러분, 잠시 주변을 둘러보세요.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서 계신가요? 어디로 향하고 계신가요? 정확하게 그러나 살아있게, 계획한 길과 샛길을 두루 살피며, 순간순간 발견되는 것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한 걸음씩 목표한 곳으로 가볼까요.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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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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