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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왜] 김국희X성수연

더 자연스럽고 더 건강하게

성수연

제215호

2022.03.24

[무엇을, 어떻게, 왜]는 배우이자 창작자인 성수연이 진행하는 대화입니다.
동시대 창작자들이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작업하며, 그 일을 왜 하는지 들어봅니다.

살아가다 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변화를 마주합니다. 배우들은 여러 인식의 변화, 활동 영역의 변화, 사회의 변화 등에 따른 생각들을 어떻게 다루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배우 김국희 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기록입니다.

성수연
안녕하세요.
김국희
안녕하세요. 오늘 여성의 날이네요.
성수연
아주 의미 있는 날에 대화를 나누게 되었네요. 요즘 바쁘시지요?
김국희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성수연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신가요?
김국희
촬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 엄마가 분명히, 여물 먹을 때 태어난 소띠여서 고생 많이 안 할 거라고 그랬는데(웃음). 그런데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작을 해요. 읽어야 하는 대본이 많습니다. 대사량이 많진 않습니다(웃음).
성수연
어떤 생각을 하며 작업들을 하고 계신지 차차 여쭤보겠습니다(웃음). 오늘 제가 국희 배우님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던 이유는, 우리가 둘 다 공연을 하고 있는 배우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활동하는 영역이 좀 달랐다고 할 수 있잖아요? 연극계 안에도 다양한 현장들이 있으니까요. 경계선이나 기준이 무엇이라고 딱 하나 짚어서 말하긴 어렵지만, 분명히 있지요.
김국희
그렇죠.
성수연
굳이 나눠서 얘기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렇다고 없다고 칠 순 없는 것 같고요.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어떤… 계? 영역? 바운더리? 필드? (웃음).
김국희
필드? (웃음).
성수연
(웃음). 비슷한 필드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들을 만날 기회가 더 많다 보니, 현장에 관한, 혹은 작업 자체에 관한 어떤 고민이나 화두들도 결국 내가 늘 나누던 사람들과 나누게 되더라고요. 자주 만나는 사람들의 생각은 조금 알지만, 얘기해볼 기회가 적은 사람들의 생각은 모르는 거예요. 예를 들면, 2018년 연극계 미투 이후 내가 자주 만나는 창작자들이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어떤 식으로 생각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나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고 함께 하고 있는데, 자주 만나지 못하는 쪽에 있는 창작자들이 어떤 생각, 어떤 감각으로 그 시기를 통과했는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 이야기들도 나누고, 어떤 생각들을 갖고 작업을 하시는지 대화하고 싶었습니다.
김국희
감사합니다(웃음). 이런 표현은 거창하긴 하지만, 이 시대 안에서 가져야 하는 연극정신에 대해서는 거의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해요. 필드가 다르더라도요.
성수연
맞아요. 그리고 그 필드를 오가면서 관극하시는 관객분들도 꽤 많으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한창 혜화동1번지랑 연우소극장에서 같은 시기에 각각 기획 프로그램 ‘세월호’와 ‘권리장전’을 할 때, 관객들이 낮에는 혜화동1번지에서 공연을 보고, 저녁엔 연우소극장에서 공연을 보는 경우가 있었어요. 저도 그랬고, 아는 분들과 함께 이동하기도, 반대로 관람하신 분들과 마주쳐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문득 이 공연들이 결국 같은 사람들 안에서만 이야기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주요한 사회적 이슈를 전면적으로 말하고 있는 공연들인데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면 좋겠고, 혹시 다른 필드에서 활동하시는 배우님들이 이런 작품을 하시면, 자연스럽게 또 다른 관객들도 함께 이 공연들에 대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관객들이 섞이지 않을까 상상했어요.
김국희
그렇죠, 그렇죠.
성수연
당시 그런 말을 많이 하고 다녔는데, 알고 봤더니 이미 여러 현장을 오가며 공연을 보시는 관객분들이 꽤 많으시더라고요(웃음). 오히려 창작자들끼리의 교류는 아주 잦지는 않은 것 같아요.
김국희
아무래도 지금은 오디션이 많지 않은 대학로가 됐잖아요. 그러다 보니 결국 알고 있는 창작자들끼리 작품을 더 많이 하게 되고, 또 알고 있는 창작자들의 작품을 보러 갔다가 캐스팅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이런 식으로 결국 비슷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끼리만 계속 교류하게 되는 게 아닐까요?
