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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이봉련X김신록

거기 있다

김신록_배우

제197호

2021.03.25

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여러분, 연기에서 혹은 일상에서, 삶에서, ‘그냥 거기 있다’, 혹은 ‘존재 한다’는 건 뭘까요. 여러 매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봉련 배우를 만나 자기만의 경험과 언어로 풀어내는 ‘거기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작년 말에서 올 초에 걸쳐 넷플릭스 오리지널 <스위트홈>의 명숙, jtbc 드라마 <런 온>의 매이언니, 국립극단에서 제작한 <햄릿>의 햄릿을 연기했다.
봉련
코로나로 <런 온> 촬영이 밀리고, 햄릿 개막이 늦춰지면서 공교롭게도 세 작품이 거의 같은 기간에 오픈되는 바람에 배우로서 다양한 모습을 한 시즌에 보여줄 수 있었던 것 같다.
<햄릿>이 여러 우여곡절 끝에 결국 온라인 극장으로 오픈되면서 관객 혹은 시청자를 만났다. 사실 연극 무대에 설 때는 관객을 직접 대면하는 위험함, 아슬아슬함이 있지만 반대로 극장에 모인 사람들끼리 하고 보고 끝난다는 안전함이 있지 않나. 오늘 실패해도 내일 잘해 볼 기회가 있고, 공연이 끝나면 다 사라지고. 영상을 통해 연극을 한 기분은 어땠나.
봉련
국립극단 약력을 보니까 <햄릿>에 대해 ‘2021년 3월 온라인 극장으로 초연됐다’는 문구가 적혀 있더라. 그걸 보니 ‘이 작품은 공연 되었구나’ 실감이 났다. 공연을 ‘한 거다.’ 코로나, 극장 화재 등 여러 악재로 꽉 채워 3개월을 연습한 끝에 결국 카메라 몇 대가 객석에 섰다. 기록물로써만 존재하던 공연 영상이 관객을 만나는 일을 배우로서 처음 경험 한 거다. 국립극단에서 내부 시사회를 한다고 관계자들이 모여 불 꺼놓고 스크린으로 함께 연극을 보는데 ‘맨정신에 볼 수 있을까’ 싶더라. 그런데 막상 보니까 생각보다 낯설지가 않았다. 처음으로 연극 하는 내 모습을 모니터링 하는 경험이었다. 말하는 안면 근육, 윤곽, 습관 등등 ‘배우가 무대에서 자기가 어떻게 하는지도 알아야 겠다’는 긍정적인 생각도 들었다.
친한 언니는 공황장애가 있어서 극장에 못 가는데 온라인 극장 한다니까 너무 다행이라며 연락을 해왔다. 자기 같은 사람한테는 온라인 극장이 너무 좋다고. 우리 엄마도 ‘공연 못해 어쩌냐’ 하면서도 주변 엄마들과 어찌어찌 예약을 해서 온라인 극장을 봤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대구 경산 어머님들이 <햄릿>을 본 거다. 엄마 카톡에 지인들이 햄릿 공주님 너무 잘 봤다면서 엄마가 박수 받고... 그러면 된 거다.
온라인 극장을, 생각지 못한 층이 공연을 즐기는 방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그저 비운이고 불운으로 볼 것인가. 좀 멀리 생각해보면 온라인도 괜찮은 것 같다. 온라인으로 송출되는 연극도 정식 공연으로 받아들여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무책임하게 ‘그냥 영상으로 내 보내고 말았어’, ‘직접 봤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아쉬워’, 이러고 말 게 아니다. 온라인 극장에 참여하는 배우가 할 일은 찍는다니까 수동적으로 찍히는 것 말고, 마이크 사용 등의 음향이나 시점 등 기술적인 문제를 이해하는 것, 초상권이나 개인이 영상 송출을 거부할 수 있는지 등의 권리문제, 상영 회차 및 예약방식 등 시스템을 이해하는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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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련
여자 햄릿 제안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
봉련
‘너무 설레!’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세상이 바뀌어서 이런 역을 하게 되는구나’ 이런 생각도 안 했다. ‘그렇지. 해도 되지. 아닐게 뭐야.’ 이런 생각을 하긴 했다. 나는 햄릿이 왜 여자여야 하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고 ‘왜 나여야 하는지’가 궁금했다. 나는 언제나 성비보다 그 배우의 고유성으로 캐스팅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번 <햄릿>도 캐스팅 성별 전복이 이 작품이 가진 본질을 덮어버리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여성 서사나 젠더 문제 등에 무책임해서가 아니고... 나는 항상 예쁜 여자도 아니었고 작고 왜소했다. 그런데 선배 언니들이 ‘봉련아, 여기 있는 역할들 중에 남자역할도 여자역할도 네가 못할 게 없다’고 말해줬었다. 