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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강보람X김신록

“내가 한다, 내 마음대로 움직인다.”

김신록_배우

195호

2021.02.18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 여러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내가 느끼는 감각에 확신이 있으신가요? 늘 더 좋은 취향이나 더 나은 선택이 있을 거라는 불안과 의심이 있지는 않으신가요? 극단 애인의 강보람 배우를 만나 ‘내가 보는 대로, 내 몸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살아간다’는, 자기만의 확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지난 연말 영상으로 송출된 극단 애인의 <1인 무대>에서 <놓다>라는 제목의 공연을 봤다. 발의 여러 부위가 지면에 닿는 감각에 몸을 온전히 맡기며 움직일 때 “발을 보고 웃는다. 불균형을 즐긴다.”라는 음성해설이 나왔다. 어쩌면 이 문장이 이 공연의, 혹은 이 공연을 만들고 실연한 배우가 깨달은 핵심이 아닐까 생각했다.
보람
2018년에 0set 프로젝트의 <나는 인간>이라는 작품에 참여하면서 나를 쳤던 질문이, “왜 나는 똑바로 걸으려 했을까?”였다. 똑바로 걷는다는 게 뭘까? 사람들은 왜 내게 ‘허리 펴고, 엉덩이 넣고’ 이렇게 말했을까? <놓다>는 이 질문을 이어 온 결과물이다. ‘똑바로 걷는다는 게 뭐지? 사람이 넘어질 수도 있는 건데, 넘어지면 왜 아픈 것보다 창피해야 하지?’ 이런 식의, 생각을 뒤집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 웃는 것은 그냥 그 상태를 즐기는 것이 컸다. 넘어졌는데 창피해하기 보다는 웃고, 넘어질까 봐 조심하기보다는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그러면서 ‘넘어진다는 건 뭘까?’ 질문도 생기고, ‘넘어질 수도 있지. 넘어지면서 사는 거 아니야?’ 이런 마음도 들고... ‘넘어진다, 위험하다, 힘들어 보인다’ 같은 말들도 다 엎어버리고 싶었다. 프레임을 엎어버리고 싶었다.
장애가 있는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불균형 자체를 받아들이면,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는데... 나는 왜 스스로를 가두고 살았을까? 맨날 ‘위험하다 하지 마라’ 들으면서 살다가, 내 몸을 주체적으로 움직여보니까 재미가 붙었다. 해방감이 느껴졌다. 감정이나 신체에 대해 스스로 억눌렀던 것들을 놓아버릴 때의 해방감이랄까? 사실 ‘놓다’ 보다는 과감하게 ‘놓아버린다’는 의미가 더 맞는 것 같다. 그 해방감을 계속 느끼고 싶고 관객들과 나누고 싶었다.
강보람
강보람
‘놓아버린다’, ‘불균형 자체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큰 이야기인 것 같다. 예전에 휄든크라이스 수업을 들을 때, 교과서적인 바른 몸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의 몸은 나의 타고남과 자람의 역사와 굴곡을 그대로 반영하므로 ‘일방적인 바른 몸’이라는 것은 없다는 취지였다. 그러면서 김연아 선수는 평생 한쪽으로 빙판을 계속 돌아왔기 때문에 장기가 한쪽으로 다 쏠려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런데도 상하좌우의 대칭과 균형, 정위치, 효율과 기능의 강박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엎어버린다’라는 말이 시원하다.
보람
<놓다>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시선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선을 던진다. 처음에는 시선이 내 안에 있었다면 그 시선이 조금 더 열려 내 몸을 보게 되고 결국 공간, 세상으로 내던져지면서 확장된다. 남들이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남을, 공간을, 세상을 본다. 내가 주체가 된 것이다. 그 순간의 발견이 좋았다. 내가 보는 대로, 내 몸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외부 시선의 대상이 아니라 시선을 가진 주체로서 자신을 자각한 순간인 것 같다.
보람
이번 작업에서 스스로 몸을 움직이면서 가장 크게 온 메시지는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었다. 내가 움직임을 하고 있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확신, 내가 의도한 시선이나 내 몸이 빚어내는 움직임 하나하나에 대한 확신. ‘내가 한다, 내 마음대로 움직인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오늘의 나를 생각할 수 없었다. 내성적이고 눈도 못 마주치고 말도 못 붙이고 발표도 잘 못 했다. 내가 내 몸과 말투를 받아들이질 못한 거다. ‘난 느리니까 말 못 하니까’ 하면서 자존감이 굉장히 낮았다. 터닝 포인트가 두 번 있었다. 대학과 극단 애인을 만난 것이다. 대학 때 문예창작을 전공했는데, 내가 쓴 수필을 소리 내서 읽지 못하고 떨며 서 있으니까 교수님께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보람이를 기다려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니까 천천히 편하게 읽으면 된다.”고 하셨다. 그때 그 한 마디에 힘을 받았고 성격이 바뀌기 시작해 3학년 때는 과 임원을 할 정도가 됐다. 교수님과는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극단 애인을 만나면서부터 타인의 시선을 먼저 생각하고 타인의 말에 의해 수동적으로 살다가 점차 주체적인 사람으로 조금씩 변해 가는 것 같다. 나는 연기도 움직임도 깊게 공부해 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늘 ‘이게 맞나?’ 자신 없어 하고 ‘어떻게 보일까’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이제는 남이 봐주기 전에 스스로 내 작업을 바라보면서 ‘이건 좋았고 이건 아쉬웠다’를 구분할 수 있는 정도의 힘이 생긴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이소영 안무가에게 큰 도움과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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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작업에 대해 ‘이건 좋고 이건 아쉽다’ 확신한다는 건 쉽지 않은 것 같다. 늘 더 좋은 취향이나 선택이 있을 거라는 불안과 의심이 든다. 안무가와는 어떤 방식으로 작업했나.
보람
