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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옆 천막극장 이야기

[연극인이 만난 사람] 원지영 X 박세환

원지영

제224호

2022.10.27

동춘서커스를 처음 방문했던 서너 달 전, 문득 노인 단체 관람객들 사이에서 공연을 보려고 어두운 객석에서 자리를 옮기려다 이어폰과 체크카드를 잃어버렸던 것이 생각났다. 이미 버려졌다고 했지만, 이른 시간의 공연 후 혼자 바닷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썰물의 모래사장을 걸었던 기억을 떠올리니 그곳은 훌쩍 다시 갈 수 있는 극장이었다. 낭만과 핑계를 뒤로 하고 인터뷰를 결심한 진짜 이유는, 이맘때 지난 연극 <재주는 곰이 부리고>를 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닷가 옆 천막극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첫 대사로 문을 열었던 이 공연은, 돌이킬 수 없는 독특한 즐거움이 있었으나 동시에 창작에 모종의 실패가 있다고 믿고, 길고 느리더라도 그 이야기를 다시 써야겠다고 결심하던 차였다. 그것을 위해선 바다 옆 천막극장에 가야 했다. 보랏빛 융단으로 둘러진 로비의 매점 앞, 온통 소란스러운 무대의 음악이 새어 나오는 가운데 극장 벽에 떼어다놓은 객석에 박세환 단장과 마주 앉았다.

옛날 옛적에

서커스는 한국 공연예술사에서 이미 뒤안길로 저물어간 장르인가 싶다가도, 해외 교류와 더불어 갑자기 많은 젊은 서커스 예술가들이 생겨나는 흐름 속에서 어쩐지 과거와 현재의 다리가 뚝 끊긴 느낌이었다. 이번 만남은 이 땅에서 과거로부터 서커스 문화를 만든 ‘아버지’와 대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원지영 연출과 박세환 단장이 극장 로비에 나란히 앉아 있다. 벽면은 보라색이고 의자는 청록색으로 색감이 화려하다. 원지영 연출은 노란색-남색의 다이아몬드가 교차하는 상의와 청바지를 입었고, “안녕” 하는 자세로 손을 든 채 카메라를 보고 있다. 박세환 단장은 하늘색 체크무늬 셔츠에 검정 자켓을 입었다. 두 사람 뒤로는 매점의 음료와 스낵 쇼케이스가 보인다.
지영
나의 서커스에 대한 관심은 여행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학로에서 나고 자라서 연극을 전공하고, 해외를 돌아다니다가 다른 나라의 예술가들을 만나고 인터뷰했다. 그중 몸과 도구에 집중하는 서커스 예술가들의 작업에 매료되었다.
마침 한국에 서커스 센터가 생긴다는 기사를 보고, 5년 전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를 찾아가 매일 기록작가와 통역으로 일을 하면서 서커스를 공부하게 되었다.
단장님은 1983년 스무 살 경 동춘서커스(이하 동춘)에 입단하셨다고 들었는데,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공연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동춘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나?
세환
아니다, 1963년에 동춘에 와서 1983년에 단장이 되었다. 막 TV가 생기던 시절이었고, 내가 극단 일을 시작한 지는 50년 되었다. 나는 경주의 이름 있는 집안의 종손으로 자라서 공부도 잘했는데 우연히 고등학교 때 악단에 들어가서 트럼펫을 불었다. 졸업할 때 즈음 악기를 불며 노래를 불러 1등도, 2등도 하면서 주목받았다. 배우와 가수가 되고 싶었는데 방법을 몰라 서커스단을 찾아가서 석 달을 따라다녔다.
수원 지동 미나리꽝에서 공연이 있었는데, 가보니까 제대로 하더라. 코끼리도, 낙타도, 침팬지도 있고.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를 약 10개의 서커스단이 이끌어왔다. 7시에 개막하면 마술과 서커스를, 8시부터 피크타임에는 <불효자는 웁니다> 같은 신파 연극을 했다. 마지막으로 9시 30분에서 10시 30분은 캉캉, 차차차 같은 버라이어티 쇼가 있었다. 우리가 알 만한 배삼룡, 백금녀 등이 나와 함께 동춘에 있었고, 1964~65년 TV가 생기면서 서커스단 배우들이 대부분 그리로 넘어갔다.
지영
연극이 쇼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었나?
세환
주된 것이 바로 연극이었다. 서커스 레퍼토리는 긴 연습이 필요해 자주 바뀔 수 없는 반면, 연극은 비교적 새로운 무대를 올리기가 쉬우니까 더 많은 손님을 끌기 위해 자주 바꿨다. 그런데 연습할 시간이 부족하니 뒤에서 읊어주고. 나도 처음에 무대 뒤에서 촛불을 들고 프롬프터를 쳤다.
지영
다들 TV로 가는데 왜 남아계셨나?
세환
당시 TV에서는 동춘에서 왔다고 하면 오디션도 필요 없었다. 검증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동춘의 주연급 배우들은 방송국에 갔다가도 성에 안 차서 그냥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무대 스타들은 견디기 어려웠던 거다. 빽도 있어야 되고, 돈 없는 사람은 배우도 못 했다. 동춘에서 엑스트라 코미디언이었거나 스태프를 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방송으로 가버렸다.
쇼, 연극, 사회자 파트를 내가 도맡아서 했다. (갑자기 당시의 사회자 대사를 그대로 재현하며) “서독 서커스가 똑같은 묘기를 보여줄 때 여러분은 과연 저것이 사람이냐 귀신이냐 손바닥이 째져라 박수를 쳤던 묘기! 여기 백의민족에게 똑같은 묘기를 보여주는데 박수 한 점 치지 않고 가만히 계신 분은 인정도, 사정도, 피도 눈물도, 애국심도 없는 사람입니드아!!!!” (입에다 손을 집어넣고 원맨쇼를 재현하다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산유화’ 등 당시 유행했던 가수들의 노래를 부른다.)

