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연극인이 만난 사람] 썸머X이산

“저 언니 또 시작이다.”

정리_편집부

제220호

2022.06.16

우리는 어떤 연극을 하고 있을까

이산
썸머 님, 우리가 지금 웹진 연극in에 대화를 하러 왔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썸머
저도 잘 몰랐었는데, 제가 연극인이더라고요(웃음). 한참 모르고 지냈었는데, 내가 연극 하는 걸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너무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요.
이산
우리가 연극인이라는 걸, 사실 그런 정체성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워낙에 좀 다방면으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그러고 있긴 하잖아요. 우리가 하고 있는 연극의 스펙트럼은 어떤 걸까요?
썸머
저는 부모님한테는 커밍아웃을 안 했지만, 제 삶에 있어서는 커밍아웃을 한 상태잖아요. 제 인생이나 경험을 많은 사람들한테 알려주고, 또 그들이 공감해줬으면 좋겠다, 그런 취지로 살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제스처를 취하는 게 연극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연극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제가 퀴어로서 많이 활동하고 있지만 비(非)퀴어의 삶, 그리고 비(非)드랙의 삶도 공연으로 얘기해보고 싶어요.
이산
우리가 지금 연극을 해온 지, 사실 6~7년 정도 되어 가는 시점이잖아요. 그래서 연극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있단 말이에요. 그럴 때 저 같은 경우에는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대학로에서 연극하냐고요. 그러면 저는 대학로에서 공연을 하는 건 아니고 대학로 근처 성신여대 쪽에 있는 극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게 되거든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대학로 밖에서의 연극이란 건 어떤 걸까요. 썸머 님은 대학로 밖의 연극에 어떤 매력을 느껴서 지금까지 그곳의 여러 사람들과 같이 연극을 해온 것 같아요?
썸머
사실 저희가 처음부터 대학로에서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에, 대학로 안과 밖을 나누어서 생각하는 게 좀 애매하긴 해요. 그런데 저는 장소 같은 거는 정말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디가 되었든 무대나 공간만 있으면 우리는 충분히 우리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산
그럼,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늘 받는 질문인데, 드랙이 뭘까요? 왜 이런 질문을 하냐면, 어떤 행사장에 가서 기자분과 간략히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잖아요. 근데 그분이 기사 사진에 “드랙은 여성 흉내를 내는 남성 성소수자이다” 이렇게 설명란을 따로 만드셨더라고요. 이번에 또 누군가가 드랙이란 단어만 보고 저희를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재밌고 간략한 설명을 부탁할 수 있을까요.
본문사진01
썸머
드랙은 오늘 제 룩에서도 보실 수 있듯이,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임팩트 있게 단시간에 보여주는 행위인 것 같아요. 오늘은 제가 했던 공연과 제가 했던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 이런 룩을 입었는데, 누가 봐도 이게 연극 포스터구나, 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잖아요. 그런 자기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 같아요. 그게 꼭 여성, 남성, 화려하다, 아니다, 그런 걸 떠나서 표현하고 싶은 걸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도해볼 수 있는 것?
이산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예술인 거죠.
썸머
산 님이 생각하기에는 어때요?
이산
예전에는 모두가 할 수 있는 것,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것, 이런 여러 설명들을 복잡하게 만들어왔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내가 좋은 설명을 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오해하지는 않을까, 고민했었는데, 생각해보면 드랙을 한다는 건 우리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방식이거든요. 오늘은 이 옷을 입어야지, 아끼는 신발을 신어야지, 예쁜 화장을 하고 싶어, 이렇게 나갔을 때 되게 신나고 짜릿하고 즐겁고 설레는 느낌이 있잖아요. 드랙을 할 때 우리는 그런 걸 느껴요.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드랙을 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어요.
썸머
맞아요. 그냥 자기의 그립톡을 바꾼다든지 아니면 필통을 바꾼다든지, 이런 것도 다 기분전환이 되고 리프레시되는 게 있잖아요. 저는 그런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이산
사실 연극이랑 드랙이라는 게 크게 구분되는 건 아니지만 드랙이 대학로 안에서도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썸머
저도 연극in을 예전부터 보고 있었는데, 정말 연극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생각했거든요. 우리한테도 이런 기회가 왔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세상이 바뀌고 있는 것 같아요.