성수연
오, 그럴 수 있겠네요.
김국희
오디션이 많이 있다면 배우들도 좀 다양한 작품에 도전해볼 수 있을 텐데. 최근, 저랑 공연을 같이 한 친한 배우가 또 다른 친한 언니 덕분에 신촌극장에서 본인들의 생각을 담은 공연을 만들어서 올리더라고요. <플라스틱 파라다이스>. 작품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좋았고, 그 언니도 작업을 하면서 ‘나 진짜 이런 작업해서 정말 행복하다’라고 했어요. 배우들은 비슷한 것 같아요. 선택할 수 있다면 더 많은 교류가 가능할 텐데 지금은 방법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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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희
성수연
맞아요. 그리고 교류가 적은 게 꼭 나쁜 것도 아니고요.
김국희
사람들이, 페이를 많이 줄 수 없는 작업이라면 은연중에 ‘페이를 많이 못 주니까 안 하겠지?’(웃음) ‘별로 하고 싶지 않겠지?’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성수연
아무래도 국희 배우님이 활동하시는 쪽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페이가 그래도 꽤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웃음)
김국희
그것도(웃음), 이 ‘필드’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이 안에서 또 세밀하게 또 나뉘어서…(웃음) 이 안에서도 한번 작업 함께 해보고 싶은데 도저히 만나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요.
성수연
그렇기도 하겠네요.
김국희
말씀하신 대로 여러 현장을 오가며 공연을 보는 관객들도 있고, 우리도 굳이 나누지 않았는데, 여러 이유로 교류가 잦지는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현장들의 특성이 생긴 것 같아요. 창작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관객들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그 조율을 어떻게 하는지가 그룹마다 다를 테니까요. 그렇지만 현장에서의 분위기나 작은 문화가 좀 다를 수는 있어도 결국 배우들은비슷한 고민들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수연
2018년 연극계 미투 이후 어떤 생각들을 하셨고, 어떤 변화들을 체감하고 계시는지 궁금해요.
김국희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어떤 감정들을 지혜롭게 표출해야 된다는 생각도 했어요. 더 나은 스텝을 위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함께 가기 위해서. 그런데 너무 긴 시간 자리 잡고 있었던 분노의 감정이다 보니, 거칠고 강력한 표현을 하게 될 때도 있는 거죠. 그게 또 어떤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좋은 대화를 할 수 없게 되고, 이런 단어를 쓰긴 조심스럽지만 ‘혐오’를 또 낳게 되고, 싸움이 되고. 그래서 당연한 것을 얘기하는데도 마치 그게 투쟁 같이 느껴지기도…(웃음) 여러 가지를 체감했고, 다방면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고요. 당연한 것을 향해서 가는 건데, 과도기이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속도가 빠른 건지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더 따뜻하고 다 같이 상처받지 않는 방향으로 충분히 변화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고, 여전히 있고, 그럴 때 아쉽습니다.
성수연
지금은 시간이 흘러서 그때와는 좀 다른 상태가 됐지만, 그때 단 며칠 만에 빠르게 많은 언어를 찾게 됐던 것이 기억나요.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느끼는 이 분노가 사실 아주 긴 시간 자리 잡고 있었던 감정이었구나, 깨닫게 되기도 했고, 구체적인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어떤 불편함들의 정체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생겼고요. 그러다 보니 상처가 또 발견되고,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고. 각자의 입장에서 오히려 또 다 같이 새로 상처받고. 많은 분들이 그러셨겠죠.
김국희
저도 어릴 때 대학로에 나와 활동을 시작했고, 음… 사실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정말 많았어요. 단 한 번도 말하겠다는 생각을 못 해봤고요. 그런데 이제는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인식이 달라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도 조심스러워지고 있고요. 건강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체감하기에, 이미 2018년 이전부터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던 부분도 있어요. 인식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고, 그러던 중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말해야 한다’가 시작된 것이라고 느끼고 있어요.
성수연
그때 주변 여성 동료들과 이야기도 많이 나누셨어요?