천막 아래의 삶

지영
공연을 위한 ‘유랑’을 상상하니 재미있다. 공연을 만들기 위한 극장을 직접 짓는 것이니까. 대부분의 공연예술은 실내 공연 시설이 갖춰진 곳에서 상연되고, 일상공간으로 침투하거나 혹은 거리로 나아가기도 한다. 즉, 물질적 극장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일은 드물다. 내가 동춘에서 가장 흥미롭게 생각했던 부분이 ‘직접 공연장을 짓는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극장이 만들어지는 그 자체가 공연이 되는 연극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상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장님에게 천막은 어떤 공간인지 궁금하다.
세환
천막을 만들기 위해 땅 구하고, 허가 내고, 포스터 붙이고, 전단 뿌리고. 한 번 이동하면 대형트럭 10~12대가 움직인다. 무대는 단원들이 직접 짓는다. 13m 높이의 아시바를 무대로 지었는데, 요즘엔 파이프를 쓰지만 예전에는 나무로 그것을 모두 지었다. 24자(약 8m)짜리의 소나무가 서로서로 엉킨다. 천막이 완성되면, 뚜껑이 없는 화물차에 악사들을 실어서 ‘딴딴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하고 코끼리도 데리고 다니면서 홍보 방송을 하는 거다. 그렇게 건물 짓고, 떠돌아다니고 하다가 태풍이 오면 팍삭 망한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거다. 콩나물 국물에 밥만 말아 먹고, 고생 직사게 하고 국수 먹으면서 한 달 견디고 그랬다. 또 그러다가 날씨 따라 다른 곳으로 옮기면 잘 될 때가 있다. 이것이 유랑극단의 취약점이다.
한적한 도로 너머로 파란색과 노란색의 줄무늬가 교차하는 천막극장이 보인다. 천막극장 바깥쪽 담장에 동춘서커스의 각종 홍보물들이 빼곡히 붙어있다.
지영
무엇보다 기후와 밀접하게 연결되었겠다. 계절마다 공연이 가능한 장소를 찾아다녔다니 흥미롭다.
세환
봄에는 농번기가 있고, 여름은 더위, 폭풍에 겨울엔 눈보라. 국토 작고, 인구 적고. 우리나라는 유랑공연을 하기 힘든 나라다. 남쪽 전라도는 여름에 비바람과 태풍이 많아 가면 안 된다. 겨울에는 강원도로 가면 춥고 일조 기간이 짧아서 어렵고…. 제주도에는 밀감 철에 가면 더 바쁘다. 밀감이 생기기 전에 가야지.
지영
한편 공연을 위한 천막 옆에 또 숙식을 위한 천막이 있지 않나. 공연장 뒤에 또 다른 삶이 펼쳐지는 것일 텐데. 그때의 생활이 어떻게 병행되었는지 궁금하다.
세환
깨끗한 사람들은 민박을 했다. 시골집 방 네 칸 집에 두 칸 빌리는 거다. 나무 떼는 방이면 동네에서 마을목 훔쳐다가 떼기도 하고. 나무하러 다니고 그랬다. 보통 일하는 잡부들은 무대 위에서 많이 잤다. 무대 위에 카페트를 깔고 가마니로 이불을 덮는다. 부부들은 무대 밑에다가 방을 만들어준다.
현재 대부도에서는 천막과 떨어진 곳에 방 15칸짜리 기숙사가 있어 그곳에 모여 산다.
지영
혈연도 아닌데 마치 가족이나 마찬가지로 보인다.
세환
가족 같은 게 아니라 가족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나를 ‘아버지’라고 했다. 요사이 단장님, 그리고선 대표라고 불리게 된 거다. 가령 객지에 온 단원이 사고를 쳤다, 부부간에 애기가 생겼는데 거꾸로 나올 참이다, 그 상황에 누가 가나. 단장이 갈 수밖에 없는 거다. 여기는 하루살이인 사람이 많아 낭비벽도 심하다. 그것을 돌보는 것이니 부모인 셈이다. 고아들, 집 나온 사람들에게 서커스 가르치고, 노래 가르치고, 음향, 조명 가르치고. 부모보다 낫다.
지영
그러게, 서커스를 둘러싼 괴담들이 많지 않나. 고아에 관련한, 그리고 연고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다. 정말인가?
세환
헛소문이 많았다. 그런데 실제로 6.25 사변 직후에는 그런 고아들이 많았다. 북쪽에서 온 사람도 많이 있었는데, 실향민인 故 송해 역시 동춘에 왔다 갔었다. 고아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부모가 있는 경우도 있었고.
아크로바틱을 하고 허리를 꺾으면, 저건 서커스단에서 식초물을 먹여 허리가 녹아서 그렇다는 소문도 돌았다.
지영
현재 동춘서커스의 구성원들은 국적이 어떻게 되나?
세환
중국 사람들이다. 현재 25명 중 한국인은 5~6명뿐이다. 중국인 기예자가 많은 건 세계적인 흐름이다. 가령 여기서 300만 원을 벌어도 중국보다 훨씬 임금이 높으니까. 공연하는 사람들을 위한 E-6 비자를 모두 내어준다.
지영
안전사고에 예민한 장르이다. 어찌 보면 서커스는 공연자의 죽음을 담보로 한 예술이기도 하다. 서커스 공연과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사고를 많이 겪어보았나?
세환
많다. 옛날에는 다쳐서 죽기도 했다. 동물들도 죽고. 그만큼 안전에 신경을 쓴다. 근래에 사망사고는 없다. 야구선수, 축구선수들이 부상을 당하는 정도의 안전사고는 생긴다. 요사이는 4대 보험이나 의료보험이 있어서 괜찮지만, 예전에는 사고가 한 번 나면 그걸 감수하려 단체가 망했다.

