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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잘 모르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왜] 라소영 X 성수연

성수연

제223호

2022.10.13

[무엇을, 어떻게, 왜]는 배우이자 창작자인 성수연이 진행하는 대화입니다.
동시대 창작자들이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작업하며, 그 일을 왜 하는지 들어봅니다.

무대에 오를 때 배우는 자신의 존재가 그 무대에서 어떤 맥락을 발생시키는지 속속들이 알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각각 배우들에게 어떤 질문을 남기게 될까요? 배우들은 작업을 하며 갖게 된 질문들을 어떻게 다루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배우 라소영 님과 대화를 나눈 기록입니다.

성수연
안녕하세요(웃음).
라소영
안녕하십니까(웃음).
성수연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라소영 배우님을 보면서 다방면으로 다재다능하신 분 같다고 생각했어요.
라소영
(웃음) 다방면이요?
성수연
네(웃음). 초연 때는 배우로, 재연 때는 안무로 참여하셨던 <드랙x남장신사>(이하 <남장신사>), 올해 출연하셨던 <웰킨> 등을 중심으로 라소영 배우님께서 어떤 것들에 주목하시며 어떻게 작업하시는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먼저 <남장신사>. 저는 초연도 보고 재연도 봤는데 정말 좋았어요. 연습 과정에서 어떤 고민들을 하셨을지, 공연을 하면서는 어떠셨을지 궁금해요. 연극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직업연극인이 아닌 분들과 함께 작업한 과정은 어떠셨을지도요.
라소영
어려운 부분은 전혀 없었어요. 다만 직업연극인인 스태프와 배우들이 먼저 이것저것 살핀 부분은 있어요. 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배우들은 무대에서 자기 이야기를 할 때나 자신으로서 어떤 발언을 할 때, 이것이 어떻게 비치고 있으며 무엇을 발생시킬지 미리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분들은 자기 이야기가 연극 안에서 어떻게 보일지 가늠해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무엇이 발생하는지 본인은 알지 못한 채 무대에 그의 이야기가 올라가 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연출부와 배우들이 잘 살펴보려고 했어요.
성수연
그분들도 걱정을 많이 하셨나요?
라소영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신 순간도 있었고, 또 어떤 기억을 반복해서 떠올려야 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결국 이 공연을 보러오는 사람들이 누구일지에 대한 인식이 모두에게 명확하게 있었어요. 그래서 참여자분들이 ‘그들을 위해서 내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라는 마음으로 작업에 참여하셨다고 생각해요.
성수연
네. 배우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매 순간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졌었어요. 그것과는 별개로 또 무대에서 배우님이 굉장히 신나 보인다고 생각했어요(웃음).
라소영
제가 다시 깨달은 것이 있었어요. 저는 늘 콘서트를 하고 싶었거든요(웃음).
성수연
(박수) (웃음) (환호)
라소영
저의 오랜 꿈을 이룬 듯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 공연을 하고. 그래서 이번에 재공연할 때 배우로 참여하지 못해서 너무 질투가 났어요. 저 무대에 있었어야 되는데 (웃음).
성수연
이효진 무대감독님이 내 자리에(웃음).
라소영
너무 부러웠어요. ‘아! 저기 내가 있었어야 됐어’ (웃음) 연습 때 이효진 감독님이 걱정을 하시기에 저의 경험을 다 얘기해드렸어요. 콘서트 같을 거라고. 정말 행복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아” 하면 저쪽 객석에서 “아악!” 해줄 거라고(웃음). <남장신사>는 진짜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무대가 아닌가 해요. 교류겠죠. 일반적인 연극에서 경험하기 힘든 어떤 교류. 관객들이 나를 보러 온 건 아니지만, 뭔가를 보러 왔잖아요. 그것을 향해 진짜 무한한 환호와 애정을 보내줘요.
짧은 머리에 검은 테의 동그란 안경을 썼다. 청남방에 안에 하얀 티셔츠를 입었다.
라소영
성수연
그 이유가 구체적으로 뭐라고 생각하세요?
