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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 모르는 것까지 말하게 될까 봐

[무엇을, 어떻게, 왜] 유은숙 X 성수연

성수연

제227호

2022.12.08

[무엇을, 어떻게, 왜]는 배우이자 창작자인 성수연이 진행하는 대화입니다.
동시대 창작자들이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작업하며, 그 일을 왜 하는지 들어봅니다.

저는 종종 기존의 제 관점이 순식간에 뒤집히는 짜릿한 경험을 합니다. ‘몰카금지’라는 말이 ‘불법촬영금지’라는 말로 바뀌었을 때, ‘애완동물’이라는 말이 ‘반려동물’이라는 말로 바뀌었을 때, 그리고 한 연습실에서 나의 행동을 ‘내가 필통에서 펜을 꺼낸다’가 아니라 ‘펜이 필통에서 꺼내지게 만든다’라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런 경험을 했어요. 배우는 연기를 통해 바뀐 관점을 삶에 어떻게 적용시킬까요? 삶을 통해 갖게 된 관점을 연기에 어떻게 적용시킬까요?
배우 유은숙 님과 대화를 나눈 기록입니다.

성수연
안녕하세요(웃음).
유은숙
안녕하세요(웃음).
성수연
예전부터 배우님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꽤 오래전에 강량원 연출님께서 진행하셨던 ‘플레이업 아카데미’ 때 배우님을 처음 뵈었었죠. 그 당시 ‘신체행동으로 설계하는 연기기술’이라는 이름으로 극단 동의 연기기술을 배웠는데, 저에게 정말 즐겁고 충만했던 시간이었어요. 함께 듣던 배우들과도 쉬는 시간 내내 이야기를 나누고, 당시 진행을 돕고 계셨던 유은숙 배우님과 김석주 배우님께 끊임없이 이것저것 묻기도 했었지요(웃음). 그 후 극단 동의 공연을 볼 때면 ‘아~ 수업에서 들었던 내용이 이렇게 반영되는구나!’ 이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그 후 시간이 꽤 흘렀는데, 극단 동의 화두는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어요. 배우님이 정말 멋져 보이고, 막연하게 꼭 도 닦는 사람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유은숙
극단 동 사람들에 대한 그런 인식이 있는 것 같아요. 도 닦는…(웃음)
성수연
(웃음) 그럴 수도 있어요. 또 한편으로는 연기하실 때 재밌고 웃긴 순간도 많이 봐서 ‘저분 약간 도 닦는 느낌도 있지만 알고 보면 웃긴 사람일 것 같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만나서 얘기해보고 싶다고(웃음).
유은숙
감사합니다(웃음). 아마 그 아카데미 땐 ‘행동’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주요하게 공유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사물에 대한 행동, 몸에 대한 행동, 내적 행동, 사람에 대한 말과 신체행동, 이런 식으로 구분해서 접근했었고요. 그 이후엔 ‘행동’을 좀 의지적인 개념으로 보고, 무의식과 제스처에 관한 연구를 했어요. 물론 그 아카데미 때도 ‘내가 커피잔을 든다’가 아니라 ‘커피잔 손잡이가 손에 잡히게 만든다, 커피가 내 입속으로 들어오게 만든다’라는 식으로 행동의 주체를 나 바깥에 두려는 방식으로 생각을 했었잖아요.
성수연
기억납니다. 아, ‘플레이업 아카데미’ 때의 냄새가 지금 느껴지네요.
유은숙
그때는 어떤 ‘행동’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제2의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제스처’라고 말했었는데, 지금은 우리가 의지적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그 많은 행동들이 결국 다 ‘제스처’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어요. 지금 내가 의지적으로 하는 행동이라고 인식하는 것들도 사실 이 순간 수많은 다른 작용들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기에, 또한 이전의 어떤 경험과도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나오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내가 ‘나’라는 ‘주체’로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는 ‘행동’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행동 하나와 연결된 이전의 세계들, 어쩌면 이 행동을 통해 나타날 이후의 세계들과도 연결된 상태로 존재한다고 해야 할까요? 어떻게 보면 예전보다 훨씬 더 그 인물의 시간을 길게 혹은 넓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배우 유은숙과 성수연 마주 앉아있다. 성수연의 뒷모습이 보이고, 유은숙은 오른손엔 커피 컵을 들고, 왼손을 쭉 뻗은 채 이야기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빛이 어둡고, 둥근 하얀색 테이블이 네 개 나란히 놓여있는 공간이다.