김국희
네. 제가 겪었을 때 불쾌하고 싫었지만 나쁘다고 얘기해야 된다는 것조차 몰랐던 어떤 것들을, 동생들도 겪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싫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저는 언니가 되어가니까요. 그런 것들을 확연히 알게 되니 조금 더 여성 배우들끼리 얘기가 깊어지고, 그런 일들에 대해서 같이 얘기를 나누게 되었어요.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가장 피해를 받은 사람이 최대한 덜 상처받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같이 고민하게 되고… 그런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도 비슷하게 좋지 않은 경험을 했었을 때, 다행히 그때 주변에 있었던 언니, 오빠들이 지혜를 발휘해서 저한테 트라우마가 생기거나 상처가 심해지지 않도록 일을 마무리해줬던 기억이 있거든요.
성수연
피해를 당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야 하니까.
김국희
조심스럽죠.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도 있고. 물론 사건의 심각성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은 해요. 어쨌든 지금은 좀 더 자연스럽게 관련 대화를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떠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면 좋을지 서로 묻고 의견을 주고받기도 하고요. 예전에는 딱히 하지 않았던 대화들을 조금 더 나누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매체 쪽에서도 공연 쪽에서도 다 교육을 받고 프로덕션을 시작하는데, 교육의 내용이 발전하는 것을 느끼기도 해요. 교육 중 굳이 성별을 지정하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거나 할 때, 변화하는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성수연
그간 교육들을 받으면서 교육 내용이 어떻게 진화하는지는 유심히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저도 주의 깊게 보고 싶어지네요.
미투 이후, 체감되는 작업 환경의 변화가 있으신가요? 작업할 때 좀 더 편하고 덜 상처받게 되었다거나, 혹은 여성 배우의 역할이 확장되는 것을 체감하신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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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희
사실 저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전부터 분명히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2016년 <레드북>이라는 창작뮤지컬 초연을 할 때에도, 주변에 창작 지원을 받아 쇼케이스를 하는 작업들을 보면 거의 여성 배우들만 나오는 작품이 많았어요. 여성서사도 많았고요. 물론, 본 공연까지 가거나 상업화가 되기까지는 벽이 있긴 했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런 작품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어렵겠지만 우리 기다려봅시다. 다들 쓰고 있어요. 노력하고 있습니다(웃음).
성수연
(웃음). 모두들 더 힘내주십시오.
김국희
더 많이 바뀌겠지요. 지금 당장 대학로 공연 포스터 게시판에 붙은 얼굴이 반은 남자, 반은 여자인 것까지는 아니지만 분명히 바뀌고 있어요.
작품에서 성비가 너무 치우쳐져 있을 때 좋지 않은 반응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뒤늦게 남성 인물을 여성으로 바꾸는 경우가 있어요. 사실 제가 매체에서 원래 남성 역할이었던 배역을 몇 개 한 적이 있습니다(웃음).
성수연
와, 그렇군요. 어떤 역할들이었나요?
김국희
촬영 들어가기 전 배역의 성별이 바뀌며 배역의 성격에도 변화가 생긴 경우가 있었고, 뒤늦게 합류하게 된 경우도 있었어요. 내부 기술 시사 후에 목소리로만 등장했던 어떤 인물의 성별을 바꾸기로 결정된 경우도 있어서, 제가 캐스팅되어 다시 가서 녹음한 적도 있고요. 이미 다 찍은 영화인데 어떤 인물의 성별이 바뀌는 바람에 다 찍은 영화에 가서 한 씬만 촬영한 적도 있어요(웃음).
성수연
‘원래 남성이었다가 여성 배역이 된 역할’ 전문배우이신가요(웃음)?
김국희
(웃음). 그렇게 하려고요. 차라리 그 편이 낫겠어요, 아예. (웃음).
성수연
그게 더 기회가 많이 생길 수도 있겠네요. 워낙 연기도 잘하시고요.
김국희
사실 성별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물론 여성일 경우의 매력, 남성일 경우의 매력이 각각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존중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크로스 됐을 때 생기는 묘한 매력도 있잖아요.
성수연
맞아요. 동의합니다.
김국희
이제는 가끔 ‘어떤 역할을 하고 싶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남자 배우들이 하는 역할 제가 다 할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해요. 약간 사냥꾼처럼. ‘성별을 바꿔보시죠’(웃음).
성수연
(웃음). 좋네요.
김국희
유일하게 인물의 성별이 지정되어 있지 않은 대본을 받아 공연한 적이 있어요. <더 헬멧>이라는 공연이었어요.
성수연
아, 대본에 성별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군요.
김국희
네, 그냥 헬멧1, 헬멧2 이런 식으로만 표기가 돼 있어요. 성별은 중요하지 않아요. 소녀인지 소년인지 중요하지 않아요.