라소영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주제와 존재의 실현을 향한 애정 아닐까요? 누가 부치 얘기를 하냐고(웃음). 그리고 트위터에서나 밈으로 소비됐던 우리의 농담들을 아주 큰 극장에서, 모두가 듣는 곳에서 공유하는 재미요. 그 숭한 이야기들을.
성수연
숭한(웃음).
라소영
숭한. 남사스러운(웃음). 내가 집에서, 침대에서, 휴대폰 보면서 혼자 음침하게 낄낄대던 이야기들을 객석에 앉아서 다 같이 지금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저는 <남장신사>의 객석 에너지들은 거기에서 왔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걸 들으며 다 같이 웃어도 돼?’ 하면서도 옆 사람들을 힐끔 보며 웃게 되는 데서요.
성수연
웃으면 내 음침함을 들킬 것만 같아서 신경 쓰이긴 하지만 다 웃고 있으니까 상관없다, 이런 기분?
라소영
네. 얼마나 편안하겠어요. 어떤 곳에서는 음침하게 나만 웃어야 되는데 여기서 다 같이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성수연
맞아요. 사적으로만 나누던 농담을 공개적으로 나누는 야릇한 기분이기도 하고.
라소영
어쨌든 농담은 우리끼리 해야 농담이 되잖아요. 그런 자리가 되었던 거 아닐까요. 사실 결과적으로 관객들이 그걸 받아준 거지, 만드는 과정에선 확신할 수 없었어요. ‘이게 인사이드 조크가 될 수 있을까?’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면 어떡하냐’ 이런 얘기가 작업 과정에서 계속 있었어요. 어떤 농담이 불편하게 느껴졌을 당사자들이 객석에 분명히 있었을지도 몰라요. 관객들이 받아준 만큼의 자리가 되었던 것 같아요.
성수연
공연 중에도 그랬고, 공연이 끝난 후 극장 주변이 축제 같은 느낌이었어요. 퀴퍼 같고.
라소영
초연 때 그런 후기들을 봤어요. ‘세종문화회관에 왔는데 S씨어터를 어떻게 가는지를 몰라서 길을 헤매다가 대충 퀴어 같은 사람 따라갔더니 극장이 나왔다’, 뭐 이런(웃음). 이 공연은 퀴퍼 시즌에 해야 되는 공연인가 보다 싶기도 했고, 또 다른 축제가 하나 더 생긴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성수연
그런 공연 경험은 배우한테 소중한 것 같아요. 관객들에게 다 받아들여지고, 관객들과 잘 만나져서 내가 하는 것 이상의 엄청난 에너지들이 생기는 것을 느끼는 경험이요. 춤과 노래와 환호가 있고. 정말 좋을 것 같고, 저도 해보고 싶은 경험이에요. 재공연 계획은 없으세요?
라소영
한 번만 더 하고 싶어요. 대학로에 부치할 수 있는 배우 다 모여(웃음).
성수연
<드랙킹 콘테스트>도 하셨었고, <퍽킹 젠더>도 하셨었지요.
라소영
네. <퍽킹 젠더>에서 7분짜리 독백을 했는데 신효진 작가님께서 써주셨어요. 제가 부탁을 드렸거든요. 자신의 거시기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장난감 군인의 이야기였어요. 작가님께서 예전에 써두셨던 희곡에서 모티브를 얻었고요.
성수연
<라 하사의 임무>.
라소영
그 직전에 연극 <웃기는 어둠>에서 ‘라 하사’라는 역할을 했었거든요. <웃기는 어둠>의 의상 디자이너님께 부탁드려서 그때의 의상을 똑같이 입고 연기했어요.
성수연
<웃기는 어둠>의 라 하사가 다시 <퍽킹 젠더>에서 라 하사로 나타난 거네요.
라소영
네. 장난감 라 하사로.
성수연
재미있는 연결이네요.
라소영
그렇죠. <웃기는 어둠>은 독일 작품인데, 원작에서 제 역할은 그냥 남성 군인이에요. 저는 그간 ‘남성’ 역할에 캐스팅 된 적이 거의 없었어요. 남성 군인 역할에 제가 캐스팅이 되었을 때, 마땅히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부분들을 충분히 하지 못한 채, 대본에 쓰여진 장면을 만드는 단계로 돌입해서 아쉬움이 좀 남았어요.