성수연
그런 세계관 혹은 연기관을 지칭하는 용어가 있나요?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자주 쓰는.
유은숙
그때는 행동에 있어서 ‘대상’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면, 지금은 ‘물리성’, ‘작용’, ‘세계’ 이런 말들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 순간 당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물리적 힘, 그러니까 작용은 무엇인가?’, ‘당신의 인물은 어떤 세계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리고 ‘오직 그 바깥의 작용에 자신을 완전히 열어 놓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랄까요?
성수연
아까 잠깐 커피잔을 예로 드셨는데, 저도 ‘내가 커피를 마신다’가 아니라 ‘커피가 내 목구멍으로 넘어가게 만든다’처럼 어떤 행동을 기존과는 다른 문법으로 말하던 것이 정말 좋았어요. 그것이 수행단계에서 잘 되고 되지 않고를 떠나서, 그 자체가 배우의 주의집중을 자기 바깥으로 옮기는 데에 좋은 관점이라고 생각했고요. 배우가 자신의 주의집중을 자신의 외부로 보내고, 그것을 통해 만나게 되는 세계와 작용하는 것은 정말 많은 것을 확장하는 일이 된다고도 생각했어요. 잘 해내려면 훈련도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행동의 단위를 나누어 각 단위 안에서 어떤 작용들이 이뤄지는지 설계했던 기억도 나요. 캐릭터 구현이라는 것이 막연한 성격 분석이 아니라, 이런 설계를 통해서 이뤄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같은 행동을 두고도 사람마다 단위를 나누는 기준도 다를 테고 각 단위 안에서 만나는 작용도 다르게 설계할 테니까요. 인물이 이 세계에서 받고 있는 여러 작용들을 찾아내고 만나며 연기를 하는 일은 배우 개개인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완전히 닿아있는 일일 것 같아요. 배우가 이 세계를 얼마나 많이, 얼마나 깊게 보고 있으며 또 그것을 얼마나 갈무리하고 있는가에 따라 연기의 설계가 달라질 테니까요. 삶과 연기가 완전히 연결되어 있는…(웃음)
유은숙
그렇게 되면 좋은데(웃음). 이런 것들을 공부할 때, 특히 책을 읽을 때면 굉장히 충만해지는 순간이 있거든요. ‘주체가 나 자신이 아니다, 인간 중심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사물과 동물과 이 세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내 시각을 지구 밖 우주로 확장시켰을 때 모든 존재는 다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 속에서 내가 움직이게 되고 나뿐 아니라 모든 존재들은 그렇다. 다중주체, 다중우주…’ 이런 시각으로 보면 굉장히 충만해지는 때가 있어요. 그런데 막상 생활할 때는(웃음). 저 같은 경우에는 그 괴리감에서 비롯되는 깊은 좌절감도 있어요(웃음).
성수연
(웃음) 그렇군요.
유은숙
나는 왜 연기할 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일상에서는 내가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고민을 하는 걸까(웃음). 내가 너무 내 중심으로 어떤 일을 해결하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기기도 해요. 연극을 연습하는 시간보다는 일상을 살아가는 시간이 훨씬 많기 때문에, 어떤 생각들을 삶 속에서 실천해야 연습에서도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연기를 할 때 하는 말처럼, 내가 일상에서 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세계와 연결된 무의식이고, 습관이고, 제스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 것 같고요.
성수연
저도 최근 여러 질문들을 갖고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인간이 어떻게 인간중심적이지 않은 사고를 할 수 있을까?’예요. ‘아마 안 될 거야’라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주체가 내가 아니라는 개념이 정말 좋은데, 연기할 때 그게 진짜로 되나요? 될 수 있나요? 물론 되는 ‘순간’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지속이 되나요? ‘아마 안 될 거야’라고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가르침을 주십시오(웃음).