나를 드러내고 보여주는 일

이산
사실 대학로에서 하든 어디서 하든 결국 좋은 극을 만들면 관객들은 어떻게든 보러 와주시더라고요. 감사하죠. 물론 관객이 많이 올 때도 있고 적게 올 때도 있지만 관객들이 많이 온다고 해서 무조건 우리가 좋은 공연을 올리나? 그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또 관객들이 조금 왔다고 우리가 한 게 나쁜 연극이 되나, 그런 것도 아니고요. 썸머 님은 이제껏 했던 공연 중에 어떤 게 기억에 남아요?
썸머
여러 가지 면에서 그런 것들이 있는데 ‘퀴어연극제’에서 올렸던 <패티쉬>(2018)나 <일반인 출입금지>(2017)나 이런 공연들에 정말 많은 관객들이 오셨어요. 한 공간 안에서 호흡했던 퀴어와 비퀴어들의 만남이 굉장히 인상에 남았던 것 같아요.
이산
되게 신나고 자극적이면서도, 짜릿한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죠.
썸머
맞아요. 근데 사실 그렇게 관객이 많을 땐 공연 홍보물에 어떤 노출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런 걸 떠나서 저는 저희끼리 준비했던 공연들도 기억에 남아요. 최근에는 이산 연출님의 <덧칠>(2021)이란 작품을 했잖아요.
이산
그 작품은 어떤 이야기였어요(웃음)?
썸머
이산 연출님이 자기 일대기와 학창시절을 그린 작품인데 그때 되게 좋았던 것 같아요. 내가 하고 싶던 것들도 많이 해볼 수 있었고요. 대사도 굉장히 많았고요(웃음).
이산
이산 연출이 본인의 이야기를 쓰면서도 썸머 님을 여러 방면으로 많이 비춰보고 싶었나 봐요(웃음).
썸머
대사가 되게 많았어요. 한 줄 정도(웃음)?
이산
아, 한 줄 정도는 아니잖아요!
썸머
한 단어인가? 하하하.
이산
근데 <덧칠>이라는 작품이 진짜 도전이긴 했어요. 그때 ‘살아있는 그림’이라는 역할로 연기를 하셨잖아요. 이산 연출이 굉장히 미안했다 하더라고요. 배우한테 팬티만 입혀놓고 몸에 물감 입힌 채 30분 넘게 포즈 바꿔가면서 서 있으라고, 어떤 연출이 그런 걸 시키겠어요. 그런데 그걸 또 해내주신 게 대단하고,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고(웃음).
썸머
저는 굉장히 좋았고,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사실 관객들의 연령대를 생각해서 팬티는 입었지만 안 입었어도 된다고 생각했고요. 제가 어릴 때부터 몸에 대한 콤플렉스가 많았는데, 그러니까 제가 흔히 말하는 아름다운 몸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나를 드러내고 그 몸을 보여주는 게 굉장히 전복적이고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는 경험에서 자존감이 올라가기도 했고요.
이산
예전에 저 같은 경우도 몸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을 땐, 옆구리나 뱃살이 좀 삐져나오면 관객들이 그걸 신경 쓸 것 같아서, 쟤 살쪘네, 그런 생각을 할 거라고 걱정했던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관객들은 정말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어요. 우리가 어떤 작품을 했는지에 깊게 관심 가져주시는 걸 보면서, 사실 우리가 고민하는 건 정말 별 게 아니라는 생각도 했고요.
썸머
제가 연극이나 드랙을 하면서 사람들이 이걸 보고 어떻게 반응할까, 사람들이 이걸 싫어하면 어떡하지, 사람들은 왜 이걸 싫어하지,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해요. 그런데 한편으로 저는, 하면 안 된다고들 하는 걸 해버리는 그런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살 수는 없잖아요.
이산
사실 드랙이라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 되게 예쁘고 날씬한 남자들이 여자처럼 보이게 하는 거라고 알고 있어요. 저희는 항상 그런 편견을 깨려고 노력을 해오기도 했고요.
본문사진2