성수연
작업하면서 재미있으셨나요?
김국희
정말 좋았어요…… 맨 처음 대본 받았을 때, 일단 성별이 적혀 있지 않은 것에서 오는 그 쾌감은 정말 말로 할 수가 없었어요.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그 후 <더 헬멧>을 쓰신 지이선 작가님 만날 때마다 나름대로 그 감사와 감동을 표현했어요. 정말 좋은 작품입니다. 앞으로도 그럼 작품이 많았으면 해요. 그래서 가끔 TV 드라마를 볼 때도 저 역할 여자였으면 어땠을까? 저 역할이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라는 식으로 생각을 해보게 돼요. 요즘 여성 배우들이 갖는 가장 큰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성수연
실제로 요즘 공연계에서 젠더프리, 젠더크로스 캐스팅을 많이 시도하는 편이잖아요. 뮤지컬 쪽에서도 그렇죠?
김국희
많이 했죠. 많이 했죠.
성수연
저도 얼마 전에 창작 과정 발표이긴 했지만 젠더프리로 <갈매기>, (웃음) 여성 으로 패싱되는 배우들끼리 했어요. ‘뜨레블레프’도 ‘도른’도 ‘소린’도 ‘니나’도 다 여자가 하고. 낭독이었지만 전 ‘뜨레블레프’를 했습니다(웃음).
김국희
와우! (웃음) 어떠셨나요?
성수연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냥, 뭔가 굉장히 신났어요. 성별을 연기한다는 강박 없이 그 인물의 말을 열심히 하는 것이 굉장히 신났어요. 말을 많이 하는 인물이기도 해서 그냥 그 인물의 말을 따라가는데, 제 안에서도 뭔가가 발생되고 신나더라고요(웃음). 워크숍 과정에서 함께 하는 배우들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았고요.
김국희
정말 재밌었겠어요. 궁금하네요.
성수연
어떤 배역을 어떤 성별이 연기하는지를 떠나서 여성 인물이나 남성 인물이 작품 안에서 각각 어떤 편견을 기반으로 그려져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는 또 많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겠지만요.
2018년 미투 당시 아까 잠깐 언급하신 뮤지컬 <레드북>이 공연 중이었는데, 국희 배우님도 출연 중이셨지요?
김국희
맞아요. 그때 당시 언뜻 <레드북>에 나오는 특정 대사가 미투 운동의 어떤 현장에서 인용되었다는 이야기도 듣긴 했어요. 공연 현장에서 관객들의 변화와 에너지를 체감하기도 했습니다.
성수연
여성서사 뮤지컬이고, 창작극이라 당시에 또 다른 의미가 생겼을 것 같아요. <레드북>에서 맡은 역할은 어떠셨어요?
김국희
좋았어요. 사실 초연 때 작가님께 많은 이야기를 드렸었어요. 여성서사로 쓰셨는데, 주인공이 여성이긴 하지만 여성 조연 중 분량이 좀 있는 역할은 내 역할밖에 없고, 또 그 역할도 뭔가를 수습하거나 안아주거나, 그런 분위기의 인물인 것이 조금 불만이라고요(웃음). 왜 여자들은 항상 이렇게 따뜻하기만 하냐고. 누가 사고 치면 수습하고, 상처받은 사람 위로해주고 이거 모두가 원하는 어머니상 아니냐고(웃음). 작가님께 그런 말씀을 드리고 요구도 드리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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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오, 요구를 수용해 주셨나요?
김국희
많이 많이 바꿔주셨어요. 좀 더 괴짜 같아지기도 하고, 여러 가지 면을 갖고 있는 인물로요. 제가 정말 사랑하는 인물이고, 좋은 대사도 정말 많고, 사람을 위로하고 공감하게 하는 말이 정말 많은 극이고. <레드북>은 제가 정말 사랑하는 작품입니다.
성수연
곧 생중계도 하더라고요. 이번엔 참여를 안 하셨는데, 당분간 공연 계획은 아직 없으세요?
김국희
없습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던 매체 작품들이 있어서요. 이제는 공연을 하며 촬영을 하는 것이 예전에 비해 조율이 되는 편이긴 한데, 스케줄이나 프로덕션 상황에 따라 다르니까요. 공연 너무 하고 싶어요. 공연 하고 싶어서 몸져누울 정도로요(웃음).