장애의 몸을 잘 알고 지도해 줄 분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교과서적으로 장애의 몸을 대하는 분을 만나면 더 어려울 것 같았다. 사실 <놓다>는 2년에 걸친 작업이었는데 2019년 <모래 위에 서다>라는 제목의 첫 쇼케이스를 마치고는 회의가 들었다. 첫 해 작업은 내가 대본을 쓰고 그 대본 내용을 움직임으로 표현하려고 동작을 하나하나 만들어서 그걸 구현하려고 했는데 어렵고 잘 안 되고 재미도 없었다. 그래서 두 번째 해에는 직접 여러 움직임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불균형’과 ‘해방감’이라는 키워드만 놓고 나머지는 열어두는 시간을 가졌다. 코로나로 서울 지역 수업들이 문을 닫기 시작할 때는 제주도까지 가서 5명의 움직임 선생님들이 마련한 ‘내 안의 춤으로부터’라는 워크숍도 들었다. 거기서 이소영 안무가를 처음 만났고 첫 수업을 듣고, 정말이지 ‘몸이 열리는’ 경험을 했다.
이 만남을 인연으로 이소영 안무가와 <놓다>를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40여 일 동안, 주로 몸으로 먼저 만나고 나눈 후에 말로 나누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동작을 만들고 배우는 게 아니고, 내가 내 몸을 잘 들여다볼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고 바라봐 주셨다. 한번은 안무가가 인상적인 미션을 주셨는데, 런쓰루를 돌고 난 후에 스스로에게 피드백을 남기라는 것이었다.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을 구분해 적어보되, 아쉬운 점은 종이에 적으면서 종이에 버린다고 생각을 하고 좋았던 점은 기억하고 발전시키라고 하셨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내 움직임에 대한 확신이 더 강해지는 걸 실감했다.
‘몸이 열린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감각이었나.
보람
하루는 바닥에 누워 호흡을 온전히 바라보면서 안무가가 터치해 주시는 몸의 부위로 호흡을 내 쉬는데 몸 안의 울림이 느껴졌다. 터치가 발끝부터 머리칼까지 진행되었는데 터치가 멈춘 후에도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로 인해 계속 움직이게 됐고, 움직임이 점차 확장되어 몸을 일으키게 되고 서게 되고 자연스럽게 즉흥 춤을 추게 되었다. 그날의 감정과 감각이 아직도 몸 안에 살아있다. ‘어떻게 움직여야지’가 아니라 ‘몸이 먼저 간다’고 해야 할까?
이 날 연습이 끝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고 혼자 햄버거 가게에 갔는데 내가 떨림이 하나도 없이 햄버거를 먹고 있는 거다. 너무 신기했다. 경직이 이완되었다! ‘장애가 있는 몸도 이완이 되는구나’ 깨달으면서 새삼 내 몸에 놀라게 되고 내 몸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같은 장애라도 사람마다 다 다른데 막연하게 ‘나는 장애가 있으니까 경직이 있어.’라고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거다. 몸이 굳거나 이완되는 정도도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른데... 자연스럽게 빚어지는 나의 몸, 나의 움직임을 더 잘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최근의 화두는 ‘내 몸의 경직과 이완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걸까’ 그리고 ‘내 몸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이다.
완성형인 움직임의 모양을 먼저 생각해서 정해놓고 그것을 구현하려는 첫해의 방식 대신, ‘나’라는 아주 구체적인 고유한 몸에서 우러나는 움직임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작업 과정이 역전된 것 같다. 위와 같은 질문을 가지고 ‘스페이스 몸’이라는 그룹과 함께 ‘몸 기록’ 작업을 진행하고 1월 말에는 백일관에서 전시도 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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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
50일간 매일 하루 15분 정도 시간을 내서 내 몸을 들여다보고, 움직이고, 이때 들었던 생각을 벽에 붙이는 작업을 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제시한 루틴은 약 15분 동안 누워서 호흡하다가, 점점 일어났다가, 다시 눕는 과정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호흡에 집중했다. 단순한 움직임이지만 그 시간에서 발생되는 매번 다른 감정들이 반가웠다.
하루 15분 동안 매일 자기 몸을 들여다본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전에 이종무 배우와 대화를 나누고는 나도 매일 15분씩 ‘세미 수파인 자세’를 하고 누워있어 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 내가 멋대로 몸을 휘두르는 것보다 내 몸을 들여다보는 게 훨씬 힘든 것 같다.
보람
정말 쉽지 않다. 그래도 똑같은 루틴으로 움직이면서 그날그날의 컨디션이나 몸 상태에 따라 들어오는 감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니까 ‘몸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중요하구나, 이게 나를 알아가고 찾아가는 과정이구나.’ 느낀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몸에게 묻고 답하고 들어보고 싶다. 그리고 몸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드라마 속 인물들도 연기하고 싶다. 극단 애인의 김지수 연출가가 쓰고 연출한 <방에서 나오기만 해>의 진주, <알록달록 한땀한땀>의 진 역할을 다시 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올렸던 작품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면서 연기적으로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내가 내 몸과 호흡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나서 이 인물들을 다시 연기 한다면 어떻게 달라질까 궁금하다. 반대로 여전히 그대로일까 두렵기도 하고. 하하하.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 여러분, 남의 시선이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에게 귀 기울이며 자기만의 느낌, 감각을 믿고 나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한다. 내 마음대로 움직인다.’ 저도 신년 토정비결 보러 갈까 하다가 말았어요.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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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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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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