편견을 넘어, 또 다른 세계와의 만남

이산
정말 다양한 사람들하고 작업을 해왔잖아요. 꽤 오래 장애예술가들 하고도 여러 작업을 해왔던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 어떻게 그런 계기가 있었던 건가요?
썸머
퀴어연극제를 할 때 ‘장애인문화예술판’과 ‘장애인배움터 너른마당’에서 저희를 많이 도와주셨어요. 공간 지원이나 대관 할인 같은 것들이 큰 힘이 됐죠. 그게 고마워서 그분들이 연극할 때 메이크업도 해드리고 그렇게 친해지다 보니까, 그분들의 삶에 제가 동화가 되어서 시위 같은 것들도 같이 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장애인으로서 살아온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고요.
이산
정말 모르고 있었던 것들, 못 보고 있었던 것들이 너무 많았죠.
썸머
바뀌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우리가 정말 많은 걸 누리고 있고, 이게 다 혜택이었다는 걸 깨달았죠. 누군가 무언가를 선택적으로 누리고 있다면, 그건 불합리한 거잖아요. 그래서 지금도 같이 놀고, 시위하고, 연극하고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이산
최근 들어 활동하고 있는 반경이 성신여대 쪽 장애인배움터 너른마당이랑 성북마을극장을 벗어나서 전국으로 확대가 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썸머
네(환호성)!
이산
요즘 아주 바쁜 스케줄로 전국 투어를 다니다가 어제도 공연을 마친 다음, 지금 세 시간 정도 자고 이 자리에 왔는데요. 최근 하고 있는 공연 <우리 동네 왜 왔니>도 휠체어 장애인이 부동산을 돌아다니면서 집을 구할 때의 고충을 그린 거잖아요. 장애학교나 시설 같은 곳에서 공연하면서 장애인 관객들을 만나고 있고요. 어떻게 이 공연을 하게 된 건가요?
썸머
‘힘나는 예술여행’이라는 프로젝트 지원을 받아서 하고 있는 거예요. 주로 연극 같은 걸 접할 기회가 없는 분들이 관객으로 오시죠. 여러 동화를 합쳐서 이야기를 만든 공연이고, 저는 셋째 돼지 역할을 맡았어요. 그러면서도 저의 정체성인 드랙을 숨길 수가 없어서 드랙 돼지를 연기하게 됐죠. 화려하고, 보석도 많고, 이런 돼지인데, 지역에 사는 관객들이 그곳에서는 접하기 힘든 광경을 눈앞에서 보게 되는 거잖아요. 굉장히 놀란 표정, 그런 것들이 제 머릿속에 사진처럼 남아있어요. 흥이 많으신 분들하고는 같이 춤추고 노래도 부르고요. 연극이 끝나면 계속 앵콜도 나와요.
이산
관객들이 같이 즐길 수 있는 그런 공연이었군요?
썸머
네, 음악극 형식이었거든요. 이건 지원사업이 아니더라도 꾸준히 우리가 가져가야 할 지향성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산
우리가 분명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객석에서 공연을 보는 것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편견이 있는 것 같거든요. 실제로 만난 장애인 관객들은 어땠어요?
썸머
저도 처음에 갔을 때는 관객들이 너무 조용하고 집중력 있게 관찰하셔서, 편견의 무서움을 알게 됐어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신이 나서 같이 춤을 추시고,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곰 세 마리’ 노래를 갑자기 부르시는 분도 있었죠. 당연한 얘기지만 하나의 특징이나, 내가 알고 있는 어떤 한 사례를 기준으로 전체를 얘기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게 됐어요.
이산
따지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잖아요. 장애인도 모두 똑같은 스펙트럼 안에서 똑같은 인격과 자아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편협하고 단순한 생각인지 깨닫게 되는 거죠.
썸머
그래서 제가 MBTI를 싫어해요(웃음). 그런 틀에 사람을 가두고 싶지가 않아요.
이산
요즘엔 사람들이 그걸 가지고 너무 편을 가르고 다른 이들을 편견 안에 가둬버리더라고요. 심지어 어떤 회사에서는 특정 MBTI인 사람은 입사 지원이 불가하다는 채용 공지를 냈대요. 이런 세상에서 썸머 님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편견을 깨는 예술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정체성, 그리고 배우로서의 삶