성수연
매체에서 연기하실 때랑 연극에서 연기하실 때 차이가 혹시 있으세요?
김국희
기본적으로 ‘연기한다’는 것은 비슷하고, 연극과 다른 부분들이 낯설긴 해도 하다 보면 적응이 돼요. 우리가 연극 처음 할 때 낯선 것들이 많았지만 결국 다 적응했잖아요? 모르면 물어보면 되고.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듯, 맡을 수 있는 배역들에 대한 고민은 계속 있고요. 매체의 특성에서 오는 배역의 한계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연극 같은 경우는, 공연에 5분만 출연해도, 제가 5분만 나오는 작품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그래도 ‘시작!’과 동시에 같이 달리기 시작하는 거잖아요.
성수연
그렇지요.
김국희
매체에서 재난물 같은 작품 찍을 때 진짜 한 씬을 일주일씩 찍고 그러는 경우도 있어요. 소리치고, 도망가고, 소리치고, 도망가고. 그런데 결과물에서 어깨만 요만큼 나오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러면 생각이 많아져요. 연기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고요. 하고 싶은 연기를 맘껏 하려면 결국 스타가 되는 수밖에 없나, 이런 생각도 해요. (웃음). 제 남편도 배우인데, 한 번은 남편이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이런 고민을 말했더니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국희야, 속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스타가 되자! 스타들이 항상 하는 말 있지?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되어 있더라고. 그러니까 국희야! 일단 푹 자!” (웃음).
성수연
(큰 웃음).
김국희
우리 스타가 됩시다. (웃음).
성수연
그러기 위해 일단 잠을 좀…(웃음).
김국희
푹 자야지요. 나는 숙면을 취할 겁니다. 우리 숙면합시다. (웃음) .
성수연
(웃음). 잘 자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매체, 연극 다 통틀어서 배우로서 국희 배우님이 최근에 갖고 계신 화두나,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김국희
요즘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은 연기적으로도 그렇고 ‘공감’과 ‘소통’에 대한 것이에요. 자연스러운 연기에 대해 많은 배우들이 고민하잖아요. 매체에서도 그렇지만 무대에서도 좀 더 사실과 가까울 때에 발생하는 공감, 그 공감 때문에 움직여지는 마음들. 그래서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표현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 같은데, 그런 고민을 하다 보니 그게 소통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문제가 될 수 있고, 접촉이 불편해지는 시대도 됐고.
성수연
작업자끼리의 소통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김국희
작업자끼리도 그렇고 사람과 사람끼리도요. 사람과 사람의 살이 닿을 때 오는 분명한 온기가 있는데, 이제는 길 가다 사람을 마주치면 당연히 서로에게서 벗어나야 하고. 아까도 말했던, ‘시작!’과 동시에 달릴 때의 쾌감이 있는데, 그 정체는 같은 공간에 존재함을 느낀다는 것 같아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뭔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쾌감. 그래서 관객들도 무대에 다 올라오는 공연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성수연
코로나 시대라서 할 수 있는 생각이셨을까요?
김국희
그런 것 같아요. 억눌려서. 지금은 커튼콜 때 박수는 해도 되는데 환호는 하면 안 되잖아요. 관객들과 다 같이 마스크 벗고 같이 땀 뻘뻘 흘리면서 막 뛰고, 같이 소리치고 구르고. 그런 공연을 너무 하고 싶어요. 사람이 사람을 병균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예 그런 시대가 돼버릴까 봐 두려워요.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성수연
작품을 통해 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김국희
해보고 싶은 이야기… 정말 많아요. 이미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을 것 같긴 한데, 동물과 사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성수연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김국희
동물을 많이 좋아하기도 하고요.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생명체에게 연기를 시키는 것이 맞는지 요즘 좀 고민하고 있어요. 그래서 가끔 TV에 아기가 나왔는데 그 아기가 더미이거나 CG라는 느낌이 확 들 때, 오히려 기쁘고 안정감을 느껴요. 진짜 아기가 연기한 게 아니구나 싶어 안도감이 들어요.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생명체들은 과연 연기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그들이 과연 원해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얼마 전에 큰일이 있었잖아요.
성수연
말.
김국희
네, 말. 그런 얘기를 스토리화해서 공연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성수연
와, 저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동물권에 관한 고민도 하고, 인간의 잣대로 그저 추측만 할 수 있는 어떤 존재들은 작품에 어떻게 드러나야 하나, 혹은 배우가 그런 존재를 연기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등등. 말씀하신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생명체들이라는 표현을 빌려와서, 그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공감할지, 어떻게 대할지. 또 어떻게 연기할지.