산업 현장으로 간 서커스

지영
나는 현재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이 많고, 앞으로의 공연에서 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사판과 산업현장에서 갖추어진 안전망 밖의 노동이 오히려 내게는 서커스로 보이기 때문이다.
공연 <재주는 곰이 부리고>를 통해 이 지점에 대해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고민했었다. 한편 그 공연에 서커스에 대한 괴담의 역사를 다루는 장면이 있었다. 프랑스의 에펠탑 공사 현장에 높은 곳을 올라갔던 인부들이 서커스 기예자들이었다는 도시 괴담을 담은 장면을 만든 적이 있다.
세환
그건 도시 괴담이 아니라 실제다. 한국 역시, 롯데월드를 지을 때 조명을 거는 십몇 층 높이의 아치탑에 서커스 하는 사람들이 올라갔다. 여수에 있는 석유 화학공장에 큰 연통도 서커스 사람들이 다 설치한 것이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도 실제로 동춘서커스 단원들이 많다.
지영
서커스와 삼성 반도체 공장이라니
세환
산업 현장에는 위험에 대비한 2인 1조 규율이나 휴식 등의 안전 규정이 있고, 그건 서커스 무대의 환경과는 분명 다르다. 여기서 더 고생했으니 그 정도야 너무 쉬운 일인 거다. 반도체 분야에 일이 많다. 새로운 칩 하나만 바뀌어도 기계가 다 바뀌는데 그것이 몇 달에 한 번씩 바뀐다. 서커스 하다가 더 이상 무대에 서지 않으면 거기에서 일을 해도 돈을 많이 번다.
지영
현업을 하면서 산업 현장에서 투잡으로 뛰는 경우가 많은가?
세환
그보다는 주로 30대 경에 은퇴하고 간다. 돈이 필요하거나, 결혼한 경우이다. 물론 장가를 가더라도 부인도 재주 하고 남편도 재주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럼 돈을 많이 번다.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적게 번다. 예를 들어 남자가 250만 원 벌면 여자는 200만 원 번다.
서커스 무대에 더 이상 서지 않을 때는 여자들은 결혼을 하고, 남자들은 나이 들면 마술을 배우면 된다. 음향, 조명을 전문적으로 배우거나. ‘도비’라고 한다. 일본어다. 건축과 무대용어는 아직도 일본용어를 많이 쓴다. 줄타기는 ‘하리가네’ 라고 한다. 전기도 다루고 천막 설치가 가능한 무대 밖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서커스 월급을 받으면서도 ‘싱코비’(특별수당)를 현금으로 더 준다.
박세환 단장 사진이다. 하늘색 체크무늬 셔츠와 검정색 자켓을 입었다.
박세환