썸머
원래 제 마인드는 ‘열심히 살지 말자’라는 주의인데, 살다 보니까 저 같은 사람이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산
네? (웃음) 인터뷰하는데, 전날 잠 세 시간 자고 옷을 만들어서 입고 왔으면서요?!
썸머
(웃음). 사진을 보시면 저의 룩을 알 수 있으실 텐데, 최근에 했던 <오즈의 로라>라는 작품으로 옷을 만들어봤어요. 사실 좀 슬픈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도 관객들이 많지 않았던 공연이어서 포스터가 너무 많이 남은 거예요. 근데 이걸 내 손으로 버릴 수가 없어서, 나의 연극인 정체성을 보여주는 그런 룩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치마랑, 종이배를 만들었죠.
본문사진3
이산
썸머 님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방향성, 목표는 어떤 건가요?
썸머
저는 꼭 연극인, 드랙 아티스트 이런 걸 나누고 싶지 않아요. 제가 하고 싶은 것들, 저를 필요로 하는 곳들, 저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들에서 저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고, 그런 기회들이 있으면 계속할 것 같아요. 산 님은 어때요?
이산
저의 앞날도 썸머 님이 가는 길과 비슷할 것 같아요. 저는 썸머 님을 통해서 많은 걸 알게 됐죠. 썸머 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평생 몰랐을 것들, 서보지 못했을 무대도 만났고요. 세상에 이렇게 연극을, 공연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어요. 내가 굉장히 좁은 틀 안에서 연극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학로 안에서 하는 것들이 좋은 연극인 줄 알았는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런 작업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연극을 만든다는 자부심도 있고요. 앞으로는 어떤 연극을 만들고 싶으세요?
썸머
저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삶, 화려한 삶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들이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어요. 노년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요. 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아도 저 같은 퀴어들이나 드랙하는 사람들이 좀 더 우리 일상에 함께 살고 있고, 오다가다 만나게 되는, 그런 캐릭터로 나오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깜짝 이벤트 같은 걸로 알게 되는 게 아니라, 밥 먹으러 가는 식당 주인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자그마한 역할일지라도 우리가 있다는, 우리도 그런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그런 연극을 하고 싶어요.
이산
성소수자, 퀴어, 장애인, 그리고 여러 차별받는 사람들, 혹은 정말 눈에 띄게 특별하거나 강력한 예술 작업을 연극계가 주목을 해온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았어요. 지금은 여러 방면의 예술들이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 같아요. 썸머 님이 보기엔 어때요?
썸머
그게 저는 조금은 양날의 검처럼 느껴지는데요. 저는, 배우로서의 삶과 드랙으로서의 삶이 더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드랙은 하면 할수록 이미지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배우로서의 캐스팅에 조금 한계가 생기고, 배우로서 특출한 게 없기 때문에 드랙을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한편으로 드랙을 안 하고 그냥 배우로서 활동했다면 이런 인터뷰가 안 들어왔을 것 같기도 해요. 근데 저는 두 개가 하나로 연결되는 작업을 하고 싶고, 드랙으로서, 퀴어로서, 배우의 길을 가는 사람으로 남고 싶고 그걸 해내고 싶어요.

공연에서의 당사자성에 대하여

썸머와 이산의 동료 코코넛이 대화에 합류한다.