김국희
오, 재미있는 고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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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이야기 나누는 것이 즐겁네요. 미투 이후 여성 배우로서의 이야기부터 연기 자체에 대한 이야기까지 쭉 나누고 있어요.
김국희
좋네요, 좋아요. 여성이든 남성이든 배우로서는 결국 같은 범주의 고민을 하고요.
성수연
맞아요. 그렇게 안 되던 때도 있었으니까, 더 그렇게 변화한다면 좋겠어요.
김국희
더, 더 자연스럽고 더 건강하게. 그래야 그게 진짜 변화가 될 것 같아요.
성수연
제가 만나서 대화하는 사람들한테 항상 하고 있는 질문인데,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게 되셨나요? (웃음).
김국희
(웃음). 어릴 때 노래를 했었고, 변성기가 올 때 목소리가 좀 많이 변해서 노래를 그만두면서 예고가 아닌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했어요. 그 학교 국어 선생님께서 연극을 해보라고 권유하셔서 연극부를 만들고, 거기서 연극을 시작했어요. 노래를 할 때보다 훨씬 즐거웠어요. 연기를 하기로 결정하고,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며 공연도 많이 보러 다녔어요. 아침에 아빠에게 만 원을 받아 지하철1호선을 타고 수원에서 대학로로 올라와서 사랑티켓 신문을 보며 공연을 골라서 보고, 다시 집에 가고. 그때 사랑티켓 신문 맨 앞장에 항상 <지하철 1호선>이 있었어요. 제가 수원에서 늘 타고 오던 그 지하철 1호선. 그게 웃겨서 공연을 보러 갔는데, 정말 쇼킹했어요. 이런 뮤지컬도 있을 수 있구나, 뮤지컬이 다 <오페라의 유령> 이나 <아가씨와 건달들> 같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구나. 생각이 확 열린 계기였어요. 그래서 연기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검색을 하던 중, 어떤 오디션 정보를 봤어요. ‘만 18세 이상은 누구나 지원 가능’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땐 만 18세의 뜻을 몰랐어요. 18세이면 지원할 수 있는 줄 알고 지원했어요(웃음). 연출님도 웃기고 기가 막히셨겠죠. 그런데 그 작품이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뮤지컬이었어요. 연출님이 ‘그래, 진짜 청소년도 한 명 출연하면 좋겠다!’ 생각하셨대요. 덕분에 데뷔를 일찍 했어요. 고등학생 때. 아무것도 모를 때 그냥 귀여움 받으면서 했어요.
성수연
(웃음). 얼마나 웃기고 귀여웠을까요.
김국희
웃음). 다들 오냐 오냐 해주셨죠. 교복 입고 오고 연습실에.
그러다 고등학교 졸업식 바로 다음 날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지하철 1호선> 오디션이었어요. 그때부터 오디션을 계속 봤어요. 붙을 때까지. 진짜 끔찍했어요. 사람들이 맨날 웃었어요. 쟤 또 왔다고. 처음 오디션을 봤을 때 3차까지 붙었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포기가 안 되는 거예요. 결국 <지하철 1호선> 다시 시작하기 전, 마지막 시즌에 붙었어요. (웃음). 너무 하고 싶었던 공연이었는데, 지금까지 했던 모든 공연 통틀어 그때가 제일 괴로웠어요. 하고 싶었던 공연, 하고 싶었던 역할이었고 하루하루가 귀한데, 어떻게 하면 잘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잖아요. 코멘트는 듣지만, 그 코멘트대로 연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데, 결국 잘하고 싶어서 매일 괴로웠어요. 저 자신을 괴롭게 너무 혹사시켰어요.
그래서 <지하철 1호선>이 끝났을 때, 큰 전환점이 또 하나 생겼어요. ‘무조건 즐겁게 하자, 공연은 직업이고, 평생 할 것이고, 좋아서 한 거니까 즐겁게 하자. 나를 괴롭게 하지 말자. 하다 보면 늘겠지. 안 늘면 포기하게 되겠지. 그러니까 그전까진 그냥 즐겁게 하자’. 그때를 기점으로 공연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어요.
성수연
잘하고 싶어서 괴로운 것, 이해되는 마음입니다.