그 과정에서 더 깊이 나누지 못했던 고민들을 <퍽킹 젠더> 팀에서 유쾌하게 담아내 주신 거예요. 딱 7분짜리 아기자기한 독백인데, 독백이라는 것을 오랜만에 해보기도 했고, 정말 재밌었어요. 거시기가 없는 군인 장난감이 ‘나의 남성성은 어디서 온 거야?’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난 그럴 필요가 없잖아?’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해요. 객석에서 볼 때 정말 성별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말을 들었는데 신기했어요. 정말 장난감인 것 같다는 말도 들었는데 특별히 장난감으로서의 액팅을 한 것이 없어요. 서사와 ‘갬성’만으로(웃음), 그런 표현이 되는 결과가 발생하는 게 재밌었어요.
성수연
장난감으로서의 움직임도 안 하셨고요?
라소영
네네. 장난감 총 정도가 소품으로 있었어요. 대사가 다 해줬죠. ‘왜 사탕 냄새가 나지, 총에서?’ 이런 식으로요.
성수연
그렇군요. 장난감 군인의 총이라 안에 사탕이 들어있었겠군요(웃음).
라소영
발바닥을 보면서 ‘메이드 인 차이나?’ 이런 대사도 하고요. 신효진 작가님의 유머가 통했고(웃음).
성수연
<웃기는 어둠>의 라 하사와 <퍽킹 젠더>의 라 하사가 동일 인물이 아니고 느낌만 차용한 것일지라도, 그 배역을 배우가 개인적으로 다시 함으로써 고민을 이어가고 풀어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시도라고 생각해요. 배우가 여러 작품들을 통과하며 갖게 되는 고민과 질문을 흘려버리지 않고, 배우 개인의 흐름으로 갈무리하는 아주 재미있는 예시라는 생각도 들어요.
팔꿈치까지 오는 긴 머리에 하늘색 티셔츠를 입었다.
성수연
라소영
마침 <웃기는 어둠>을 먼저 했고, 마침 <퍽킹 젠더>를 하게 됐고, 마침 신효진 작가님이 도와주셨고. 우연의 연속이었지만 정말 운이 좋았기에 할 수 있었어요.
성수연
라소영이라는 배우가 라 하사라는 남성 군인 배역을 맡았을 때 좀 더 깊이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를 결국 한 셈이네요. 배우와 배역의 젠더에 대해서는, 특히 의도적으로 그것을 일치시키지 않을 땐, 섬세하게 이야기를 잘 나누어야만 배우가 주체성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작품의 특성에 따라 나눠야 할 구체적인 이야기는 물론 다르겠지만요.
라소영
젠더 이슈와 별 관계가 없는 작품에 캐스팅 되어 공연을 하고, 공연이 다 끝난 후에 ‘사실은 당신을 캐스팅함으로써 젠더적인 어떤 미스핏한 감각을 노렸다, 염두에 두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경우도 꽤 있어요.
성수연
다 끝나고 난 후 그런 얘기를 들으면 어떠세요?
라소영
‘나는 몰랐어요!’ 이렇게 얘기하게 되는 거죠. 사실 꽤 많은 작품에서 그런 포지션이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내가 고민한 것은 없는 듯한 느낌이 남기도 해요. 직접적으로 퀴어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할 땐 과정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작품을 하면서, 연출이 어떤 식으로든 젠더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나를 캐스팅하고도 그걸 공유하지 않았다면, 나는 작업 과정에서 그런 부분을 한순간도 고민해보지 못했을 수 있으니까요. 나쁘게 말하면 그것을 논의하지 않음으로 인해 쉽고 편안한 어떤 아웃풋이 된 것 같다거나, 안전장치가 된 것 같은 느낌. 물론 좋게 말하면 저라는 배우가 아무런 장벽 없이 어떤 배역이든 맡아서 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마치 그걸 거래한 것 같은 찝찝함이 남을 때도 있었어요.
성수연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배우가 내가 갖고 있는 어떤 요소들이 공연에 어떻게 놓이고 있는지 알고 하는 것이랑 모르고 하는 것은 굉장히 다르니까요. 알고 하든 모르고 하든 딱히 연기가 크게 바뀌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주체적으로 운용하는 것과 그냥 놓이는 것은 다른 상황이 되니까.