유은숙
아니에요. 저도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 할 때, 내가 주체가 아닌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나 그 사람 중심으로 뭔가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저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른다’라는 전제를 세우되, 그 위에서 최대한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그 사람을 향한 진정한 호기심을 갖는 것에서 출발해보는 거죠. 어떻게 보면 주체를 저쪽으로 옮긴다는 것은 ‘내가 없다’가 아니라 ‘나는 최대한 저 존재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일 수도 있겠어요. 그런 노력 안에서 그 존재가 만나는 세계를 배열해보고, 마치 내가 그 존재를 안다는 듯이 연기하지 않는 것이요. 그래서 아마 단위와 단위 사이를 너무 의지적으로 연결시키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되면 인물에 대한 설계 자체가 ‘내가 이 인물을 이해했다!’, ‘이 인물은 이렇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연기를 하다 보면 자꾸 나도 모르게 마치 안다는 듯이 사이를 꽉 채워서 ‘이런 거야!’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 같아요.
성수연
주장을 하지 않는 게 좋은 이유는 뭘까요?
유은숙
어떤 주장은 뭔가를 단정 지어 버린다고 해야 될까요? 어쩌면 연기의 설계, 단위의 설계 자체가 이미 인물에 대한 나의 이해에서 비롯된 완벽한 나의 주장일 수 있으니까, 실행할 때는 좀 사이 안에 던져둔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이가 다 채워지면 주장이 더 강해져서 강요가 되기도 할 텐데, 나도 모르게 그런 일을 자꾸 하게 되니까, 내가 잘 모르는 것까지 말하게 된다고 해야 될까요?
배우 유은숙의 웃는 옆모습.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머리에, 검은색 상의를 입고, 회색 바지를 입었다. 책상다리를 하고 회색 패브릭 소파에 앉아있다.
유은숙
성수연
와닿는 말이네요. 뭔가를 단정 지어 버리면 잘 모르는 것까지 말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마치 아는 것처럼.
유은숙
네. 한순간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해서 잘 모르던 것을 문득 알게 되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런 것은 좋다고 생각하는데, 한 끗 차이로 잘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되기도 할 테고… 잘 모르겠어요. 배우들은 다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요. 억지로 더 노력하면서 더 잘 안 되는 경우도 있잖아요.
성수연
네. 너무 애쓰다가 오히려 수렁으로 빠지는…(웃음) 단위와 단위 사이를 비워놓는다는 말이 참 좋네요. 대신 그 단위 안에 있을 때는 정확한 것들을 해야겠지요? 적어도 내가 설계한 단위니까요.
유은숙
네. 작용으로 존재하니까요. 이 단위의 작용, 그다음 단위의 작용, 이런 식으로 작용과 만나며 존재하는 것이죠.
성수연
단위와 단위 사이를 연결할 때 어떤 것들을 꽉 채우려고 하지 않아도.
유은숙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그 사이를 자꾸 ‘채우려고’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스스로 당장 알아채지 못하는 깊은 이해 속에서 나도 모르게 ‘채워지는’ 순간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식의 연결은 좋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사이를 어떤 식으로든 연결하지 않으려고 해요. 어떤 존재가 존재하는 방식을 ‘그 존재에게 작용하는 여러 세계들의 총합’으로 보기 때문에요.
성수연
재밌어요.
유은숙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하고 더 알게 되네요. 왜 작업에서는 이렇게 하지 못했지? (웃음) 수연 배우님이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시고, 질문들을 통해 이야기를 끌어내 주시니까 그 질문들과 연결된 수많은 시간들이 돌아오는 것 같아요.
성수연
저 아마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웃음).
얼마 전 신촌극장에서 하셨던 <복도 굴뚝 유골함>을 정말 재밌게 봤어요.
유은숙
공연이 괜찮았던 날 보셨을지 모르겠네요. 안 좋았을 때도 있었어서(웃음).
성수연
공연이 좋았고, 안 좋았고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세요?