박제된 동물들과 서커스 박물관

지영
동물과의 관계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일 테다. 동물들과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 언제부터 사라졌나.
세환
코끼리, 호랑이, 곰 전부 박제해서 창고에 넣어두었다. 대만 서커스가 한국에 와서 망한 후 코끼리, 사자, 침팬지를 샀다. 한국은 전문성이 없어서 외국에서 훈련이 된 동물들을 데려왔다. 코끼리가 죽었을 때 치료하는 방법을 몰라 서울대공원의 동물원 원장이자 수의학 박사에게까지 문의했다. 서울대 수의학과도 해결을 못 해 미국으로 문의해 링거를 양 귀에 하나, 발목에 하나 꽂고. 그랬던 코끼리를 겨울 땅에 묻었다. 도저히 눈에 삼삼한 게 아른거려서 너무 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지나갈 때 코끼리가 치면 사람이 날아갈 정도이지만, 내가 지나가면 (코끼리 흉내를 내며) 코를 부드럽게 비틀면서 좋아한다. 코를 말아서 몸에 딱 얹고 서로 쳐다보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동물은 사람보다 더… 나를 따른다. 눈에 밟혔다. 잘못했다간 누가 코끼리를 가져가서 고기로 해 먹을까 봐 걱정이 들었다.
땅에 묻혀 있던 코끼리를 다시 꺼내어 박제했다. 껍질 안에 알루미늄으로 본을 뜨고, 머리는 뼈로 그대로 쓰고. 상아는 나무로 깎아서 만들고, 발 네 개의 뼈는 그대로 두었다. 그 이후부터는 죽은 동물은 모두 박제한다.
지영
무대에서 동물들이 사라졌듯이, 서커스 문화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를 겪고 있다. 근래 한국에 등장한 ‘현대 서커스’의 창작 환경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세환
서울문화재단의 광진구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 회의도 여러 차례 했다. 서커스 아카데미를 만드는 데에 지원을 요청했고, 전용 극장도 만드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게 잘 안됐다. 지속적으로 지자체, 문화체육관광부에 알아보고 서커스를 문화유산으로 남길 방법을 고민하는 중이다. 재단에서 혜택을 받는 신진 예술가들이 있지만 극소수라고 생각한다. 나는 20~30인으로 구성된 시립 수준의 단체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팀이 되려면 서커스 학교가 있어야 한다. 20명의 소외된 사람들, 연고 없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가르쳐서 팀을 짜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서울시립서커스단에서 어린 시절부터 월급을 받으면서 훈련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영
축제 등에서 젊은 서커스 창작자들의 공연을 볼 때의 감상은 어땠나?
세환
진짜 제대로 된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본을 만드는 데에 최소 2년이 걸리는데 기초체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기예 속에 다른 장르나 국악 등을 끼워 넣어 서커스라기보단 연기나 퍼포먼스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노하우가 많은데, 그쪽과 은근히 경쟁구도가 되다 보니 어떤 밧줄을 써야 하는지, 어떤 설치를 해야 하는지 속 시원히 알려주지 못해 아쉬웠다.
지영
동춘서커스가 ‘옛날 서커스’라는 인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세환
나는 ‘서커스는 서커스다워야 한다’고 본다. <태양의 서커스>도 뜯어보면 9~10종류의 기예밖에 없다. 나머지는 화려한 쇼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적어도 15~16가지의 기예를 한다. 나는 한국곡예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사명감을 가지고 볼쇼이부터 여러 서커스단을 본다. 서커스답다는 것은, 체력과 체조적인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태양의 서커스>와 비교하자면 한국에서는 우리 서커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부족하다.
지영
결국 우리는 서커스라는 수입된 용어를 쓰고 있는데, 사실 그 시절이면 남사당패에서 넘어오신 분들도 많은데 어쩌다가 ‘서커스’라고 부르게 되었나. 다른 명칭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안 드는지?
세환
서커스는 서클(circle), 로마의 원형무대로부터 온 단어인데 우리에게는 ‘마당’인 셈이다. 이 명칭을 이어받은 것이다. 북한은 ‘교예’, 중국은 ‘기예’, 원래 한국은 ‘곡예’라고 불렀다.
지영
지금 이 극단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세환
경영력이 필요하다. 인력은 보통 내가 직접 섭외를 하기도 하고, 예전에는 예술 관련 대학원생들도 있었다.
극단을 이끌어가려면 재력, 대담성, 대화법, 전기, 음향, 시설, 조명, 홍보, 인터넷. 이런 분야를 앞서가야 한다. 팝콘도 튀길 줄 알아야 하고. 현재는 사회도 배우고, 진행도 배우고, 홍보 기획도 배울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면 기술적인 일을 위해 나중에 높은 데 올라갈 줄도 배워야 하고. 옛날엔 한 번 극단에 들어오면 보통 10년 넘게 있었다. 지금은 인건비가 비싼 시대니까 필요한 사람만 소수로 찾아서 가르친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운영하기 좋도록 만들고 있다. 땅도 있고 건물도 우리 것이니 어떻게 명맥을 유지할지 계획 중이다.
지영
단장님이 죽고 난 뒤 동춘서커스의 명맥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마지막 꿈이 궁금하다.
세환
동춘서커스 기념관. 우리나라 서커스 문화 기념관이다. 가령 30~50년 전의 색소폰은 굉장히 크다. 옛날 기타도. 엄청 모아 두었다. 그때 단장이 타고 다니던 지프차, 모아둔 것을 박물관에 전시하고 싶다. 아직 어디에 열지 모르겠다.
기록을 학술적으로 남기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 (- 2013년 출간된 연구자 하야시 후미키의 동춘서커스 연구자료가 있지 않은가?) 외국인에게 모든 노하우를 전할 수는 없었다. 재단을 만들든지 법인을 만들든지 지원을 받아서 기록을 남기고 싶다.
현재 대부도에서는 12년째 동춘서커스를 운영 중이다. 나는 600석 이하 극장에서는 공연 안 한다. 무대에 서면, 관객들 머리 사이로 눈만 보인다. 바글바글한 인산인해를 이룬다. 공연을 열심히 만들어서, 향후 서커스 기념관을 건립하고 싶다.
동춘서커스 포스터가 네 장씩 두 줄로 붙어있는 벽면이다. 가장 오래된 포스터는 1998년의 것이고, 가장 최근의 포스터는 2022년의 것이다. 각 포스터에 따라 시대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오래된 포스터에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반면, 최근의 포스터는 기예를 하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2022년의 포스터는 천막극장을 원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단순한 구성이다.