코코넛
제가 생각하기에 요즘 공연이나 연극계에서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당사자성에 대한 문제 같아요. 사실 다른 예술 장르에서는 당사자성이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기도 하고, 한편으로 연극은 표현의 예술이기 때문에, 굳이 참여하는 구성원이 당사자여야 하는가, 이런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계에서 그 주제를 직접 삶으로써 표현하고 계신 분들이 하는 작업이 늘어나는 것 같은데, 그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게 꼭 필요한 작업인지, 그리고 그것이 기존의 공연과는 어떻게 다른지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썸머
사실 그런 역할을 연기하시는 분이 당사자인지 아닌지 분명히 보일 때가 있어요. 근데 최근에는 당사자가 아니라면 아예 그런 이슈를 다루지 않거나 당사자분들을 초청해서 하는 공연들이 많아졌다고 느껴요. 저는 후자가 더 좋은 방향성인 것 같긴 해요. 당사자성이 없는 분들의 연기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당사자분들의 눈빛이라든지 떨림, 그런 것들이 객석에 전해지거든요. 그 순간의 전율 같은 것이 있어요. 물론 그런 삶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품들이 많아지는 것도 중요한데, 저는 더 다양하고 다채로운 연극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작업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이산
일단 당사자성이라는 건 그런 거잖아요. 모두가 겪을 수 있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어느 정도 당사자만이 전달할 수 있는 주제라는 게 있는 거죠. 그리고 비당사자가 공연을 하게 될 경우, 의도를 했든 하지 않았든 누군가에겐 아주 큰 상처가 되거나 공격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작품을 만들 때 조심해야 하는 게 당연하고요. 예를 들어서 비장애인이 휠체어 장애인 역할을 연기하는 그런 연극을 본 적이 있어요. 근데 그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집중을 하는 게 아니라, 단지 장애인이기 때문에 불행한 모습으로만 그리는 거죠.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의 삶은 불행한가요? 이건 혐오고 무례이고 실례인 것 같아요. 비당사자가 무조건 그 주제를 표현해선 안 되고 손대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만, 아주 신중하게, 많은 분석과 질문을 구하고 공부를 해야 하는 거죠.
본문사진4
이산
코코넛
이전에는 좀 소재화되고, 일부 표면적인 특성만을 작품에 활용했던 그런 사례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요즘에는 당사자들을 직접 무대로 소환해서, 결코 타자화될 수 없는 그들의 삶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충분히 예술적으로 의미가 있는 작업들이 나오고 있다고 느껴요. 그런데 그분들이 활동할 수 있는 판을 만드는 것, 예를 들어 어떤 단체를 조직하거나 실질적으로 제작비를 마련하거나,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연극들과 마찬가지로 저희도 조금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업을 계속하시는 원동력이랄까요, 이런 걸 어디서 찾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썸머
사실 퀴어, 장애인분들이랑 작업할 때 정말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거든요. 그 순간들을 저는 기억하고 있어서, 제가 그런 걸 느꼈기 때문에 더 많은 분들이 그런 경험을 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감추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저도 계속 설 자리가 있을 것 같고요(웃음).
이산
우리 모두 서로의 밥줄을 위해서 으쌰으쌰(웃음)! 원동력이라고 말한다면, 뭔가 정말 경이로운 순간이 있어요. 연극 무대에 오르는 걸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온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할 수 있다, 연극을 해보자, 이렇게 무대에 올라서 공연이 끝나고 박수 받을 때 그 사람의 눈빛이 달라지는 게 느껴져요. 관객들도 공연을 보고 난 다음에 나도 할 수 있을까, 하고 물어본다든가, 몰랐던 이야기를 새롭게 알았다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런 순간들이 너무 귀하고 값지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런 순간들을 만나고 싶고, 선물하면서 선물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저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코코넛
코로나로 인해서, 특히나 소수자들에 대해 상호 간에 신뢰할 수 없는 상태로 문화가 바뀌어 버리는 일이 있었잖아요. 퀴어계에서도 그랬고요. 그래서 코로나 이후에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회복하고 공연으로 승화하고, 또 떠나갔던 동료들을 극장으로 다시 부를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런 주제로 같이 만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혹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같이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썸머
우선 굉장히 힘들게 코로나 2~3년을 보냈기 때문에 지쳐서 떠난 분들을 많이 봤어요. 지금은 상황이 조금 나아졌지만, 다시 돌아오기는 힘든 단계인 것 같아요. 그래서 우선은 자기 일상에서 조금 더 행복을 누리고 너무 급하지 않게, 정말 하지 않으면 안 될 때 같이 또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분들은 사명감을 갖고 계속해주시고,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또 같이 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이산
떠나간 사람들을 굳이 돌아오게 해야 할까요. 돌아와서 같이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사실 좋기만 한 건 아닌 것 같고요. 물론 문은 항상 열어놔요. 같이 작업을 하고 무대에 선다는 건 너무 멋진 일이잖아요. 그렇다고 네가 있어야만 해, 다시 돌아와야 한다, 우리랑 끝까지 같이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없어요. 다만 모두가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이 세계를 지키고 싶고, 그걸 지켜나가는 게 우리의 목표에요.
코코넛
코로나 팬데믹 동안, 사실은 그동안 자신이 비주류나 소수들과 전혀 상관없다고 느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코로나에 감염이 되고, 그 감염으로 인해 격리되고 눈총을 받고, 이런 경험을 했잖아요. 그동안 어떤 논리와 법률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부분들, 나의 선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난과 격리를 감내해야만 했던 정말 많은 소수자들의 상황들, 그런 것들을 전 세계가 한번 경험해봤다는 게 큰 의미인 것 같아요. 물론 그래서 우리가 이중 삼중으로 더 차별받는 일도 있었지만 이걸 앞으로 어떻게 예술적으로, 연극적으로, 퀴어적으로 표현할 것인가, 이런 이야기도 같이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이게 어떤 낙인이 되어서 그 사람의 잘못이라고 비난하는 상황으로 수렴되지 않게, 또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요.