라소영
예전에는 제가 먼저 제대로 묻지 못했다거나, 저도 모르고 했던 적도 있는 것 같아요.
이제는 할 수 있어요. 나를 왜 캐스팅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점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물어볼 수 있는데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성수연
<웰킨>을 할 땐 어떠셨나요? 저는 배우님이 연기하신 ‘매리 미들턴’이 재미있었어요. 저 사람은 2022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었으면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해보게 되기도 했어요.
라소영
맞아요. ‘이렇게까지 행동한다고?’ 싶기도 했죠.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웃음).
성수연
정체성을 인식하거나 드러내기 어려웠던 시대를 살고 있었던 퀴어일까 하는 상상도 해봤어요.
라소영
맞아요. 퀴어일까 그 생각도 했어요. 남편으로부터 어떤 가정폭력을 겪는다고만 나와 있긴 해요. 그 작품은 여성들이 가진 날것의, 야성적인 면모를 담고 있잖아요. 그런데 한국의 정서상, 혹은 사회 통념적인 정서상 그 부분이 다 담기지 않긴 했어요. 사람에게는 은밀한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마치 헐벗은 것 같은 솔직한 면모들이 있잖아요. 그것들을 더 많이 캐치하지 못한 것이 약간 아쉽네요. 그 당시에는 생각 못 했고 지금 얘기하면서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성수연
<웰킨>은 아무래도 등장인물이 많은데다가, 모두가 내내 등장해 있잖아요. 조금 더 중심서사에 있는 인물들은 대사량도 적지 않은 편이라 단서도 비교적 많았을 텐데, 다른 인물들은, 배우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단서를 찾거나 만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궁금했어요. 모든 인물들에게 중심이 되는 순간들이 부여되어 있었고, 메리 미들턴의 순간들도 인상적이었어요. 그 인물의 흐름을 만들 때 어떤 식으로 작업을 하셨어요?
라소영
많이들 그렇겠지만 <웰킨>에서도 인물의 전사를 찾는 작업 과정이 있었어요. 그것이 몸 상태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됐고, 극이 진행되는 동안 인물이 변화하는 포인트는 무조건 다른 인물로부터 온다는 기준을 잡았어요. 사실 저는 늦게까지 이거다 싶은 감각을 못 찾았었어요. 그러다 분장 디자이너님이 제 헤어 얘기를 해주시며 살짝 ‘어떤 사람인 것 같다’라고 얘기하셨을 때 크게 와닿았고 이후로 인물이 잡혔어요.
성수연
어떤 말이었나요?
라소영
노동자로서 되게 와일드하고 거칠고 지쳐 있고… 이런 말이었던 것 같은데, 그전까지 생각 못 했던 부분도 아닌데, 헤어의 형태와 함께 들으니 그 미묘한 텐션이 바로 떠오르더라고요. 아프로펌 같은 걸 하자고 하셨거든요. 너무 신기한 경험이었죠.
라소영
성수연
의상이나 헤어에 영향을 받아서 감각적으로 뭔가가 확 찾아지는 순간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라소영
굉장히 의지가 되는 부분이지요.
성수연
그런 것들을 연습 과정에서 더 많이 만나보는 게 배우에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과정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미투 이후에 안전한 창작환경을 만들자는 목적 하에 여러 노력들과 시도들이 있잖아요. 배우님도 여러 프로덕션을 오가면서 작업을 하시는데, 이런 부분이 현장에서 잘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라소영
시간이 흐르긴 흐른 것 같아요. 아직 뭘 많이 한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그 노력들을 피곤해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좀 의아해요. 결국 중요한 건 인성인가 싶기도 하고요(웃음). 같은 상황에 놓여 있어도 결국 행동은 개개인의 인성에 달려있기도 하니까. 사람마다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 연극에 대한 생각은 다 다를 테고, 또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다 모난 부분이 있는데, 결국 어떤 행동을 하느냐의 문제잖아요.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폭력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한가 싶고 확신이 없는 상황을 마주하면, 이건 결국 개인의 인성 문제인가 싶어질 때가 있어요.