인터뷰 말미에 나는 어느새 관객들에게 화장실을 안내하고 있었다. 하도 많은 관객들이 천막 로비를 지나며 대화에 침투했기 때문이다. 박세환 단장의 차를 얻어 타고 나오며 섬에서 멀어질 때에서야, 내가 하고 싶은 작업들을 조금 털어놓을 수 있었다.

실은 지면으로 옮기지 못한 이야기가 더 많다. 그 말은 즉, 경탄의 무대 뒤로 과거 한국 서커스가 가진 그늘과 모순이 선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서커스는 죽음 그 자체이자, 언급조차 하기 싫은 생의 아픔일 것이다. 하여 이 만남은 대중들의 머릿속에 과거부터 대상화된 서커스의 관습을 확인하는 동시에, 무대의 산증인을 통해 그 선입견의 틈새를 들여다 본 시간이기도 하였다. 문화의 박제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겨울땅 동물의 주검을 파내는 그리움이 존재한다는 것.

한편, 인터뷰 대상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수소문에 멈추었던 무대의 사람들이 있다. 다음 기회가 있다면, 위태로운 무대에서 자신의 언어를 감춘 주체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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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지영

원지영
극장의 안과 밖, 어쩐지 연극과 멀리 있는 것들이 연극이 되어가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연출자로, 관객으로, 기록 작가로, 통역자로 자리를 바꾸어가며 무대 가까이에 있습니다. 서커스와 연결한 작업으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영원한 해변>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도 ‘원의 안과 밖’에서 공연을 만드는 중입니다.
onejooyool@gmail.com

박세환

박세환
1963년부터 연극, 극장쑈, 서커스 등 천막에서 50년간 외길인생을 걸어온 동춘서커스의 단장이다. 주로 서커스 무대의 사회자로, 배우 겸 가수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동춘서커스진흥원 대표, 한국곡예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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