김국희
그렇게 나 자신을 괴롭혀도 안 될 건 안 되고, 그냥 이렇게 평생 싸우면서 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성수연
일에서 오는 그런 긴장들을 풀어주거나, 환기가 될 수 있는 취미가 있으세요?
김국희
시간을 정해두고 저에게 집중을 해요. 연기를 할 때 그 인물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정작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은 너무 짧아요. 어느 순간 그것이 좀 섭섭하더라구요.
성수연
(웃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김국희
그래서 시간을 정해두고 정확하게 집중해서 일에 대해 생각을 하고, 나머지 시간엔 나에게 집중해서 내 기분대로 행동을 하려고 해요. 누워있고 싶으면 누워있기도 하고, 고양이만 바라보고 있기도 하고. 대단한 취미가 있어야 할 것 같지만, 그렇게 치면 배우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거든요.
성수연
취미도 일처럼 느껴지고, 언젠가 써먹어야 해서 배우는 것 같고요.
김국희
맞아요. 기술적으로 훌륭한 단계까지 올라가야만 될 것 같거든요. 그게 나를 어느 순간 괴롭혀요. 그리고 드라마도 그냥 안 봐지잖아요.
성수연
(웃음). 맞아요. 일처럼 되는 경우가 많아요.
김국희
‘하루 종일 드라마 봤어’라고 하면, 회사 다니는 친구들은 ‘야, 너 진짜 좋았겠다!’ 그러는데 저는 ‘노는 거 같지? 일이야 일’이라고 하지요(웃음). 계속 분석하고, 저 배우가 저걸 어떻게 연결했나 다시 한번 돌려보고, 좋은 연기 있으면 한 20번 돌려보고. (웃음). 이상한 것이 있으면 저건 작가의 선택이었을까, 배우의 선택이었을까 생각하고.
성수연
저는 최근에 <구경이>를 정말 너무너무 재밌게 봤는데, 계속 보면서 저런 캐릭터들은 작가, 연출, 배우가 어떤 식으로 소통하면서 만들었을까, 저 장면에선 왜 저런 표현을 선택했을까, 어떻게 찍었을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요. (웃음). 취미로 시작했다가 밤을 새우고 기력을 소진했어요.
김국희
일이니까요, 사실. (웃음). 잠을 푹 자야 하는데. (웃음).
성수연
오늘 여러 이야기들 재미있게 들려주시고, 고민들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우리 둘 다 푹 자도록 해요(웃음). 우리가 오늘 나누었던 대화를 잠시 생각해보고, 다섯 개씩 질문 주고받기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 어떨까요?
김국희
좋아요. 좋아요.

(잠시 침묵, 국희와 수연,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본문사진6
성수연
다 같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변화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국희의 눈에 약간의 눈물이 고인다)
김국희
아무도 상처받지 않게 하는 연기가 존재할까?
(수연, 아- 하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는다)
성수연
사람을 치유하는 연기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
.
김국희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 중 연극의 가치는 어디쯤에 있을까?
.
.
성수연
무대 위에서 관객들이랑 다 같이 소리 지르고 뛰고 땀 흘리고 분장실로 돌아갔을 때 너는 어떤 말을 처음 내뱉게 될까?
(국희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퍼진다)
김국희
다른 존재들이 궁금한 만큼, 나 스스로에게 궁금한 것이 있을까?
.
.
성수연
네가 가장 최근에 정말 스스로가 사랑스럽다고 느낀 건 언제 어느 순간이었어?
.
.
김국희
나는 네가 항상 많이 멋있었는데, 너 괜찮아?
(수연, 고개를 숙였다가 든다. 미소를 짓는다.)
성수연
공연이 너무 하고 싶다고 했는데, 한참 후 공연을 하게 되면 첫 커튼콜 때 너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
.
김국희
우리는 다른 필드에 있지. 언젠가 함께 지향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우리가 같은 무대에 섰을 때, 연기적으로 안 싸울 수 있을까?
.
.
성수연
이게 마지막 질문이라고요? (웃음). 좀 더 그럴싸하고 멋있는 질문 없으세요?
김국희
현실적이어야죠(웃음).
성수연
맞아요(웃음).
김국희
현실적이어야 돼요(웃음).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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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파이리)

성수연(파이리) 본지 편집위원
배우, 창작자. 다양한 형태의 연극작업을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sooyeon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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