성수연
맞아요. 여러 사람이 모여 연극 작업을 하다 보면 생각이 다름을 확인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물론 있겠지만,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인신공격을 하거나 상대에게 함부로 말하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요.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하는 바도 있고요. 더 안전한 환경을 만들려면 어떤 노력들이 필요할까요? 내부규약을 잘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져서 팀의 내부규약에 명시하지도 않은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기도 하니까요.
라소영
그게 결국 인성이라는 거죠(웃음). 지금 시점에서는, 백래쉬랄까? 아직 뭘 많이 한 것도 아닌데 피곤하다는 인식이 퍼지는 것부터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이, 성별 불문하고요. KTS 읽는 게 그렇게 피곤한 일인가? (웃음) ‘가능하면 모두가 모였을 때 함께 읽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도, 그냥 나눠주고 각자 읽어보자며 넘어가는 경우도 많잖아요. 지성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민주시민의 덕목이랄까, 인성을 갖춘 시민이 되려는 노력은 해야 되지 않을까요.
성수연
그렇네요. 인성을 갖춘 시민.
개인적인 질문을 좀 드리고 싶어요.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라소영
페미니즘 연극제에서 <이방연애>라는 작품을 할 때, 공연 중에 그 이야기 한 적이 있어요. 저는 드라마 <파리의 연인>을 보고 박신양 배우를 좋아하게 되었었어요. ‘그 땐’ 그랬습니다(웃음). 그래서 <바람의 화원>도 보게 됐는데, 거기서 문근영 배우가 연기한 ‘신윤복’ 역할이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저거 내가 해보고 싶다. 문근영 배우 왜 이렇게 잘해?’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사실 그 역할엔 좀 퀴어한 면이 있잖아요. 그 땐 퀴어로 정체화하기도 전이었는데, 감각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드라마의 대사를 적어서 혼자 해봤어요. 신윤복의 대사를요.
성수연
와, 그 대사 기억나세요?
라소영
아니요. 기억 안 나요. 제가 연습했던 대사는 기억 안 나고, 드라마의 명대사는 기억이 나요. 신윤복이 ‘정향’이라는 인물에게 플러팅을 하듯 “향기가 있어서 왔더니 꽃이 있군”.
성수연
캬. (기절)
라소영
신윤복이 자기 손을 돌로 막 찍다가 다친 손을 부여잡고 김홍도를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 인상이 깊었어요. 그때 배우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드라마를 다 보고 TV를 딱 끈 그 순간에 바로 혼자 결심을 해버린 거예요. 그 순간 미래를 쭉 그려보면서요(웃음). 그렇게 연기를 전공했고, 그러다 장우재 연출님을 만나 ‘극단 이와삼’에서 작업을 하며 지금까지 이렇게 연극을 하고 있어요.
성수연
혹시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작업이나, 연기를 할 때 좀 더 주목하고 있는 측면 혹은 지향하는 방향 같은 것들이 있으세요?
라소영
내 연기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계획은 없는데, 하고 싶은 것은 있어요. 속 시원한 것을 하고 싶어요. 요새 숨 막힐 때가 있어요. 제가 맡은 인물이 답답함을 느끼는 건지, 나와는 너무 다른 인물을 해야 돼서 제 속이 답답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남장신사>처럼 콘서트 같은, 마음껏 연기할 수 있는 공연을 하고 싶어요. 저의 어떤 특성과도 잘 어우러지는 역할을 하면서요.
저는 사회 통념상 조금 일반적이지 않은 역할을 맡는 경우가 꽤 있었어요. 그런 역할들에 저랑 잘 어우러지는 부분이 있을 때도 있고요. 그럴 때 누군가는 제가 연기를 쉽게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역할을 맡아도 부대낄 때가 있어요. 모든 배우가 인물을 만나기까지 부대끼잖아요. 나와 비슷한 인물을 하든 나와 다른 인물을 하든 연극 안에서 서사를 진행시키는 것은 똑같으니까요. 코 풀 듯이 (웃음) 쉽게 하는 작업은 없으니까. 그런데 저에 대해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성수연
(웃음) 왜일까요? 예를 들면 라 하사 같은 역할인가요? ‘저 배우는 보이쉬하니까 남자 역할 편하게 하겠지’ 이런 오해일까요?