그때 열렸던 것 같다. 어떤 인물이 남자일 필요도, 할머니일 필요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극단 골목길에 들어갔더니 분장이나 음성변화를 통해 소위 ‘몸을 만드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더라. 그전까지 나는 몸을 만들어서 연기해 왔는데. 극단에서 연극하면서 나보다 어린 후배가 내 엄마가 되는 경험을 하면서 성별이나 나이 같은 제약에 대해 자유로웠던 것 같다. 그리고 예전에는 발성 좋고 예쁘고 잘 갖추어진 배우가 주연으로 섰지만. 이제는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는 것 아닌가. 영화로 치면 송강호 선배, ‘거기 그냥 존재해 버리는’ 인물이 등장한 거다.
그냥 존재해버리는 인물이란 어떤 것인가.
봉련
영화 <버닝>에 주인공 언니 역할로 잠깐 출연한 적이 있다. 이창동 감독님이 ‘주인공 둘 빼고는 전부 단역이다. 힘들 거다.’면서 ‘리딩 때 한 번 읽고 현장에 와서 연기 해버려야 되지 않겠냐. 이거 한 회차면 끝나고 어려운 거 안다. 근데 그런 사람으로 존재해주기를 바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다. 사실 죽 출연하는 인물보다 단타로 치고 빠지는 인물이 더 어렵다. 더 긴장하게 되고 주인공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도 잘 모르고. 존재하라는 건, 그 인물이 식당 아줌마니까 순간적으로 그냥 거기 있어 달라는 거다. 존재한다는 개념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보는 사람이 그냥 잠깐 넋을 놓고 그 장면을 넘길 수 있어야 한다. 그냥 믿고 슥 지나가게 되어야 한다. ‘무슨 식당 아줌마가 저래’ 소리 안 나오게.
반면 햄릿은 해낼 게 더 많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들이 혹은 내가 ‘사람이 저렇게 저러다 보면 저럴 수 있겠구나.’ 그랬으면 좋겠다. 햄릿이 정의를 향해 달려가지만 결국 칼을 써버리는 걸 보면 사실 당황하는 거다. 그렇게 한 번 잘못됐을 때 바로잡지 못하고 그 길로, 잘못된 신념으로 달려가 버리는 인물이지 않나. 왕, 햄릿 이런 편견을 떠나서, ‘그래 사람이 저럴 수 있지, 저럴 수 있겠어’라고 이해가 된다면 난 거기 존재한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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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을 영상으로 보면서, 또 다른 드라마에 출연한 이봉련 배우의 모습을 보면서, 외부와 내부 혹은 원경과 근경 사이의 레이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나는 에너지가 구조나 상황, 외부, 설득해야 할 대상으로 빠지는 스타일이다. 에너지가 상대를 향해 치고 나갔다가 다시 나라는 베이스캠프로 돌아오고, 치고 나갔다가 돌아오고. 그런데 봉련 배우의 에너지 혹은 존재의 층위는 근경 혹은 본인의 내부 가까이 머물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련
에너지가 약간 누워있죠?(웃음) 난 그냥 거기 있는 거 같다. 물론 무대에서 소리를 내야 할 때는 다소 다른 에너지를 쓰지만 기본적으로 누구를 설득해야 겠다는 생각이 딱히 없다.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하면서 다시 시작은 잘 안하는 것 같다. 그냥 거기서 이야기 한다. 원래 있던 데서. 맨날 머물러 있는 즈음에서 얘기하고 생각하고 ‘아니면 말아’하는 것 같다.
영상 매체 연기에는 근경이나 내부 가까이 에너지를 운용하거나 내부 에너지를 더 강력하게 작동 시키는 게 더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봉련
난 영상 매체에서 연기할 때도 발산하고 꺼내야 했다. 단역이니까. 그런데 연기하고 나면 ‘작게 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내가 어떨 때 작게 하는 날이 있는데, 그건 그냥 그럴 만한 역할인 거다. 그런 역할을 맡으면 힘 안 들여도 마이크랑 카메라를 들어다 놔 준다. ‘크다. 작게 해라. 연극 했냐. 소리 줄여.’ 이런 말을 들으며 지내왔다. 그때 집에 오면서 생각하는 건, 내가 작게 했다고 한들, 내게 주어진 대사는 ‘당신 미친 거 아냐?’ 하나뿐인데 ‘너 목소리 크다’는 평가에 휘둘릴 일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 되는 거다. 준비해 간 것을 충실히 잘하고 오는 거다. 무대에서든 촬영현장에서든 ‘여긴 이렇고 저긴 저렇고’ 나누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하던 저기서 하던 그 갭을 없애는 것이 목표다. 요새는 ‘무대에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도 별로 없지 않나. 점점 그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데 내 스스로 계속 경계를 만들면 이상하게 되는 것 같다. 색깔도 없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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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배우들이 영상 매체로 넘어가면 연극 활동이 뜸해지지 않나. 그에 비해 연극작업을 꾸준히 하는 편이다.