유은숙
저희 식대로 말하자면, 물리적인 작용으로 존재하지 않으니 배우 개개인이 힘이 없고 각자의 템포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말이 똑같이 나오는, 그야말로 관객은 희곡의 이야기에만 기대야 하고 배우의 에너지는 느낄 수 없는 텅 빈 무대랄까요?
성수연
얘기하다 보니 이번 공연에서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가는, 어머니라는 세계의 작용을 계속 다른 방식으로 만나는 역할을 맡으셨다는 점이 재미있어요. 자신을 구성한 어머니라는 세계를 찾아가는 내용을 연기할 때, 그 인물을 구성하는 여러 세계들을 찾는 방법으로 연기하셨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유은숙
제가 연기한 건축사진사는 “나는 도대체 누구를 닮았지?”, “내가 엄마와 닮았나요?”, “계속 우리에 대해서 얘기하던가요?” 이런 말들을 해요. 자신의 기원에 대한 궁금증으로 인해 어머니를 찾는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됐는가’라는 궁금함이요. 그 여정에서 만나는 것도 어머니 자체가 아니었어요. 어머니에 대해서 증언해주는 사람들이 말하는 어머니의 이름도 다 다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다 증명해주지도 못하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 안에서 어머니의 흔적이 조금씩 유추되는 이야기였지요. 건축사진사는 그 모든 인물들의 삶과 어머니의 존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돼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고 떠났던 건축사진사는 누군가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행위 자체로, 거기서 만난 모든 사람들의 각각 굉장히 다른 세계들을 받아들이게 돼요. 그 세계들이 그에게 이미 들어온 것이겠지요. 주체가 더 많이 분열되고, 혹은 더 많은 존재로의 확장이 이뤄진다고 해야 될까요.
성수연
네. 저는 이번 공연에서 배우님을 보며 굉장히… 어떤 표현이 좋을까요? 아름다운? 정적이지만 역동적인? 그런 말들이 떠올랐어요. 몸도 많이 움직이셨지만, 움직이지 않고 있는 순간에도 배우님의 피부 안쪽에서 엄청나게 역동적인 움직임들이 발생하고 있고, 그것이 객석에 있는 나에게도 전달된다는 느낌이요. 저는 가끔 피부 안쪽이라는 표현을 쓰는데(웃음), 피부 안쪽에 있어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움직임이 저에게 전달되더라고요. 주체가 더 많이 분열되고 많은 세계가 한 사람 안에 들어오는 얘기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성수연이 두 손을 앞으로 뻗어 무언가를 살포시 쥐는 듯 말하고 있다.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회색 상의를 입었다. 그 뒤로 창문 세 개가 있으며, 창밖으로 잎이 노랗고 빨갛게 물든 나무들이 보인다.
유은숙
그런 식으로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제대로 해내면 아마 말씀하신 부분들이 그렇게 잘 될 텐데, 잘 안될 때도 많아요(웃음).
성수연
그렇군요(웃음). 극단 동의 작품을 볼 때, 혹은 배우님의 연기를 볼 때 저는 이런 생각들을 해요. 기억나는 장면 중에 배우님께서 몸을 좀 아래쪽으로 숙이고 오랫동안 말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몸의 모양이 소위 일상적이라고 말하는 모양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장면을 계속 보다 보면 제가 일상에서 흘려보내고 있던, 어떤 순간의 핵심이 확 와닿는다고 해야 할까요?
바지 장면도 너무 재밌었어요. 바닥에 앉아서 바지를 반쯤 다리에 비스듬히 걸친 채로 말하는 장면이요. 정말 이상하지만, 뭔지 알겠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어요. 그런 순간들은 어떻게 발견하세요?
유은숙
바지 장면의 경우, 시궁창에 처박혔었던 어린 시절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몸의 순간을 찾고 싶었어요. 어떤 멈춤의 순간은 기억이 소환된 몸의 순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여러 각도를 찾아봤어요. 그러다가 옷을 입다 만, 약간 추운 상태의, 몸이 구부러진, 그리고 중심이 뒤바뀌어 다리가 위로 간 상태를 찾았고, 그게 저에겐 좀 적절히 느껴졌던 것 같아요.