라소영
네. 또 지금의 저로서는 오히려 여성성을 수행하는 편이 더 퀴어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나는 단지 사회 통념을 인물에 입히지 않았을 뿐인데, 물론 역으로 차용할 때도 있지만, 헤어가 짧고 치마를 입지 않았고 사회적 여성성을 수행하지 않았을 뿐인데, 아예 남성 인물을 연기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더라고요. 젠더 이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나 디테일하게 보지, 그렇지 않으면 <옥상 위 카우보이>를 보시고 “아들 아니었어?”(웃음) 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대사에 딸이라고 나왔는데도요(웃음). 또 앞서 말했던 ‘당신에게서 발생하는 미스핏한 감각을 노린 거였다’ 같은 경우도 있고요. 아직까지는 외적인 모습이나 의복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강력하다고 느껴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요. 다음 공연에서는 ‘아들’ 역할을 하는데 아예 장발로 등장해 볼까 봐요. 머리 짧다고 자꾸 남자로 본다면(웃음).
성수연
무슨 여자애가 남자 역할을 해! 이렇게 되려나요? 혹은 남자 역할이면 머리를 짧게 했어야지! (웃음)
성수연
라소영
모르겠네요. 저 자체를 그냥 머리 긴 남자로 보는 거 아닐까요? (박장대소)
성수연
또 해보고 싶은 것이 있으세요? 혹은 연극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지 궁금해요.
라소영
사실 최근엔 아는 것을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얼마 전에 공연한 <A·I·R 새가 먹던 사과를 먹는 사람>은 호불호가 엄청 나뉘는 작품이었는데, 저에게는 불호의 목소리가 너무 강하게 들렸어요. ‘모르는 것을 했나? 우리 자신도 잘 모르는 것을 무대에 올려놔서 관객들이 이렇게 반응하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분명히 해야 할 이야기인 듯한데, 안 좋은 반응을 얻는 건 괴로우니까 아는 이야기만 하고 싶다는 기분도 들었어요.
성수연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주제들이요?
라소영
네. 그렇지만 기후 위기도 그렇고, 온 지구촌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는 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긴 하거든요. 결국 배우로서 관심을 갖고 할 이야기는, 비록 잘 모르더라도 필요하다고 인식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긴 해요.
성수연
필요한 이야기.
라소영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도 좋지만, 다 알지 못하더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나,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이야기를 보여줄 때도 분명히 뭔가가 발생할 텐데. 그러기엔 우리 다 피곤한가? 살기가 힘든가? 모르는 것을 보거나 하기엔 삶이 빠듯한가? 이런 생각도 들고. 어디로 가면 될까요? 모르겠어요. 앞으로 뭘 하면 좋을지 제일 모르겠어요, 지금.
성수연
저도 지금 그렇습니다. 진짜 모르겠어요. 모르겠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얘기를 했네요(웃음).
오늘 시간 내주시고, 흥미로운 이야기 많이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깊이 나눠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잘 모르겠는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질문을 다섯 개씩 주고받으며 마무리를 해보면 어떨까요?
라소영
어렵네요(웃음).

라소영과 성수연, 서로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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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우리한테 필요한 이야기를 우리는 사실 기다리지 않는다면 어떡하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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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소영
(웃음) 연극은 왜 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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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연극을 볼 때도 할 때만큼 좋을 때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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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소영
보는 게 더 좋을 때가 있지 않아?
성수연
요즘 제일 안 보고 싶은 건 어떤 것들이야?
라소영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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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극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단 한 순간이라도, 같은 것을 보게 되는 순간이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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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소영
행복은 전달이 가능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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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누군가에게서 전달받은 행복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네가 연기한 어떤 인물의 변화 포인트가 무조건 다른 사람에게서 출발한 것이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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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소영
사람 좋아하니?
책상을 나란히 놓고 성수연과 라소영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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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파이리)

성수연(파이리) 본지 편집위원
배우, 창작자. 다양한 형태의 연극작업을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sooyeon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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