봉련
매체 하면서 공연을 한 게 아니고, 공연 하면서 매체를 했다. 매체보다 공연 기회가 더 많았다. 여기서 일을 더 하고 싶다. 여기가 토양이니까. 이곳에서부터 출발이니까. 공연을 해야 한다가 아니라 공연은 늘 해왔던 거니까. 그리고 무대에 서는 건 참 괜찮은 일이지 않나.
나는 쉴 때, ‘운동하고 나를 가꾸고 나를 들여다보고’ 이런 방식 말고, 무대에서 훈련을 해야만 나를 꺼낼 수 있다. 버튼 누르면 바로 연기가 되는 배우가 아니다. 일정상 정말 안 되는 건 나도 안 한다. 양쪽 팀에 불안함과 민폐를 끼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조율 가능한 건 할 수 있다. 요즘 부쩍 코로나라는 예기치 못한 일 때문에 장소 섭외문제나 확진자 발생에 대한 우려 등으로 한 작품만 해주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조율할 수 있다면 해보는 거다.
어느 한 쪽에 대해 ‘시간이 되면 돌아올 거야’라거나 ‘이쪽은 많이 해봤으니까 이제 매체를 좀 해봐야지’가 아니라 양쪽 다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같이 잘 해나가고 싶다. 나는 지금까지 연극을 통해서 드라마와 영화 기회가 왔었다. 거의 전부. 그랬기 때문에 무대의 힘을 믿는다. 물론 현장에 가면 좀 다르게 연기하고 접근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 무대에서의 에너지를 믿고 배우를 캐스팅했던 거니까 완전히 다른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자꾸 안 한다, 안 한다 하면 나중에 전화 안 한다.’ 이런 마음 때문에 조급했던 적도 있었다. ‘못해요, 못해요’ 하면 정말 바쁜 사람처럼 인식되는 게 신경 쓰이더라. 그런데 그것도 벗어던졌다.
지금도 극단 골목길의 <코스모스: 여명의 하꼬다떼>라는 연극에 출연 중이다.
봉련
오랜만에 골목길 공연을 하게 돼서 좋다. 결과가 좋으면 더 좋지만 결과를 떠나서, 만나서 어떤 걸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좋다. 나 혼자 있으면 뭔가를 만들어내고 정해진 시간에 뭘 올리고 이런 게 어렵지 않나. 집중력이 없어서 1년에 책 한 권도 읽기 힘든 내가 함께 뭔가를 만들어 낸다는 건 큰 성과고 에너지를 비축하는 일이다. 욕먹어도 괜찮다. ‘뭘 했으니까, 결과물을 냈으니까 이런 말이라도 듣겠지’ 하면서.
여전히 막판까지 머리를 맞대고 공연을 만들고 하는 일이 힘들지만, 사실 나는 ‘내 감정선에서 그건 힘들어요’가 별로 없다. 내 감정선이나 흐름보다 외부에서 괜찮다고 하면 나는 내가 못 할 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할 때마다 힘들다. ‘너 골목길이니까 다 할 수 있잖아’라는 말을 가끔 듣는데 사실 아니라는 걸 공식적으로 밝히고 싶다. 나는 조심조심하고 겁도 많다. 나도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 배우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빨리 가는 줄 아는 분들이 있던데 나도 오래 걸린다.
마지막으로, 거기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혹은 거기 있는 것의 핵심은 뭘까?
봉련
몰라요. 몰라요. 나는 그런 생각 안 해봤어요.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 여러분, 각자의 삶과 경험에서 다음으로 그 다음으로 겅중겅중 넘어가지 않고, 디뎌온 자리에 잘 머무르며 거기 있는 사람의 힘이 느껴지시나요. 하지만 머무름에도 어쩔 수 없이 시시각각 흐르는 것이 결국 생명 아닐까요? 어쩌면 ‘거기 있다’는 건 그렇게 흘러가는 ‘그 흐름 안, 거기에 있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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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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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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