성수연
지금 말씀하신 것들이 객석의 저에게 잘 전해지는 느낌이었어요. 저 사람의 어린 시절의 어떤 순간, 저 사람이 느꼈을 감각. 저는 가끔 ‘외롭다’는 말 대신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게 어리둥절하다’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그런 감각들이 저 사람 안에서 발생하는 것처럼도 보였어요.
유은숙
어떤 느낌인가요? 궁금해요. 어리둥절한 느낌?
성수연
어느 날 외롭다는 말을 곱씹다 보니 좀 이상하고, 구체적으로 그게 어떤 감각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저의 상태를 설명하기 더 적합한 말을 찾다가, ‘나는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게 어리둥절한 상태구나’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유은숙
어릴 때 그런 느낌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성수연
네. 배우님의 바지 장면을 보는 순간에 그 느낌이 떠올랐어요. 그 어리둥절한 느낌(웃음).
유은숙
설계가 많은 것을 관통하게끔 잘 된 경우에는 그렇게 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아서…(웃음) 좋은 것을 찾으려고 노력은 하는데, 잘 되지 않을 때도 많고, 억지를 쓰며 우기게 될 때도 있고, 완전히 가로막혀 있을 때는 문득 근본적인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요. ‘작용이란 뭐지?’, ‘세계를 만난다는 것은 뭐지?’
배우 유은숙이 가슴 앞에서 두 손으로 무언가를 둥그렇게 쥐고 있는 듯 웃고 있다.
성수연
그러게요. 문득 끝없는 질문을 던지게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작용이란 뭐지?’, ‘나한테 유의미하게 작동하는 것이 작용인가?’, ‘유의미함과 무의미함은 누가 판단하지?’, ‘지금 내가 인지적으로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게 사실은 유의미한 작용인 건 아닐까?’, ‘설계 단계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설계하지?’
유은숙
맞아요. 연출님이 “심리적인 것보다는 물리성을 원해요”라고 하시면 또 새삼스레 ‘물리성이 뭐지? 작용이란 게 뭐지?’ 생각할 때도 있고요(웃음).
성수연
강량원 연출님과는 어떻게 작업을 하게 되셨나요?
유은숙
성우 일을 하다가 도움이 될까 싶어 연기를 공부했는데, 그러다 연출님을 만나게 됐어요.
성수연
성우 일을 먼저 하셨군요. 목소리가 워낙 좋으시니까요.
유은숙
운이 좋았어요. 성우 일을 하면서 연기가 부족하다고 느껴서 스타니슬랍스키 연기 학교 수업을 들었어요. 연기를 배우는 것이 정말 좋더라고요. 연기를 계속하고 싶은데, 하자는 사람도 없고 저도 용기가 나지 않고(웃음). 그러다 연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될 생각으로 연기전공 대학원을 가게 됐어요. 거기서 강사로 오신 강량원 연출님을 만났고요. 논문만 쓰면 되는 상황에서 대학원을 그만두었어요. 연출님 따라가서 연기하고 싶어서요(웃음).
성수연
와, 대단하세요(웃음). 강량원 연출님과 하셨던 첫 작품이 뭐예요?
유은숙
<죄와 벌>이라는 작품이었는데, 그때 배우가 한 명 부족했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연출님과 함께하게 됐어요. 잠깐 나오는 역할이었어요.
성수연
그 작업을 통해서 극단 동에 들어가시게 된 건가요?
유은숙
네. 그땐 홍대에서 활동했던 초창기의 극단 동이 잠시 작업을 쉬고 있을 때였어요. 공연 중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 제가 극장 문이 열리기 전에 미리 가 있었어요. 그때 연출님께서도 일찍 오셔서 “극단 동을 다시 해보고 싶은데, 같이 해볼래요?”라고 물어보셨고, 저도 “네. 같이 한 번 해볼게요”라고 대답했어요.