연극, 단단한 관계, 풍요로운 삶

코코넛
지금 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연습실 여기저기서 공연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요. 연극은 공동작업이고, 그러다 보니 다른 예술 장르와 비교해서 감정 소비가 많기도 하고, 기록되지 않는 일회성이고, 이렇게 연극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징들이 있잖아요. 연극이라는 예술의 이런 특징하고, 본인이 표현하려는 세계가 얼마나 잘 맞는지 궁금해요.
썸머
일회성이라든지 그때 그 상황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그런 것들은 저랑 굉장히 잘 맞아요. 저는 기록되고 싶지 않고, 그때 그 기분은 나만 느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드랙도 똑같은 걸 한 적이 거의 없어요. 그때의 기분, 날씨, 상태, 혹은 그때의 피곤함, 이런 게 다 다르니까요. 물론 공동으로 창작에 참여한다는 것이 힘들기도 해요. 그래서 조심하고, 반성하려고 노력하고요. 우선은 제가 무언가를 잘못했다거나 틀렸다는 것에 대해 크게 두려움이 없어요. 저는 항상 잘못하고 있고,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어서요. 늘 배우려고 애쓰고 있어요.
본문사진5
썸머
코코넛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다 기록으로 남겨야 하고, 그게 내 필모그래피가 되어야 하고, 인정받아야 하고, 상도 받고 해외에도 나가야 하고, 사실 우리가 하는 작업이 이런 것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잖아요. 그래서 자기 신념이나 가치를 확인해주고 믿어주는 동료가 없으면 하기 힘든 작업 같기도 해요. 썸머 님에게 동료란 어떤 의미인지, 앞으로는 어떤 동료들을 만나고 싶으신지 듣고 싶어요.
썸머
저는 애초에 어떤 한 분을 만나게 돼서 그분을 통해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어요. 너무 좋은 분들을 만났죠. 동료들을 많이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지금 이 사람들로 충분하기도 하고요. 예전에는 많은 사람을 알고, 친해지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이런 마음이 컸었는데, 지금은 있는 사람들과 더 단단해지고 더 많은 일들을 하고 싶어요.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알아가게 되겠죠. 하지만 저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같이 작업할 수 있는 그룹을 만들 기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산
이제 웹진 독자 분들이 우리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실지, 썸머 님이 품고 있는 기대를 얘기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썸머
저는 연극을 한다는 것에 대해, 하나의 직업으로서 굉장히 리스펙트하고 멋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더더욱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그런 예술로 연극이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처음에는 누군가의 부탁으로 하우스 멘트를 할 기회가 있었고, 그걸 계기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거든요. 그 하우스 멘트를 했던 순간이 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거죠. 사실 굉장히 소심하고 남 앞에서 말도 잘 못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이후로 내 삶에 굉장한 변화가 찾아왔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연극이라든지, 그런 매체를 찾아서 시도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특히 저희 같은 퀴어는 굉장히 숨기는 데 익숙하고 감추는 데 타고난 사람들이잖아요. 하지만 자기를 잘 드러내면 일상도 바뀌어요. 저는 일상을 더 행복하게 살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연극을 하는 것 같아요.
이산
궁극적으로 보면 그게 정말 맞는 것 같아요. 행복하고 싶어서 연극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썸머
저도 정말 조용히 살고 어디 가도 눈에 안 띄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좀 더 과감하게 하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주목을 하는 거예요. 사실 이건 정말 별거 아니고 겉치장인데, 사람들이 나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해주는 게 어떨 때는 기분이 좋지만, 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고 살았다면 이런 관심을 평생 받지 못했겠구나, 그리고 그런 사람이 굉장히 많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저는 일상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사람한테 관심이 더 많이 가거든요. 모두 엄청난 것을 갖고 있지만 눈에 안 띌 뿐이죠. 우리가 겉모습을 가지고 누군가를 주목하고 이런 게 좋으면서도 싫어요.
코코넛
올해는 어떤 작업들을 계획 중에 계신가요?
썸머
일단 다른 공연팀에서 같이 연극을 하자고 연락을 주셔서, 지금 프로덕션이 꾸려지는 단계인 작업이 있고요. 퀴퍼(퀴어 퍼레이드)도 있기 때문에 기깔나게 나가야 하고, 여러 가지 행사가 있는데 너무 스포가 되니까, 그냥 스케줄 다 꽉 찼다고 생각해주시면(웃음)…
본문사진6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썸머X이산

썸머X이산
썸머
드랙과 공연을 통해서 소수자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퍼포머이자 배우. 편견 없는 몸과 표현을 지향한다. 요즘은 신체 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summer_ryumickey

이산
썸머와 더불어 드랙과 공연을 통해 함께 사는 세상을 표현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퍼포머, 배우, 연출. 요즘은 다양한 매체와 드랙이 만나는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two__mountain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