성수연
그 순간, 그 내리던 비는 어떤 작용이었을까요? 그 순간을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단위 분석을 어떻게 하시겠어요? (웃음)
성수연이 오른손은 가슴 앞쪽으로, 왼손은 허리 높이에서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웃고 있다.
유은숙
(웃음) 글쎄요. 이른 아침이었고, 거센 비, 인켈아트홀의 좁은 계단에서 들려오던 극단 동의 이전 역사, 지극히도 고요하게 들려오던 목소리… 저의 세계 안에서 어떤 격변의 충돌이 일어나는 순간일 텐데… 단위는 어떻게 나누지? 일단 연출님이 하신 제안의 말이 가장 큰 외침인 것으로(웃음).
저는 강량원 연출님을 만나고 나서 좀 더 인간답게 사는 것 같아요. 연출님은 작업에서 늘 여러 각도로 뚫려있고, 특히나 배우들에게 작업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영감을 주세요. 배우들은 고통스러울 줄 알면서도, 자신이 맞닥뜨릴 세계에 대한 설렘을 품고 기꺼이 달려와요. 동료 배우들도 정말 멋져요. 사는 모습 자체가 참 넉넉한 사람, 상대의 고통을 깊이 헤아려 주는 사람, 꿋꿋하게 자신의 작업을 견지해 나가는 사람, 다른 사람을 잘 도와주는 사람, 연극을 만들 때만큼은 감각이 극도로 깨어있는 사람… 모두에게 다 닮고 싶은 부분들이 있어요. 누군가에게 “너무 멋있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물어보면 “응. 너는 할 수 없어” 이런 대답을 듣기도 하고(웃음). “꼭 그렇게 말해야겠니(웃음)” 하기도 하고. 제가 볼 때 김석주 배우는 연기에 관해서는 언제나 철두철미하고 날 서 있으면서도, 인간적으로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돕는, 유쾌한 분위기메이커예요. 본인에게 얘기하면 “다 집어치워요. 이런 얘기 듣기 싫어” 이런 식이고요(웃음). 물론 우리들 사이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니죠. 시간이 오래된 만큼 해야 할 얘기도 많아지더라고요. 또 우리가 추구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작업 과정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는가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는 중이에요.
성수연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해오셨는데, 여전히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된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인 것 같아요. 배우님도 그분들께 놀랍고 존경스러운 동료겠지요.
조금 다른 얘기로 넘어 가볼게요. 항상 작업할 때 에너지를 여러모로 많이 쓰실 것 같은데, 배우님에게 휴식과 충전이 되는 일이 있으세요? 어떻게 쉬시나요?
유은숙
쉬는 걸 잘 못 하는 것 같아요. 아버지와 강아지 한 마리를 돌봐야 하는 상황도 있고요. 그렇다고 시간이 없는 건 아닌데, 괜히 유튜브 보고 맨날 정치 방송 보고(웃음). 책을 보기도 하고, 제가 하고 싶은 작업들을 생각해보기도 해요. 이것저것 써보기도 하고요.
성수연
어떤 것을 쓰시나요?
유은숙
희곡 비스무레한 것을 써요. 그냥 끄적대는 정도로요. 그것을 1인극으로 한 번 해볼까 싶기도 하고, 집 앞에 있는 호프집 아주머니랑 2인극을 해볼까 싶기도 하고… 그 호프집이 희곡의 배경 중 하나라서요. 호프집에 오는 손님들을 관객으로…(웃음)
성수연
와, 재미있겠다! 꼭 해주세요.
유은숙
너무 아무것도 아니라서…
성수연
아무것도 아닌 것, 최고죠. 꼭 보고 싶어요.
유은숙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극단 동에서의 연기와는 일말의 관계도 없고, 그 어떤 실험도 없어요(웃음).
성수연
알고 보면 웃긴 분일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제 짐작이 맞았군요(웃음). 저는 진지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바로 억눌린 B급 정서라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냥 괴상한 농담 툭툭 하고 싶은 충동 같은 것 있잖아요.
유은숙
맞아요. 연습 단계에서 다 삭제된 유치한 것들을 다시 꺼내서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웃음). 연출님에 의해 재탄생된 좋은 것들은 무대 위에서 하니까요.
성수연
정말 기대가 됩니다. 어떤 이야기를 쓰셨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스포일러가 될까요?
유은숙
전혀 아니에요. (웃음) <도봉산의 은미>라고… 등장인물인 은미는 배우인데, 공연하자고 제안하는 사람도 없고, 오디션을 봐도 늘 떨어져요. 그날도 오디션을 보고, 오디션 복장으로 산에서 길을 헤매게 돼요. 얕게 올라가도 좀 헤매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도봉산에는 있거든요. 저도 거의 매일 올라가는데도 꼭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하여튼 은미가 도봉산에서 길을 잃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더니 외국인이거나 그냥 자기 갈 길 가버려요. 그러다 꼬리명주나비라고 도봉산에서만 서식하는 나비가 있는데, 멸종위기의 귀한 나비거든요. 그 나비와 은미가 말을 섞게 되면서…
성수연
으악, 너무 좋아요.
유은숙
은미가 오디션 스트레스 때문에 목이 너무 마른 상태예요. 그랬더니 나비가 자신이 이슬이 있는 곳을 안다며, 은미를 등에 태우고 험준한 도봉산을 날아 날아서 이슬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요. 그곳이 우리집 앞에 있는 왕노가리 호프. 은미는 살얼음이 낀 참이슬을 마시고, 나비는 혜은이가 되어 새벽비를 부르는데…(웃음)
성수연
역시… 웃긴 분이 맞았어(웃음). 정말 좋아요. 빨리 해주세요.
유은숙
그런 류의 이야기들을 많이 쓰고 있어요. <주문진에서의 은미> 등등 계속.
성수연
주문진에서는 나비 대신 오징어가 나오나요? 은미 시리즈인가요?
유은숙
네, 은미 시리즈. 제 후배 중 은미라는 친구가 있어요. 은미가 공연을 하고 싶어 해서 쓰고 있는데 아직까지 공연으로 만들지는 못했어요.
성수연
좋네요. 배우님이 1인극으로 하시는 것도 궁금하고, 진짜 그 은미라는 분과 하시는 것도 궁금하고요. 꼭 공연으로 만들어주세요. 은미 시리즈도 계속 이어서 써주세요. 아이고, 시간 관계상 아쉽게도 오늘의 대화를 여기서 마무리해야겠네요. 은미 시리즈에 대해서도 그렇고 이야기를 더 나눠보고 싶어요(웃음).
유은숙
저야말로 정말 그렇습니다(웃음).
성수연
오늘 좋은 이야기 많이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질문 주고받기를 하며 오늘의 대화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성수연과 유은숙.

유은숙과 성수연, 서로를 바라본다.

성수연
오늘 우리가 만났던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너의 세계, 너는 어떤 작용들을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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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숙
너는 나와의 대화를 통해 어떤 작용들을 만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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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나의 중심을 내 밖으로 옮기는 일은 어떤 때 잘 되고 어떤 때 잘 되지 않아?
유은숙
막연할 때, 집착할 때, 성급하게 결과물을 내려고 할 때… 아, 이건 대답이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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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연기를 하다가 크게 가로막혔다는 생각이 들 때, 어떤 식으로 그 상황을 헤쳐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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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단위와 단위 사이의 여백에서 너는 존재하고 있어, 존재하지 않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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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숙
너는 우연을 즐기는 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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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너는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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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숙
너는 어떨 때 가장 기운을 잃거나 힘들다고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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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나는 지금 이렇게 오른손으로 턱을 반쯤 감싸고 있고,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고개를 45도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어. 혹시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작용들이나, 지금의 나를 둘러싼 세계들이 너한테 짐작이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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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숙
(웃음) 중심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나와 연결된 것들의 연속으로서 나를 인식하는 것을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좀 더 이것을 잘 알게 될까? 이렇게 살면 무엇이 나아지는 걸까?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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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파이리)

성수연(파이리) 본지 편집위원
배우, 창작자. 다양한 형태의 연극작업을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sooyeon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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